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에런의 손이 무릎 위에서 떨어졌다.
마차가 멈추며 차체가 조금 기울었다. 에런은 좌석 옆을 짚었지만, 문이 열린 뒤에도 바로 내리지 않았다.
“방금…….”
“결혼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쭤봤어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네. 잘못 말씀드린 건 아니에요.”
문밖에서 하인이 발판을 내렸다. 에런은 레티를 보다가 열린 문을 보았다.
“우선 내리시죠. 자세한 말씀은…….”
먼저 마차에서 내려 손을 내밀려던 에런의 발이 계단 끝을 빗나갔다. 구두 밑창이 발판 모서리를 스쳤다. 에런은 문틀을 붙들고 몸을 바로 세웠다.
레티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발을 접질리신 건 아니죠?”
“네. 멀쩡합니다.”
에런은 바닥에 두 발을 놓은 뒤에야 레티를 올려다보았다. 오른쪽 눈썹 위로 앞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내려오십시오. 이번에는 제대로 서 있습니다.”
레티는 문 옆 손잡이를 잡고 내려왔다. 에런이 드레스 자락이 발판에 걸리지 않도록 옆으로 비켜 주었다.
현관에서 노라가 달려 나왔다.
“아가씨, 저녁은 드셨어요? 공작님께서 늦으신다고 전갈을 보내셨어요.”
“다과를 먹었어. 물만 가져다줘.”
“외투는요?”
레티가 외투 단추를 풀자 노라가 받아 들었다. 에런은 그동안 발판을 접는 하인을 도왔다. 평소라면 그대로 인사하고 돌아갔을 사람이 현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레티는 노라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오늘 바로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가씨.”
“사정이 있어요. 그것부터 말씀드려야 하는데 순서가 바뀌었네요.”
에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현관 불빛 아래에서 제복 소매를 한 번 펴고 나서 물었다.
“내일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오전에 정원에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레티는 계단을 한 칸 올랐다가 돌아보았다.
“돌아가실 때 계단 조심하세요.”
에런이 문틀에서 손을 떼었다.
“그건 잊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결혼보다 계단이 더 급한가 봐.’
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다물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
노라가 가져온 물은 밤사이 반도 줄지 않았다.
레티는 아침에 잔을 비우고 책상 앞에 앉았다. 종이 맨 위에 에런의 이름을 적었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부탁할 말을 정리하려 했는데, 이름 아래로 줄을 그을 수가 없었다. 기간과 조건만 적으면 상점에 물건을 주문하는 종이가 될 판이었다.
“아가씨, 오늘도 이 드레스로 드릴까요?”
노라가 옅은 초록색 드레스를 들었다. 어제 입은 옷은 의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응. 정원에 나갈 거야.”
“에런 경이 벌써 오셨어요.”
레티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벌써?”
“기사대장님을 뵙고 계세요. 아가씨께 서두르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 달라셨어요.”
레티는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다시 펼쳐 이름이 안쪽으로 들어가게 접고 서랍에 넣었다.
“노라, 정원에 차를 내줘. 오늘은 향이 진하지 않은 걸로.”
“과자도요?”
“조금만.”
노라가 옷을 침대 위에 놓으며 창밖을 보았다.
“조금이 어느 정도인지 도련님께는 비밀로 해야겠네요.”
잔디길을 가로질러 뛰는 노엘이 보였다. 손에는 나무 검이 들려 있었다.
레티는 서랍을 닫았다.
‘이미 늦었네.’
▽
장미 덤불에는 아직 꽃보다 잎이 많았다.
레티가 정원 탁자에 도착했을 때 에런은 노엘의 나무 검을 살펴보고 있었다. 검 끝에 묻은 흙을 손수건으로 닦은 뒤 노엘에게 돌려주었다.
“누나!”
노엘이 검을 등 뒤로 숨겼다.
“왜 숨겨? 다 봤는데.”
“숨긴 거 아니야. 뒤로 잡는 연습이야.”
“앞으로 잡는 것부터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에런의 말에 노엘이 얼른 검을 앞으로 가져왔다.
레티는 의자에 앉았다. 노라가 찻잔을 놓고 물러나자 에런도 맞은편에 앉았다. 노엘은 에런 옆에 붙어 섰다.
“경께 검을 가르쳐 달라고 말씀드렸어.”
“그래서?”
