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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9 12:08:46

잉크가 덜 마른 동그라미 끝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레티는 손가락에 묻은 검은 자국을 수건으로 닦았다. 달력은 그대로 두고, 찻잎을 적은 종이만 옆으로 조금 밀었다. 내일 아침에는 서재부터 가야 했다.

침대에 누운 뒤에도 촛불을 끈 자리가 눈에 남았다. 눈을 감으면 겨울 침실이 보일까 봐, 한동안 천장의 작은 꽃무늬를 바라보았다.

복도에서 노엘이 재채기했다. 곧이어 노라가 창문을 닫으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레티는 이불을 어깨까지 당겼다.

이번에는 빈 의자를 기다리지 않고 잠들었다.

▽

다음 날 아침, 노라가 커튼을 걷기도 전에 레티는 옷장 앞에 서 있었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서재에 가려고.”

“아침 식사는요?”

“아버지께서 식사하시는 동안 책을 찾고 싶어.”

노라는 옷걸이에 걸린 드레스를 살폈다. 레티는 장식이 적은 연한 초록색 옷을 골랐다. 소매가 좁아 책을 꺼내다가 걸릴 일이 없었다.

“혼인에 관한 책이라 하셨죠?”

“응.”

“어떤 혼인이요?”

“안 해도 되는 혼인.”

노라가 뒤쪽 단추를 채우던 손을 멈췄다.

“아가씨.”

“아직 아무 일도 없어.”

“그런 말을 하시면 곧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잖아요.”

레티는 거울 속 노라와 눈이 마주쳤다.

“책부터 읽고 생각하려고.”

노라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앞치마 주머니에서 머리끈을 꺼내 밤색 머리를 느슨하게 묶어 주었다.

“책 먼지가 많으면 재채기가 나실 거예요. 제가 같이 갈까요?”

“혼자 찾을게. 아침에는 달걀 좀 남겨 줘.”

“딸기는요?”

“노엘이 먹기 전에 한 알만.”

“어제 전부 주셔서 오늘도 기다리고 계실 텐데요.”

‘친절에도 뒷일이 있네.’

레티는 문을 열기 전에 책상으로 돌아갔다. 봄 둘째 달 20일로 바뀐 날짜 표시를 확인하고, 빈 종이와 연필을 주머니에 넣었다.

▽

아버지의 서재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레티는 문을 조금 열어 안을 살폈다. 안경집은 책상 위에 있었지만 안경도 아버지도 없었다. 식당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시간이었다.

조용히 들어가 문을 닫았다.

서재 한쪽에는 법전이 모여 있었다. 세금, 토지, 상속. 손잡이가 달린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올라서자 그 위 칸의 제목도 보였다.

혼인과 가문.

레티는 두꺼운 책을 양손으로 잡았다. 책등이 선반에 붙어 있어 한 번에 빠지지 않았다. 조금씩 흔들어 꺼내다가 아래쪽 책을 건드렸다.

툭.

얇은 책 한 권이 떨어졌다.

레티는 발판에서 내려와 책을 주웠다. 떨어진 책보다 문을 먼저 보게 됐다.

‘책 읽는 게 죄도 아닌데.’

그래도 아버지에게 이유를 설명할 말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서재 가운데 탁자에 법전을 펼쳤다. 모서리가 닳은 차례에는 가문끼리 혼인을 정하는 절차, 신전 서약, 황실과의 혼담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황실이라는 글자를 찾아 페이지를 넘겼다.

첫 문장부터 혼인에 필요한 재산과 증인 이야기가 나왔다. 그다음에는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이 서약할 때 확인해야 할 문서가 있었다.

레티는 연필을 꺼냈다.

제국법은 황태자비에게 필요한 공부에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외운 것은 황실의 권한과 예법이었다. 혼인을 피하는 방법을 배울 이유는 없었다.

종이 위에 짧게 적었다.

「칙서가 오기 전.」

그 아래에는 황실 혼담을 거절할 수 있는지를 쓰려다가 멈췄다. 펼친 페이지에는 거절이라는 말 대신 조정과 승인만 가득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뜻을 들어준다 해도, 황실에 무엇을 내밀어야 하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레티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잠깐 읽고 나갈 생각으로 왔는데, 창가의 햇빛이 어느새 탁자 끝까지 들어와 있었다.

마침내 신전 서약과 황실 혼담이 함께 적힌 대목을 찾았다.

