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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너무 무방비하시네 이거

Author: 무취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7 03:26:14

"다 먹었으면 그만 일어날까요?"

마지막 한 잔을 마시며 깔끔하게 한 병을 비워 낸 하늘이 벗어둔 겉옷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를 따라 우주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테이블을 둘러봤다.

한 그릇 다 비웠네.

오랜만에 식사를 제대로 하긴 했지만, 몰려오는 약간의 죄책감과 걱정은 어쩔 수 없었다.

"잘 먹었어요."

자신의 빈 그릇을 쳐다보던 우주는 이내, 잘 먹었다는 그녀의 인사에 천만에. 라고 말하듯

어깨를 한번 으쓱 올리고는 성큼 성큼 계산대로 다가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찾았다.

"어."

당황한 우주는 반대편 주머니에도 손을 넣어 보았지만 무언가가 잡힐 리 없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우주는 문득 밴 안에 있던 자신의 재킷 안 지갑을 챙기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당연히 그녀를 차에 태워 자신이 알고 있는 프라이빗 식당으로 갈 생각이었던 우주가 지갑을 챙겼을 리 없었고,

그의 휴대폰은 그가 앉아있던 밴 옆자리에 덩그라니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아..씨"

애꿎은 빈 주머니만 만져 대는 우주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와.. 고단수?"

하늘은 잔뜩 당황한 우주의 곁을 살짝 지나치며, 카드를 사장님께 내밀었다.

"아, 기, 기다려요. 계산 하지 말고. 내가 빨리 나가서 차에서 지갑 가져오면"

하지만 그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채, 하늘은 계산이 끝난 카드를 사장님께 받아 들고,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그리곤 뒤돌아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얻어 먹었다 치죠. 그냥"

그리곤 식당 문을 열고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공기를 맡으며 식당 안을 벗어났다.

그런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던 우주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입을 벙긋 거리며 따라 나섰다.

"고, 고단수라니. 나 진짜 무슨 그런 쪼잔한 놈 아니거든? 갑자기 그 쪽 때문에 여기로..!"

한 껏 당황한 그의 표정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는 모습을 보며,

하늘은 또 한 번 웃었다.

"알았어요. 나 때문이라 치자구요. "

하늘은 그의 구겨진 표정이 재밌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입을 가리고는 웃음을 참았다.

더 이상 구차하게 변명하기엔 우주의 모습은 이미 머쓱함과 당황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는 그녀 앞에선 더 이상의 말은 핑계처럼 들릴 게 뻔했다.

"하. 참. 내가 그 쪽이랑 있으면 진짜 별일을 다 겪는다니까. 아 웃지 마요. 갚을거니까."

그의 말에 그녀는 입을 가리고 있던 손으로 자신의 콧잔등을 살짝 스치며 말했다.

"갚을 필요 없어요. 이미 갚았어요, 그 빚."

제법 서늘하고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볼을 스쳤다.

"동생이 그 쪽 사인 받고 많이 웃어줬거든요. 그 순간 만큼은 진짜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진심 어린 그녀의 말에 우주는 잔뜩 구겨져 있던 얼굴에 힘이 풀렸고 눈을 한 번 깜빡이며 그녀의 눈을 마주쳤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엔 우주가 알 수 없는 무언가 슬프고 복잡한 감정이 서려있었다..

"고마워요. 내 동생 웃게 해줘서. 나보다 더 동생을 행복하게 해줘서. 진짜 고마워요."

그녀는 그렇게 우주의 눈을 마주치며 내 앞에선 처음 보는 미소를 지었다.

내 앞에서 그녀는 웃고 있는데. 우주의 표정은 일그러진다.

눈썹이 한 껏 치켜 올라간다. 기분이 나빠도, 몸이 아파도 카메라 앞에선 누구보다 생글생글 웃던 포커페이스가 주 특기인 우주는

지금 그녀 앞에서 아무 것도 제어되지 않는 고장 난 자동차 같았다.

