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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매콤 칠리소스
안유경은 민해준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더는 상관없었다.

오해든 신뢰든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3년 전, 그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고 자신을 내쳤을 때 이미 이 남자를 향한 미련을 모두 떨쳐버렸다.

지금 안유경이 바라는 건 단 하나, 저들이 당장 눈앞에서 꺼지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는 것뿐이었다.

“CCTV 확인 다 했니? 끝났으면 네 약혼녀랑 그 집 식구들 데리고 얼른 꺼져줄래?”

안유경이 팔짱을 낀 채 민해준을 쏘아보았다. 노골적인 혐오와 피로가 섞인 표정이었다.

그 말을 들은 민해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고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 근육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한참을 말이 없던 민해준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경찰에게 던지듯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리 이만 짐 뺄게요.”

짐을 뺀다는 소리에 경미란이 악을 쓰며 울부짖었다.

“민 서방, 안 돼! 여기서 이미 다 적응하고 살고 있는데 갑자기 나가라니! 저 계집애가 들어왔다고 왜 우리가 나가야 해? 이 집 민 서방이 산 거잖아!”

머리가 깨질 듯한 소음에 민해준이 서늘한 눈빛으로 경미란을 쏘아보았다.

“당장 짐 싸라고요!”

경미란은 더 이상 찍소리도 못했다.

결국 송규진 일가는 쫓기듯 허둥지둥 짐을 챙겨 나갔다.

떠나기 전, 민해준은 안유경을 깊이 응시했다.

“유경아, 약속을 어기고 돌아와서 모두를 이토록 곤란하게 만들어? 그때 내가 역시나 너한테 너무 관대했어!”

현관문이 닫혔다.

정적만이 감도는 거실, 바닥은 엉망진창이었다.

안유경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던 깨진 가족사진 액자를 주워들고 그 위에 묻은 오물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참았던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엄마, 아빠... 미안해요. 제가 두 분을 미처 지켜드리지 못했네요.”

옆에서 지켜보던 진경찬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사모님, 대표님께 연락드릴까요?”

안유경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먼저 일에 집중하게 놔두세요.”

“그럼 청소 업체를 부르거나 다른 숙소를 알아봐 드릴까요?”

안유경은 휘청이는 몸을 겨우 일으켰다.

“호텔부터 예약해 주세요. 어디든 좋으니 깨끗하기만 하면 돼요.”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모든 것이 너무 더러웠다.

아파트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훤칠한 체격의 검은 그림자가 차 옆에 기대어 서 있었고 어둠 속에서 손끝의 담뱃불만이 붉게 점멸했다.

발소리가 들리자 민해준이 고개를 들었다. 안유경을 향한 그의 시선은 복잡하고 서늘했다.

“내려왔네? 이제야 한바탕 소동이 끝난 거야?”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유경은 대꾸 없이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안유경!”

민해준이 담배를 비벼 끄고는 성큼 다가와 그녀를 가로막았다. 가까이 마주한 남자의 눈에는 핏줄이 서 있었고 턱 근육은 팽팽하게 당겨졌다.

“돌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왜 굳이 기어들어 와?”

“여기 내 집이야. 못 올 이유가 뭔데?”

안유경이 맞받아쳤다.

“네 집?”

마치 그 단어에 치명상을 입기라도 한 듯 민해준이 비릿하게 헛웃음을 흘렸다. 다시 뜬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너희 아버지는 죽었고 엄마는 정신줄을 놓았어. 이제 집이라는 게 남아 있긴 한 거니?”

그는 안유경의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 손아귀에 서서히 힘이 실렸다.

“떠나라고 한 건 내가 너한테 베푼 마지막 배려야. 제발 나 좀 가만히 두면 안 돼? 네 얼굴 보는 거 끔찍하게 싫다고. 알아들어?”

안유경은 자신의 팔을 으스러뜨릴 듯 움켜쥔 그의 투박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민해준, 3년 전에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아 타지로 쫓아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집에 원수까지 들여놓고 살아? 이게 네가 말하는 배려야? 가끔은 진짜 궁금해. 넌 그때 무슨 마에 씌었니? 왜 갑자기 원수의 딸을 사랑한다며 그 난리를 치고 나를 뼛속 깊이 증오하게 된 거야? 계기가 뭔데?”

“정신을 차렸거든.”

민해준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손에 힘을 더했다.

“너와 네 아버지의 그 거짓말 속에서 이제야 완전히 깨어났다고. 더는 너한테 안 속아!”

“거짓말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안유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에 민해준은 비참한 미소를 지었다.

“연기 그만해. 아, 맞다. 너는 원래 연기가 주특기였지. 그런데 유경아, 나도 널 위해 할 만큼 했잖아. 심지어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까지 묻어버렸어. 단지 떠나라고,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안유경은 한참 동안 민해준을 응시했다.

