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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유리엘 에이브론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9 12:18:52

레티가 잔을 비우자 에런이 빈 잔을 받침 가운데로 옮겼다. 유리엘은 찻주전자 손잡이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

“더 마실 거야?”

“아니요. 오늘은 이만 마실래요.”

아버지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 아래에 밀어 둔 서류 가방을 챙기려다 레티와 눈이 마주쳤다.

“내일 가져갈 것만 넣어 두마.”

“법전은 제 방에 있어요.”

“알고 있다.”

“몰래 가져가시면 알아요.”

“그레고리에게 부탁하지도 않았다.”

아직이라는 말은 붙지 않았다. 레티는 아버지의 가방을 한 번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엘이 의자를 잡았다. 에런은 식탁 위에 놓인 레티의 얇은 숄을 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둘이 한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뵐게요.”

“푹 주무십시오, 아가씨.”

“늦게까지 일지 읽지 말고.”

레티는 유리엘을 보았다.

“노라가 이야기했어요?”

“네 방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

“앞으로도 가끔 날 거예요.”

“그래.”

유리엘이 의자를 식탁 안으로 밀었다. 레티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식당을 나왔다.

계단 끝에서 돌아보자 그레고리가 오른쪽 빈자리에 놓인 의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인데도 다른 의자와 똑같이 반듯하게 맞췄다.

▽

다음 날 아침, 노라는 레티의 소매 끝을 펴고 단추를 다시 확인했다.

밝은 회색 드레스는 앉아도 무릎께가 많이 구겨지지 않는 옷이었다. 레티가 직접 골랐다. 노라가 꺼낸 진주 목걸이는 화장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정말 안 하실 거예요?”

“목이 좀 답답할 것 같아.”

“그럼 이 핀만 꽂을게요.”

노라가 머리 옆에 작은 핀을 꽂았다. 거울 속에서 밤색 머리카락 한 가닥이 다시 빠져나왔다. 노라는 손끝에 물을 조금 묻혀 눌러 주었다.

“너도 앉을 자리 있지?”

“신전에서 하인들 자리도 마련해 주신대요.”

“기록하느라 계속 서 있지는 말고.”

노라가 앞치마 대신 입은 단정한 옷의 주머니를 눌렀다. 작은 수첩 모서리가 보였다.

“앉아서도 적을 수 있어요.”

“오늘은 많이 적을 필요 없어.”

“이름은 틀리면 안 되잖아요.”

레티는 장갑을 집어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맨손으로 갈게.”

노라는 이유를 묻지 않고 장갑을 서랍에 넣었다. 레티의 왼손 약지는 다른 손가락과 다를 것 없이 보였다. 한 달 동안 보였던 금빛 줄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레티는 손을 한 번 폈다가 가볍게 쥐었다.

현관에서는 노엘이 외투 단추와 씨름하고 있었다. 단추를 잘못 끼워 옷자락 한쪽이 올라가 있었다.

“누나, 이거 좀.”

레티가 손을 뻗기도 전에 에런이 몸을 낮췄다.

“하나씩 밀렸습니다.”

“급해서 그랬어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에런이 단추를 풀어 다시 끼워 주었다. 노엘은 검을 찼는지 확인하듯 허리 옆을 만졌다가 손을 내렸다. 오늘은 검을 가져오지 않기로 했었다.

“검 띠만 매면 안 돼요?”

“오늘은 이 옷이 잘 맞습니다.”

유리엘이 현관 옆에서 노엘의 접힌 옷깃을 펴 주었다.

“돌아와서 매.”

“알겠어요.”

노엘은 두 사람을 올려다보다가 에런 옆에 붙어 섰다. 에런의 손이 내려오자 바로 잡았다.

레티가 계단을 내려갔다. 유리엘이 외투를 펼쳤고, 에런은 노엘의 손을 잡은 채 반대 손으로 외투 자락을 받았다.

“내가 입힐 수 있다.”

“자락이 바닥에 닿습니다.”

“들고 있다.”

“이쪽은 제가 들고 있습니다.”

레티는 두 사람 사이로 팔을 넣었다.

“옷을 나누지는 마세요. 한 벌밖에 안 꺼냈어요.”

에런의 입가가 올라갔다. 유리엘은 레티의 어깨에 외투를 맞춘 뒤 앞섶을 내려다보았다.

