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7화. 오늘 끝나고
“있었지.”
이태건의 대답은 짧았다.
그런데 그 짧은 말 하나가 강의동 앞 공기를 전부 바꿔놓았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린은 내 팔을 붙잡은 채 숨도 제대로 쉬지 않는 얼굴이었고, 주변에 있던 학생들은 대놓고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있었다고?
도윤이 핑계가 아닌 때가 있었다고?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야 했다.
아니, 물으면 안 됐다.
여기서 더 말을 이어가면, 지금 우리를 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먹잇감을 던져주는 꼴이었다.
나는 가방 앞주머니에 넣은 빨간 미니카를 손으로 꾹 눌렀다.
“저 수업 가야 해요.”
“알아.”
“그럼 비켜요.”
태건은 나를 보다가 한 걸음 옆으로 비켰다.
그런데 비켜서도 완전히 길을 터준 느낌은 아니었다. 지나가려면 그의 어깨 옆을 스치듯 지나가야 했다.
일부러 그런 건가.
나는 괜히 그를 노려봤다.
“이태건 씨.”
“태건.”
“네?”
“또 씨 붙인다.”
이 상황에서 그게 중요하냐고 묻고 싶었다.
하린이 옆에서 입술을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나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수업 늦었거든요.”
“끝나고 연락해.”
“왜요?”
“도윤이한테 장난감 받았다고 말해야지.”
“그건 그쪽이 전하면 되잖아요.”
“네가 직접 해야 좋아해.”
또 도윤이.
분명 도윤이 핑계인 걸 아는데, 완전히 거절하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도윤은 정말 나를 찾았고, 정말 내 손을 놓지 않았고, 지금 내 가방 안에는 도윤이 준 빨간 자동차가 들어 있었다.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볼게요.”
“생각만?”
“연락할게요.”
“언제.”
“수업 끝나고요.”
그제야 태건은 조금 물러났다.
“그래.”
나는 하린에게 끌리듯 강의동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태건의 시선인지, 다른 학생들의 시선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강의실에 들어서자 하린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야.”
“왜.”
“나 심장 터질 뻔했어.”
“내가 더 그래.”
“쟤 방금 고백한 거 아니야?”
나는 자리에서 가방을 내려놓다 말고 하린을 봤다.
“무슨 소리야.”
“있었지. 이게 뭐야. 도윤이 핑계 아닌 때가 있었다는 거잖아.”
“아니야.”
“뭐가 아니야.”
“그냥 사람 헷갈리게 말하는 거야.”
“그게 플러팅이야.”
나는 노트북을 꺼내며 애써 무심한 척했다.
“말도 안 돼.”
“유민서. 네가 지금 얼굴 빨개진 상태로 말도 안 된다고 하면 설득력이 없어.”
나는 급히 손등으로 볼을 눌렀다.
뜨거웠다.
망했다.
하린은 책상에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봤다.
“근데 조심은 해.”
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
하린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져 있었다.
“왜?”
“이태건 선배, 생각보다 더 유명해.”
“고등학교 때?”
“그것도 그렇고, 대학 와서도.”
나는 노트북 화면을 켰지만 시선은 하린에게 가 있었다.
“무슨 소문인데.”
“정확한 건 몰라. 그냥 복학 전에 휴학 길게 했고, 학교에서 누가 건드리면 큰일 난다는 말이 있었대. 선배들 사이에서도 좀... 이름만 나오면 다들 피하는 느낌?”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고등학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학교가 바뀌어도, 이태건 주변에는 여전히 소문이 있었다.
“그리고.”
하린이 조금 더 목소리를 낮췄다.
“애 있다는 건 진짜 다들 몰랐나 봐. 그래서 더 난리인 것 같아.”
“도윤이는 소문거리 되면 안 되는데.”
“그러니까. 다행히 어제 네가 계단에서 말한 뒤로 애 이름 언급하지 말자는 분위기도 있어. 근데 사람들 호기심이 쉽게 꺼지진 않을 거야.”
나도 알고 있었다.
