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한 선 밖에서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30 챕터

제1화

공연을 마친 솔지가 대기실로 들어가려던 때,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예겸이 솔지를 벽 모서리로 밀어붙이면서 차가운 손가락이 허리에 닿았다.얇은 옷감으로는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열기를 막을 수 없었다. 손이 닿자 전류가 흐르듯 온몸이 저릿해졌다.“뭐 하는 거예요?” 솔지는 침착했다. 눈앞의 상대가 정말 선을 넘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사람을 홀릴 듯한 예겸의 눈이 솔지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허리를 잡은 손으로 살결을 가볍게 문지르며 입꼬리를 올렸다. 도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허리부터 열이 번졌다. 솔지는 이렇게 제멋대로인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하예겸의 여자라고?”예겸의 손은 갈수록 대담해졌다. 허리에서 미끄러진 손이 탄탄하게 솟은 엉덩이까지 내려갔다.웃음도 한층 짙어졌다.솔지는 예겸에게 몰려서 벽 모서리에 갇혔다. 달아날 곳도 없었다.지금은 대기실에 드나드는 사람도 없어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알면서도 이래요? 내 남자가 당신을 죽일 만큼 화를 낼까 봐 겁도 안 나요?” 솔지가 날카롭게 경고했다.하진동 회장의 차남 하예겸은 악명이 높았다. 변덕스럽고 성정이 거칠어서, 한번 그의 눈 밖에 나면 앞날이 편할 수 없었다.사람들은 뒤에서 예겸을 ‘미친 겸 도령’이라고 불렀다.예겸은 재미있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시선이 솔지의 가슴께에 머물렀다. 엉덩이를 받친 손에 힘을 주면서 끌어 올리자, 솔지의 몸과 바짝 밀착됐다.솔지의 볼이 붉어지고 심장이 빨라졌다.‘설마 하예겸이 두렵지도 않은 건가?’이곳을 드나드는 남자들은 모두 한솔지가 하예겸의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한솔지라는 여자에게 욕심을 품어도, 그저 눈으로만 탐할 뿐 감히 손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다른 남자들은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에 두고도, 끝내 아쉬움을 삼킨 채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나를 죽여?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등에 업고 다니면서 사기 칠 배짱은 있고?” 예겸이 귓가에 대고 말하자, 뜨거운 숨결이 피부를 달궜다.그리고
더 보기

제2화

‘미라주’에서 반년이나 일했어도 이런 접촉은 익숙하지 않았다. 솔지는 손바닥을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손을 떼었다.예겸이 오히려 손을 누르면서 잡았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 아래로 차갑고도 뜨거운 시선이 솔지를 꿰뚫었다.솔지의 얼굴에도 열이 올랐다. 손을 빼려고 했지만 예겸은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귓가에서 의미심장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그제야 예겸이 솔지의 손을 놓아주었다.솔지는 서둘러 자세를 바로잡고 숨을 골랐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감정을 애써 다스렸다.“오늘 전무님이 돌아오셨으니 제대로 한잔 올려야죠.” 원석이 잔을 들었다.나머지 사람들도 예겸을 향해 일제히 술잔을 올렸다.예겸은 긴 다리를 느슨하게 꼬았다. 왼팔을 솔지 뒤쪽 소파 등받이에 걸치고 다른 손은 허벅지 위에 둔 채, 쏟아지는 아부를 무심하게 받아들였다.원석은 술자리 파트너까지 따로 준비해 두었다. 예겸이 잔만 들고 마시지 않자 여자에게 눈짓했다.예겸 대신 술을 마시려고, 여자가 예겸의 술잔을 받으려고 했다.그러나 손이 닿기 전에 예겸이 술잔을 솔지의 입가로 가져갔다.“속이 안 좋아. 네가 마셔.”솔지는 평소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고, 누군가의 술을 대신 받은 적도 없었다.오늘이 처음이었다.솔지는 짧은 사이에 많은 생각을 했다. 예겸이 거짓말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 기회에 두 사람의 관계를 기정사실로 만들면 됐다.이 바닥에서 계속 일하려면 예겸을 화나게 할 수 없었다. 비위까지 맞춰야 했다.솔지는 술잔을 받아 들며 웃었다. 살짝 흐르는 눈매에는 말로 다 담기 힘든 매혹이 배어 있었다.“그럴게요. 대신 내 주량이 약한 거 아시죠? 취하면 전무님이 돌봐 주셔야 해요.”조금 전에는 현장에서 들켰다는 생각에 당황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예겸이 무슨 이유로 침묵하는지는 몰라도,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예겸의 여자이며 총애까지 받는다는 인상을 남겨야 했다.“걱정 마. 버려두지는 않을 테니까.” 예겸이 흥미로운 눈으로 솔지를 봤다. 생각보
더 보기

