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이게 맞나?”
“나도 몰라.”철호와 태욱은 긴장한 얼굴로 내리막길을 걸어가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이들 예배가 시작된 후.
부인인 조 선생과 영애에게 양해를 구한 두 사람은 잠시 인협의 집을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
“아니, 그 폐가에 사람이 들어와 산다꼬?” “그러니까. 못해도 10년 정도는 방치되었던 거 같은데. 우리가 소원리에 왔을 때 이미 김 씨 할머니네 부부가 돌아가신 후였으니까.” “그래?” “응.”귀향하기 전에도 영애를 따라서 소원리를 일 년에도 여러 번씩 찾아왔던 태욱이었다.
그래서 어렴풋이나마 지나가다 마주쳤던 어린 시절의 인협을 기억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읍내에 있는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때쯤 부모님의 상황이 좀 잘 풀리게 되어서 다시 인협이랑 동생을 데리고 갔다고 들었고.
태욱은 사실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두 형제의 모습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 와중에 인협이 나이에 답지 않게 어둡던 인상을 하고 있던 건 기억이 났다.
“그 꼬맹이는 어떻게 자랐으려나?”태욱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에 두 사람은 인협의 집으로 향하는 길로 꺾어 들어갔다.
“저기요, 계십니까?”목소리가 큰 철호가 담장 너머에서 외쳤다.
그러자, 이내 집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끼이익, 하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낡은 철문이 열렸다.
얼마나 관리가 안 되어있으면 저 철문에 기름칠 한번을 안 했대.
굳이 집안까지 둘러보지 않아도, 집안 상태가 눈에 훤하다고 느낀 철호였다.
“누구시죠?”그 어둡던 꼬맹이는 더 어두워지고, 가시까지 돋아나 버렸구나.
차가운 표정으로, 마당으로 걸어 나오는 인협을 본 태욱은 속으로 생각했다.
인협의 두 눈은 고요하고 어두워 보였으나, 동시에 세상을 향해 불만 가득한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 인협아. 나 태욱이 아저씨야, 기억나? 문 씨 할머니네 첫째 딸인 영애 이모의 남편.” “아-.”태욱의 기나긴 소개에도 인협은 꼿꼿한 태도로 일관했다.
큰일이네, 이거. 생각보다 어렵겠는데.
갑순이 인협을 한번 봐주기를 왜 그리 간절하게 부탁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마지못해 건네온 인협의 인사에 철호와 태욱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저 옆집에 갑순 할머니 알지요? 할머니가 이 집을 한 번만 보고 보수해달라고 사정 사정을 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싫어요.”태욱의 망설임을 알아차린 철호는 단번에 인협을 찾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는, 성질 급한 철호의 평생 철학이었다.
“네?” “알다시피 집이 10년 가까이 방치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셨으니까 원체 관리가 안 되어있었을 거고,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안 살아서 집안이 엉망일 건데-.”철호의 눈에도 인협은 아직 완전히 여물어지기 전인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회는 그를 성인이라 인정하고, 다 자란 어른이라고 인정해도 50대 어른의 눈에는 스물다섯인 인협도 이런 집에서 살기에는 지나치게 앳되어 보일 뿐이었다.
“됐습니다.” “네?”인협의 차가운 거절에 어느 정도 예측했던 태욱은 눈을 꾹 감았고, 철호는 입을 헤벌린 채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됐다고요. 저는 이런 도움 원한 적 없습니다.” “그게-.”흔들리는 철호의 두 눈에 멀리서 볼 때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집의 외관이 들어왔다.
지붕 상태도 엉망인 데다가, 집 외관도 고치고 보수할 곳이 수십 가지였다.
외관도 이런데, 하물며 사람이 사는 공간인 집 내부일까.
