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6화. 해 뜰 때 오세요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9 12:09:21

“아버지께서 에런 경에게 부탁하셨어요.”

레티는 현관 난간에서 손을 떼었다. 유리엘의 오른손 장갑은 손목까지 올라가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먼저 돌아왔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유리엘은 바로 마차로 내려가지 않았다. 레티의 얼굴을 보다가 열린 현관 안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뒤뜰에서 노엘이 에런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다음에는 내 마차를 써.”

“전하께서 쓰셔야 하잖아요.”

“한 대만 있는 게 아니다.”

“저희 집에도 마차는 있어요.”

말이 너무 빨리 나왔다. 레티는 소매 끝을 펴며 덧붙였다.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유리엘은 잠깐 말이 없었다. 웨스가 마차 문을 열어 놓고 기다렸다.

“무리하지 마.”

“네. 전하도 조심히 돌아가세요.”

유리엘이 계단을 내려갔다. 마차 문이 닫힌 뒤에야 레티는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마차까지 늘리면 둘 곳도 없겠네.’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노라가 빈 쟁반을 들고 나왔다.

“아가씨, 에런 경께서 신전에 언제 가실지 여쭤보셨어요.”

레티는 계단 첫 칸에서 발을 멈췄다.

“근무가 없는 날을 알려 달라고 해 줘.”

이번에는 날짜만 정하고 돌아오는 일이었다. 그래도 직접 가서 확인해야 했다. 법전에서 읽은 문장만 믿고 생일 새벽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

봄 셋째 달 1일 아침, 레티의 방에는 젖은 천 냄새가 조금 남아 있었다.

노라가 작은 다리미를 내려놓고 옷을 들어 보았다. 옅은 갈색 치마의 주름이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

“이 정도면 신전에 입고 가도 괜찮겠죠?”

“오늘 입을 거야?”

“아뇨. 증인 설 때요. 미리 해 놓으려고요.”

“아직 날짜도 안 잡았는데.”

“날짜가 잡히면 아가씨 옷부터 봐야 하니까요.”

레티는 거울 앞에서 귀걸이를 내려놓았다. 노라가 제 옷을 다리는 모습은 드물었다. 늘 레티의 소매나 노엘의 흙 묻은 바짓단이 먼저였다.

“다른 옷을 맞춰도 돼. 비용은 내가 낼게.”

“이 옷이 좋아요. 제가 처음 받은 월급으로 산 거예요.”

노라는 치마를 접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펼치다가 레티와 눈이 마주쳤다.

“뭘 적었어?”

“챙길 물건이요.”

“나도 봐야 챙기지.”

노라는 잠깐 망설이다 수첩을 내밀었다. 손수건과 머리핀을 적은 줄 아래에 다른 글이 있었다.

「내가 아가씨 결혼식 증인이라니.」

옆에는 작은 별이 그려져 있었다. 레티는 그 줄을 엄지로 덮지 않고 그대로 읽었다.

신전에서 이름을 빌리겠다는 부탁은 에런과 레티 사이에서만 간단한 말이었다. 노라에게는 가장 좋은 치마를 다려 놓을 일이었다.

“아가씨?”

레티는 수첩을 돌려주었다.

“손수건은 여분도 챙겨 줘.”

“울지는 않을 거예요.”

“네가 울 거라고 안 했어.”

“혹시 모르니까 두 장 넣을게요.”

노라는 수첩을 닫았다. 레티는 귀걸이 대신 작은 머리핀 하나를 골랐다.

▽

오전에는 마차를 바로 쓸 수 없었다.

그레고리가 현관에서 공작의 승마 일정과 마구간 점검 시간을 차례로 알려 주었다. 신전까지 가는 마차는 점심 뒤에 준비된다고 했다.

“에런 경께는 전했습니다. 기사대장님을 뵙고 기다리시겠답니다.”

“그럼 나도 잠깐 뒤뜰에 다녀올게요.”

아버지에게 외출을 알릴 겸이었다. 신전에서는 우선 필요한 절차부터 물어볼 생각이었다. 서약 날짜를 확정하면 아버지에게도 더 미룰 수 없었다.

뒤뜰에는 말 두 필이 서 있었다.

공작은 승마용 장갑을 끼면서 고삐를 겨드랑이에 잠깐 끼워 두고 있었다. 옆에는 검은 외투를 입은 유리엘이 있었다.