제3화

솔지는 꿈을 꿨다.꿈속에서 솔지는 건달처럼 굴며 잘생긴 남자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평소에는 감히 떠올리지도 못한 장면이 가득했다. 진짜인지 꿈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몸을 움직이자 머리가 지끈거렸고 몸 여기저기도 묘하게 불편했다.힘겹게 눈을 떴지만 햇빛이 눈부셔서 얼른 손으로 눈을 가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솔지가 사는 낡은 원룸은 서향이라 아침 햇살이 들지 않았다.여기는 솔지의 집이 아니었다.정신이 조금 더 맑아진 솔지는 어젯밤 일을 빠르게 되짚었다.장면들이 차례로 떠오르다가 마지막에 이름 하나가 남았다.‘하예겸!’기억이 연이어 밀려들며 정신이 또렷해졌다.솔지는 다급히 옆을 돌아봤다.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눈앞에 크게 들어왔다.숨이 턱 막혔다.‘꿈이 아니었어!’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머리는 아직 대책도 세우지 못했지만 몸이 먼저 움직였다.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의 옷을 주웠다. 가슴을 가린 채 맨발로 서둘러 나갔다. 안에 있는 남자가 자신을 부를까 봐 겁이 났다.얼른 밖에서 옷을 챙겨 입고 숨을 죽인 채 빠져나왔다....솔지는 ‘미라주’로 출근했다.사흘 내내 예겸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예겸 같은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 매일 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만나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무대 하나를 마치고 내려와서 다음 공연을 준비하려고 했다.누군가가 솔지의 앞을 막았다.처음 보는 낯선 남자였다.“춤이 괜찮더라. 룸으로 가서 나만 보면서 한 곡 춰.”“대표님, 이제 어떡하죠?” 솔지가 끌려가는 모습을 본 직원들이 다급해졌다.유혁은 W시에서도 힘깨나 쓰는 인물이었다. 집안에 고위 공직자가 있어 웬만한 사람은 건드리지 못했다.원석은 굳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너희는 룸 앞을 지켜. 난 전화할 테니까.”원석이 유혁을 상대할 힘은 없었다. 그렇다고 하예겸의 여자를 건드리게 내버려두면 미라주의 문을 닫아야 할 터였다.룸 안.“벗어!
더 보기