“단추는 내가 잠가도 돼요.”

레티가 먼저 손을 올렸다.

‘오늘도 옷 한 벌에 둘이 붙네.’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 나서야 두 사람이 손을 놓았다. 노엘은 에런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마차로 향하는 동안 현관에 선 그레고리가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아버지는 서류 가방을 들고 앞서 걸었다. 가방이 어제보다 얇았다. 레티가 쳐다보자 아버지가 덧붙였다.

“법전은 안 넣었다.”

“확인서만요?”

“확인서와 신전에서 보낸 절차 안내.”

잠깐 뜸을 들인 뒤 아버지가 말했다.

“조문 사본 한 장도.”

레티는 더 묻지 않고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

새벽의 신전으로 가는 길에는 꽃을 든 사람들이 많았다.

수레에 꽃바구니를 싣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아이의 손목에 꽃줄을 묶어 주는 사람도 있었다. 마차가 느리게 모퉁이를 돌자 레티는 창밖을 보았다. 봄꽃 축일을 맞아 신전 앞 기둥에도 흰 꽃이 걸려 있었다.

계단 아래는 이미 사람들로 차 있었다.

“저렇게 많이 와?”

노엘이 창 가까이 얼굴을 댔다.

아버지가 서류 가방의 덮개를 눌렀다.

“축일이니까.”

노엘은 아버지를 보고, 다시 창밖을 보았다.

“누나 보러 온 사람도 있죠?”

“있겠지.”

레티가 대답했다.

“그럼 나도 옆에 있어도 돼?”

“정해 준 자리까지는 같이 가.”

노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멈추자 에런의 손을 다시 찾아 잡았다.

문이 열렸다. 먼저 내린 유리엘이 레티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런은 반대편에서 발판이 흔들리지 않는지 눌러 보았다.

레티는 유리엘의 손을 잡고 내려왔다. 돌길에 발이 닿자 잡았던 손을 놓았다. 유리엘은 더 붙잡지 않았다.

신전 문 앞에 마고가 서 있었다. 꽃 장식 아래에서 손을 흔들다가 주변 사람들이 돌아보자 손을 가슴께로 내렸다.

“일찍 왔네.”

“자리가 없을까 봐. 아버지가 나보다 더 서두르셨어.”

마고는 레티의 옷깃을 보더니 목걸이에 관해서는 묻지 않았다.

“물 필요해?”

“아직 괜찮아.”

“안쪽에 있어. 목이 마르면 말해.”

마고는 그 말만 하고 옆으로 비켰다. 평소 같으면 벌써 누가 누구와 함께 왔는지 말했을 텐데, 오늘은 레티가 지나갈 자리부터 만들었다.

노라가 뒤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수첩을 꺼내려다가 한 손에 든 잉크병 때문에 잠깐 멈췄다.

“내가 들어 줄까?”

레티가 묻자 노라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는 들어가세요. 제가 챙길게요.”

마고가 노라의 잉크병을 받아 들었다.

“내 옆에 앉아. 탁자 끝이 가까워.”

노라는 잠깐 놀란 얼굴로 마고를 보았다가 허리를 숙였다.

신전 문이 열리자 사람들의 말소리가 낮아졌다. 레티는 아버지의 팔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

높은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바닥에 길게 놓여 있었다.

안쪽에는 작은 탁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황실 문양이 찍힌 칙서와 신전의 서약 기록이 나란히 놓였다. 레티는 두 종이 사이의 빈 곳을 보았다.

오르반 대사제가 서류를 덮고 다가왔다.

“잘 주무셨습니까?”

“네.”

“아침도 드셨고요?”

“조금 먹었어요.”

“다행입니다. 빈속에 오래 서 있으면 다리가 먼저 불평합니다.”

오르반은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절차를 시작하기 전까지 앉아 계셔도 됩니다.”

레티가 의자로 향하자 유리엘과 에런의 손이 동시에 등받이에 닿았다.

“내가 하지.”

“밖에서는 전하께서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발판은 네가 봤지.”

“그건 발판입니다.”

레티는 의자 앞에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대사제님이 기다리세요.”

오르반은 두 손을 소매 안에 넣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 법을 기다린 것보다는 짧겠지요.”

