FAZER LOGIN20년 전.
중학교 2학년, 2학기.
“야, 장혁.”
“왜.”
“오늘 전학생 온대.”
장혁은 책상에 엎드린 채 눈도 뜨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래.”
“그래서.”
박승철의 미간이 구겨졌다.
“새끼가 대화할 의지가 없네.”
“잠이나 자.”
“성격 존나 더러워.”
“알면 꺼져.”
승철은 익숙하다는 듯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장혁과 박승철은 어릴 때부터 붙어 다녔다.
부모들끼리도 알고 지냈고 집도 가까웠다.
학교가 바뀌어도 이상하게 같은 학교였고, 중학교까지 같은 반이 되면서 이제는 서로에게 질릴 대로 질린 사이였다.
드르륵.
앞문이 열렸다.
담임이 들어오자 시끄럽던 교실이 조금씩 조용해졌다.
그리고 선생님 뒤로 작은 여자애 하나가 따라 들어왔다.
장혁은 여전히 엎드려 있었다.
“오늘부터 우리 반에서 같이 생활할 친구다.”
칠판에 이름 세 글자가 적혔다.
한로로.
“자, 인사해.”
“안녕하세요.”
그제야 장혁이 눈을 떴다.
그리고 처음으로 한로로를 봤다.
작았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또래 여자애들 사이에 세워놔도 유난히 작을 것 같은 체구.
어깨에 닿는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그런데 눈이 특이했다.
푸른빛이 돌았다.
교실 여기저기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눈 봐.”
“렌즈인가?”
“예쁘다.”
로로에게도 들렸을 텐데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생긋 웃었다.
"한로로야. 잘 부탁해.”
겁먹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담임이 빈자리를 찾았다.
“저기 창가 자리 비었지?”
하필 장혁의 바로 앞이었다.
로로가 가방을 들고 걸어왔다.
장혁의 책상 옆을 지나는 순간.
툭.
가방에 달려 있던 작은 인형이 장혁의 책상 위로 떨어졌다.
로로가 멈췄다.
장혁도 인형을 내려다봤다.
낡은 토끼였다.
한쪽 귀가 반쯤 뜯어져 있었다.
장혁이 집어 들었다.
“내놔.”
첫마디가 그거였다.
장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주워줬는데?”
“그러니까 줘.”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로로가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줘.”
“성질 봐라.”
“너도 만만치 않아 보여.”
뒤에서 지켜보던 승철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장혁이 고개를 돌렸다.
“뭘 쪼개.”
“아니. 너 첫날부터 여자애랑 싸우는 게 웃겨서.”
로로가 토끼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 앉았다.
장혁은 황당했다.
보통 전학생이면 눈치라도 좀 보는 법인데.
저건 전혀 아니었다.
점심시간.
장혁과 승철은 늘 그렇듯 급식실로 향했다.
“야, 오늘 돈가스.”
“어.”
“두 개 받을 수 있으려나?”
“돼지냐?”
“성장기거든.”
둘이 복도를 내려가다 승철이 갑자기 멈췄다.
“어?”
“왜.”
“쟤 안 가는데?”
교실 안.
로로가 혼자 앉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이미 대부분 급식실로 내려간 뒤였다.
장혁이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가자.”
“냅둬?”
“배고프면 알아서 먹겠지.”
그렇게 계단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장혁이 멈췄다.
승철이 뒤에서 부딪칠 뻔했다.
“아, 씨. 왜!”
“먼저 가.”
"너는?”
“금방 감.”
“어디 가는데?”
장혁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교실로 돌아왔을 때도 로로는 그대로였다.
창밖만 보고 있었다.
장혁이 문에 기대어 물었다.
“야.”
로로가 돌아봤다.
“왜?”
“밥 안 먹어?”
“응.”
“왜.”
“별로 안 고파.”
그 순간이었다.
꼬르륵.
교실이 너무 조용해서 소리가 선명했다.
로로의 얼굴이 굳었다.
장혁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웃으면 죽인다.”
“안 웃었는데.”
“지금 웃었잖아.”
“안 웃었다니까.”
“입꼬리 내려.”
결국 장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로로가 책상 위 필통을 집어 던졌다.