“돌아가세요.” “아니-.” “이만 돌아가자.”인협의 단호한 거절에 황당해하는 철호의 한쪽 어깨를 손으로 살짝 붙든 태욱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자. 집주인이 싫다잖아.”철호는 다정하지만, 표현은 조금 투박한 편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나고 자랐던 태욱보다 속정은 훨씬 더 깊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인협같이, 딸뻘인 사람이 이런 엉망인 환경 속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납득이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협의 집 보수를 해주기 위해 혈안이 되어 버린 것이고.
그러나 송곳니를 드러내고서 으르렁거리는 인협의 선을 넘는 게 좋지는 않겠다는 판단이 선 태욱이었다.
이 엉망인 집에서 살기를 고집 피우며 자존심을 내세우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쯤 되면 물러서야 할 때임을 태욱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자.” “안녕히 가세요.”태욱의 반복된 권유에 인협은 차가운 인사 한마디를 남기고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니-.” “쉿.”억울하고도 황당한 마음에 무언가 토로하려던 철호에게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한 태욱은 그를 데리고 마을 길로 나왔다.
인협의 집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서야, 철호의 입이 터졌다.
“아니, 유진이보다 어린 녀석이 무슨 세상 다 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보기 드문 청년일세. 집을 공짜로 고쳐주겠다는데도 저런 썩어빠진 집에서 살아보겠다고 하고-.” “사정이 있겠지.” “아이고, 내 속이야. 뉘 집 아들내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이 속이 썩어나시겠네.” “부모가 애한테 관심이 있었으면 애가 이 깡촌에 들어와 저런 꼬라지의 집에서 이러고 있겠어?”늘 밝고 다정한 편인 태욱의 비꼬는 어투에 철호가 놀란 얼굴을 했다.
“아니, 이런 말투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웬 제대로 된 고슴도치 한 마리가 동네에 들어왔네.”껄껄. 철호의 말을 회피한 태욱은 소리를 내어 웃을 뿐이었다.
“고슴도치는 귀엽기라도 하지. 그, 어디 자연 다큐에서 봤는데 아프리카 어딘가에 산미치광이라는 게 있던데. 딱 그것 같아.”태욱의 말에 철호는 대놓고 투덜거릴 뿐이었다.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네. 영애를 만나기 전까지 세상에 잔뜩 뿔이 나 있던 그 시절이.
태욱은 이제는 다른 사람의 과거처럼 느껴지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저 가시들은 또 누가 뽑아주려나? 분명 저 가시보다 더 단단한 손을 가진 여자가 한 명 있을 텐데 말이야.
태욱은 제 과거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
아이들 예배가 끝난 후.늘 늦게까지 남아서 도우미를 자처해 주는 정렬과 함께 뒷정리를 마친 에스더는 떠날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아, 황 선생님!” “사모님!”소원 초등학교의 최고 모범생인 예담의 엄마이자, 가끔 심심할 때마다 학교로 도둑 수업을 들으러 오는 어린 예솜의 엄마인 지혜였다.
식당에서 올라온 지혜의 양손에는 남은 반찬이 담겨있는 반찬통이 담긴 봉지가 두 개 들려있었다.
일요일마다 남은 반찬을 지혜는 늘 마을에 혼자 사는 사람 위주로 나눠주고는 했다.
그중에 한 명은 에스더였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반찬이 좀 많이 남았나 봐요?” “그러니까요. 이렇게 대량으로 할 때마다 양 조절이 잘 안되네요. 모자란 것보다 많은 게 낫다 싶어서 양을 자꾸만 늘리다가 맨날 이래요.”에스더의 질문에 지혜가 민망해하며 웃음을 흘렸다.
“감사해요.” “아 참, 선생님. 갑순 할머니 댁 옆집에 손주분이 들어오셨다고-.”지혜의 말에 에스더는 방금 받아 든 두 개의 봉지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혹시 가시는 길에 그쪽에도 하나 갖다드리는 걸 부탁드려도 될까요?”그분은 이걸 받자마자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릴지도 몰라요, 사모님.