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에런이 먼저 의자 한쪽을 놓았고 유리엘도 손을 뗐다. 레티는 스스로 의자를 조금 당겨 앉았다.

“제가 앉으면 끝나는 일이었네요.”

“그렇습니다.”

에런은 웃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유리엘은 의자 다리가 바닥의 이음새에 걸리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노엘은 에런 곁에 섰다. 엄지손가락으로 에런의 손등을 문지르다가, 레티가 보자 손을 멈췄다.

“나 여기 있어도 돼요?”

노엘이 오르반에게 물었다.

“시작하면 아버님 옆으로 가 주십시오. 지금은 괜찮습니다.”

“얼마나 남았어요?”

“제가 서류를 확인하고 나면 시작합니다.”

노엘은 탁자 위의 종이를 보았다. 아버지도 보았다. 레티는 둘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오늘은 저 종이가 천천히 넘어가겠네.’

오르반은 아버지에게 확인서를 받아 칙서 옆에 놓았다. 아버지가 접어 온 조문 사본은 가방 안에 남았다.

“이름을 말씀하신 뒤에는 오늘 결정에 관한 기록을 남깁니다.”

오르반이 레티를 보며 말했다.

“서약 해제 의식은 내일 따로 진행합니다. 오늘 여기서 누군가의 손을 떼어 놓는 일은 없을 겁니다.”

노엘의 손가락이 조금 풀렸다. 에런이 잡힌 손을 가볍게 고쳐 잡았다.

“이름 외에 다른 말을 해야 하나요?”

레티가 물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이유를 설명하실 의무는 없습니다.”

“이름만 말해도 되는 거죠?”

“그렇습니다. 다른 분께 대신 말하게 하실 수는 없고요.”

아버지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레티가 고개를 돌리자 아버지는 바로 옆에 섰다. 어젯밤 부탁한 자리였다.

“여기 있으면 되겠니?”

“네.”

레티는 아버지의 소매를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

오르반이 가운데로 나오자 뒤쪽 문이 닫혔다.

사람들은 통로를 비우고 양옆으로 섰다. 레티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앞에 섰다. 유리엘과 에런도 양쪽으로 떨어져 섰다. 늘 식탁에서 마주하던 거리보다 멀었다.

노라는 마고 옆에 앉아 수첩을 펼쳤다. 작은 탁자 끝에 잉크병을 놓고 펜을 들었다. 마고는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레티를 보고 있었다.

“봄 첫째 달 15일, 봄꽃 축일의 혼인 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르반의 목소리가 신전 안에 들렸다.

“같은 날 맺어진 신전의 혼인 서약과 황실의 혼인 칙서는 오늘까지 모두 효력을 지녔습니다.”

오르반은 두 서류에 차례로 손을 얹었다.

“정해진 기간 동안 두 배우자는 하르벨 영애의 집에 머물렀으며, 어느 쪽도 스스로 물러나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레티는 에런을 보았다.

에런의 제복 소매에는 노엘이 잡은 자리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노엘은 오르반의 말을 듣고도 손을 놓지 못했다. 아버지가 한 걸음 다가가자 그제야 에런을 올려다보았다.

“손이 차갑습니다, 도련님.”

에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도요.”

“아까 마차 밖에 먼저 나가 있었거든요.”

“나중에 따뜻한 거 마셔요.”

“그러겠습니다.”

노엘은 양손으로 에런의 손을 한 번 더 잡았다. 에런이 몸을 낮추자 귓가에 뭔가를 말하고는 아버지 옆으로 왔다. 레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오르반이 서류를 덮었다.

“하르벨 영애께서 직접 한 분의 이름을 말씀하시면 됩니다. 말씀하시기 전, 두 분께서 전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유리엘은 레티를 보았다. 입술이 잠깐 움직였지만 바로 말하지 않았다. 레티가 눈을 맞추고 기다리자 짧게 말했다.

“천천히 해.”

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런이 앞으로 나왔다.

레티는 몸을 돌려 에런을 마주 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에런의 제복 단추가 햇빛을 받았다. 아침에 노엘의 옷을 매만지던 손이 옆으로 내려와 있었다.

“아가씨.”

“네, 에런 경.”

“무릎을 꿇어도 괜찮겠습니까?”

레티는 에런의 얼굴을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런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댔다. 검을 가져오지 않아 허리 옆이 비어 있었다. 레티는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턱을 조금 낮췄다.