“누나한테 먼저 허락을 받으래.”
레티가 에런을 보았다.
“기사대장께 배우고 있지 않나요?”
“네. 그 수업을 빼먹지 않는 날에만 함께 연습하자고 했습니다. 다만 시간을 정하려면 아가씨 허락부터 받아야 합니다.”
“그런 거면 아버지께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노엘이 빠르게 끼어들었다.
“아버지는 누나가 좋다면 좋대.”
“언제 여쭤봤어?”
“아침 먹을 때. 안경 닦으시면서 그러셨어.”
레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기사대장님 수업은 제대로 받고?”
“받고.”
“다친 데가 있으면 숨기지 않고?”
“안 숨기고.”
“연습한다고 식사 빼먹지 않고?”
노엘이 과자 접시를 보았다.
“그건 안 해.”
가장 믿을 만한 대답이었다.
“그럼 좋아. 에런 경 시간이 되실 때만이야. 조르지는 말고.”
노엘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최고 누나!”
“검 들고 뛰지는 마.”
“최고 누나 말도 잘 들을게!”
노엘은 정말로 뛰지 않았다. 대신 발걸음을 우스울 만큼 크게 벌려 연습장 쪽으로 걸어갔다. 에런이 탁자에 놓인 과자 하나를 종이에 싸 주자 두 손으로 받았다.
“검은 한 손으로 잡아야 해.”
레티가 말하자 노엘은 과자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따 먹을 거야.”
동생이 멀어지고 나서 레티는 제 앞의 과자를 에런 쪽으로 밀었다.
“결국 하나도 못 드셨네요.”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만 하시면 노엘이 다음에는 접시째 가져가요.”
에런은 과자 하나를 집었다. 레티는 그제야 찻잔 손잡이를 잡았다.
“어제 말씀드린 건요.”
에런이 과자를 작은 접시에 내려놓았다.
“듣고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와 혼인하고 싶지 않아서 드린 부탁이에요.”
잎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탁자 한쪽에 놓인 냅킨이 들썩이자 에런이 접시로 끝을 눌렀다.
“혼담이 오갔습니까?”
“아직 아버지께 정식으로 들은 건 없어요. 하지만 곧 정해질 것 같아요.”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까?”
“제 생일을 비워 두라고 하셨어요.”
그 말만으로 결혼을 확신하는 것은 무리였다. 레티는 잔을 돌려 손잡이가 몸 쪽을 향하게 놓았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요. 설명이 모자란 건 알아요.”
에런은 재촉하지 않았다.
“황궁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네. 제 하루를 제가 정하면서 살고 싶어요.”
레티는 탁자 아래에서 드레스 주름을 폈다. 황태자궁에서는 아침에 입을 옷도, 만날 사람도, 찻잔을 내려놓을 때도 정해져 있었다.
그 말을 모두 꺼낼 수는 없었다.
“차를 배우고 싶어요. 나중에는 직접 섞어서 팔아 보고 싶고요.”
“가게를 여실 생각이십니까?”
“작은 가게요. 제가 고른 잔에 제가 만든 차를 내는 곳.”
에런은 레티의 찻잔을 보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왜 저입니까?”
레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오래 알았기 때문에. 부탁을 들어줄 것 같아서. 거절해도 남에게 퍼뜨리지는 않을 사람이라서.
어느 쪽도 에런에게 좋은 이유는 아니었다.
“경이 믿을 만한 분이라서요.”
“그것만으로 혼인을 정하셔도 되겠습니까?”
레티는 찻잔에서 손을 뗐다.
“경께는 안 되겠네요.”
에런의 눈이 레티에게 머물렀다.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황실 혼담을 피하려면 먼저 맺은 신전 서약이 있어야 한다고 읽었어요. 그래서 경께 이름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려던 거예요. 일 년만요.”
“일 년 뒤에는요?”
“서약을 풀 방법을 알아보려고요. 비용은 제가 맡고, 경이 곤란해지지 않도록 아버지께도 직접 말씀드릴게요.”
말을 하고 보니 종이에 적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렇게 입으로 해도 에런을 제 계획 속 자리에 끼워 넣는 부탁이었다.
레티는 의자에 기대지 않고 등을 곧게 폈다.
“하지만 경이 원하지 않으시면 다른 방법을 찾을게요.”