에스더는 진실을 알리고 싶었으나, 순수한 지혜의 눈망울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아, 인협이네 들리게?”그때 집으로 출발하기 전에 교회 화장실에 들리기 위해 잠시 안으로 들어온 갑순의 음성이 들려왔다.
갑순과 복란은 종종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교회에 남아 사람들과 수다를 떨다 돌아가고는 했다.
“네, 할머니.” “그럼 혹시 인협이한테 내 소쿠리도 좀 받아서 우리 집 앞에 놔줄 수 있을까?” “아-.”에스더는 어제의 만남의 끝을 떠올리고는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망했다.
속마음과는 다르게 에스더는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할머니나 사모님이 그 인간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내가 하는 게 낫겠지.
어쭙잖은 정의감일지 배려심일지 모를 마음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아으아아악-.”교회에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며 에스더가 절규했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속마음 담긴 소리를 내뱉고는 에스더는 주변을 빠르게 두리번댔다.
다행이다. 아무도 못 들은 것 같아.
“어? 철호 아저씨. 태욱 아저씨-.”절망 속에 길을 걸어 내려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 올라오는
태욱과 철호가 에스더의 눈에 띄었다. “퇴짜 맞았어요.” “황 선생님, 저 친구 보통내기가 아니네요. 이야기 나눠본 적 있으세요?”태욱과 철호가 허허 웃으며 인협과의 첫 만남에 대한 감상평을 늘어놓았다.
“그럼요. 쉽지 않으셨죠?” “아잇, 선생님. 서운해요. 아셨으면,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시지.” “사실 그럴까 했었는데, 그러면 두 분이 안 가실 거 같아서요.”에스더의 대꾸에 철호는 깊은 공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러네요.” “어제 봤는데, 집 상태가 워낙 엉망이더라고요. 그리고-.”그 사람도 적잖이 위태위태해 보였고요.
에스더는 끝말은 생략한 채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 눈치가 빠른 태욱과 철호는 그녀가 하지 못한 말의 의미를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사모님이 인협이 반찬 갖다주래요? 줘요, 내가 대신 다녀올게요.”에스더 손에 들린 두 봉지를 발견한 태욱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마 막내딸보다 어린 에스더가 인협의 날카로운 가시에 찔릴까 싶어서 배려의 마음으로 제안을 한 듯 싶었다.
“괜찮아요. 오늘의 분량은 충분히 다 하신 듯해요, 아저씨.”에스더의 당찬 말에 철호와 태욱은 소리를 내어서 껄껄껄 웃었다.
“그래요, 그럼.” “우리는 와이프 얼굴 보며 다친 마음 힐링을 좀 해야 하겠어요.”태욱과 철호는 에스더의 선택을 존중하고는 다시 오르막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괜히 내가 간다고 했나?
에스더는 결의를 다지고서 길을 걸어 내려가며 생각했다.
“아냐, 무서워하면 지는 거야.”무서워할 이유 따위는 없는 거야.
원래 요란하게 짖어대는 사람은 분명 약함이나 두려움을 감추려고 그러는 법이니까.
에스더는 반찬통이 담긴 비닐봉지를 꼭 붙들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에스더는 오늘은 또 어떤 막말을 마주해야 할까 하는 의문을 품고서 걸음을 서둘렀다.
