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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작가: 잔물결
클럽 벨로아.

예겸이 룸에 들어서자마자 놀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쁜 애를 구해줬는데, 눈치 빠른 여자라면 몸으로라도 보답했을 텐데. 달콤한 밤을 보내지 않고 왜 여기까지 왔어?”

말을 건 사람은 진정민이었다. 벨로아의 대표이자 W시 JY그룹의 외아들로 개인 자산만 수조 원대였다.

와인 잔을 흔드는 다른 남자는 부승우였다. 세계 곳곳에 사업장을 둔 부동산 재벌로 정확한 자산 규모는 알려진 바 없었다.

승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이렇게 큰일을 벌여? 유혁까지 건드리고 뒤탈이 두렵지도 않아?”

예겸은 탁자 위 시가를 집어 향을 맡았다.

“내 뒤에 붙은 구린내가 한두 개야?”

정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진심이야?”

“여자 하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까지 한다고?”

“여자 하나라면 그럴 리 없지. 하지만 네가 직접 움직이게 만든 여자라면 얘기가 달라.”

정민은 궁금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신경 써?”

예겸은 커터로 시가 끝을 자르고 천천히 불을 붙였다.

“자기 발로 찾아온 애야.”

승우가 눈썹을 올리며 정민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예전에도 먼저 다가온 여자는 많았지만, 예겸이 이런 식으로 상대해 준 적은 없었다.

“둘 사이를 온 동네에 광고하는 걸 보니, 연나 대신 표적이 되어 줄 사람으로 남겨 두려는 거야?”

예겸은 얇은 입술 사이에 시가를 물었다. 한 모금 천천히 빨면서 불씨를 살리는 동작까지 우아하게 보였다.

연기가 입안에 머무른 시간은 짧았다.

곧바로 내뱉은 예겸은 시가를 든 채 나른한 눈길을 보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충분한 대답이었다.

정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

“내가 뭐랬어. 쟤한테는 역시 연나가 제일 중요하다니까.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줄 리가 없지.”

승우가 예겸을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그럼 그 예쁜 애만 불쌍하게 됐군.”

예겸의 머릿속에 문득 솔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불쌍하다고?’

‘다 자기가 자초한 일이잖아.’

‘내가 억지로 끌어들인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지금은... 그 여자가 이런 결말을 더 바라고 있는 것 같은데.’

...

솔지는 비좁은 철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예겸이 뛰어들어 자신을 구하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몸을 뒤척이자 침대가 살짝 흔들렸다.

위기에 빠졌을 때 남자의 도움을 받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여자는 드물었다.

솔지에게도 아주 잠깐 설레는 감정이 일었다.

하지만 정신은 맑았다. 하예겸 같은 남자는 길들지 않은 야생의 매였고, 주변에는 늘 여자가 넘쳐났다.

솔지는 스스로 날아든 먹잇감일 뿐이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 예겸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서로를 이용했다.

자신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흥미를 조금 끌었기에 관심을 받았을 뿐이다.

‘혹시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

예겸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예겸을 붙잡아야 했다.

계속해서 예겸의 흥미를 끌어야 했다.

상황을 똑바로 인식하자 마음도 가라앉았다. 어지럽게 뒤엉킨 감정이 차분해졌다.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은행 입금 알림과 개인 레슨 일정 알림이 하나씩 떠 있었다.

원석은 보상금으로 400만 원을 보냈고, 집에서 충분히 쉬라고 거듭 당부했다.

솔지는 거리낌 없이 돈을 받았다. 손님에게 폭행당한 일이니 업소에서 책임지는 게 마땅했다.

예겸 때문에 특별 대우를 받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은 보상금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솔지는 모처럼 일찍 잠들었다.

...

아침이 되자 뺨의 손자국은 많이 옅어졌다.

간단히 씻고 준비한 뒤 솔지는 병원에 들렀다.

수납 창구에서 600만 원을 내자 밀린 병원비가 일단 정리됐다.

병실에는 가지 않았다. 어머니 최미영이 한숨 쉬는 소리도, 앞으로 돈이 얼마나 더 들지 되풀이하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최미영은 늘 여리고 의존적이었다. 작은 일만 생겨도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솔지의 친아버지가 딸 8살 때 세상을 떠난 뒤 최미영은 지금의 남편과 재혼했다.

솔지는 의붓아버지 박성호의 손에서 자랐다.

피가 섞이지 않아 친딸과 똑같을 수는 없었지만, 박성호는 솔지를 구박하지 않았고 대학까지 보내 줬다.

박성호가 병에 걸리자, 최미영은 솔지가 모른 척할까 불안해하며 그동안 받은 은혜를 계속 들먹였다.

솔지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돈만 벌었다. 아름다운 말보다 통장에 찍히는 돈이 훨씬 큰 안도감을 줬다.

솔지는 한때 앞날이 탄탄대로는 아니더라도 밝을 거라고 믿었다.

이렇게 어두운 길이 펼쳐질 줄은 몰랐다.