레티는 걸음을 조금 늦췄다.

“전하께서 오신 줄 몰랐어요.”

“일찍 왔다.”

“아버지와 승마하신다고 들었어요.”

공작이 반갑게 손짓했다.

“레티, 잘 왔다. 말을 타고 돌아오기 전에 나간다기에 얼굴도 못 볼 줄 알았구나.”

“점심 뒤에 나가려고요.”

“브리그 경과 노라가 함께 간다고 했지?”

“네.”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고리에게 외출 일정을 들은 모양이었다.

말 옆에 있던 에런이 마구를 살피다 몸을 돌렸다.

“아가씨, 바닥에 물이 있습니다.”

레티는 내려다보았다. 마구간 앞을 씻은 물이 돌 틈에 고여 있었다. 치마를 조금 들고 마른 쪽으로 발을 옮겼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에런이 옆에 놓인 낮은 발판을 가져왔다. 공작이 말에 오를 때 쓰려고 꺼내 둔 발판이었다. 물이 고인 좁은 홈 위에 발판을 놓자 건너갈 자리가 생겼다.

유리엘이 먼저 발판 모서리를 구두로 눌렀다.

“이쪽이 뜬다.”

“바닥이 고르지 않습니다. 방향을 바꾸겠습니다.”

에런이 발판을 돌렸다. 유리엘은 반대편을 눌러 본 뒤 발을 뗐다.

“이제 와.”

레티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조금 돌아가도 되는데요.”

“치마가 젖습니다.”

“신발도.”

한 사람씩 말했는데 대답할 틈은 없었다.

레티가 발판에 올라서자 에런이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을 만큼 높은 곳은 아니었다. 레티는 치마만 잡고 건너왔다.

“잘 건넜어요. 두 분 다 감사해요.”

‘물 한 줄 건너는데 사람 셋.’

공작은 말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내가 건널 때도 저렇게 해 주게.”

“각하께서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에런이 마른 길을 가리켰다. 공작이 그 길을 보더니 안경을 벗었다.

“저쪽이 있었군.”

유리엘은 공작에게 고삐를 건넸다. 말이 고개를 내리면서 가죽 끈이 왼손 장갑의 잠금쇠 밑으로 끼었다. 유리엘은 당기지 않고 손목을 돌려 끈을 풀었다.

레티가 한 걸음 물러나자 말이 바닥을 발굽으로 가볍게 긁었다.

“가만있어.”

유리엘이 말에게 짧게 말했다. 오른손으로 고삐를 받아 쥔 뒤 왼손 장갑을 벗었다. 눌려 있던 장갑 손목을 펴고, 맨손으로 꼬인 가죽 끈을 바로잡았다.

레티의 시선이 그 손에 멎었다.

왼손 약지에 가는 은빛 흉터가 있었다.

손가락 안쪽에서 옆으로 이어진 선이었다. 햇빛이 닿은 부분만 유난히 옅게 보였다. 고삐를 쥐자 손가락이 굽어 흉터의 끝이 가려졌다.

전생에는 없던 흉터였다.

혼인식 날 반지를 끼우면서도 보았다. 황태자궁에서 장갑을 벗고 서류를 넘기던 손도 기억했다. 레티는 소매 안에서 제 손가락을 접었다.

“손에 뭐가 묻었습니까?”

에런의 물음에 레티가 고개를 들었다. 에런은 유리엘이 아니라 레티의 손을 보고 있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유리엘은 고삐를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레티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손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전하, 손가락을 다치셨어요?”

“오래된 상처다.”

“말을 타셔도 괜찮으세요?”

“문제없어.”

유리엘은 장갑을 다시 끼었다. 은빛 선이 검은 가죽 안으로 사라졌다.

더 물을 까닭이 없었다. 레티가 알고 있는 손은 지금보다 아홉 해 더 나이 든 남편의 손이었다. 그 사이 흉터가 옅어졌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레티는 유리엘의 왼손을 한 번 더 보았다.

공작이 말에 올라앉았다.

“너도 다음에는 함께 타자꾸나. 요즘 방과 서재에만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요. 다음에요.”

“그래. 무리하지 말고.”

유리엘이 말에 오르자 외투 끝이 안장 옆으로 내려앉았다. 장갑을 낀 왼손이 고삐를 짧게 잡았다.

“바람이 차다. 외투 챙겨.”