장혁이 피하며 웃었다.
“배 존나 솔직하네.”
“꺼져.”
“밥 먹으러 가.”
“싫어.”
“왜.”
로로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혼자 가기 싫어.”
장혁의 웃음이 멎었다.
아무것도 아닌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걸렸다.
장혁이 문밖으로 턱짓했다.
“그럼 같이 가.”
“너랑?”
“싫으면 말고.”
장혁이 돌아서자 뒤에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같이 가!”
그가 돌아봤다.
로로가 어느새 가방에서 지갑까지 챙겨 뛰어오고 있었다.
“급식 먹는데 지갑은 왜 가져와?”
“매점 갈 수도 있잖아.”
“밥 안 고프다며.”
“생각이 바뀌었어.”
장혁이 피식 웃었다.
“이상한 년.”
“너 이름 뭐야?”
“장혁.”
“장혁.”
로로가 한번 따라 불렀다.
그러고는 씩 웃었다.
“너 생각보다 착하다?”
장혁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헛소리하지 마.”
“왜?”
“나 안 착해.”
“밥 같이 먹으러 가주잖아.”
“시끄러워.”
둘이 급식실에 도착했을 때 승철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승철이 장혁 뒤에 붙어 온 로로를 발견했다.
“뭐야?”
“같이 먹는대.”
“누가?”
“쟤가.”
로로가 바로 반박했다.
“네가 같이 가자고 했잖아.”
승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장혁은 로로를 노려봤다.
“그냥 가자고 했지.”
“그게 같이 먹자는 거지.”
“아닌데.”
“맞는데.”
승철이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빈 의자를 빼줬다.
“일단 앉아. 난 박승철.”
“한로로.”
“알아. 아까 들었어.”
로로가 환하게 웃었다.
“잘 부탁해, 박승철.”
“어.”
그날 세 사람은 처음으로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었다.
그리고 장혁은 또 하나를 알게 됐다.
“야.”
“왜?”
“너 안 고프다며.”
“응.”
“근데 왜 내 돈가스까지 먹어?”
로로의 볼이 빵빵했다.
“너 안 먹는 줄 알았지.”
“내가 아껴 먹고 있었거든?”
“이미 먹었는데 어떡해.”
“뱉어.”
“미친놈아!”
승철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장혁, 그냥 포기해.”
“내 돈가스잖아.”
“전학생한테 하나 줘라.”
“넌 왜 안 줘?”
“난 다 먹었어.”
“개새끼.”
“욕하지 마.”
“네가 할 말이냐?”
로로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웃었다.
처음에는 작게.
그러다 결국 소리 내 웃었다.
장혁은 투덜거리면서도 남은 반쪽까지 로로의 식판에 던져줬다.
“먹어.”
“진짜?”
“대신 조용히 좀 해.”
“장혁.”
“왜.”
“너 진짜 착하네.”
“아니라고.”
“맞는데?”
“아, 씨.”
승철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때까지만 해도 승철 역시 몰랐다.
저 조그만 전학생 하나가 자신과 장혁 사이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세 사람이 함께 보내는 계절이 스무 번이나 반복될 줄은.
그리고 그중 누구보다 먼저,
장혁이 한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될 줄은.
며칠 뒤.
장혁은 자기 사물함 앞에서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한로로.”
처음 보는 남학생 하나가 로로를 불러 세웠다.
손에는 접힌 편지가 들려 있었다.
“이거 받아.”
“뭔데?”
“읽어봐.”
남학생의 귀가 새빨갰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장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옆에 있던 승철이 중얼거렸다.
“야.”
“왜.”
“저거 아무래도 고백 같은데?”
“…….”
“전학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받냐.”
장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편지를 받아드는 로로의 손을 빤히 바라봤다.
승철이 그런 장혁을 한번 쳐다봤다.
“장혁.”
“왜.”
“너 표정 왜 그래?”
“내 표정이 뭔데.”
“존나 마음에 안 드는 표정.”
장혁이 승철을 노려봤다.
“닥쳐.”
그날 장혁은 아직 몰랐다.
자신이 앞으로 한로로에게 오는 편지를 몇 통이나 가로채게 될지.