제4화

솔지는 유혁의 얼굴을 뒤덮은 피를 떠올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남자를 보자, 술병이 더 남아 있었다면 예겸도 멈추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가차 없이 손을 쓰는 걸 보고 나자 흉흉한 소문이 괜히 생긴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솔지 앞에 선 예겸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겁먹었어?”솔지는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 없겠지. 넌 원래 겁이 없잖아. 며칠 전에는 나랑 자고 도망치기까지 했으니까.”“내가 전무님 여자인데 어떻게 자고 도망친 게 돼요? 깨우기 미안해서 조용히 나온 것뿐이에요.”막힘없는 대답이었다.예겸이 눈썹을 들고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솔지를 보며 말했다. “난 얼마든지 즐길 수 있어. 네가 감당 못 할까 봐 그렇지.”솔지는 말속에 감춰진 뜻을 알아들었다.지금까지는 자기 혼자 예겸을 끌어들였으니 원할 때 그만둘 수 있었다.하지만 둘이 함께 시작하면 솔지에게 멈추자고 할 권리는 없었다.게다가 먼저 다가간 쪽도 솔지였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예겸이 문을 봤다. “들어와.”문이 열리고 원석이 들어왔다. 손에는 구급함과 냉찜질 팩이 들려 있었다.“솔지 씨, 다른 곳은 안 다칬어? 병원에서 검사 받으러 갈까?”솔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그럼 이걸 얼굴에 대고 있어.”“고맙습니다.”원석은 예겸을 향해 먼저 잘못을 인정했다. “전무님, 오늘 솔지 씨가 위험한 일을 겪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솔지가 냉찜질 팩을 얼굴에 대려고 했다.예겸이 손가락을 까딱하면서 솔지를 불렀다.솔지는 의아해하면서도 남자에게 다가갔다. 발이 아팠지만 흐트러짐 없이 걸었다.예겸은 담배를 끄고 솔지를 끌어당겨 앉혔다. 어깨를 감싸면서 자기 쪽으로 돌린 뒤 냉찜질 팩을 받아 솔지의 왼쪽 뺨에 대주었다.차가운 감촉과 예겸의 숨결에 섞인 담배 냄새가 함께 닿자, 솔지의 몸은 저절로 긴장했다.예겸의 어두운 눈이 벌겋게 부은 뺨에 머물렀다. 입술
더 보기

제5화

클럽 벨로아.예겸이 룸에 들어서자마자 놀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쁜 애를 구해줬는데, 눈치 빠른 여자라면 몸으로라도 보답했을 텐데. 달콤한 밤을 보내지 않고 왜 여기까지 왔어?”말을 건 사람은 진정민이었다. 벨로아의 대표이자 W시 JY그룹의 외아들로 개인 자산만 수조 원대였다.와인 잔을 흔드는 다른 남자는 부승우였다. 세계 곳곳에 사업장을 둔 부동산 재벌로 정확한 자산 규모는 알려진 바 없었다.승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이렇게 큰일을 벌여? 유혁까지 건드리고 뒤탈이 두렵지도 않아?”예겸은 탁자 위 시가를 집어 향을 맡았다. “내 뒤에 붙은 구린내가 한두 개야?”정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진심이야?”“여자 하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까지 한다고?”“여자 하나라면 그럴 리 없지. 하지만 네가 직접 움직이게 만든 여자라면 얘기가 달라.”정민은 궁금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신경 써?”예겸은 커터로 시가 끝을 자르고 천천히 불을 붙였다. “자기 발로 찾아온 애야.”승우가 눈썹을 올리며 정민과 눈빛을 주고받았다.예전에도 먼저 다가온 여자는 많았지만, 예겸이 이런 식으로 상대해 준 적은 없었다.“둘 사이를 온 동네에 광고하는 걸 보니, 연나 대신 표적이 되어 줄 사람으로 남겨 두려는 거야?”예겸은 얇은 입술 사이에 시가를 물었다. 한 모금 천천히 빨면서 불씨를 살리는 동작까지 우아하게 보였다.연기가 입안에 머무른 시간은 짧았다. 곧바로 내뱉은 예겸은 시가를 든 채 나른한 눈길을 보냈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충분한 대답이었다.정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 “내가 뭐랬어. 쟤한테는 역시 연나가 제일 중요하다니까.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줄 리가 없지.”승우가 예겸을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그럼 그 예쁜 애만 불쌍하게 됐군.”예겸의 머릿속에 문득 솔지의 얼굴이 떠올랐다.‘불쌍하다고?’‘다 자기가 자초한 일이잖아.’‘내가 억지로 끌어들인 것도 아니었고.’‘오히려 지
더 보기