둘이 처음 신전 앞에 섰을 때는 동이 트기 전이었다. 레티는 시간부터 확인했었다. 그날 에런의 손이 떨렸다는 것은 며칠 전 돌아오는 길에서야 들었다.

지금 에런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았다. 웃을 때 한쪽 볼이 조금 들어갔다.

“제 손이 필요하실 때 잡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레티의 손끝이 소매에 닿았다.

“제가 먼저 부탁했잖아요.”

“그렇습니다.”

“에런 경이 들어 주셨고요.”

“제가 그러고 싶었습니다.”

레티는 에런을 피하지 않고 보았다.

신전 문밖에서 꽃바구니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났다. 안쪽에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노라의 펜도 종이에 닿지 않은 채 멈춰 있었다.

에런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

“레티시아 님, 행복하세요.”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레티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에런의 어깨 위로 내려앉은 햇빛을 보고, 다시 얼굴을 보았다. 눈앞이 조금 흐려져 한 번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말끝이 짧게 끊겼다. 레티는 숨을 들이쉬고 한마디를 더 했다.

“에런 경도요.”

“네.”

에런은 바로 대답했다. 레티가 손을 내밀자 손끝을 가볍게 잡고 일어났다. 몸을 일으킨 뒤에는 먼저 손을 놓았다.

레티는 에런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

노엘이 아버지 옆에서 소매 끝으로 코를 문질렀다. 아버지는 손수건을 꺼내 동생의 손에 쥐여 주었다. 마고는 여전히 두 손을 꼭 모으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 숨이 빠져나오지도 않았다.

레티가 작게 입 모양으로 숨을 쉬라고 하자 마고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라는 그 틈에 펜촉을 잉크병에 넣었다가 꺼냈다.

오르반이 레티에게 몸을 돌렸다.

“준비되셨습니까?”

“네.”

아버지가 바로 옆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레티의 앞을 가리지 않는 자리였다. 노엘도 함께 움직였다.

레티는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금빛 줄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 손으로 서약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은 없었다. 에런은 끝까지 그날의 부탁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레티는 손을 펴고 유리엘을 보았다.

유리엘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왼손 약지의 은빛 흉터가 장갑 없이 드러나 있었다. 종 앞에서 손으로 덮었던 자리였다. 레티가 바라보자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가 멎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탁자에는 황제의 칙서가 있었다. 레티는 종이에 적힌 이름을 읽지 않았다.

유리엘의 얼굴을 보고 입을 열었다.

“유리엘 에이브론.”

노라의 펜이 종이에 닿았다.

신전 아래에서 종이 한 번 울렸다.

「별채 일지 — 봄 첫째 달 15일. 봄꽃 축일. 외투: 두 분. 신전 의자: 아가씨께서 직접 당기심.

에런 경께서 무릎을 꿇으심. 도련님은 손을 오래 잡고 계셨음.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이름: 유리엘 에이브론. 종이 한 번 울림.」