초콜릿을 몇 개나 버리게 될지.
그리고 언젠가,
로로가 좋아한다는 축구부 주장 앞을 직접 막아서게 될지도.
그저 하나만 확실했다.
전학생 한로로.
쟤가 자꾸 신경 쓰였다.
집을 구하는 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회사와 가깝고, 햇빛이 잘 들고, 작업할 작은 방이 있을 것.네 번째 집에서 로로는 베란다 창을 열었다.바람이 들어왔다.“여기로 할게요.”“조금 더 보셔도 되는데요.”“아뇨. 여기가 좋아요.”소파도 식탁도 누군가의 흔적도 없었다.누구와 함께 살 집도 아니었다.처음부터 끝까지—한로로 혼자 고른 집이었다.토요일 오전.“야, 미친년아. 이게 짐이 적은 거냐?”“적지.”“저건?”“술.”“장혁 불러.”로로의 손이 멈췄다.“싫어.”“왜.”“너 있잖아.”“장혁까지 부르면 사람이 둘이잖아!”“전화해봐.”“싫다고.”“걔랑 싸웠냐?”“안 싸웠어.”“근데 왜 안 불러.”“그냥.”부르면 올 테니까.예약이 있어도 끝내고 와서 짐을 들고, 탄산수까지 사다 놓을 인간.그래서 부르지 않았다.“침대 여기 맞아?”“응.”“창문 옆인데 추워.”“난 더위 많이 타.”“그건 장혁이고.”둘 다 멈췄다.
일주일이었다. 장혁을 피한 지. 정확히 말하면—도망친 지.로로는 책상에 턱을 괸 채 휴대전화를 봤다. 연락도 없는데 몇 번씩 같은 이름을 검색했다.[장혁]“미친년.” “네?” 민지가 고개를 들었다. “본인한테 욕하셨어요?” “맞아. 병신 같아서.” “또 장혁 씨요?” “꺼져.” “좋아하는 거 알았으면 이제 어떻게 하실 건데요?”로로의 손이 멈췄다.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그걸 알아버렸다. 그럼 하진은?“아무것도 안 해.” “왜요?” “걔 여자친구 있잖아. 내가 남의 연애 깨도 돼?”기태와 사귀면서 혁과 잤다. 섹스와 마음은 별개라고 떠들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처음부터 분리된 적이 없었다.“나 이미 한 번 충분히 개같이 굴었어. 이번에는 안 그래.” “그럼 계속 피하게요? 20년 친구라면서요.” “말은 쉽지.” “쉬우니까 제가 하죠.”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었다. 스무 해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민지야. 나 오늘 칼퇴한다.” “데이트요?” “아니.” “그럼요?” “친구 보러.”퇴근 후 타투샵 앞에 섰다. 예전에는 문부터 열었다. 야, 장혁. 그거면 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혁을 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뛰었다.그때 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혁이 들어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했다.“저 새끼가 진짜.”딸랑— 문을 열자 익숙한 종소리가 났다.“앉아 있어.” “오랜만에 온 친구한테 그게 끝이냐?” “일주일 가지고?” “일주일이면 오래지.” “스무 해 봤는데?”혁은 냉장고를 가리켰다. “탄산수 있어.”자기가 마시던 탄산수가 있었다. 하나를 열었다. 예전 같았다. 그래야 했다.마지막 손님은 아홉 시 넘어 나갔다.“밥 먹었냐?” “어.” “뭐 먹었는데.” “왜.” “안 먹었네. 거짓말할 때 대답부터 짧아져.” “떡볶이나 시켜.” “김말이?” “응. 순대는 내장 많이.”혁을 보며 로로는 다시 생각했
혹시.정말 혹시—한로로가 자신 때문에 저러는 거라면.장혁은 한참 휴대폰을 내려다봤다.그러다 피식 웃었다.“……지랄.”말도 안 됐다.한로로였다.자기가 소개팅을 나간다고 했을 때 옷까지 골라주던 여자.하진과 손을 잡았다고 하자 잘했다고 했고.정식으로 만나게 됐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신나게 축하했다.한기태와 데이트가 있다고 자신과의 약속을 취소하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여자.그런 한로로가—이제 와서 자신을 좋아한다고?장혁은 고개를 저었다.“미쳤네, 진짜.”잠깐이라도 기대한 자신이 병신이었다.로로는 그냥 변한 게 싫은 거다.이십 년 동안 자기 필요할 때마다 있던 놈이 갑자기 다른 여자 때문에 안 움직이니까.그게 낯선 거겠지.그 이상일 리 없었다.