똑똑. “미치겠네.”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끄으응-.”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
같은 날 점심시간 무렵. 카페가 유독 바쁜 날이라 카페 사장인 아내 영애를 도우러 출근한 태욱이었다.그는 가게 일을 돕다가 잠시 한산해진 틈을 타 커피 한잔을 하며 쉬는 중이었다. “철호!”태욱은 그때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뜻밖의 손님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비싼 커피보다는 인스턴트커피가 제 입맛에는 제격이라며 읍내에서 일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에 절대 들리지 않던 철호였다. 대개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철호의 얼굴이었지만,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서글서글해지는 얼굴이 웬일로 가장 친한 태욱을 발견해 내고 나서도 여전히 굳어있었다. 어딘가에 영혼을 빼앗겨버린 듯한 철호의 모습에 태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태 봐왔던 철호의 모습 중 새로운 모습이었다. ”태욱아.” “웬일이야, 여기에는? 철물점은?”카페 한구석에 빈자리에 앉아 있던 태욱 맞은편 의자에 철호는 쓰러지듯 앉았다. 다리가 풀려버린 사람처럼. “태욱아.” “커피 한잔 내려줄까? 달달하고 따끈한 거로?”평소에 펄펄 끓는 물로 만든 인스턴트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하는 철호였다. 뜨끈한 기운이 몸을 데워줘서 좋다나. 그런 철호의 취향을 아는 태욱은 인스턴트커피와 얼추 비슷한 달달한 라떼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시원한 걸로 내려주라. 내 속에 천불 좀 끄게.” “뭐?” “……..”놀란 태욱이 되물어도 철호는 말없이 카페의 자랑인 바다 풍경만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잠시 답을 거부하는 그 옆모습을 읽어낸 태욱은 바로 향해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영애가 이 카페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만 고생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태욱은 그녀 옆에서 부지런히 카페 일을 배워서 그녀를 보좌했었다.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고정으로 돌릴 직원이 생겨난 데다가, 갑자기 맡게 된 영애의 조카들 때문에 태욱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 여보? 커피 한잔만 하고 바로 집에 들어간다면서?”카운
주중 어느 평범한 날 낮.“아니, 거기 김씨네 첫째 손주 만나봤나?”“아휴, 말도 마. 성질이 어찌나 고약한지. 지난번에는 지나가다 나를 맞은편에서 이렇게 딱 맞닥뜨려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지나가더라니까-.”“하여튼, 그 버르장머리 보면 김 씨 아주머니네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거야.”고 이장의 부인 심 씨가 부쳐다 놓은 전 몇 장을 중간에 두고서 막걸리와 함께 어른 몇이 함께 밭일을 하던 차림으로 새참을 먹고 있었다. 6월 중순으로 치닫는 시간 속 햇볕은 매우 뜨거웠다. 멋보다는 기능에 더 치중한 모자나 토시 같은 걸 잔뜩 걸친 모두는 고 이장의 넓은 밭 한 귀퉁이에 그늘진 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오늘의 멤버는 고 이장, 심 씨, 소원 초등학교 교장 구본용, 그의 부인 정 씨, 그리고 정렬의 아버지 원길이었다. 여기다 종종 최 씨까지 함께 자리하고는 했는데, 최 씨의 밭은 동떨어져 있기도 했고, 그는 가게 핑계로 밭일 품앗이에서 종종 제외되고는 했다. 오늘은 마을에서 가장 넓은 고 이장의 밭에 나 있는 물꼬를 점검하고 보수하는 날이었다. 보통은 6월 말에 찾아오는 끈질긴 장마 때문에 소원리는 6월을 기점으로 많이 바빠졌다. 이전해 장마로 인해 모양을 잃은 물꼬를 보수하고, 그곳에 있는 이물질들을 잘 치워줘야 장마철에 밭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양은 주전자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서로의 잔에 채워주며 그들은 아침 노동의 피로를 덜어내고 있었다. “아휴, 매년 도와줘서 고마워요.”“아이, 우리 형님들 일이면 나서서 도와야죠.”심 씨는 원길의 잔에 막걸리를 채워주며 감사 인사를 했고, 원길은 쑥스러워하며 대꾸했다. “크으-.”원길이 시원하게 막걸리를 들이키자, 심 씨와 정 씨가 순간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원길이 거나하게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온 마을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김 씨 아주머니네 첫째 손주가 어떤데 그래요? 어렸을 땐 그래도 고분고분하더니만.”원길의 질문에 최근에 인