(7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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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엘이 외투 끈을 다시 묶어 주었다. 북쪽 길에서 불어온 바람에 풀린 매듭이었다.레티는 손을 내리고 매듭 끝을 잡았다.“너무 꽉 묶지는 마세요.”“바람이 들어온다.”“목까지 막으실 필요는 없어요.”유리엘의 손이 조금 내려갔다. 매듭이 느슨해지고, 접힌 옷깃이 펴졌다. 레티는 길의 굽은 곳을 한 번 더 본 뒤 마차 쪽으로 돌아섰다.마차 문을 연 유리엘이 손을 내밀었다.“빵은 잊지 않을게요.”“벌써 그 이야기인가.”“두 분이 성문까지 오는 동안 여러 번 말씀하셨잖아요.”“브리그 경은 옆에 두라고 했지.”“유리엘은요?”“먹는 것까지 확인한다고 했다.”레티가 내민 손을 잡았다.‘떠나도 승부는 남네.’마차에 오르자 유리엘이 외투 자락을 안으로 넣어 주었다. 문이 닫힌 뒤에도 레티는 무릎 위의 매듭을 잠깐 만졌다.▽봄 첫째 달 20일 오후, 봄날의 찻잔 창가에는 작은 빵 접시가 놓여 있었다.레티는 찻잎을 덜어 낸 뒤 그 접시를 곁눈질했다. 빵 위에 덮은 천의 모서리가 반듯했다. 접시 아래에는 유리엘이 접어 둔 쪽지가 있었다.「식기 전에 먹어.」빵은 이미 식었다.“찻잎 봉지를 묶는 동안 먹으려고 했어요.”맞은편에 앉은 유리엘이 접시를 보았다.“그 봉지는 다 묶었잖아.”“다음 봉지가 있었죠.”“지금은?”레티는 손에 든 빈 봉지를 내려놓았다.“지금은 먹을게요.”유리엘이 덮개를 걷었다. 레티는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에런 경은 잘 보이는 데 놓아 달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제 손앞까지 밀어 달라고는 안 하셨는데요.”“눈앞에 있어도 안 먹으니.”“확인하겠다고 하신 건 기억해요.”“약속은 지켜야지.”레티가 한입 먹자 유리엘은 그제야 접시에서 손을 뗐다. 빵 부스러기가 새 앞치마에 떨어졌다. 레티는 손바닥으로 털어 작은 쓰레기통에 넣었다.다시 단 앞치마 걸이는 허리 높이에 있었다. 예전에는 문 옆에 높이 달려 있어 매번 까치발을 들었다. 새 걸이는 레티가 직접 자리를 정했다.작은 선반도, 찻잔을 말리는 받침도 그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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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소리가 잦아들자 오르반이 칙서 위에 손을 얹었다.“말씀하신 이름대로 기록하겠습니다.”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이 탁자 옆으로 다가왔고, 에런은 노엘이 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노엘은 아버지가 쥐여 준 손수건을 접지도 않은 채 들고 있었다.“형님, 내일 아침에는 있어요?”“있습니다.”“같이 먹어요?”“도련님께서 늦잠을 주무시지만 않으면요.”“안 잘 거예요.”에런이 노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레티는 두 사람이 나란히 신전 문을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에런의 보폭은 평소보다 짧았다.오르반이 서약 기록을 따로 거두었다.“내일은 작은 기도실로 오시면 됩니다. 두 분 손을 확인하고 서약을 거둘 겁니다.”“손을요?”레티가 왼손을 들었다.“없어진 줄이 잠깐 보일 수도 있습니다.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에런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따로 준비할 것이 있습니까?”“맨손으로 오시면 됩니다.”레티는 약지를 엄지로 한번 문질렀다. 유리엘이 곁에서 기다렸다. 내밀지는 않은 손이 레티의 손 가까이에 있었다.밖으로 나서자 마고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내가 더 떨었네.”“계속 숨 안 쉬고 있었지?”“중간에 쉬었어. 네가 알려 줬을 때.”노라가 잉크병 뚜껑을 꼭 닫았다. 아버지는 가방을 들었고, 노엘은 에런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레티도 그 뒤를 따라갔다. 내일 올 때는 사람이 적을 터였다. 꽃이 걸린 신전 문을 한 번 돌아본 뒤 마차에 올랐다.▽다음 날 아침, 노엘은 식당에 가장 먼저 와 있었다.머리 뒤쪽이 눌려 있었고 소매 한쪽이 접혀 있었다. 그래도 자리에 앉아 빵이 담긴 바구니를 지키고 있었다.“늦잠 안 잤어요.”에런이 들어오자 노엘이 바로 말했다.“확인했습니다.”“빵도 남겨 뒀어요.”“감사합니다.”레티가 자리에 앉자 에런이 오른쪽 의자를 당겼다. 유리엘은 왼쪽에 앉았다. 그레고리가 놓은 잔과 접시는 어제와 수가 다르지 않았다.레티는 빵을 집다가 에런 앞에 놓인 작은 접시를 보았다. 노엘이 골라 놓은 듯