소문은 불처럼 한 번 붙으면 쉽게 꺼지지 않는다.
특히 이태건처럼 원래부터 이야기 많은 사람 옆에, 갑자기 아이와 여자가 등장하면 더더욱.
그 여자가 나라는 게 문제였다.
수업이 시작됐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교수님의 목소리는 들리다가 말고, 필기 화면에는 의미 없는 단어만 몇 개 적혔다.
태건.
도윤.
비상 연락망.
있었지.
나는 멍하니 있다가 가방 앞주머니를 만졌다.
작은 미니카의 단단한 윤곽이 손끝에 걸렸다.
웃음이 나올 뻔했다.
왜 이런 걸 학교까지 가져온 걸까.
도윤이 울었다는 말도 웃기고, 그걸 또 순순히 들고 온 이태건도 웃겼다.
무서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는 이상한 데서 성실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하린이 내 노트북을 덮었다.
“가자.”
“어딜?”
“밥. 너 오늘 밥 제대로 먹어야 돼. 어제부터 얼굴이 반쪽이야.”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리고 이태건 선배한테 답장하기 전에 내 앞에서 해.”
“왜?”
“감시.”
“내가 무슨 사고 치는 애야?”
하린은 대답 대신 눈썹만 올렸다.
반박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학생식당으로 향했다.
다행히 오늘은 누가 대놓고 말을 걸진 않았다. 대신 시선은 계속 느껴졌다. 어제보다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이 더 피곤했다.
식판을 들고 자리에 앉자 하린이 말했다.
“연락해.”
“지금?”
“수업 끝나고 연락한다며. 약속은 지켜야지.”
“너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내가 옆에서 봐야 안심돼.”
나는 한숨을 쉬고 휴대폰을 꺼냈다.
이태건의 이름을 누르는 손가락이 괜히 어색했다.
[수업 끝났어요]
보내자마자 읽음 표시가 떴다.
정말 바로 봤다.
하린이 내 화면을 같이 보며 중얼거렸다.
“와. 기다렸나 봐.”
“아니거든.”
답장이 왔다.
[밥 먹었냐]
하린이 내 어깨를 때렸다.
“뭐야. 걱정하네.”
“그냥 묻는 거잖아.”
나는 답장을 썼다.
[먹는 중이에요]
[뭐 먹는데]
“이걸 왜 물어봐.”
“관심.”
“윤하린.”
“알았어. 조용히 할게.”
나는 사진을 찍어 보내려다 멈췄다.
아니, 식판 사진까지 보내는 건 너무 이상했다.
대신 짧게 답했다.
[학식]
잠시 뒤 답장이 왔다.
[맛없겠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린이 바로 포착했다.
“웃었어.”
“웃긴 말이잖아.”
“아니. 네가 이태건 선배 문자 보고 웃었다는 게 웃겨.”
나는 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괜히 말을 돌리고 싶었다.
그때 또 메시지가 왔다.
[도윤이 영상통화 하겠대]
숟가락이 멈췄다.
“뭐래?”
하린이 물었다.
나는 화면을 보여줬다.
하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받아. 당장 받아.”
“여기 식당이야.”
“그래서? 애기 영상통화가 뭐 어때서.”
“사람들이 보잖아.”
“이미 보는데 뭐.”
그 말이 맞아서 더 슬펐다.
잠시 뒤 진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이태건.
나는 식판 앞에서 굳었다.
“받아.”
하린이 옆에서 속삭였다.
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식당 구석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켜졌다.
처음 보인 건 태건의 턱이었다.
낮은 각도.
흔들리는 화면.
그리고 어딘가에서 들리는 작은 목소리.
― 아빠, 누나 보여줘.
“기다려.”
태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화면이 제대로 맞춰졌다.
도윤이 화면 가득 얼굴을 들이밀었다.
― 누나!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도윤아.”
― 자동차 받았어?
“응. 받았어. 고마워.”
나는 가방 앞주머니에서 빨간 미니카를 꺼내 화면에 보여줬다.
도윤이 환하게 웃었다.
― 누나 거야.