「먼저 맺은 신전 서약이 있으면 황실 혼담은 무르는 것이 관례다.」

레티는 손가락을 문장 아래에 대고 다시 읽었다.

먼저 맺은 서약.

혼담을 무르는 관례.

연필 끝이 종이에 빠르게 움직였다. 문장을 옮겨 적은 뒤, 신전 서약에 필요한 절차도 찾아보았다.

해가 뜰 때. 대사제 앞에서. 증인 둘.

그 아래에는 서약한 두 사람의 왼손 약지에 옅은 금빛 줄이 나타난다고 적혀 있었다. 줄은 한 달 동안 남아 누구나 서약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레티는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인장을 찍은 종이가 아니라, 손에 남는 표시였다. 황실의 사자가 찾아와도 이미 혼인했다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숨길 필요도 없었다.

“아가씨.”

문밖에서 그레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티는 연필을 놓쳤다. 탁자 밑으로 굴러간 연필을 줍고 나서야 대답했다.

“네.”

“식사가 식고 있습니다.”

“곧 갈게요.”

“공작님께서 책은 식사 뒤에도 도망가지 않는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레티는 입술을 다물었다.

이미 아셨다.

“아버지께서 많이 기다리셨어요?”

“신문을 다 읽으셨습니다.”

그건 꽤 오래 기다렸다는 뜻이었다.

레티는 옮겨 적은 종이를 접었다. 펼친 장 가장자리에 작은 종이 끝이 삐져나와 있었지만, 책을 닫자 보이지 않았다.

법전을 들고 선반으로 돌아갔다. 무거운 책을 밀어 넣은 뒤 발판도 제자리로 옮겼다.

문 앞에서 한 번 종이를 확인했다.

「먼저 맺은 신전 서약.」

그 방법이 있었다.

문제는 그 서약을 누구와 하느냐였다.

▽

“혼인법은 왜 읽느냐?”

아버지는 레티가 앉자마자 물었다.

노엘은 달걀 껍데기를 까다가 누나를 보았다. 레티는 그레고리가 따라 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알아두려고요.”

“갑자기?”

“제가 모르는 게 많더라고요.”

에드윈 공작은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았다.

“어려운 대목이 있으면 나한테 물어라.”

“아버지도 다 아세요?”

“필요한 부분은 알지.”

“신전 서약도요?”

“재산 문제라면.”

레티는 잔을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법전을 자주 읽는 이유는 대체로 땅과 돈 때문이었다.

노엘이 달걀 반쪽을 입에 넣고 말했다.

“누나 결혼해?”

“씹고 말해.”

노엘이 서둘러 삼켰다.

“결혼하면 내 방 옆에 누가 살아?”

“네 방부터 치워.”

“방은 어제 치웠어.”

“침대 밑도?”

노엘은 남은 달걀을 집었다.

에드윈 공작이 헛기침했다.

“아직 그런 이야기는 없다. 누나는 당분간 집에 있을 거다.”

레티는 포크로 달걀을 잘랐다. 당분간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저는 오래 있고 싶은데요.”

아버지의 손수건이 멈췄다.

“그래?”

“싫으세요?”

“그럴 리가 있느냐.”

공작은 안경을 다시 썼다. 코에 걸친 안경이 조금 비뚤어졌다.

“누가 불편하게 했거나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으면 바로 알려라.”

레티는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노엘은 그 사이 누나의 접시를 살폈다.

“딸기 안 먹어?”

“먹을 거야.”

“어제는 줬잖아.”

“오늘은 내가 먹어.”

노엘은 아쉽다는 얼굴로 물러났다. 레티가 딸기를 반으로 자르자 포크가 다시 천천히 다가왔다.

레티는 접시를 당겼다.

“이건 법으로도 안 돼.”

“무슨 법?”

“내 아침 지키는 법.”

아버지가 신문 뒤로 얼굴을 가렸다. 신문 위쪽이 잠깐 흔들렸다.

▽

방으로 돌아오자 책상 위에 종이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한 장은 서재에서 옮겨 적은 법 조문이었다. 다른 한 장은 새 종이였다.

레티는 맨 위에 적었다.

「신전 서약을 부탁할 사람.」

쓰고 보니 이상한 제목이었다. 서약은 찻잎 한 봉지를 빌리는 일이 아니었다. 상대도 약지에 금빛 줄을 남겨야 했고, 혼인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터였다.

연필 끝으로 종이 귀퉁이를 두드렸다.

사교계에서 춤을 청했던 남자부터 떠올렸다. 오래 얘기해 본 적은 없어도 가족이나 평판은 대강 알았다.