그녀가 웃는 모습은 마치 슬로우 모션을 건 화면처럼 느렸고, 난 몸도 얼굴도 고장 난 채 그렇게 멍하니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장난기 가득했던 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입꼬리는 굳어 있었다.

골목의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그녀의 얼굴만이 그의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크흠.."

이 내 그녀의 눈을 먼저 피한 우주는 주먹 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한 번 크게 했다.

고장 난 몸을 억지로 움직이듯 어색하고 뻣뻣한 몸짓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려 눈을 지켜 뜬 우주의 눈에 골목 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밴이 보였다.

운전석 창문이 열리고, 운전석에 타고 있는 매니저 성민과 눈이 마주쳤다.

매니저 성민은 연신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얼른 타라는 손짓과 함께 주의를 잔뜩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매니저와 눈을 마주치자 우주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턱 짓으로 골목 끝을 가리켰다.

"일단 가죠"

우주의 짧고 무심한 말 속에는 이미, 조금 남아있던 뾰족함마저 사라져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나란히 걷는 그녀의 발소리가 우주의 귀에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왔다.

자신들의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전혀 의식 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 성민이 빨리 오라고 연신 손짓을 해댔지만, 우주는 일부러 걸음을 늦춰 그녀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채 말 없이 걷고 있던 우주가 잠시 걸음을 멈추며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태워 줄테니까, 내 차 타고 가요."

그의 말에 하늘은 그를 쳐다보고는 이내 두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우주는 그녀의 입을 가로막았다.

"거절 하는 게 특기인 거 알고 있는데. 이번엔 내 말 좀 듣죠?"

단호한 그의 말에 그녀는 무언가 말 하려던 걸 멈추고는 이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곤 고갤 돌려 그의 밴이 세워진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래. 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그녀는 우주를 바라보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우주는 한 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 가려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고는

앞을 바라보며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성큼 성큼 밴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우주는 그녀가 매니저에게 짧은 목례를 하며 먼저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는, 따라서 좌석에 몸을 실었다.

매니저는 룸 미러로 두 사람을 흘끔 확인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에 올라타 차 내부를 슬쩍 둘러보았다.

넓은 밴 내부는 예상보다 깔끔하고 아늑했다. 어두운 간접 조명이 은은하게 켜져 있었고, 뒷 자석엔 우주가 벗어 놓은 듯한

자켓이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었다.

매니저는 차를 좁은 골목길에서 빼낸 후, 반짝이는 불빛들이 가득한 도로 위로 차를 올렸다.

매니저는 그녀에게 주소를 물었고, 하늘은 자신이 사는 곳 빌라 이름을 말하고는 감사하단 말도 덧붙였다.

우주는 자연스럽게 창가 쪽 자신의 자리에 앉아 발을 뻗었다.

따뜻한 차 안에서 긴장이 조금 풀린 탓인지, 좌석에 등을 기대고 느릿하게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차가 부드럽게 도로를 내달리자 어색하게 앉아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던 그녀도

마침 내 좌석에 등을 살짝 붙여 조금은 편안하게 기대어 앉았다.

차 안에선 미세하지만 따뜻한 히터 바람이 차가웠던 그녀의 볼을 녹여주었고,

어느새 켜 져 있는 그녀의 좌석 열선 시트가 몸을 따뜻하게 댑혀 주는 듯 했다.

찬 공기를 맡았다가 금 새 몸이 따뜻해지니 그녀의 주량보다 한참 모자란 소주 한 병의 취기가 갑자기 올라오는 듯 해

그녀는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창밖을 보니 화려한 네온 사인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등받이에 조금 더 기대었다.

그런 그녀를 흘끔 바라보던 우주도 이내 고개를 돌려 빠르게 지나치는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오늘 밥 고마워요."

여전히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우주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내 말 듣고 있.."

우주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어느 새 머리를 깊게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이 보였다.

"..너무 무방비 하시네, 이거."

그런 그녀를 보며 우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갑자기 불쑥 손을 뻗어 뒷 자석에 벗어 놓았던 자켓을 휙 들고는

그녀의 어깨에 무심한 듯, 하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덮어주었다.

룸미러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매니저가 고개를 돌려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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