제6화

솔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뒤로 뺐던 발을 원래 자리로 옮기더니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바짝 좁아졌다.가까이 서자 솔지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향수 냄새가 아니라 옷과 머리카락에 밴 깨끗한 향기였다.그날 밤에도 이 향기를 맡았다. 예겸은 홀린 듯 깊이 빠져서 헤어나지 못했다.예겸은 늘 먼저 접근하는 여자를 질색했다.그런 여자와 잠자리를 갖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그 원칙이 솔지 앞에서 처음 깨졌다.동정까지 솔지에게 줬다.솔지가 다가오자, 예겸은 뒤쪽 소파에 앉으며 재빨리 솔지의 허리를 감쌌다.솔지의 몸이 예겸의 품으로 쏠렸다.예겸이 눈을 내리깔았다. “정말 적극적이네.”흑백을 뒤집는 데 타고난 남자였다.솔지는 예겸의 가슴을 두 손으로 짚었다. 손바닥 아래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몸을 일으키려는데 허리 뒤로 무게가 실렸다. 다시 눌려 내려간 모습은 솔지가 일부러 예겸에게 달라붙은 것처럼 보였다.솔지는 눈을 크게 뜨고 짓궂은 남자를 노려봤다.“전무님이 계속 이러시면 정말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할 것 같아요.”솔지는 아예 움직이지 않았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더 버틸 이유도 없었다.예겸의 눈이 솔지의 얼굴을 천천히 오갔다. 화장기 없는 피부는 매끄럽고 눈동자는 맑게 빛났다.촉촉한 분홍빛 입술을 살짝 다문 모습은 막 피어나려는 꽃처럼 은밀한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내가 널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예겸의 숨결이 얼굴에 흩어졌다. 잔열이 촘촘하게 솔지의 피부를 달궜다.솔지는 이 말에 불순한 뜻이 담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꼬집어 낼 만한 증거는 없었다.겉보기에는 솔지가 주도권을 쥔 듯했지만 실제로는 줄곧 밀리고 있었다. 예겸의 손안에서 놀아나는 셈이었다.솔지는 지고 싶지 않았다.예겸이 허리를 누르자 솔지는 손을 예겸의 배에 밀착시켰다.예겸의 눈동자가 곧바로 가늘어졌다.그날 밤, 솔지의 손이 몸을 훑고 지나가자 이성을 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잘 알지도 못하고 속셈까지 많은 여자에게 자신이 무너질
더 보기

제7화

몸에 붙는 요가복은 솔지의 매끄러운 곡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성숙한 아름다움을 강조했다.곱게 휜 눈썹과 또렷한 눈, 단정한 콧날 아래에는 붉고 촉촉한 입술이 자리했다.솔지는 만날 때마다 더 대담해졌다.예겸 앞에서 느끼던 두려움과 불안은 진작에 사라진 듯했다.예겸에게 다가와 유혹하려는 여자는 많았지만 성공한 사람은 솔지가 처음이었다.아름답고 배짱도 대단했다. 낯가림이나 부끄러움도... 충분히 없었다.계획에 잘 맞는 상대였다.예겸이 솔지의 허리 뒤쪽을 꽉 눌렀다. 솔지의 몸이 다시 예겸 쪽으로 기울었다.“느낌이 없었다면 내 잘못이네.”어둡고 깊으면서 웃음기가 어린 눈길을 마주하자, 솔지의 심장은 제멋대로 뛰었다.시선이 아래로 움직이면서 예겸의 입술에 닿았다.얇은 입술을 가진 남자는 냉정하고 마음도 없다고들 했다.그러나 지금까지 예겸은 솔지에게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위세도 빌렸고 남자도 가졌다.예겸이라면 손해 볼 일이 없었다.“전무님, 여자친구 있어요?” 솔지는 용기를 내어 예겸의 목젖에 손을 뻗었다.검지로 가볍게 건드렸다.예겸의 목젖이 움직였다. 예겸은 얌전히 있지 않는 솔지의 손을 붙잡았다.“왜? 내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 나지막한 목소리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솔지의 손은 여전히 예겸의 목젖에 붙어 있었다. 예겸이 말할 때마다 손바닥 아래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아니요.”솔지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진지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전무님한테 여자친구가 있으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옳지 않으니까요.”“하.”예겸은 솔지의 손을 떼어 손가락을 잡았다. 뜻을 담아 말했다. “이제 와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는 좀 늦지 않았어?”“잘못을 계속 반복하지는 않았잖아요.”솔지가 듣기로 하예겸은 만난 여자가 많았고, 헤어진 뒤에도 상대에게 돈을 아끼지 않았다.하지만 누구도 여자친구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었다.바람둥이가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않는 이유는 마음을 붙들 사람을 만나지 못했거나, 가슴에 이루지
더 보기