  •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76화. 유리엘 에이브론

    레티가 잔을 비우자 에런이 빈 잔을 받침 가운데로 옮겼다. 유리엘은 찻주전자 손잡이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더 마실 거야?”“아니요. 오늘은 이만 마실래요.”아버지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 아래에 밀어 둔 서류 가방을 챙기려다 레티와 눈이 마주쳤다.“내일 가져갈 것만 넣어 두마.”“법전은 제 방에 있어요.”“알고 있다.”“몰래 가져가시면 알아요.”“그레고리에게 부탁하지도 않았다.”아직이라는 말은 붙지 않았다. 레티는 아버지의 가방을 한 번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유리엘이 의자를 잡았다. 에런은 식탁 위에 놓인 레티의 얇은 숄을 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둘이 한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내일 아침에 뵐게요.”“푹 주무십시오, 아가씨.”“늦게까지 일지 읽지 말고.”레티는 유리엘을 보았다.“노라가 이야기했어요?”“네 방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앞으로도 가끔 날 거예요.”“그래.”유리엘이 의자를 식탁 안으로 밀었다. 레티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식당을 나왔다.계단 끝에서 돌아보자 그레고리가 오른쪽 빈자리에 놓인 의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인데도 다른 의자와 똑같이 반듯하게 맞췄다.▽다음 날 아침, 노라는 레티의 소매 끝을 펴고 단추를 다시 확인했다.밝은 회색 드레스는 앉아도 무릎께가 많이 구겨지지 않는 옷이었다. 레티가 직접 골랐다. 노라가 꺼낸 진주 목걸이는 화장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정말 안 하실 거예요?”“목이 좀 답답할 것 같아.”“그럼 이 핀만 꽂을게요.”노라가 머리 옆에 작은 핀을 꽂았다. 거울 속에서 밤색 머리카락 한 가닥이 다시 빠져나왔다. 노라는 손끝에 물을 조금 묻혀 눌러 주었다.“너도 앉을 자리 있지?”“신전에서 하인들 자리도 마련해 주신대요.”“기록하느라 계속 서 있지는 말고.”노라가 앞치마 대신 입은 단정한 옷의 주머니를 눌렀다. 작은 수첩 모서리가 보였다.“앉아서도 적을 수 있어요.”“오늘은 많이 적을 필요 없어.”“이름은 틀리면 안 되잖아요.”

  •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75화. 일지는 다 모아 두었어요

    “오늘만이라는 말, 유리엘한테도 하신 거예요?”에런이 동쪽 별채 창을 다시 보았다.“들리지는 않으셨을 겁니다.”“그럼 제가 전할까요?”“내일 아침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레티는 장갑을 벗어 가방 위에 얹었다. 에런이 현관 문을 열어 주었다. 목도리는 아직 목에 느슨하게 둘려 있었다.“그런데 내일도 문을 먼저 열어 주시려고요?”“아침 식탁 의자는 먼저 빼 드릴 수 있습니다.”“퇴근길만 양보하신 거군요.”“오늘만이라고 했습니다.”레티는 웃으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 에런이 느릅관 쪽으로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동쪽 창의 불도 아직 켜져 있었다.▽봄 첫째 달 14일 오후, 아버지의 서재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레티가 문틈으로 들여다보자 에드윈 공작이 안경을 벗었다. 책상 위에는 낡은 법전과 얇은 서류철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서류철 모서리에 붙인 종이가 유난히 많았다.“들어오너라. 의자는 치웠다.”“왜 치우셨어요?”“아니, 의자에 있던 책을 치웠다는 말이다.”레티는 책상 앞 의자를 보았다. 앉을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대신 옆의 작은 탁자 위에 책이 높이 쌓여 있었다.‘옮긴 걸 치웠다고 하시는구나.’레티가 앉자 아버지는 법전을 밀어 주었다. 펼쳐진 곳의 종이는 다른 쪽보다 더 닳아 있었다.“이걸 또 읽고 계셨어요?”“마지막으로 확인했다.”“지난번에도 마지막이라고 하셨는데요.”“그때는 서약 해제에 관한 조항을 확인한 거고.”아버지는 헛기침을 했다. 레티는 책에 붙은 종이 하나를 들춰 보았다. 아버지의 글씨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딸이 직접 말할 것.」그 아래에는 그 말에 밑줄이 두 번 그어져 있었다.“이건 외우셨겠어요.”“첫날부터 외웠다.”“그런데 왜 계속 보세요?”아버지는 안경을 다시 썼다. 법전의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눌렀지만, 페이지는 자꾸 조금씩 들렸다.“혹시 다른 조항이 이 말을 막고 있을까 봐.”레티는 붙임 종이를 놓았다.아버지는 서류철을 열었다. 황실 문양이 찍힌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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