“진짜 나 줘도 돼?”
― 응. 누나가 부릉 잘해서.
옆에서 하린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나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고마워. 누나가 잘 가지고 있을게.”
도윤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화면 밖을 보며 말했다.
― 아빠. 누나 오래?
나는 순간 굳었다.
태건의 목소리가 화면 밖에서 들렸다.
“물어봐.”
― 누나, 오늘 와?
식당 소리가 갑자기 멀어졌다.
도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작은 눈에 기대가 가득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화면 너머 태건을 찾았다.
“이태건 씨.”
곧 태건의 얼굴이 화면에 들어왔다.
가까웠다.
휴대폰 화면일 뿐인데도, 그의 눈이 너무 선명해서 나는 숨을 삼켰다.
― 싫으면 안 와도 돼.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뒤에서 도윤이 작게 말했다.
― 누나 와...
하린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결국 눈을 감았다 떴다.
“잠깐만 갈게.”
도윤의 얼굴이 밝아졌다.
― 진짜?
“응. 수업 다 끝나고 잠깐.”
― 약속.
“약속.”
통화를 끊고 나니 하린이 팔짱을 끼고 나를 보고 있었다.
“잠깐만?”
“응.”
“그 잠깐이 어제는 병원 가고 집까지 간 그 잠깐이었지?”
“오늘은 진짜 잠깐이야.”
“그 말 기록해둘게.”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밥맛이 완전히 사라졌다.
도윤이 보고 싶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마음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태건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정말 도윤 때문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오후 수업이 끝나고 학교 정문을 나서자, 태건은 어제와 같은 골목 입구에 서 있었다.
이번엔 도윤도 함께였다.
아이는 노란색 모자를 쓰고, 태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누나!”
그 소리에 지나가던 학생 몇 명이 돌아봤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도윤은 이미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도윤아, 뛰지 마.”
태건이 말했지만 도윤은 내 앞까지 와서 내 손을 잡았다.
“누나 왔다.”
그 작은 말에 마음이 녹았다.
나는 도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열은 이제 괜찮아?”
“응. 아빠가 약 줬어.”
“잘 먹었어?”
“응. 아빠가 이상한 얼굴 했어.”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태건이 다가와 낮게 말했다.
“무슨 얼굴.”
도윤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무서운 얼굴.”
나는 결국 웃었다.
태건은 나를 보았다.
“웃기냐.”
“조금요.”
“많이 웃는데.”
“착각이에요.”
도윤은 내 손을 잡은 채 신나게 말했다.
“누나, 우리 집 가?”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집 말고 산책만.”
“왜?”
“누나 수업해서 피곤해.”
도윤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태건이 아이 머리를 살짝 눌렀다.
“산책만 해.”
“아빠도?”
“응.”
“누나도?”
“응.”
도윤은 금세 다시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학교 뒤편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태건, 도윤, 그리고 나.
누가 보면 이상한 조합이었다.
아니, 이미 이상한 조합으로 보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윤은 그런 걸 몰랐다.
그저 한 손에는 태건을, 다른 손에는 나를 붙잡고 걸었다.
작은 손이 우리 둘 사이를 이어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더 겁이 났다.
공원 벤치에 도착했을 때, 도윤은 미끄럼틀 쪽으로 달려갔다. 태건은 바로 따라가려 했지만, 내가 먼저 말했다.
“제가 볼게요.”
“넘어지면.”
“바로 잡을게요.”
“계단 조심해야 돼.”
“알아요.”
“위에서 밀면 안 돼.”
“안 밀어요.”
“애들 옆에 있으면...”
“이태건.”
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가 나를 봤다.
“숨 좀 쉬어요.”
태건은 잠깐 굳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쉬고 있어.”
“전혀요.”
“너도 애 키워봐.”
“저 안 키우거든요.”
“비상 연락망이라며.”
“그거 그쪽이 멋대로 붙인 거잖아요.”
태건이 희미하게 웃었다.
도윤은 미끄럼틀 위에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누나! 봐!”
“응, 보고 있어!”