백작가 장남.

가문에서 이미 다른 혼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줄을 그었다.

동부에 영지가 있는 자작.

다과회에서 상속 재산을 얼마나 받느냐고 먼저 물었던 사람이었다. 그때는 아버지의 재산이 궁금한 줄 알았다.

또 줄을 그었다.

마고의 사촌.

남의 부탁을 들어주고는 다음 모임에서 반드시 이야기했다. 결혼을 부탁했다는 말을 수도 전체가 알게 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레티는 연필을 놓았다.

‘남자는 많은데 부탁할 사람은 없네.’

황실 혼담을 피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이유부터 따질 사람이 떠올랐다. 황태자 대신 자신을 택한 것으로 여길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면서 이름만 빌려서는 안 됐다.

상대가 원한다면 끝낼 수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사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노라가 빈 찻잔 두 개를 쟁반에 놓다가 책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름을 적으시는 거예요?”

“아직은 지우는 중이야.”

“많이 지우셨네요.”

“쓸 때보다 지울 때 빠르네.”

노라는 줄이 그어진 이름들을 보더니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분은 무도회에서 하인에게 소리를 지르셨어요.”

“왜?”

“장갑을 못 찾았다고요. 본인 주머니에 있었는데.”

레티는 이미 그어진 줄 위로 한 줄을 더 그었다.

“잘 지웠네.”

“그런데 무슨 목록이에요?”

레티는 종이를 뒤집었다.

“부탁할 사람이 필요해서.”

“차 맛 봐 달라는 부탁은 아니죠?”

“그것보다는 어려워.”

노라는 잠깐 생각하더니 쟁반을 들었다.

“그럼 아가씨가 싫다고 해도 화내지 않는 분으로 고르세요.”

레티는 뒤집어 놓은 종이에 손을 얹었다.

“응. 그래야겠어.”

복도에서 그레고리가 노라를 불렀다. 오후에 기사 손님이 오니 연습장 옆 휴게실에도 차를 준비하라는 말이었다.

노라는 나가면서 손가락을 접어 찻잔 수를 셌다.

“기사대장님 것, 손님 것. 도련님은 우유…….”

레티는 다시 종이를 펼쳤다.

빈 줄 아래로 연필 자국만 조금 남았다.

▽

오후에는 창문을 열었다.

아침부터 책상에 붙어 있자 어깨가 굳었다. 레티는 팔을 뻗었다가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목검 부딪치는 소리였다.

공작저 뒤편 연습장은 정원 끝에서 일부가 보였다. 노엘이 그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손에는 나무 검이 들려 있었다.

노라가 빈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도련님은 수업 끝나자마자 가셨어요. 기사대장님께 오늘은 꼭 봐 달라고 하셨대요.”

“검을?”

“네. 손님도 오셨고요.”

“아버지 손님이야?”

“기사대장님을 찾아오셨대요. 여기서 견습으로 지내셨던 분이래요.”

레티는 창틀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하르벨 공작가에서 견습으로 지냈던 기사.

생각나는 얼굴이 몇 있었다. 그중 한 얼굴에서 손이 멈췄다.

“누구신데?”

“근위 기사님이요. 에런 브리그 경.”

레티는 문 쪽으로 돌아섰다.

에런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을까.

결혼 전 공작저에서는 종종 마주쳤다. 수련을 마치고 장갑을 벗던 모습, 무거운 짐을 들고도 먼저 문을 열어 주던 손이 떠올랐다.

황태자궁에 들어간 뒤에는 인사를 나눌 일도 드물었다.

“아가씨?”

“산책 좀 하려고.”

레티는 책상에 놓인 목록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연필도 함께 챙겼다. 노라가 쟁반을 내려놓고 따라왔다.

연습장 가까이 가자 노엘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이건 할 수 있어요.”

노엘이 나무 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맞은편 남자는 검 없이 서 있었다.

짧은 갈색 머리였다. 근위 기사 제복의 어깨는 기억보다 넓었다.

노엘이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검을 크게 휘두르는 순간 발끝이 모래에 걸렸다.

레티가 걸음을 빨리했다.

남자가 먼저 손을 뻗어 노엘의 팔을 잡았다. 무릎은 바닥에 닿았지만 얼굴부터 넘어지는 것은 막았다.

“괜찮으십니까?”

에런이었다.

노엘은 곧바로 일어나려 했다. 에런이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잠깐만요. 아픈 곳부터 봐야 합니다.”