제8화

솔지의 목이 바짝 조여들었다.예겸이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돌려 말하면 솔지와 한동안 즐기고 싶다는 뜻이었다.솔지는 누구의 ‘비밀 연인’이 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가장 힘들 때조차 그런 선택지는 떠올리지 않았다.솔지에게 ‘비밀 연인’이라는 자리는 떳떳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관계였다.그러나 예겸은 결혼하지 않았고 여자친구도 없었다.평범한 연애에 가까운 관계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단지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빠져 있을 뿐이었다.솔지는 굳이 그 말의 모순을 파고들지 않았다. 예겸이 자신에게 감정을 품으리라고 기대한 적도 없었다.예겸의 말대로 고작 자신의 몸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적어도 예겸은 솔직했다.“얼마 동안 나랑 만나실 생각이에요?”사랑이 없어도 서로에게 정직할 수 있다면 나쁠 건 없었다.예겸은 솔지가 꽤 마음에 들었다. 아름답고 대담한 데다가 영리했다.말이 통하는 여자와 대화하면 모든 일이 편했다.“그건 몰라.”예겸은 문신으로 시선을 내렸다. “전에 말했지? 내 여자로 지내는 건 쉽지 않아. 잘 생각해.”솔지는 진지하게 고민했다.“생각할 시간을 주실래요?”예겸은 한동안 솔지를 바라보다 가볍게 웃었다. 몸을 일으켜 옷을 정리하자, 방금 전과 달리 빈틈없는 신사처럼 보였다.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했다. “물론.”솔지도 상체를 일으켰다.끈적하게 얽혀 있던 공기가 거짓말처럼 잔잔해졌다....솔지는 원룸으로 돌아왔다.절친 정다은이 퇴근하자마자 포장 음식을 들고 찾아왔다. 생각에 잠긴 솔지를 보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솔지는 예겸이 제안한 관계를 다은에게 털어놓았다.“솔직하기는 하네.” 다은이 솔지를 힐끗 봤다. “감정을 갖고 논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이렇게 분명히 말하는 걸 보면 비겁한 사람은 아니지.”솔지가 웃었다. “응.”예겸은 처음부터 솔지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 점만큼은 좋은 인상을 남겼다.“대신 마음이 한곳에 머무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다은이 포장
더 보기