“챙겼습니다.”

에런이 현관 쪽을 가리켰다. 노라가 접은 외투를 팔에 걸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 실어 두겠습니다.”

“입히고 나가.”

“아가씨께 여쭤보겠습니다.”

레티는 두 사람 사이에서 고개를 들었다.

“추우면 제가 입을게요.”

공작이 말을 돌렸다. 유리엘도 더 말하지 않고 뒤를 따랐다. 두 말이 정문 쪽으로 멀어진 뒤에도 레티는 한동안 장갑이 덮인 손가락을 떠올렸다.

▽

브람은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도착했다.

붉은 머리가 이마에 붙어 있었고, 한 손에는 몇 번이나 접었다 편 종이가 들려 있었다. 에런에게 인사하던 브람이 레티를 보고 급히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브람입니다.”

“증인을 맡아 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에런이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이런 일일 줄은…….”

에런이 브람을 보았다.

“미리 말했잖아.”

“말은 들었지. 그런데 오는 동안 생각해 보니까 신전에서 하는 일이잖아.”

브람은 손에 든 종이를 펼쳤다.

“이름도 읽어야 하고.”

“본인 이름이야.”

“알아.”

노라가 마차 안에서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다물었다. 레티는 먼저 올라가 안쪽 자리에 앉았다. 에런과 브람이 맞은편에 앉자 노라가 문 옆에 외투를 반듯하게 놓았다.

마차가 출발한 뒤에도 브람은 종이를 내려놓지 않았다.

“연습해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레티가 대답하자 브람은 등을 곧게 폈다.

“저, 에런 브리그는 두 분의 서약을…….”

에런이 종이 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건 내가 적어 준 예시야. 네 이름으로 바꿔.”

“그러네.”

브람이 종이를 접어 예시의 윗부분을 가렸다.

“제 이름은 브람입니다.”

“그건 방금 들었어.”

“확실히 해 두는 거야.”

이번에는 노라가 창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어깨가 조금 움직였다.

레티도 손수건을 무릎에 펴며 웃었다.

“신전에서 종이를 보고 읽어도 되는지 여쭤볼게요.”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브람은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종이 모서리가 너무 구겨져 있어서 노라가 빈 수첩 한 장을 뜯어 내밀었다.

“여기다 본인 말씀만 옮겨 적으세요. 다른 이름은 빼고요.”

“고맙습니다.”

“신전 도착하면 펜을 빌려 드릴게요.”

브람은 종이를 받아 무릎 위에 올렸다. 에런은 접힌 예시를 가져다가 제 주머니에 넣었다.

레티는 마차 창문을 조금 열었다. 시장을 지나자 빵 굽는 냄새 대신 젖은 돌과 풀 냄새가 들어왔다.

“에런 경.”

“네, 아가씨.”

“오늘은 날짜를 잡기 전에 절차부터 다 들어 볼 거예요.”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경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꼭 물어보세요.”

에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도 바꾸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레티는 무릎 위 손수건의 끝을 맞췄다.

“네. 그렇게 할게요.”

▽

새벽의 신전 앞 계단에는 꽃잎 몇 장이 떨어져 있었다.

노라가 치마를 들고 올라가다가 브람의 소매를 가볍게 잡았다. 브람이 종이를 보고 걷느라 계단 끝을 밟을 뻔했다.

“도착했으니까 이제 보셔도 돼요.”

“네. 감사합니다.”

브람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레티는 문 앞에서 머리핀을 한 번 눌러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 안은 바깥보다 서늘했다. 높은 창으로 들어온 빛이 긴 의자 끝에 닿아 있었다. 레티가 벽에 붙은 혼인 안내문을 읽는 동안 에런이 접수대에 방문 목적을 전했다.

얼마 뒤 오르반 대사제가 직접 나왔다.

흰 수염 아래로 시선이 내려왔다. 오르반은 레티를 보고, 에런을 보고, 뒤에 선 노라와 브람까지 차례로 살폈다.

“서약 날짜를 정하러 왔다고 들었습니다.”

“네. 필요한 절차도 여쭤보려고요.”

레티가 대답했다. 오르반의 시선이 다시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인사를 덧붙여야 하나 싶을 만큼 오래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안쪽 작은 방에는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노라는 브람에게 펜을 빌려준 뒤 문 옆에 섰다. 브람은 종이를 벽에 대고 이름부터 또박또박 적었다.