“안 아파요.”

“그럼 바지에 묻은 모래라도 털겠습니다.”

에런은 노엘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털었다. 검을 놓친 손에 묻은 모래도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노엘은 레티가 오는 것을 보고 입술을 다물었다.

“나 안 다쳤어.”

“아직 안 물었어.”

“물으려고 했잖아.”

레티는 노엘의 바지 무릎을 살폈다. 천이 조금 더러워졌을 뿐 찢어진 곳은 없었다.

노엘이 목검을 다시 쥐었다.

“한 번만 더 하면 되는데.”

에런은 떨어진 검집을 주워 모래를 털었다.

“이번에는 검을 휘두르지 말고 발부터 옮겨 보십시오.”

“검 안 쓰면 검술이 아니잖아요.”

“넘어지지 않는 것도 검술입니다.”

노엘은 못마땅한 듯 검 끝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에런이 앞에서 천천히 발을 움직이자 따라 했다.

레티는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에런은 잘했다고 큰 소리로 칭찬하지 않았다. 노엘이 무릎을 덜 굽힐 때마다 손으로 높이를 보여 주고, 발을 너무 멀리 내밀면 자기 발을 옆에 놓았다.

노엘은 같은 동작을 여러 번 하면서도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노라가 옆에서 수첩을 꺼냈다.

레티의 눈길이 펼친 장에 닿았다.

「찻잔 둘. 우유잔 하나. 기사님 잘생겼다.」

노라가 황급히 수첩을 접었다.

“잔 수 적었어요.”

“마지막 줄도 잔 수야?”

“손님 특징도 알아 둬야 하니까요.”

레티는 웃음을 삼켰다.

연습장 너머에서 기사대장이 에런을 불렀다. 에런은 노엘에게 목검을 받아 선반에 세운 뒤 고개를 숙였다.

“무릎이 아프면 꼭 말씀하십시오.”

“정말 안 아파요.”

“그래도 오늘은 뛰지 마시고요.”

노엘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는 주머니 속 종이에 손을 넣었다. 접힌 모서리가 손끝에 닿았다.

▽

본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엘은 계속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발을 너무 멀리 놓으면 안 된대.”

“들었어.”

“나는 검만 빨리 움직이면 되는 줄 알았는데.”

계단 앞에 이르러서도 노엘은 한 걸음씩 천천히 올라갔다. 우유를 마시러 주방 쪽으로 간다면서도 뛰지 않았다.

레티는 복도 창가에 잠깐 섰다.

주머니에서 꺼낸 목록은 반으로 접힌 자리에 연필 자국이 번져 있었다. 아침에 지운 이름들 아래에는 아직 넓은 여백이 남았다.

바깥에서 기사대장과 이야기하는 에런의 모습이 보였다. 레티는 종이를 창가 탁자에 올려놓았다.

황실 혼담을 피하고 싶다는 말을 들어 줄 사람.

좋지 않은 부탁이라고 생각하면 좋지 않다고 말해 줄 사람.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탁해도 되는지는 따로 물어야 했다.

현관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레티가 고개를 들자 에런이 복도 안으로 들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오른쪽 눈썹에 작은 흉이 있었다. 에런은 레티를 알아보고 걸음을 멈췄다.

손에 들고 있던 장갑을 한쪽으로 모은 뒤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레티는 대답하려다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연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목록 맨 아래, 아무것도 지우지 않은 자리에 이름을 하나 적었다.