제9화

원석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솔지가 ‘미라주’에 나온 뒤 매출은 전보다 크게 올랐다.솔지를 보려고 찾아오는 손님도 적지 않았다.“전무님이 내가 솔지 씨를 착취한다고만 안 하시면 돼.”솔지가 웃었다. “그럴 분 아니에요.”원석은 한숨을 내쉬고 나갔다....솔지는 화장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오늘은 흰 셔츠와 정장 바지를 입었다. 도회적인 직장인처럼 말끔하고 단정한 차림이었다.무대에 오르자 장내가 뜨겁게 들끓었다.솔지는 노출이 심한 옷으로 시선을 끌거나 일부러 요염하게 꾸미지 않았다. 어떤 옷을 입든 무대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매력은 옷차림과 무관했다.멀리서 지켜보던 원석의 옆에서 누군가 농담했다. “하예겸도 통이 크네. 저런 여자는 집에 숨겨 둘 만한데, 우리까지 구경하라고 내보내잖아.”“말조심해.”클럽을 운영하면서 원석은 온갖 부류를 다 만나 봤다.권력 있는 남자를 등에 업고도 이곳에서 춤을 추며 돈을 버는 여자는 드물었다.한 무대를 마치자 솔지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직원 한 명이 찾아왔다.“솔지 씨를 찾는 손님이 있어요.”솔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개인 지명 안 받아요.”“남자 손님이 아니라 여자예요.”솔지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직원이 설명했다. “돈도 많이 준대요. 노래 한 곡에 10만 원이래요.”솔지는 놀랐다.한 곡이 길어야 5분이니 분명 높은 금액이었다....솔지는 룸으로 갔다.문을 열자 여자 한 명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옆에는 여행용 가방도 놓여 있었다.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여자가 돌아보며 솔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솔지도 상대를 가만히 관찰했다.여자는 어려 보였고 얼굴도 작았다.솔지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말만 떠올랐다. 깨끗하고 생기가 넘쳤다.다정한 이웃집 동생이나 첫사랑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도 있었다.“안녕하세요.” 솔지가 먼저 인사했다. “한솔지입니다.”여자가 활짝 웃자 또렷한 눈이 반달처럼 휘면서 뺨
더 보기

제10화

중간에 과일을 가져온 직원은 솔지가 제자리에서 계속 도는 모습을 봤다.30분 뒤 간식을 가져온 직원이 다시 들어왔을 때도 솔지는 계속 돌고 있었다.40분이 지나자 솔지는 태엽을 멈추기 전까지 영원히 춤추는 오르골 속 소녀처럼 보였다.굳게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예겸이 들어왔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확인한 솔지는 가슴이 꽉 조이면서 거의 중심을 잃을 뻔했다.“예겸아!”연나가 반가움으로 가득 찬 눈을 들었다. 환한 미소에는 티 하나 없이 맑은 기쁨만 담겨 있었다.솔지는 놀랐다.‘둘이 아는 사이였어.’‘그럼 연나 씨가 일부러 나를 지명한 건가?’약속한 시간이 끝나지 않아서 솔지는 멈추지 않았다.예겸은 솔지를 한 번 본 뒤 소파 옆 여행용 가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나에게 물었다. “막 돌아왔어?”“응.” 연나가 웃었다. “한솔지 씨를 빨리 보고 싶어서 바로 왔어.”연나는 눈꼬리를 휘며 웃으면서 솔지를 가리켰다. “봐, 춤을 정말 잘 추지? 거의 한 시간 동안 돌았는데 몸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어.”예겸이 소파에 앉아 솔지를 정면으로 바라봤다.‘내가 모르는 모습이 대체 얼마나 더 있는 거지?’보통 사람이라면 계속 돌다가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솔지는 회전마저 가벼운 바람처럼 만들었다. 부드럽고 유려했다.예겸의 눈길이 끊길 듯 이어지며 솔지에게 머물렀다. 정신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고 자세도 흐트러지지 않았다.“왜 돌아왔어?” 예겸이 연나에게 물었다.연나는 예겸의 옆에 앉아 맑은 얼굴에 서운함을 드러냈다. “다들 W시에 있는데 나만 혼자 떨어져 있잖아. 버림받은 것 같았어.”예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간 지 반년밖에 안 됐잖아.”“나한테 반년은 아주 길어.” 연나는 곁에 더 붙어 앉고 싶어 했지만 그래도 거리는 지켰다. “다시는 안 갈래.”예겸은 또 솔지를 흘끗 봤다.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구나.’예겸이 대꾸하지 않자, 연나의 마음이 깊이 가라앉았다. 솔지를 올려다보며
더 보기
이전
123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