장혁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오빠.”하진의 목소리에 장혁이 고개를 들었다.“응?”“또 딴생각.”“아.”하진이 웃었다.“오늘 세 번째예요.”둘은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하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친구분?”장혁의 손이 멈췄다.하진은 금방 알아차리고 웃었다.“맞네.”“……티나?”“조금?”“미안.”“미안할 건 아닌데.”하진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로로 씨 맞죠?”장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남자친구랑 헤어졌대.”“아…….”하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많이 힘들겠네요.”그 말뿐이었다.왜 헤어졌냐고 묻지도 않았다.자기와 있을 때 다른 여자를 생각하냐고 화내지도 않았다.오히려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장혁이 눈을 들었다.“어딜.”“로로 씨한테.”“…….”“오래된 친구라면서요.”장혁은 헛웃음을 흘렸다.“오지 말래.”“싸웠어요?”“그런 것 같기도 하고.”“왜 싸웠는데요?”장혁이 대답하지 못했다.왜 싸웠지.생각해보면 시작은 로로였다.왜 변했냐고 했다.연락하면 안 된다고 하고.불러도 안 나오고.자기와의 관계도 끝냈다고.그러다—하진을 만나면서 자기와도 자자고
[버려.]메시지를 보낸 뒤.장혁에게서는 답이 없었다.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로로는 그날 밤 몇 번이나 휴대폰을 확인했다.“……병신.”답하지 말라고 밀어낸 건 자신이었다.그러면서 답장이 없다고 서운해하는 것도 자신이었다.결국 휴대폰을 침대 반대편으로 던졌다.며칠 동안 로로는 호텔에서 출퇴근했다.회사에서는 기태와 필요한 말만 했다.“2팀 수정안 전달드렸습니다.”“확인하겠습니다.”그뿐이었다.기태도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오히려 그래서 더 숨이 막혔다.민지가 눈치를 보며 커피를 내려놓았다.“팀장님.”“응.”“집은 알아보고 계세요?”“응. 주말에 몇 군데 보려고.”“혼자 가세요?”“그럼 누구랑 가.”민지가 입을 다물었다.예전 같으면 당연히 기태였을 것이다.아니면—로로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얼굴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장혁.“씨발.”“네?”“아무것도 아니야.”이제 생각하는 것조차 습관이었다.점심시간.휴대폰이 연달아 울렸다.한동안 조용했던 단체방이었다.[박승철][야][니들 언제까지 분위기 이럴 건데]로로의 손이 멈췄다.현재 방에는 셋뿐이었다.박승철.장혁.한로로.기태가 빠졌을 뿐인데—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이십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박승철][기태랑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우리 셋까지 이럴 필요는 없잖아]잠시 뒤 장혁이 답했다.[냅둬.][박승철][뭘 냅둬 새끼야][니도 요즘 존나 이상해]로로는 화면을 바라봤다.우리 셋.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 익숙한 말이었다.어디를 가도 셋.술을 먹어도 셋.여행을 가도 셋.누가 연애를 해도 결국 돌아오면 셋이었다.그런데 이제—그럴 수 있을까.[박승철][이번 주 토요일 가게로 와][술이나 먹자][장혁][난 하진이랑 약속 있음.]로로의 손가락이 굳었다.아무 잘못 없는 말이었다.당연한 말.장혁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으니까.그런데도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박승철][