「에런 브리그.」

(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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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엘이 외투 끈을 다시 묶어 주었다. 북쪽 길에서 불어온 바람에 풀린 매듭이었다.레티는 손을 내리고 매듭 끝을 잡았다.“너무 꽉 묶지는 마세요.”“바람이 들어온다.”“목까지 막으실 필요는 없어요.”유리엘의 손이 조금 내려갔다. 매듭이 느슨해지고, 접힌 옷깃이 펴졌다. 레티는 길의 굽은 곳을 한 번 더 본 뒤 마차 쪽으로 돌아섰다.마차 문을 연 유리엘이 손을 내밀었다.“빵은 잊지 않을게요.”“벌써 그 이야기인가.”“두 분이 성문까지 오는 동안 여러 번 말씀하셨잖아요.”“브리그 경은 옆에 두라고 했지.”“유리엘은요?”“먹는 것까지 확인한다고 했다.”레티가 내민 손을 잡았다.‘떠나도 승부는 남네.’마차에 오르자 유리엘이 외투 자락을 안으로 넣어 주었다. 문이 닫힌 뒤에도 레티는 무릎 위의 매듭을 잠깐 만졌다.▽봄 첫째 달 20일 오후, 봄날의 찻잔 창가에는 작은 빵 접시가 놓여 있었다.레티는 찻잎을 덜어 낸 뒤 그 접시를 곁눈질했다. 빵 위에 덮은 천의 모서리가 반듯했다. 접시 아래에는 유리엘이 접어 둔 쪽지가 있었다.「식기 전에 먹어.」빵은 이미 식었다.“찻잎 봉지를 묶는 동안 먹으려고 했어요.”맞은편에 앉은 유리엘이 접시를 보았다.“그 봉지는 다 묶었잖아.”“다음 봉지가 있었죠.”“지금은?”레티는 손에 든 빈 봉지를 내려놓았다.“지금은 먹을게요.”유리엘이 덮개를 걷었다. 레티는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에런 경은 잘 보이는 데 놓아 달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제 손앞까지 밀어 달라고는 안 하셨는데요.”“눈앞에 있어도 안 먹으니.”“확인하겠다고 하신 건 기억해요.”“약속은 지켜야지.”레티가 한입 먹자 유리엘은 그제야 접시에서 손을 뗐다. 빵 부스러기가 새 앞치마에 떨어졌다. 레티는 손바닥으로 털어 작은 쓰레기통에 넣었다.다시 단 앞치마 걸이는 허리 높이에 있었다. 예전에는 문 옆에 높이 달려 있어 매번 까치발을 들었다. 새 걸이는 레티가 직접 자리를 정했다.작은 선반도, 찻잔을 말리는 받침도 그랬

  •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77화. 건강하세요, 아가씨

    종소리가 잦아들자 오르반이 칙서 위에 손을 얹었다.“말씀하신 이름대로 기록하겠습니다.”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이 탁자 옆으로 다가왔고, 에런은 노엘이 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노엘은 아버지가 쥐여 준 손수건을 접지도 않은 채 들고 있었다.“형님, 내일 아침에는 있어요?”“있습니다.”“같이 먹어요?”“도련님께서 늦잠을 주무시지만 않으면요.”“안 잘 거예요.”에런이 노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레티는 두 사람이 나란히 신전 문을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에런의 보폭은 평소보다 짧았다.오르반이 서약 기록을 따로 거두었다.“내일은 작은 기도실로 오시면 됩니다. 두 분 손을 확인하고 서약을 거둘 겁니다.”“손을요?”레티가 왼손을 들었다.“없어진 줄이 잠깐 보일 수도 있습니다.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에런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따로 준비할 것이 있습니까?”“맨손으로 오시면 됩니다.”레티는 약지를 엄지로 한번 문질렀다. 유리엘이 곁에서 기다렸다. 내밀지는 않은 손이 레티의 손 가까이에 있었다.밖으로 나서자 마고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내가 더 떨었네.”“계속 숨 안 쉬고 있었지?”“중간에 쉬었어. 네가 알려 줬을 때.”노라가 잉크병 뚜껑을 꼭 닫았다. 아버지는 가방을 들었고, 노엘은 에런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레티도 그 뒤를 따라갔다. 내일 올 때는 사람이 적을 터였다. 꽃이 걸린 신전 문을 한 번 돌아본 뒤 마차에 올랐다.▽다음 날 아침, 노엘은 식당에 가장 먼저 와 있었다.머리 뒤쪽이 눌려 있었고 소매 한쪽이 접혀 있었다. 그래도 자리에 앉아 빵이 담긴 바구니를 지키고 있었다.“늦잠 안 잤어요.”에런이 들어오자 노엘이 바로 말했다.“확인했습니다.”“빵도 남겨 뒀어요.”“감사합니다.”레티가 자리에 앉자 에런이 오른쪽 의자를 당겼다. 유리엘은 왼쪽에 앉았다. 그레고리가 놓은 잔과 접시는 어제와 수가 다르지 않았다.레티는 빵을 집다가 에런 앞에 놓인 작은 접시를 보았다. 노엘이 골라 놓은 듯