오르반이 레티와 에런의 이름을 받아 적었다.

“서약은 해가 뜰 때 합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뜻으로 서야 하고, 증인 두 명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증인은 이 두 분이에요.”

노라와 브람이 나란히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신분을 확인할 서류는 당일에도 가져오세요.”

레티는 필요한 서류를 종이에 적었다. 에런이 옆에서 장부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서약문은 미리 읽어 볼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오르반이 얇은 종이 두 장을 꺼내 주었다. 에런은 먼저 읽고 레티가 보기 편하게 종이를 돌렸다.

서로의 뜻을 묻는 문장이 첫 줄에 있었다. 레티는 그 줄에서 잠깐 멈췄다. 에런이 기다리자 끝까지 읽고 종이를 내려놓았다.

“서약이 맺어졌다는 것은 무엇으로 확인하나요?”

“장부에 남고, 두 사람의 왼손 약지에 옅은 금빛 줄이 생깁니다. 한 달쯤 지나면 사라집니다.”

레티는 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침에 본 은빛 흉터가 떠올랐다. 금빛 줄과는 달랐다. 유리엘은 그것을 오래된 상처라고 했다.

“궁금한 것이 더 있습니까?”

레티는 손을 탁자 아래로 내렸다.

“황실에서 혼담이 와도 이미 맺은 신전 서약은 인정받는다고 읽었어요.”

오르반은 펜을 내려놓았다.

“서약을 알리고 혼담을 거두는 것이 관례입니다. 다만 이미 내려진 황실 명령이 있다면 확인해야 합니다.”

“아직 그런 명령은 없어요.”

“그렇다면 두 분의 뜻을 먼저 확인하면 되겠지요.”

오르반이 에런을 보았다. 에런은 서약문에서 손을 떼고 똑바로 대답했다.

“제 뜻으로 하겠습니다.”

레티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장부가 두 사람 쪽으로 조금 당겨졌다. 레티는 빈 날짜 칸에 눈을 두었다.

“봄 셋째 달 10일로 정하고 싶어요.”

오르반의 펜이 장부 위에서 멈췄다.

“다른 날은 어렵습니까?”

“그날이면 좋겠어요.”

레티는 생일이라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종이 가장자리를 누른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오르반이 날짜를 적었다. 노라는 수첩을 펼쳤고, 브람은 새로 적은 제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대사제가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장부를 덮었다.

“봄 셋째 달 10일, 해 뜰 때 오세요.”

(6화 끝)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80화. 우리 집에는 남편이 하나 있습니다

    레티는 남은 차를 천천히 마셨다. 잔 바닥에 볶은 보리 한 조각이 가라앉아 있었다.내일 아침에는 이것을 치울 시간이 없을 터였다. 레티는 잔을 씻어 받침 위에 엎어 두고, 북부로 보낼 답장을 봉투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등불을 끄기 전 예복 덮개를 살짝 들었다.흰 소매 끝에 작은 단추들이 가지런했다.레티는 손가락으로 단추 하나를 만진 뒤 덮개를 내렸다.▽“아가씨, 손을 조금만 더 내려 주세요.”레티는 거울 앞에서 손을 내렸다. 노라가 마지막 단추를 잠갔다. 새벽빛은 아직 창 아래까지 닿지 않았다.“너도 오늘은 손이 느리네.”“단추를 잘못 잠그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요.”“벌써 다섯 번은 확인한 것 같은데.”“여섯 번입니다.”노라는 대답하고도 소매 끝을 한 번 더 살폈다.‘이러다 생일이 끝나겠네.’레티가 웃자 노라도 입가를 풀었다. 탁자 위의 작은 여행 가방을 들기 전에 노라가 거울 속 레티와 눈을 맞췄다.“생일 축하드립니다, 아가씨.”“고마워.”“결혼도요.”“그건 조금 뒤에 다시 해 줘.”“두 번 해 드릴 수 있습니다.”노라가 방문을 열었다.복도에는 공작이 서 있었다. 안경을 벗었다 쓰던 손이 멈췄다. 레티가 다가가자 공작은 소매를 펴고 팔을 내밀었다.“불편한 곳은 없느냐?”“없어요.”“신발은?”“어제도 신어 봤잖아요.”“오늘은 오래 서 있어야 하니.”레티는 공작의 팔에 손을 올렸다. 단단히 굳어 있던 팔이 조금 내려갔다.계단 아래에서는 노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지 상자를 두 손으로 받친 채였다. 레티를 보자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왜?”“계단부터 내려오세요.”“말하면 내가 넘어질까 봐?”“그럴 수도 있잖아요.”노엘은 레티가 마지막 계단을 밟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누나, 생일 축하해.”“고마워.”“그리고 오늘은 상자 확인 안 해도 돼. 집사님하고 벌써 했어.”그레고리가 문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안에 반지도 있습니다.”“그것까지 말하시면 어떡해요.”노엘이 상자를 조금 몸 쪽으