에런은 손수건을 꺼내 손끝에 묻은 흙을 닦았다. 노엘의 검을 닦으며 묻은 흙이었다. 깨끗해진 손수건을 접고도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레티는 차가 식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
정원 너머에서 나무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 이어지다가 누군가 자세를 고쳐 주는 말에 멎었다.
에런이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아가씨가 원하실 때 언제든 끝내셔도 됩니다.”
레티가 입을 열려 하자 에런이 말을 이었다.
“다만 신 앞에서 거짓으로는 서약 못 합니다. 진심으로 하겠습니다.”
레티는 에런의 얼굴을 보았다.
웃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목소리가 너무 차분해서, 어젯밤 계단에서 발을 헛디딘 사람이 같은 말을 하는 게 낯설었다.
“경은 이런 부탁에도 서약부터 걱정하시네요.”
“중요한 일이니까요.”
“제가 참 큰 부탁을 했어요.”
“알고 계시면 됐습니다.”
그제야 에런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레티도 작게 웃었다. 부담스러운 말을 기사답게 바꾸어 받아 준 셈이었다.
“그러면 함께 신전에 가 주실 건가요?”
“네.”
“날짜는 제 생일로 잡고 싶어요. 해 뜰 때 서약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날 새벽을 비워 두겠습니다.”
레티는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데 바닥이 받침 가운데를 조금 벗어났다.
에런이 손을 뻗다가 멈췄다. 레티가 직접 잔을 옮기기를 기다렸다.
▽
오후에는 황실 문장이 찍힌 방문 서류가 응접실 탁자에 놓였다.
공작은 서류를 읽다가 안경 너머로 레티를 보았다.
“전하께서 직접 오신다는구나.”
“언제요?”
“곧.”
“그걸 지금 알려 주시면 어떡해요.”
“나도 지금 받았다.”
공작은 서류를 뒤집어 보았다.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봄 다과회에 참석한 가문을 찾아 인사를 하신다는데.”
레티는 노라가 고쳐 준 소매 끝을 내려다보았다. 정원에서 묻은 작은 풀잎이 안쪽에 끼어 있었다. 손끝으로 떼어 내 탁자 옆 빈 접시에 놓았다.
‘인사는 어제도 했잖아.’
공작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불편한 일이 있으면 아버지에게 먼저 말하렴.”
“알겠어요.”
신전 서약부터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그레고리가 문을 열었다. 레티는 접시에서 손을 거두고 일어났다.
유리엘은 짙은 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문가에서 공작에게 인사한 뒤 레티 앞에 멈췄다.
“하르벨 영애.”
“어서 오세요, 전하.”
유리엘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장갑을 벗은 손이었다.
레티는 잠깐 공작 쪽을 보았다. 아버지는 안경을 벗어 천으로 닦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인사였다. 피하면 오히려 눈에 띌 일이었다.
레티는 오른손을 내주었다.
유리엘의 손가락이 손끝을 받쳤다. 허리를 숙인 유리엘의 입술이 손등에 짧게 닿았다.
레티는 소매 안에서 다른 손을 말아 쥐었다.
전생에도 처음에는 이런 인사가 있었다. 정해진 순서대로 손을 내밀고, 고개를 숙이고, 주변에서 흐뭇하게 보는 인사.
유리엘이 손을 놓자 레티는 팔을 천천히 내렸다.
“앉지.”
공작이 안쪽 의자를 가리켰다.
그때 열린 문으로 에런이 들어왔다. 노엘의 연습 시간을 공작에게 알리러 온 참이었다. 레티를 보고 멈추려던 에런에게 공작이 손짓했다.
“브리그 경도 들어오게. 노엘 이야기는 함께 들으면 되겠군.”
에런이 유리엘에게 먼저 인사했다.
“전하.”
“브리그 경.”
그레고리가 찻잔을 더 가지러 돌아섰다. 레티도 자리에 앉으려 했는데 의자 등받이에 두 손이 거의 동시에 닿았다.
한쪽에는 유리엘의 맨손이, 다른 쪽에는 에런의 손이 있었다.
레티는 의자 앞에서 멈췄다.
‘오늘은 의자인가.’
유리엘이 에런을 보았다.
“내가 하지.”
“문턱 쪽에 다리가 걸려 있습니다. 제가 옮기겠습니다.”
에런은 의자 아래를 가리켰다. 두꺼운 깔개 끝이 의자 다리 밑에 접혀 있었다.