  •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76화. 유리엘 에이브론

    레티가 잔을 비우자 에런이 빈 잔을 받침 가운데로 옮겼다. 유리엘은 찻주전자 손잡이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더 마실 거야?”“아니요. 오늘은 이만 마실래요.”아버지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 아래에 밀어 둔 서류 가방을 챙기려다 레티와 눈이 마주쳤다.“내일 가져갈 것만 넣어 두마.”“법전은 제 방에 있어요.”“알고 있다.”“몰래 가져가시면 알아요.”“그레고리에게 부탁하지도 않았다.”아직이라는 말은 붙지 않았다. 레티는 아버지의 가방을 한 번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유리엘이 의자를 잡았다. 에런은 식탁 위에 놓인 레티의 얇은 숄을 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둘이 한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내일 아침에 뵐게요.”“푹 주무십시오, 아가씨.”“늦게까지 일지 읽지 말고.”레티는 유리엘을 보았다.“노라가 이야기했어요?”“네 방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앞으로도 가끔 날 거예요.”“그래.”유리엘이 의자를 식탁 안으로 밀었다. 레티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식당을 나왔다.계단 끝에서 돌아보자 그레고리가 오른쪽 빈자리에 놓인 의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인데도 다른 의자와 똑같이 반듯하게 맞췄다.▽다음 날 아침, 노라는 레티의 소매 끝을 펴고 단추를 다시 확인했다.밝은 회색 드레스는 앉아도 무릎께가 많이 구겨지지 않는 옷이었다. 레티가 직접 골랐다. 노라가 꺼낸 진주 목걸이는 화장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정말 안 하실 거예요?”“목이 좀 답답할 것 같아.”“그럼 이 핀만 꽂을게요.”노라가 머리 옆에 작은 핀을 꽂았다. 거울 속에서 밤색 머리카락 한 가닥이 다시 빠져나왔다. 노라는 손끝에 물을 조금 묻혀 눌러 주었다.“너도 앉을 자리 있지?”“신전에서 하인들 자리도 마련해 주신대요.”“기록하느라 계속 서 있지는 말고.”노라가 앞치마 대신 입은 단정한 옷의 주머니를 눌렀다. 작은 수첩 모서리가 보였다.“앉아서도 적을 수 있어요.”“오늘은 많이 적을 필요 없어.”“이름은 틀리면 안 되잖아요.”

  •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75화. 일지는 다 모아 두었어요

    “오늘만이라는 말, 유리엘한테도 하신 거예요?”에런이 동쪽 별채 창을 다시 보았다.“들리지는 않으셨을 겁니다.”“그럼 제가 전할까요?”“내일 아침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레티는 장갑을 벗어 가방 위에 얹었다. 에런이 현관 문을 열어 주었다. 목도리는 아직 목에 느슨하게 둘려 있었다.“그런데 내일도 문을 먼저 열어 주시려고요?”“아침 식탁 의자는 먼저 빼 드릴 수 있습니다.”“퇴근길만 양보하신 거군요.”“오늘만이라고 했습니다.”레티는 웃으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 에런이 느릅관 쪽으로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동쪽 창의 불도 아직 켜져 있었다.▽봄 첫째 달 14일 오후, 아버지의 서재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레티가 문틈으로 들여다보자 에드윈 공작이 안경을 벗었다. 책상 위에는 낡은 법전과 얇은 서류철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서류철 모서리에 붙인 종이가 유난히 많았다.“들어오너라. 의자는 치웠다.”“왜 치우셨어요?”“아니, 의자에 있던 책을 치웠다는 말이다.”레티는 책상 앞 의자를 보았다. 앉을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대신 옆의 작은 탁자 위에 책이 높이 쌓여 있었다.‘옮긴 걸 치웠다고 하시는구나.’레티가 앉자 아버지는 법전을 밀어 주었다. 펼쳐진 곳의 종이는 다른 쪽보다 더 닳아 있었다.“이걸 또 읽고 계셨어요?”“마지막으로 확인했다.”“지난번에도 마지막이라고 하셨는데요.”“그때는 서약 해제에 관한 조항을 확인한 거고.”아버지는 헛기침을 했다. 레티는 책에 붙은 종이 하나를 들춰 보았다. 아버지의 글씨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딸이 직접 말할 것.」그 아래에는 그 말에 밑줄이 두 번 그어져 있었다.“이건 외우셨겠어요.”“첫날부터 외웠다.”“그런데 왜 계속 보세요?”아버지는 안경을 다시 썼다. 법전의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눌렀지만, 페이지는 자꾸 조금씩 들렸다.“혹시 다른 조항이 이 말을 막고 있을까 봐.”레티는 붙임 종이를 놓았다.아버지는 서류철을 열었다. 황실 문양이 찍힌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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