도윤이 조심스럽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다. 나는 아래에서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받아주었다.
작은 몸이 품에 안겼다.
“잘했어.”
“또!”
“한 번만 더.”
“세 번.”
“두 번.”
“네 번.”
“도윤아, 흥정이 이상한데?”
도윤은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태건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나는 그를 봤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또 그냥.”
“네가 있으면.”
그가 말을 멈췄다.
나는 기다렸다.
태건은 도윤을 보다가, 다시 나를 봤다.
“애가 잘 웃어.”
심장이 조금 내려앉았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도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래 잘 웃는 애 같은데요.”
“아니야.”
태건의 목소리는 낮았다.
“요즘은 아니었어.”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도윤이 밝아 보여서 몰랐다.
혹은 밝아 보이려고 애쓰는 아이였을지도 몰랐다.
나는 다시 미끄럼틀을 올라가는 도윤을 바라봤다.
“그럼 자주 웃게 해주면 되죠.”
말하고 나서 깨달았다.
너무 쉽게 말했다.
태건이 나를 보고 있었다.
“자주?”
나는 급히 말을 고쳤다.
“그니까... 그쪽이요. 아빠가.”
태건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나 혼자?”
“네.”
“비상 연락망은 안 도와주고?”
나는 그를 노려봤다.
“그 별명 그만 써요.”
“싫은데.”
“왜요?”
“부르면 네가 반응하잖아.”
순간 말문이 막혔다.
태건은 내 반응을 보더니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가까워서, 나는 괜히 도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망가는 게 아니었다.
그냥 아이를 봐야 했으니까.
정말이다.
도윤은 세 번째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다가 발을 살짝 헛디뎠다. 나는 바로 아이를 받아 안았다.
“괜찮아?”
“응.”
도윤은 웃으며 내 목을 감았다.
“누나 좋아.”
나는 멈칫했다.
그 말이 너무 순수해서,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
“누나도 도윤이 좋아.”
그 말이 나오자마자 태건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눈빛이 이상했다.
마치 도윤에게 한 말을, 자기까지 들은 사람처럼.
공원 옆길에서 누군가 우리 쪽을 향해 휴대폰을 들었다.
이번엔 내가 먼저 봤다.
손이 차가워졌다.
태건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 전, 내가 도윤을 안은 채 말했다.
“찍지 마세요.”
휴대폰을 들고 있던 여학생이 당황했다.
“아, 아니에요.”
“찍지 말라고요.”
내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태건이 내 옆에 섰다.
하지만 이번엔 그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
그냥 내 뒤에 있었다.
그게 이상하게 힘이 됐다.
여학생은 머쓱한 얼굴로 휴대폰을 내리고 멀어졌다.
도윤은 내 품에서 물었다.
“누나 왜?”
나는 아이 머리를 토닥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태건이 낮게 말했다.
“잘하네.”
나는 그를 봤다.
“뭐가요.”
“도망 안 가는 거.”
그 말에 가슴이 조용히 뛰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도윤은 내 품에서 고개를 들어 태건을 봤다.
“아빠.”
“응.”
“누나 우리 집에 같이 살면 안 돼?”
순간 공원 공기가 멈춘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태건도 굳었다.
도윤만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우리 둘을 번갈아 봤다.
“누나 있으면 나 안 울어.”
아이의 작은 말이, 너무 커다랗게 마음을 두드렸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태건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가 아주 낮게 말했다.
“도윤아.”
“응.”
“그건 누나한테 물어보는 거 아니야.”
나는 겨우 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그가 선을 그어줬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태건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내가 물어봐야지.”
나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그는 농담처럼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윤은 환하게 웃었다.
“아빠가 물어봐!”
나는 도윤을 안은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태건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언젠가는 정말 물어볼 사람처럼.