  •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79화. 이번 차는 내가 골랐어요

    “그건 벌써 주방에 말해 뒀어.”유리엘이 레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대답했다.“제가 받아 드리기 전부터요?”“네 식사니까.”레티는 반지가 끼워진 손을 조금 들었다. 창가의 불빛 아래에서 작은 돌이 반짝였다. 유리엘은 손가락이 불편하지 않은지 살피다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너무 꼭 맞나?”“아니요. 잘 맞아요.”“불편하면 고치면 돼.”“차부터 고쳐 드릴게요. 아주 식었어요.”레티가 빈 잔을 가져오자 유리엘이 주전자를 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레티가 손을 받치지 않았다. 차가 두 잔에 고르게 나뉘어 담겼다.“이제 혼자 하시네요.”“옆에서 보고 있잖아.”레티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유리엘도 잔을 들었다. 탁자 가운데의 빈 반지 상자는 닫지 않은 채 두었다.밖에서 마차 바퀴가 멎는 소리가 났다.레티는 남은 차를 마시고 일어났다. 유리엘이 먼저 의자를 밀어 주었다.“날짜도 정해야겠군.”“제 생일에 하고 싶어요.”유리엘의 손이 의자 등받이에 머물렀다.“같은 날에?”“네. 이번에는 제가 정한 일로 바쁘고 싶어요.”유리엘은 열린 반지 상자를 닫았다.“그럼 그렇게 하자.”▽봄 둘째 달에 들어서자 공작저 서재의 큰 탁자가 다시 서류로 덮였다.이번에는 한 지붕 법 조문이 아니었다. 손님 명단과 신전에서 보낸 준비 목록, 천 견본을 붙인 종이가 나란히 놓였다.공작은 안경을 올리고 명단을 살폈다.“아침 예식이면 피로연은 점심에 해야겠구나. 노엘, 그 상자는 탁자에 내려놓아도 된다.”“괜찮아요.”노엘은 작은 반지 상자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그레고리가 점심 쟁반을 들여왔을 때도 상자는 무릎 위에 있었다. 노엘은 한 손으로 빵을 집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레티가 손을 내밀었다.“먹는 동안 누나가 맡아 줄까?”“제가 맡기로 했잖아요.”“지금은 연습용 상자야. 반지는 아직 안 넣었어.”“그러니까 지금 연습해야죠.”노엘은 상자를 옆구리에 끼우고 빵을 먹었다. 한쪽 팔꿈치가 지나치게 올라가 있었다.유리엘이 빵 접시를 조금