아침 일곱 시.로로는 호텔 침대에서 눈을 떴다.잠든 건지 기절한 건지 알 수 없었다.눈은 퉁퉁 부었고 머리는 무거웠다.제일 먼저 손을 뻗은 건 휴대폰이었다.메시지 두 개.[민지][팀장님 오늘 오전 회의 10시로 바뀌었어요!]그리고.[장혁][출근은 할 거냐.]새벽 한 시 십칠 분.로로는 한참 그 문장을 바라봤다.답장은 하지 않았다.대신 휴대폰을 뒤집었다.“……하지 마.”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도 몰랐다.연락하지 말라는 건지.기대하지 말라는 건지.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후회했다.기태가 있었다.늘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같은 회사.같은 층.디자인 1팀과 2팀.헤어졌다고 출근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그런데 이상했다.어제까지만 해도 저 사람과 같은 집에서 출근했다.오늘은 호텔에서 혼자 나왔다.“팀장님.”민지가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괜찮으세요?”“응.”“눈이…….”“울었어.”민지가 입을 다물었다.로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노트북을 켰다.잠시 후 회의가 시작됐다.“2팀부터 진행 상황 공유하겠습니다.”기태의 목소리가 들렸다.로로는 화면만 봤다.평소와 똑같았다.차분했고.일 얘기만 했다.“1팀 의견은 어떻습니까?”결국 시선이 마주쳤다.딱 한 번.“현재 안으로 진행해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알겠습니다.”그게 끝이었다.한로로 팀장.한기태 팀장.삼 년을 사랑한 흔적은 회사 어디에도 없었다.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갔다.로로도 자료를 챙겨 일어났다.“로로야.”걸음이 멈췄다.회의실에는 둘뿐이었다.기태는 로로를 보지 않았다.“오늘 짐 가지러 올 거야?”“……응.”“몇 시.”“퇴근하고.”“알았어.”로로가 문으로 향했다.“나 그 시간에 나가 있을게.”손잡이를 잡은 손이 멈췄다.“그럴 필요 없어.”“내가 있어도 괜찮겠어?”대답하지 못했다.기태가 씁쓸하게 웃었다.“봐. 안 괜찮잖아.”“……미안해.”“그 말도 이제 그만해.”로로는 결국 문을 열었다.
[한기태님이 나갔습니다.]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한 줄.가장 먼저 반응한 건 승철이었다.[?][뭐야][둘이 또 싸움?]로로는 화면만 바라봤다.헤어졌어.고작 네 글자면 설명되는 일이었는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잠시 후 개인 메시지가 왔다.[장혁][너 기태랑 뭔 일 있어?]심장이 먼저 반응했다.한참 망설이다 답했다.[헤어졌어.]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받지 않았다.다시.또다시.세 번째가 울릴 때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왜.”-어디야.평소와 똑같은 목소리.그것만으로 울컥했다.“밖.”-밖 어디.“그냥 밖.”-한로로. 어디냐고.예전 같았으면 말했다.데리러 와.혁이네 갈게.술 사놔.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됐어. 혼자 있을 거야.”-왜 헤어졌어. 결혼 때문에?“아니.”-그럼?대답할 수 없었다.너 때문에.내가 널 사랑하는 걸 알아버려서.장혁에게는 하진이 있었다.“내 문제야. 캐묻지 마.”잠깐 침묵이 흘렀다.-가게로 와.가슴이 철렁했다.너무 익숙한 말이라서.가고 싶었다.기태와 헤어진 게 아팠고.미안했고.무서웠다.무엇보다 장혁이 보고 싶었다.하지만.“싫어.”-뭐?“안 갈래.”-왜.'하진 씨 있잖아.”-지금 없어.“그런 뜻 아니야.”로로는 눈을 감았다.-“너 여자친구 있잖아.”장혁이 조용해졌다.“나 이제 거기 예전처럼 못 가.”-왜 갑자기 그래.“갑자기가 아니라.”로로가 씁쓸하게 웃었다.“이제야 정신 차린 거지.”먼저 전화를 끊었다.좋아하는 줄 몰랐을 때는 마음대로 찾아갔다.술을 마셨고.같은 침대에서 잤고.심지어 하진을 만나면서 자신과도 자자고 했다.그런데 사랑한다는 걸 알아버린 순간—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장혁은 종료된 통화 화면을 내려다봤다.한기태와 헤어졌다.그 말을 들은 순간 아주 잠깐—기뻤다.“……미친 새끼.”기뻐하면 안 됐다.로로는 삼 년을 만난 남자와 헤어졌다.자신에게는 하진이 있었다.그런데도 가장 먼저 떠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