그가 내뱉은 말들은 속속들이 귀에 들어왔지만 한 문장으로 쭉 이으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원한을 내려놓았겠지. 그러니까 송지연과 함께한 거고.

하지만 그는 송지연을 위해 복수를 내려놓은 것이지 정작 안유경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 아닌가?

“미친 거 아니야?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 너랑 실랑이할 시간 없어.”

그 말을 내뱉은 안유경은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진경찬이 잡아준 호텔에 도착해 밤이 깊었지만, 그녀는 침대 위에서 계속 뒤척였다.

3년 전의 기억이 끈질기게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민해준과 그녀는 송지연 때문에 수없이 다퉜다. 민해준은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송지연을 그룹 프로젝트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안유경의 권한을 무력화시키고 그녀의 기획안을 가로챘으며 그녀가 아끼던 사람들마저 해고했다.

그녀를 짓밟고 상처 주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유경은 그와 헤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둘의 기념일에는 관계를 회복하고자 야심 차게 준비한 요리들로 식탁을 가득 채웠었다.

하지만 그날, 민해준은 송지연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식탁 위의 음식들을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처박고 차가운 눈길로 안유경을 쳐다봤다.

“유경아, 우리 파혼하자. 과거의 정을 생각해서 돈은 충분히 챙겨줄게. 민성 그룹도 서경시도 떠날 만큼 챙겨줄게.”

안유경은 당연히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할 따름이었다. 민해준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민성 그룹에서는 왕따 신세가 되었고 이직을 시도했지만 보내는 이력서마다 감감무소식이었다. 심지어 개인 계좌마저도 ‘거래 위험’이라는 이유로 은행에서 동결시켜 버렸다.

그 시절, 안유경은 숨 막히는 나날 속에서 세상의 냉혹함을 뼈저리게 맛보아야 했다.

한때 그녀를 에워싸던 ‘친구’들은 하나둘씩 멀어졌고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의 병원비는 바닥을 드러냈다. 아버지의 옛 사건을 재수사하는 데 필요한 자금도 턱없이 부족했고 심지어 그녀가 후원하던 유기동물 보호소마저 문을 닫아야 했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저녁, 안유경은 은행 앞 현금인출기 앞에 서 있었다. 화면에 뜬 [계좌 거래 일시 정지]라는 안내 문구를 바라보며 마침내 무너져 내려 길모퉁이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결국 그녀는 민해준이 건네준 ‘해고 수당’과도 같은 돈을 받아들고 타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 돈은 그녀의 모든 것을 사들인 대가였다. 민해준을 향한 어린 시절부터의 모든 감정까지도...

눈가가 약간 시큰거렸다. 안유경은 길게 숨을 내쉬며 생각을 털어냈다.

‘자자, 자고 나면 싹 다 잊힐 거야.’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

호텔 로비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안유경은 잠에서 깼다.

호텔 밖은 이미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총알처럼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외침, 휴대폰을 든 구경꾼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세수를 하고 로비로 내려서자 미친 듯이 터지는 플래시 세례가 그녀를 덮쳤다.

“안유경 씨! 아버지 안정국 씨가 민우석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 하실 말씀 없습니까?”

“살인범의 딸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 거죠?”

“어제저녁, 송지연 씨 가족을 폭력적으로 내쫓고 그분들의 거처를 박살 냈다는 제보가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아직도 민 대표님에게 미련이 남은 건가요? 이번 귀국이 혹시 송지연 씨와 민해준 씨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겁니까?”

질문들은 하나같이 독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인파 속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살인자 딸은 당장 꺼져!”

“너희 가족은 그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 죗값을 치러야 해!”

“그때 무고한 시민 여섯 일곱 명이나 죽었어! 네 아비 목숨 하나로는 턱도 없다고!”