  •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78화. 이번엔 내 말로 할게

    유리엘이 외투 끈을 다시 묶어 주었다. 북쪽 길에서 불어온 바람에 풀린 매듭이었다.레티는 손을 내리고 매듭 끝을 잡았다.“너무 꽉 묶지는 마세요.”“바람이 들어온다.”“목까지 막으실 필요는 없어요.”유리엘의 손이 조금 내려갔다. 매듭이 느슨해지고, 접힌 옷깃이 펴졌다. 레티는 길의 굽은 곳을 한 번 더 본 뒤 마차 쪽으로 돌아섰다.마차 문을 연 유리엘이 손을 내밀었다.“빵은 잊지 않을게요.”“벌써 그 이야기인가.”“두 분이 성문까지 오는 동안 여러 번 말씀하셨잖아요.”“브리그 경은 옆에 두라고 했지.”“유리엘은요?”“먹는 것까지 확인한다고 했다.”레티가 내민 손을 잡았다.‘떠나도 승부는 남네.’마차에 오르자 유리엘이 외투 자락을 안으로 넣어 주었다. 문이 닫힌 뒤에도 레티는 무릎 위의 매듭을 잠깐 만졌다.▽봄 첫째 달 20일 오후, 봄날의 찻잔 창가에는 작은 빵 접시가 놓여 있었다.레티는 찻잎을 덜어 낸 뒤 그 접시를 곁눈질했다. 빵 위에 덮은 천의 모서리가 반듯했다. 접시 아래에는 유리엘이 접어 둔 쪽지가 있었다.「식기 전에 먹어.」빵은 이미 식었다.“찻잎 봉지를 묶는 동안 먹으려고 했어요.”맞은편에 앉은 유리엘이 접시를 보았다.“그 봉지는 다 묶었잖아.”“다음 봉지가 있었죠.”“지금은?”레티는 손에 든 빈 봉지를 내려놓았다.“지금은 먹을게요.”유리엘이 덮개를 걷었다. 레티는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에런 경은 잘 보이는 데 놓아 달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제 손앞까지 밀어 달라고는 안 하셨는데요.”“눈앞에 있어도 안 먹으니.”“확인하겠다고 하신 건 기억해요.”“약속은 지켜야지.”레티가 한입 먹자 유리엘은 그제야 접시에서 손을 뗐다. 빵 부스러기가 새 앞치마에 떨어졌다. 레티는 손바닥으로 털어 작은 쓰레기통에 넣었다.다시 단 앞치마 걸이는 허리 높이에 있었다. 예전에는 문 옆에 높이 달려 있어 매번 까치발을 들었다. 새 걸이는 레티가 직접 자리를 정했다.작은 선반도, 찻잔을 말리는 받침도 그랬

  •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77화. 건강하세요, 아가씨

    종소리가 잦아들자 오르반이 칙서 위에 손을 얹었다.“말씀하신 이름대로 기록하겠습니다.”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이 탁자 옆으로 다가왔고, 에런은 노엘이 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노엘은 아버지가 쥐여 준 손수건을 접지도 않은 채 들고 있었다.“형님, 내일 아침에는 있어요?”“있습니다.”“같이 먹어요?”“도련님께서 늦잠을 주무시지만 않으면요.”“안 잘 거예요.”에런이 노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레티는 두 사람이 나란히 신전 문을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에런의 보폭은 평소보다 짧았다.오르반이 서약 기록을 따로 거두었다.“내일은 작은 기도실로 오시면 됩니다. 두 분 손을 확인하고 서약을 거둘 겁니다.”“손을요?”레티가 왼손을 들었다.“없어진 줄이 잠깐 보일 수도 있습니다.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에런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따로 준비할 것이 있습니까?”“맨손으로 오시면 됩니다.”레티는 약지를 엄지로 한번 문질렀다. 유리엘이 곁에서 기다렸다. 내밀지는 않은 손이 레티의 손 가까이에 있었다.밖으로 나서자 마고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내가 더 떨었네.”“계속 숨 안 쉬고 있었지?”“중간에 쉬었어. 네가 알려 줬을 때.”노라가 잉크병 뚜껑을 꼭 닫았다. 아버지는 가방을 들었고, 노엘은 에런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레티도 그 뒤를 따라갔다. 내일 올 때는 사람이 적을 터였다. 꽃이 걸린 신전 문을 한 번 돌아본 뒤 마차에 올랐다.▽다음 날 아침, 노엘은 식당에 가장 먼저 와 있었다.머리 뒤쪽이 눌려 있었고 소매 한쪽이 접혀 있었다. 그래도 자리에 앉아 빵이 담긴 바구니를 지키고 있었다.“늦잠 안 잤어요.”에런이 들어오자 노엘이 바로 말했다.“확인했습니다.”“빵도 남겨 뒀어요.”“감사합니다.”레티가 자리에 앉자 에런이 오른쪽 의자를 당겼다. 유리엘은 왼쪽에 앉았다. 그레고리가 놓은 잔과 접시는 어제와 수가 다르지 않았다.레티는 빵을 집다가 에런 앞에 놓인 작은 접시를 보았다. 노엘이 골라 놓은 듯