# 특별외전 2화. 나를 선택한 사람- 태건시점 - 결혼 다음 날, 나는 민서가 도윤에게 차이는 모습을 보며 눈을 떴다.도윤의 발이 민서의 뺨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민서는 아이의 발목을 잡아 이불 안으로 밀어 넣었고, 도윤은 잠든 채 다시 다리를 뻗었다.“도윤아.”민서가 낮게 불렀다.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아이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미안.”“네가 왜 사과해.”“내 아들이라며.”잠이 덜 깬 채 대답했지만 민서가 웃는 소리는 분명히 들렸다.이상한 아침이었다.도윤은 내 옆에서 자고 있었고, 민서는 같은 반지를 낀 채 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우리 침대였다.나는 아직도 그 단어가 낯설었다.우리 집.우리 방.우리 침대.민서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절대로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말들이었다.처음 본 유민서는 지나치게 태연했다.길을 잃은 도윤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울리지 않았고, 내가 나타났을 때 겁먹은 얼굴로 물러나지도 않았다.오히려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도윤이 아빠 맞아요?”확신하지 못하는 목소리였다.도윤이 나를 아빠라고 불렀는데도 의심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맞는데.”내가 대답하자 민서는 도윤을 바로 넘겨주지 않았다.“그럼 아이가 왜 혼자 있었어요?”첫 만남부터 따졌다.나는 그게 싫었다.도윤을 잃어버린 사람은 나였고, 아이를 찾을 때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내가 부족한 아빠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잠깐 놓친 거야.”“잠깐이어도 아이는 무서웠을 수 있잖아요.”민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그래서 더 싫었다.나는 틀린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화를 낼 수 있었다.맞는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부터 마주해야 했다.그런데 도윤은 민서의 손을 놓지 않았다.“누나도 가.”도윤이 말했다.나는 그 말이 불편했다.아이는 원래 낯선 사람을 쉽게 따르지 않았다.어린이집 선생님에게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처음 보는 사람이 가까이 오면
# 특별외전 1화. 내가 먼저 고른 사람-민서 시점 - 결혼 다음 날 아침, 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태건의 얼굴이 아니었다.도윤의 발바닥이었다.정확히는 내 뺨 옆에 놓인 작은 발이었다.나는 눈을 뜬 채 한동안 그 발을 바라봤다.어젯밤 분명 도윤을 가운데 눕혔다. 그런데 자는 동안 세로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아이의 머리는 태건의 옆구리에 붙어 있었고, 두 다리는 내 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도윤아.”작게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발을 살짝 밀자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내 얼굴 쪽으로 가져왔다.결혼 첫날밤의 다음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나는 결국 도윤의 발을 붙잡아 이불 안으로 넣었다.그때 태건이 눈을 떴다.“왜.”“네 아들이 나 걷어찼어.”태건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도윤을 자기 쪽으로 끌었다.“미안.”“네가 왜 사과해.”“내 아들이라며.”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이런 아침을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이태건을 처음 봤을 때의 나는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을 장면이었다.그날의 태건은 무서운 사람이었다.검은 옷.굳은 표정.사람을 믿지 않는 눈.그리고 처음 보는 아이가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안겼다.“아빠.”도윤이 그 한마디를 내뱉었을 때, 나는 내가 알던 세상의 규칙 하나가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저런 사람이 아빠라고?그것도 저렇게 작은 아이의?나는 처음부터 태건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그가 도윤의 아빠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오히려 더 의심했다.아이는 왜 혼자 있었는지.태건은 왜 그렇게 늦게 나타났는지.아이를 제대로 돌보고 있는 것은 맞는지.지금 생각하면 태건 역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봤을 것이다.