나약한 어머니에 중병을 앓는 의붓아버지, 게다가 중학생인 남동생까지 있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짊어져야 할 책임은 솔지가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

오후가 되자 솔지는 청월 빌리지로 향했다.

정문에서 방문 등록을 마치자 경비 직원이 의뢰인의 집까지 안내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1분 남짓 기다린 뒤에야 문이 열렸다.

문 너머로 예겸의 얼굴이 나타나자 솔지는 조금 놀랐다.

예겸의 눈에도 뜻밖이라는 기색이 스쳤다.

솔지는 흰색 자외선 차단 재킷과 같은 색의 와이드 팬츠, 깨끗한 흰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높게 묶어 단정하고 맑은 얼굴을 그대로 드러냈다. 장신구 하나 없이 산뜻했다.

미라주에서 보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요가 강사?”

예겸이 물었다.

솔지는 짧게 대답하고 똑같이 물었다.

“전무님은 어떻게 여기 계세요?”

예겸이 대답하기 전에 안쪽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오셨어?”

예겸의 시선이 솔지에게 머물렀다. 처음 마주쳤을 때의 놀라움은 이미 사라지고 차분한 표정만 남아 있었다.

“오셨어.”

예겸이 몸을 옆으로 비켜 길을 내줬다.

솔지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은 뒤 예겸의 시선을 받으며 걸어갔다. 카펫을 밟는 내내 태연한 척하는 마음은 팽팽하게 조여 있었다.

문이 닫혔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예겸의 시선이 등에 닿는 게 느껴졌다.

“아르떼 요가원의 선생님이시죠?”

송혜주는 이미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채 환하게 웃었다.

솔지는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예겸과 어딘가 닮은 듯한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송혜주 회원님. 한솔지입니다. 옷을 갈아입게 화장실을 잠시 써도 될까요?”

송혜주가 미소 지었다.

“안내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화장실로 간 솔지는 바지만 갈아입고 나왔다.

재킷도 벗었다. 연회색 슬림 반팔 상의와 검은색 8부 요가 팬츠 차림은 단정하면서 보기 좋았다.

밖으로 나오자 예겸이 대놓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낌없는 눈길이었다.

“타투가 참 독특하고 예쁘네요.”

송혜주가 칭찬했다.

가슴은 잔뜩 조여들었지만, 솔지는 시선을 피하면서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예겸이 알 듯 말 듯한 웃음을 지었다.

송혜주가 예겸을 보면서 말했다.

“간다더니?”

“모처럼 시간이 났으니 조금 더 같이 있으려고.”

예겸은 환한 표정과 맑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송혜주가 고운 눈썹을 살짝 모으며 말했다.

“난 너랑 놀아 줄 시간 없어.”

“신경 쓰지 마.”

예겸은 송혜주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일부러 자신의 눈길을 피하는 솔지만 바라봤다.

솔지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송혜주의 동작을 지도했다.

또렷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잔잔한 관악기의 선율과 어우러졌다.

길고 편안한 선율이 귓가에 내려앉으면서 마음까지 안정을 찾게 만들었다.

예겸은 다리를 꼬고 소파에 느슨하게 기대앉았다. 깊은 눈은 줄곧 솔지에게 향해 있었다.

굴곡이 선명한 몸과 한 손에 잡힐 듯한 허리, 가늘고 긴 팔다리를 보자 그날 밤 솔지의 몸이 왜 그렇게 부드러웠는지 떠올랐다.

예겸의 목젖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움직였다.

중간 휴식에 들어갈 무렵 송혜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송혜주는 전화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거실에는 솔지와 예겸만 남았다.

솔지는 예겸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얼굴만 마주하지 않으면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때 솔지의 눈앞에 물 한 잔을 내밀었다.

“그렇게 돈이 급해?”

솔지가 몸을 돌렸다. 눈가에 웃음을 띠고 있는 예겸은 겉보기에는 친절했다.

“네.”

솔지는 인정했다.

‘평범하게 사는 사람 중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숨기지 않고 곧바로 인정하는 태도에 예겸은 더 흥미를 느꼈다.

예겸이 잔을 한 번 더 내밀며 받으라는 뜻을 보였다.

솔지는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물을 가져왔어요.”

예겸은 솔지에게 내밀었던 물컵을 거두고 자신이 마셨다.

유리잔을 든 채 무심하게 물었다.

“타고난 자원을 제대로 이용하지 그래? 이렇게 힘들게 살 필요가 있나?”

솔지는 그 말에 숨어 있는 다른 뜻을 읽었다. 노력 없이 얻으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예전부터 누군가는 솔지의 외모와 몸매라면 자존심만 내려놓아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예겸의 눈에 자신은 가격표를 붙일 수 있는 물건일 뿐이라는 걸 다시금 분명히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예겸은 솔지가 거리를 벌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말이 너무 심하다고 느낀 건가?’

“이제 와서 나와 거리를 두기엔 늦지 않았어?”

예겸은 쇄골의 문신을 바라봤다.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도를 늦춰 말하자 귀를 녹일 만큼 부드러웠다.

“네가 내 여자라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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