그녀가 귀국한 건 어제였다. 이 호텔조차 급하게 잡은 임시 거처일 뿐인데 이들은 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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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쾌한가? 아주 조금은 그럴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그보다는 소동이 잦아든 뒤의 정적, 그리고 옅은 피로감이 더 컸다.복수가 주는 쾌감은 늘 찰나에 불과했고 그 뒤에는 더 깊은 공허함이 남기 마련이었다.“그럭저럭.”안유경은 결국 그렇게만 대답했다.“일이 해결됐으면 된 거지.”“뭐야. 왜 이렇게 덤덤해?”안유경의 차분한 태도에 류설아가 화제를 돌렸다.“그나저나 지금 어디야? 주변이 되게 조용하네.”“그냥... 아는 사람 집.”안유경은 차씨 가문의 복잡한 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마음이 없어 적당히 둘러댔다.“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며칠 더 머물 것 같아.”류설아는 더 캐묻지 않고 인터넷상의 재미있는 댓글들을 몇 개 더 읊어준 뒤 몸을 잘 챙기라는 당부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안유경이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화면이 다시 켜졌다. 민해준에게서 온 새로운 메시지였다.화면 위에 손가락을 몇 초간 멈추고 있다가 끝내 읽지 않고 그대로 화면을 꺼버렸다.옷을 갈아입고 밥을 먹으려고 먼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화장대를 지나칠 때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가 한없이 맑았다. 금방 잠에서 깨어난 나른함 외에 별다른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안유경이 거울을 보며 긴 머리를 천천히 빗어 넘겼다.창밖으로 본가의 불빛들이 하나둘씩 켜지는 풍경이 꽤 근사했다.저녁 식사는 예상외로 평온했다.긴 식탁에 차도현과 안유경 두 사람뿐이었다. 정갈한 요리들이 차례로 올라왔고 분위기는 여유로웠다.안유경은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침묵해도 되었고 차도현 역시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식사 내내 차지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방에서 죽을 먹었다는 소리에 안유경은 내심 안도했다.하지만 그 안도가 너무 성급했다.밤이 깊어지자 본가 저택이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았다.씻고 나온 안유경이 침대 머리에 기대 책을 읽다가 불을 끄려던 그때 저택 반대편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쿵 하는 소리가 적막한 밤공기를 타고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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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악의적인 추측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안유경의 과거 정보를 캐내어 제멋대로 왜곡하고 해석하기 시작했다.송지연 측에서 고용한 댓글 부대와 선동된 네티즌들은 진실을 밝혀냈다는 흥분 상태에 빠져 있었다.드디어 때가 왔다.안유경이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의 SNS 계정에 접속해 차도현의 비서가 보내준 경미란의 심리 검사 진단서 위조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올렸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이미지 비교 증거들을 조목조목 정리해 장문의 글을 작성했다.작성을 마친 후 가짜 진단서를 처음 퍼뜨린 익명 계정과 가장 열심히 퍼뜨리던 계정 몇 개를 태그한 다음 게시 버튼을 눌렀다.그러고는 노트북을 덮고 욕실로 향했다.따스한 물줄기가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렸다. 아직 환한 대낮이었지만 그래도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안유경이 넓고 폭신한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감쌌다.이불에서 햇살에 잘 말린 듯한 포근한 향기와 은은한 향 내음이 났다. 예상외로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다.눈을 감기 전 낮에 보았던 차지환의 히스테릭한 모습과 차도현의 지친 뒷모습, 그리고 인터넷의 비난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안유경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멘탈이 좋아야 여자의 인생도 잘 풀리는 법이지.”비웃음이 섞인 말투였지만 한편으론 후련함도 담겨 있었다.안유경은 깊게 잠들지 못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났다.“작은 사모님,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문밖에서 도우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안유경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개운함이 몸을 감쌌다.협탁 위에 두었던 무음 모드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이 켜짐과 동시에 쏟아지는 알림 메시지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좋아요, 댓글, 공유, 다이렉트 메시지... 붉은 숫자들이 쉴 새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부재중 전화도 두 통 와 있었다. 한 통은 민해준, 다른 한 통은 류설아였다.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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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수의 딸과 바람난 남친   제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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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수의 딸과 바람난 남친   제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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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수의 딸과 바람난 남친   제25화

    다른 한편 안유경도 경미란의 심리 검사 진단서를 조사 중이었지만 아직 뚜렷한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그러던 차에 차도현의 비서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안유경이 멈칫했다가 마우스를 움직여 메일을 클릭했다.내용을 확인한 순간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어졌다.아주 상세한 조사 보고서와 함께 여러 장의 비교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보고서는 경미란의 중증 우울증 진단서에 문제가 있음을 명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서류에 찍힌 도장과 의사의 서명 등 여러 군데가 해당 심리 클리닉에서 사용하는 실제 양식과 달랐다.결론은 자명했다. 위조된 진단서였고 이 또한 예상했던 바였다.거짓말이 일상인 경미란과 송지연 모녀라면 증거를 위조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터.안유경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톡톡 눌렀다.차도현의 일 처리 속도에 안유경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이제 막 귀국해서 회사 일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사건이 터진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런 결과물을 내놓았다.누가 차도현 아니랄까 봐 일 처리가 지극히 효율적이었다.안유경이 보고서를 저장한 뒤 컴퓨터를 껐다.창밖이 어느새 어두워졌고 도심의 불빛들이 하나둘씩 피어올랐다. 안유경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밤 9시가 다 되어갈 무렵 차도현이 퍼스트 강남으로 돌아왔다. 거실에 켜진 스탠드 조명 하나가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안유경이 무릎 위에 얇은 담요를 덮고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쳐놓고 있었지만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듯 보였다.문이 열리는 소리에 안유경이 고개를 들었다.차도현이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쳐두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가 그녀를 보며 평소처럼 덤덤하게 물었다.“밥 먹었어?”“아직.”안유경이 책을 덮었다.“같이 먹자, 그럼.”차도현은 짧게 말하고는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가사 도우미가 금세 정갈한 4첩 반상과 국을 차려냈다.다이닝 룸에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두 사람 모두 이 갑작스러운 식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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