자기 아이 옆에 붙어 있으면서 계속 따지는 여자.그런데도 나는 떠나지 않았다.도윤이 내 손가락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때는 아이를 두고 갈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것은 대단한
# 외전 5화. 우리 애가 다시 골랐다 [외전완결]결혼을 정한 다음 날.태건과 민서는 하연을 먼저 만났다.장소는 도윤이 자주 가는 어린이도서관 근처 카페였다. 도윤과 하연의 정기 만남이 없는 날이라 세 사람만 마주 앉았다.하연은 민서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지만 먼저 묻지 않았다.태건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우리 결혼하기로 했어.”짧은 말이었다.하연의 시선이 태건에게서 민서에게로 옮겨 갔다.놀란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축하해.”“고마워.”민서가 대답했다.하연은 물잔을 만지며 잠시 생각했다.“도윤이한테는 말했어?”“아직.”태건이 말했다.“너한테 먼저 알리기로 했어.”하연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허락을 구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도윤보다 먼저 자신의 귀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결혼하면 바로 달라지는 게 있어?”하연이 물었다.“생활은 지금이랑 비슷해.”민서가 대답했다.“이미 같이 살고 있으니까.”“도윤이 돌봄은?”“지금처럼 태건이가 주로 맡고요.”민서는 준비해 온 말을 천천히 꺼냈다.“저도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만큼 제가 선택한 범위에서는 함께할 거예요. 하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하연 씨와의 일정은 두 분이 계속 직접 조율해 주세요.”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민서 씨한테 엄마 역할을 부탁할 생각은 없어요.”“알아요.”“도윤이가 결혼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까.”하연은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엄마가 바뀐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그 부분부터 설명하려고.”태건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엄마는 그대로 너라고.”하연은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내렸다.도윤의 엄마라는 자리를 확인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자신이 그 자리를 온전히 지켜 온 사람도 아니었다.그런데 태건은 하연의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현재의 역할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었다.“가족식은 작게 하려고 해.”태건이 말했다.“가까운 사람들만 불러서 밥 먹는 정도로.
# 외전 4화. 이번에는 내가 고르는 약속토요일 오후.도윤은 준우네 집에서 열리는 생일 파티에 갔다.태건은 아침부터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네 시에 데리러 가는 거 맞지?”민서가 물었다.“응.”“그럼 세 시간밖에 없네.”“결혼 이야기하는 데 세 시간이 부족해?”태건은 소파에 앉아 민서를 바라봤다.민서는 식탁 위에 서류 몇 장을 펼쳐 두고 있었다.태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게 뭐야.”“내가 준비한 말.”“결혼 이야기하는데 서류가 필요해?”“필요해.”민서는 종이를 태건 쪽으로 밀었다.가장 위에는 두 사람의 현재 생활이 적혀 있었다.태건의 센터 근무와 소득.민서의 학업과 프로젝트 일정.공동생활비 분담.도윤의 양육비와 돌봄 체계.하연과의 정기 만남.태건은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이거 우리 집 구할 때 다 이야기한 거잖아.”“결혼하면 달라지는 게 있으니까 다시 보는 거야.”“뭐가 달라져.”“법적으로 가족이 되는 거.”민서는 옆에 놓인 자료를 펼쳤다.혼인신고 이후 달라지는 법적 관계와 재산 관리, 의료 상황에서의 보호자 지위, 주거 계약과 세금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이었다.태건은 예상하지 못한 얼굴로 민서를 바라봤다.“이걸 다 알아봤어?”“응.”“언제.”“네가 계속 결혼 이야기할 때부터.”태건은 서류를 다시 내려다봤다.결혼이라는 말을 꺼낸 사람은 자신이었다.그런데 정작 결혼이 두 사람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는지는 깊이 알아보지 않았다.좋아하고, 함께 살고, 오래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민서는 마음이 부족해서 자료를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오래 함께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었다.“결혼하면 내 빚도 네가 책임져야 해?”