유리엘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의자를 조금 들었다. 에런이 구두 끝으로 깔개를 펴고 뒤쪽을 맞췄다.
결국 두 사람이 함께 의자를 빼 주었다.
레티는 앉기 전에 드레스 자락부터 확인했다.
“감사해요. 이제 놓으셔도 돼요.”
두 손이 떨어졌다. 공작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사람들이 손발도 잘 맞는군.”
레티는 차라리 찻잔이 빨리 왔으면 했다. 마실 것이 없으니 표정을 가릴 수도 없었다.
▽
노엘의 수업은 공작이 허락했다. 에런은 기사단 근무가 없는 날에만 오겠다고 했고, 공작은 기사대장에게도 같은 내용을 전하겠다고 했다.
유리엘은 그 대화를 듣다가 레티 쪽으로 잔을 밀었다.
“식겠다.”
“감사합니다.”
잔은 손잡이가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다. 레티가 집기 좋게 놓여 있었다.
에런이 과자 접시를 가까이 옮겼다.
“오전에도 차만 드셨습니다.”
“과자도 먹었어요.”
“반쪽을 드셨습니다.”
유리엘의 손이 접시 쪽으로 갔다. 에런이 이미 접시를 놓은 뒤라, 손은 탁자 위에서 잠깐 멈췄다가 돌아왔다.
레티는 작은 과자를 하나 집었다.
“이제 하나를 다 먹을게요.”
공작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얼굴로 노엘의 검 수업에 쓸 장갑을 물었다. 에런이 크기가 맞는 것을 골라 주겠다고 답했다.
레티는 과자를 천천히 씹었다. 두 사람은 더 권하지 않았다. 대신 빈 접시가 생기자 유리엘이 먼저 옆으로 치웠고, 에런은 레티의 소매에 닿을 뻔한 냅킨을 접었다.
‘손이 모자랄 일은 없겠네.’
인사가 끝나자 공작은 서재에서 가져올 서류가 있다며 먼저 나갔다. 에런은 노엘에게 수업 시간을 알려 주러 뒤뜰로 향했다.
레티는 유리엘을 현관까지 배웅했다.
바깥에는 황실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웨스가 발판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전하.”
유리엘은 대답하지 않고 외투 안쪽에서 오른손 장갑을 꺼냈다. 손가락을 하나씩 밀어 넣는 동안 레티는 현관 난간에 얹은 손을 거두었다.
내일은 신전 방문을 준비해야 했다. 아버지에게 말할 순서도 정해야 했다. 황태자가 돌아서기만 하면 방으로 가서 종이에 다시 적을 생각이었다.
유리엘이 장갑 손목을 당겨 맞추었다.
“어제 기사와 마차를 탔다더군.”
(5화 끝)
레티는 남은 차를 천천히 마셨다. 잔 바닥에 볶은 보리 한 조각이 가라앉아 있었다.내일 아침에는 이것을 치울 시간이 없을 터였다. 레티는 잔을 씻어 받침 위에 엎어 두고, 북부로 보낼 답장을 봉투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등불을 끄기 전 예복 덮개를 살짝 들었다.흰 소매 끝에 작은 단추들이 가지런했다.레티는 손가락으로 단추 하나를 만진 뒤 덮개를 내렸다.▽“아가씨, 손을 조금만 더 내려 주세요.”레티는 거울 앞에서 손을 내렸다. 노라가 마지막 단추를 잠갔다. 새벽빛은 아직 창 아래까지 닿지 않았다.“너도 오늘은 손이 느리네.”“단추를 잘못 잠그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요.”“벌써 다섯 번은 확인한 것 같은데.”“여섯 번입니다.”노라는 대답하고도 소매 끝을 한 번 더 살폈다.‘이러다 생일이 끝나겠네.’레티가 웃자 노라도 입가를 풀었다. 탁자 위의 작은 여행 가방을 들기 전에 노라가 거울 속 레티와 눈을 맞췄다.“생일 축하드립니다, 아가씨.”“고마워.”“결혼도요.”“그건 조금 뒤에 다시 해 줘.”“두 번 해 드릴 수 있습니다.”노라가 방문을 열었다.복도에는 공작이 서 있었다. 안경을 벗었다 쓰던 손이 멈췄다. 레티가 다가가자 공작은 소매를 펴고 팔을 내밀었다.“불편한 곳은 없느냐?”“없어요.”“신발은?”“어제도 신어 봤잖아요.”“오늘은 오래 서 있어야 하니.”레티는 공작의 팔에 손을 올렸다. 단단히 굳어 있던 팔이 조금 내려갔다.계단 아래에서는 노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지 상자를 두 손으로 받친 채였다. 