  •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76화. 유리엘 에이브론

    레티가 잔을 비우자 에런이 빈 잔을 받침 가운데로 옮겼다. 유리엘은 찻주전자 손잡이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더 마실 거야?”“아니요. 오늘은 이만 마실래요.”아버지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 아래에 밀어 둔 서류 가방을 챙기려다 레티와 눈이 마주쳤다.“내일 가져갈 것만 넣어 두마.”“법전은 제 방에 있어요.”“알고 있다.”“몰래 가져가시면 알아요.”“그레고리에게 부탁하지도 않았다.”아직이라는 말은 붙지 않았다. 레티는 아버지의 가방을 한 번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유리엘이 의자를 잡았다. 에런은 식탁 위에 놓인 레티의 얇은 숄을 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둘이 한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내일 아침에 뵐게요.”“푹 주무십시오, 아가씨.”“늦게까지 일지 읽지 말고.”레티는 유리엘을 보았다.“노라가 이야기했어요?”“네 방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앞으로도 가끔 날 거예요.”“그래.”유리엘이 의자를 식탁 안으로 밀었다. 레티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식당을 나왔다.계단 끝에서 돌아보자 그레고리가 오른쪽 빈자리에 놓인 의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인데도 다른 의자와 똑같이 반듯하게 맞췄다.▽다음 날 아침, 노라는 레티의 소매 끝을 펴고 단추를 다시 확인했다.밝은 회색 드레스는 앉아도 무릎께가 많이 구겨지지 않는 옷이었다. 레티가 직접 골랐다. 노라가 꺼낸 진주 목걸이는 화장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정말 안 하실 거예요?”“목이 좀 답답할 것 같아.”“그럼 이 핀만 꽂을게요.”노라가 머리 옆에 작은 핀을 꽂았다. 거울 속에서 밤색 머리카락 한 가닥이 다시 빠져나왔다. 노라는 손끝에 물을 조금 묻혀 눌러 주었다.“너도 앉을 자리 있지?”“신전에서 하인들 자리도 마련해 주신대요.”“기록하느라 계속 서 있지는 말고.”노라가 앞치마 대신 입은 단정한 옷의 주머니를 눌렀다. 작은 수첩 모서리가 보였다.“앉아서도 적을 수 있어요.”“오늘은 많이 적을 필요 없어.”“이름은 틀리면 안 되잖아요.”

  •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75화. 일지는 다 모아 두었어요

    “오늘만이라는 말, 유리엘한테도 하신 거예요?”에런이 동쪽 별채 창을 다시 보았다.“들리지는 않으셨을 겁니다.”“그럼 제가 전할까요?”“내일 아침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레티는 장갑을 벗어 가방 위에 얹었다. 에런이 현관 문을 열어 주었다. 목도리는 아직 목에 느슨하게 둘려 있었다.“그런데 내일도 문을 먼저 열어 주시려고요?”“아침 식탁 의자는 먼저 빼 드릴 수 있습니다.”“퇴근길만 양보하신 거군요.”“오늘만이라고 했습니다.”레티는 웃으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 에런이 느릅관 쪽으로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동쪽 창의 불도 아직 켜져 있었다.▽봄 첫째 달 14일 오후, 아버지의 서재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레티가 문틈으로 들여다보자 에드윈 공작이 안경을 벗었다. 책상 위에는 낡은 법전과 얇은 서류철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서류철 모서리에 붙인 종이가 유난히 많았다.“들어오너라. 의자는 치웠다.”“왜 치우셨어요?”“아니, 의자에 있던 책을 치웠다는 말이다.”레티는 책상 앞 의자를 보았다. 앉을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대신 옆의 작은 탁자 위에 책이 높이 쌓여 있었다.‘옮긴 걸 치웠다고 하시는구나.’레티가 앉자 아버지는 법전을 밀어 주었다. 펼쳐진 곳의 종이는 다른 쪽보다 더 닳아 있었다.“이걸 또 읽고 계셨어요?”“마지막으로 확인했다.”“지난번에도 마지막이라고 하셨는데요.”“그때는 서약 해제에 관한 조항을 확인한 거고.”아버지는 헛기침을 했다. 레티는 책에 붙은 종이 하나를 들춰 보았다. 아버지의 글씨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딸이 직접 말할 것.」그 아래에는 그 말에 밑줄이 두 번 그어져 있었다.“이건 외우셨겠어요.”“첫날부터 외웠다.”“그런데 왜 계속 보세요?”아버지는 안경을 다시 썼다. 법전의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눌렀지만, 페이지는 자꾸 조금씩 들렸다.“혹시 다른 조항이 이 말을 막고 있을까 봐.”레티는 붙임 종이를 놓았다.아버지는 서류철을 열었다. 황실 문양이 찍힌 사본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