민서가 물었다.태건의 표정이 굳었다.“빚 있어?”“없어.”“그럼 왜 물어.”“서로 모르는 게 있는지 확인하려고.”민서는 질문 목록을 꺼냈다.학자금 대출.개인 채무.보험.저축.가족에게 정기적으로 보내는 돈.태건은
# 외전 3화. 졸업하는 아빠도윤의 유치원 발표회 날.태건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났다.도윤의 흰 셔츠를 다리고, 바지 주름을 펴고, 유치원에서 보내 준 안내문을 세 번 확인했다.준비물은 없었다.보호자는 열 시까지 강당으로 오라는 내용뿐이었다.그런데도 태건은 도윤의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아빠.”잠옷 차림의 도윤이 방문에 기대 서 있었다.“왜.”“오늘 가방 안 가져가.”태건의 손이 멈췄다.“알아.”“그런데 왜 봐?”“혹시 필요한 게 있나 해서.”“없어.”도윤은 하품을 하며 욕실로 걸어갔다.“나 노래 안 틀리게 해야 돼.”“집에서 계속 불렀잖아.”“친구들이 틀리면 나도 틀릴 수 있어.”태건은 웃지 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수도 있지.”도윤이 욕실 앞에서 돌아봤다.“틀려도 돼?”“응.”“선생님 안 화내?”“발표회는 시험 아니야.”도윤은 안심한 얼굴로 욕실에 들어갔다.민서는 그때까지도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전날 프로젝트 회의가 늦게 끝난 탓이었다.태건은 침실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발표회 보호자는 자신과 하연이었다.민서는 집에서 쉬다가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도윤이 직접 정한 일이었고, 민서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그런데 태건은 괜히 침실 안을 한 번 더 바라봤다.민서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빠진 사람은 아니었다.이미 함께 돌아올 집에 있는 사람이었다.하연은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짙은 남색 원피스 위에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손에는 작은 꽃다발도, 선물도 없었다.유치원에서 꽃과 장난감을 가져오지 말아 달라고 안내했기 때문이었다.“엄마.”도윤이 하연을 발견하고 뛰어갔다.태건은 따라가지 않았다.하연이 아이 앞에 몸을 낮췄다.“긴장돼?”“조금.”“엄마도 조금 긴장돼.”“엄마는 노래 안 하잖아.”“도윤이 보는 게 처음이니까.”도윤은 잠시 하연을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같이 들어가.”하연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강당에는
# 외전 2화. 엄마가 오는 토요일“엄마, 내 집 봐.”도윤이 하연의 손을 잡아당겼다.하연은 현관 안쪽을 한 번 더 바라봤다.거실 바닥에는 새 수납장이 놓여 있었고, 민서의 책상 옆에는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조명이 기대어 있었다. 소파 위에는 태건의 겉옷과 도윤의 작은 가방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누군가의 집을 구경하는 일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 보였다.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누구의 물건이 어디에 놓이는지.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어떤 생활이 만들어졌는지.“잠깐 보고 가세요.”민서가 다시 말했다.하연은 그제야 신발을 벗었다.“실례할게요.”“엄마, 여기.”도윤은 하연이 신발을 정리할 틈도 주지 않고 작은방으로 데려갔다.방문 안쪽에는 자동차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창문 아래 낮은 침대에는 공룡 이불이 깔려 있었다.벽 한쪽 수납장에는 자동차와 기차가 줄을 맞춰 들어가 있었다.“이게 파란 자동차.”도윤이 가장 먼저 꺼낸 것은 민서의 이전 집에 두고 다니던 장난감이었다.“누나 집에 있던 거 기억나?”하연은 자동차를 받아 들지 않고 아이가 든 모습을 바라봤다.“응. 도윤이 자리라고 했던 거.”“이제 여기 있어.”“좋겠다.”“엄마 집에도 내 거 있어?”질문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하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응.”태건이 그녀를 바라봤다.하연은 도윤에게 설명했다.“지난번에 같이 산 기차책이랑 도윤이 쓰는 컵 하나 있어.”“내 컵?”“초록색.”“왜 나한테 안 보여 줬어?”“도윤이가 엄마 집에 올 수 있게 되면 보여 주려고 했어.”도윤은 곧바로 물었다.“나 언제 가?”하연은 태건 쪽을 보지 않았다.도윤에게 묻고, 태건이 대신 답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피하지 않았다.“아직 날짜는 안 정했어.”“왜?”“엄마 집에서 도윤이가 편하게 지낼 수 있는지 아빠랑 먼저 확인해야 해.”“침대 있어?”“도윤이가 낮잠 잘 수 있는 자리부터 만들려고.”도윤은 자신의 방을 돌아봤다.“내 침대는 여기 있는데.”“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