레티를 보자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왜?”“계단부터 내려오세요.”“말하면 내가 넘어질까 봐?”“그럴 수도 있잖아요.”노엘은 레티가 마지막 계단을 밟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누나, 생일 축하해.”“고마워.”“그리고 오늘은 상자 확인 안 해도 돼. 집사님하고 벌써 했어.”그레고리가 문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안에 반지도 있습니다.”“그것까지 말하시면 어떡해요.”노엘이 상자를 조금 몸 쪽으
“그건 벌써 주방에 말해 뒀어.”유리엘이 레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대답했다.“제가 받아 드리기 전부터요?”“네 식사니까.”레티는 반지가 끼워진 손을 조금 들었다. 창가의 불빛 아래에서 작은 돌이 반짝였다. 유리엘은 손가락이 불편하지 않은지 살피다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너무 꼭 맞나?”“아니요. 잘 맞아요.”“불편하면 고치면 돼.”“차부터 고쳐 드릴게요. 아주 식었어요.”레티가 빈 잔을 가져오자 유리엘이 주전자를 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레티가 손을 받치지 않았다. 차가 두 잔에 고르게 나뉘어 담겼다.“이제 혼자 하시네요.”“옆에서 보고 있잖아.”레티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유리엘도 잔을 들었다. 탁자 가운데의 빈 반지 상자는 닫지 않은 채 두었다.밖에서 마차 바퀴가 멎는 소리가 났다.레티는 남은 차를 마시고 일어났다. 유리엘이 먼저 의자를 밀어 주었다.“날짜도 정해야겠군.”“제 생일에 하고 싶어요.”유리엘의 손이 의자 등받이에 머물렀다.“같은 날에?”“네. 이번에는 제가 정한 일로 바쁘고 싶어요.”유리엘은 열린 반지 상자를 닫았다.“그럼 그렇게 하자.”▽봄 둘째 달에 들어서자 공작저 서재의 큰 탁자가 다시 서류로 덮였다.이번에는 한 지붕 법 조문이 아니었다. 손님 명단과 신전에서 보낸 준비 목록, 천 견본을 붙인 종이가 나란히 놓였다.공작은 안경을 올리고 명단을 살폈다.“아침 예식이면 피로연은 점심에 해야겠구나. 노엘, 그 상자는 탁자에 내려놓아도 된다.”“괜찮아요.”노엘은 작은 반지 상자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그레고리가 점심 쟁반을 들여왔을 때도 상자는 무릎 위에 있었다. 노엘은 한 손으로 빵을 집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레티가 손을 내밀었다.“먹는 동안 누나가 맡아 줄까?”“제가 맡기로 했잖아요.”“지금은 연습용 상자야. 반지는 아직 안 넣었어.”“그러니까 지금 연습해야죠.”노엘은 상자를 옆구리에 끼우고 빵을 먹었다. 한쪽 팔꿈치가 지나치게 올라가 있었다.유리엘이 빵 접시를 조금
유리엘이 외투 끈을 다시 묶어 주었다. 북쪽 길에서 불어온 바람에 풀린 매듭이었다.레티는 손을 내리고 매듭 끝을 잡았다.“너무 꽉 묶지는 마세요.”“바람이 들어온다.”“목까지 막으실 필요는 없어요.”유리엘의 손이 조금 내려갔다. 매듭이 느슨해지고, 접힌 옷깃이 펴졌다. 레티는 길의 굽은 곳을 한 번 더 본 뒤 마차 쪽으로 돌아섰다.마차 문을 연 유리엘이 손을 내밀었다.“빵은 잊지 않을게요.”“벌써 그 이야기인가.”“두 분이 성문까지 오는 동안 여러 번 말씀하셨잖아요.”“브리그 경은 옆에 두라고 했지.”“유리엘은요?”“먹는 것까지 확인한다고 했다.”레티가 내민 손을 잡았다.‘떠나도 승부는 남네.’마차에 오르자 유리엘이 외투 자락을 안으로 넣어 주었다. 문이 닫힌 뒤에도 레티는 무릎 위의 매듭을 잠깐 만졌다.▽봄 첫째 달 20일 오후, 봄날의 찻잔 창가에는 작은 빵 접시가 놓여 있었다.레티는 찻잎을 덜어 낸 뒤 그 접시를 곁눈질했다. 빵 위에 덮은 천의 모서리가 반듯했다. 접시 아래에는 유리엘이 접어 둔 쪽지가 있었다.「식기 전에 먹어.」빵은 이미 식었다.“찻잎 봉지를 묶는 동안 먹으려고 했어요.”맞은편에 앉은 유리엘이 접시를 보았다.“그 봉지는 다 묶었잖아.”“다음 봉지가 있었죠.”“지금은?”