가로등도 제대로 없는 어두운 시골길을 포터는 열심히 내달렸다. 읍내로 나가던 길의 차 안 분위기와 돌아오는 길의 차 안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차 안은 여전히 고요했으나, 에스더와 인협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이 많이 완화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직접 나눈 대화는 거의 없었으나,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있었다.서로가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 서로가 아닌 정렬을 향해 보내던 따스한 모습들은 두 사람 모두에게 ‘이 사람도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 심어준 듯싶었다.정렬 씨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 사람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던데. 묵묵히 창밖만 내다보던 에스더는 치킨집에서 보았던 인협의 여러 모습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녀 앞에서나 다른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성격 파탄자처럼 굴던 그가 유일하게 정상인처럼 보이던 시간이었다.저 사람도 사람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할 만큼. 인협을 속으로 마음껏 비웃고 미워하던 시간만큼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와 동시에 인협이 소원리로 오게 된 이유를 가볍게 치부했던 것도 떠올랐다. 어쩌면 저 사람에게도 타당하고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는지도 몰라, 라는 생각과 함께.어느새 포터는 소원리 입구로 진입했다. 차 한 대만 겨우 지나다닐 만한 길을 어둠 속에서도 정렬은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그만큼 이 동네에 익숙한 그였다. “어어-.”그때 포터가 소원 초등학교 교문 앞을 지나쳐 내리막으로 향한 탓에 에스더가 놀란 소리를 냈다. “아, 형 먼저 내려주고 선생님 내려드릴게요.” 정렬이는 다 생각이 있었구나. 인협은 어둠 속에서 고요히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늦은 시간에 핑계를 대고 관사 앞까지 걸어가서 데려다주기 딱 좋을 터였다. “응, 나 먼저 내려줘.”물론 에스더에게 정렬이 아깝다고 생각한 인협이었지만, 저 정도로 좋아 죽으려는 정렬의 마음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인협의 말에 정렬은 재빠르게 인협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 앞에 차를 세웠다
신화읍의 어느 한 옛날 통닭집.다섯 자리 남짓 있는 홀 한구석에는 세 사람이 앉아서 치킨을 시켜두고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에스더와 정렬만 신나서 이야기하는 동안, 인협은 묵묵히 500cc 잔을 말끔히 비워내는 중이었다.정렬은 앞에 콜라를 두고 있었다. 술만 들어가면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로 인해 정렬부터 시작해 그의 동생들까지도 술이라면 입에 대기도 싫어했다. “그래서 유림이가요-.” “하하하-.”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정렬의 막둥이 동생들의 학교생활 이야기에 인협은 조용히 술잔을 다 비워냈다. 차라리 이 편이 나았다. 이런 불편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이 어쭙잖게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면, 인협은 다시는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을 터였다. 그러나, 서로로 인해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듯한 두 사람을 인협은 묵묵히 구경만 하면 됐다. 사실 에스더가 주로 떠들고, 정렬은 떠드는 에스더를 사랑스러워하며 중간중간에 그녀가 필요한 것을 굳이 말을 하거나 내색하지 않아도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그게 약간 힘든 부분이기는 했지만, 오랜만의 나들이에 나쁘진 않았다. 에스더의 맞은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정렬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한순간도 가시지를 않았다.아무래도 데이트에 낀 건 맞는 거 같은데. 그럼, 고제환은 도대체 뭐지? 인협은 날개 부위를 뜯으며 에스더와 인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형은 어쩌다가 소원리로 다시 오게 된 거야?”다 뜯은 날개뼈를 뼈통에 집어넣으려던 인협은 정렬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아-.”어렸을 적, 교육을 위한다는 아버지의 횡포로 인해 컴퓨터는커녕, 인터넷도 없는 집에서 살던 정렬이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렬은 돌아가는 세상사에 유독 관심 없어 했었다. 인협은 프로게이머라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죽어도 숨길 예정이었다. 애초에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 사람들만 있는 곳이 이곳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어느 날 불현듯이 소원리가 떠올랐는지도 몰랐다. 진실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