레티는 손에 든 빈 봉지를 내려놓았다.“지금은 먹을게요.”유리엘이 덮개를 걷었다. 레티는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에런 경은 잘 보이는 데 놓아 달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제 손앞까지 밀어 달라고는 안 하셨는데요.”“눈앞에 있어도 안 먹으니.”“확인하겠다고 하신 건 기억해요.”“약속은 지켜야지.”레티가 한입 먹자 유리엘은 그제야 접시에서 손을 뗐다. 빵 부스러기가 새 앞치마에 떨어졌다. 레티는 손바닥으로 털어 작은 쓰레기통에 넣었다.다시 단 앞치마 걸이는 허리 높이에 있었다. 예전에는 문 옆에 높이 달려 있어 매번 까치발을 들었다. 새 걸이는 레티가 직접 자리를 정했다.작은 선반도, 찻잔을 말리는 받침도 그랬
종소리가 잦아들자 오르반이 칙서 위에 손을 얹었다.“말씀하신 이름대로 기록하겠습니다.”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이 탁자 옆으로 다가왔고, 에런은 노엘이 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노엘은 아버지가 쥐여 준 손수건을 접지도 않은 채 들고 있었다.“형님, 내일 아침에는 있어요?”“있습니다.”“같이 먹어요?”“도련님께서 늦잠을 주무시지만 않으면요.”“안 잘 거예요.”에런이 노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레티는 두 사람이 나란히 신전 문을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에런의 보폭은 평소보다 짧았다.오르반이 서약 기록을 따로 거두었다.“내일은 작은 기도실로 오시면 됩니다. 두 분 손을 확인하고 서약을 거둘 겁니다.”“손을요?”레티가 왼손을 들었다.“없어진 줄이 잠깐 보일 수도 있습니다.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에런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따로 준비할 것이 있습니까?”“맨손으로 오시면 됩니다.”레티는 약지를 엄지로 한번 문질렀다. 유리엘이 곁에서 기다렸다. 내밀지는 않은 손이 레티의 손 가까이에 있었다.밖으로 나서자 마고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내가 더 떨었네.”“계속 숨 안 쉬고 있었지?”“중간에 쉬었어. 네가 알려 줬을 때.”노라가 잉크병 뚜껑을 꼭 닫았다. 아버지는 가방을 들었고, 노엘은 에런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레티도 그 뒤를 따라갔다. 내일 올 때는 사람이 적을 터였다. 꽃이 걸린 신전 문을 한 번 돌아본 뒤 마차에 올랐다.▽다음 날 아침, 노엘은 식당에 가장 먼저 와 있었다.머리 뒤쪽이 눌려 있었고 소매 한쪽이 접혀 있었다. 그래도 자리에 앉아 빵이 담긴 바구니를 지키고 있었다.“늦잠 안 잤어요.”에런이 들어오자 노엘이 바로 말했다.“확인했습니다.”“빵도 남겨 뒀어요.”“감사합니다.”레티가 자리에 앉자 에런이 오른쪽 의자를 당겼다. 유리엘은 왼쪽에 앉았다. 그레고리가 놓은 잔과 접시는 어제와 수가 다르지 않았다.레티는 빵을 집다가 에런 앞에 놓인 작은 접시를 보았다. 노엘이 골라 놓은 듯
레티가 잔을 비우자 에런이 빈 잔을 받침 가운데로 옮겼다. 유리엘은 찻주전자 손잡이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더 마실 거야?”“아니요. 오늘은 이만 마실래요.”아버지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 아래에 밀어 둔 서류 가방을 챙기려다 레티와 눈이 마주쳤다.“내일 가져갈 것만 넣어 두마.”“법전은 제 방에 있어요.”“알고 있다.”“몰래 가져가시면 알아요.”“그레고리에게 부탁하지도 않았다.”아직이라는 말은 붙지 않았다. 레티는 아버지의 가방을 한 번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유리엘이 의자를 잡았다. 에런은 식탁 위에 놓인 레티의 얇은 숄을 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둘이 한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내일 아침에 뵐게요.”“푹 주무십시오, 아가씨.”“늦게까지 일지 읽지 말고.”레티는 유리엘을 보았다.“노라가 이야기했어요?”“네 방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앞으로도 가끔 날 거예요.”“그래.”유리엘이 의자를 식탁 안으로 밀었다. 레티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식당을 나왔다.계단 끝에서 돌아보자 그레고리가 오른쪽 빈자리에 놓인 의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인데도 다른 의자와 똑같이 반듯하게 맞췄다.▽다음 날 아침, 노라는 레티의 소매 끝을 펴고 단추를 다시 확인했다.밝은 회색 드레스는 앉아도 무릎께가 많이 구겨지지 않는 옷이었다. 레티가 직접 골랐다. 노라가 꺼낸 진주 목걸이는 화장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정말 안 하실 거예요?”“목이 좀 답답할 것 같아.”“그럼 이 핀만 꽂을게요.”노라가 머리 옆에 작은 핀을 꽂았다. 거울 속에서 밤색 머리카락 한 가닥이 다시 빠져나왔다. 노라는 손끝에 물을 조금 묻혀 눌러 주었다.“너도 앉을 자리 있지?”“신전에서 하인들 자리도 마련해 주신대요.”“기록하느라 계속 서 있지는 말고.”노라가 앞치마 대신 입은 단정한 옷의 주머니를 눌렀다. 작은 수첩 모서리가 보였다.“앉아서도 적을 수 있어요.”“오늘은 많이 적을 필요 없어.”“이름은 틀리면 안 되잖아요.”
“오늘만이라는 말, 유리엘한테도 하신 거예요?”에런이 동쪽 별채 창을 다시 보았다.“들리지는 않으셨을 겁니다.”“그럼 제가 전할까요?”“내일 아침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레티는 장갑을 벗어 가방 위에 얹었다. 에런이 현관 문을 열어 주었다. 목도리는 아직 목에 느슨하게 둘려 있었다.“그런데 내일도 문을 먼저 열어 주시려고요?”“아침 식탁 의자는 먼저 빼 드릴 수 있습니다.”“퇴근길만 양보하신 거군요.”“오늘만이라고 했습니다.”레티는 웃으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 에런이 느릅관 쪽으로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동쪽 창의 불도 아직 켜져 있었다.▽봄 첫째 달 14일 오후, 아버지의 서재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레티가 문틈으로 들여다보자 에드윈 공작이 안경을 벗었다. 책상 위에는 낡은 법전과 얇은 서류철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서류철 모서리에 붙인 종이가 유난히 많았다.“들어오너라. 의자는 치웠다.”“왜 치우셨어요?”“아니, 의자에 있던 책을 치웠다는 말이다.”레티는 책상 앞 의자를 보았다. 앉을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대신 옆의 작은 탁자 위에 책이 높이 쌓여 있었다.‘옮긴 걸 치웠다고 하시는구나.’레티가 앉자 아버지는 법전을 밀어 주었다. 펼쳐진 곳의 종이는 다른 쪽보다 더 닳아 있었다.“이걸 또 읽고 계셨어요?”“마지막으로 확인했다.”“지난번에도 마지막이라고 하셨는데요.”“그때는 서약 해제에 관한 조항을 확인한 거고.”아버지는 헛기침을 했다. 레티는 책에 붙은 종이 하나를 들춰 보았다. 아버지의 글씨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딸이 직접 말할 것.」그 아래에는 그 말에 밑줄이 두 번 그어져 있었다.“이건 외우셨겠어요.”“첫날부터 외웠다.”“그런데 왜 계속 보세요?”아버지는 안경을 다시 썼다. 법전의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눌렀지만, 페이지는 자꾸 조금씩 들렸다.“혹시 다른 조항이 이 말을 막고 있을까 봐.”레티는 붙임 종이를 놓았다.아버지는 서류철을 열었다. 황실 문양이 찍힌 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