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신화읍의 어느 한 옛날 통닭집.
다섯 자리 남짓 있는 홀 한구석에는 세 사람이 앉아서 치킨을 시켜두고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에스더와 정렬만 신나서 이야기하는 동안, 인협은 묵묵히 500cc 잔을 말끔히 비워내는 중이었다.
정렬은 앞에 콜라를 두고 있었다.
술만 들어가면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로 인해 정렬부터 시작해 그의 동생들까지도 술이라면 입에 대기도 싫어했다.
“그래서 유림이가요-.” “하하하-.”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정렬의 막둥이 동생들의 학교생활 이야기에 인협은 조용히 술잔을 다 비워냈다.
차라리 이 편이 나았다.
이런 불편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이 어쭙잖게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면, 인협은 다시는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을 터였다.
그러나, 서로로 인해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듯한 두 사람을 인협은 묵묵히 구경만 하면 됐다.
사실 에스더가 주로 떠들고, 정렬은 떠드는 에스더를 사랑스러워하며 중간중간에 그녀가 필요한 것을 굳이 말을 하거나 내색하지 않아도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그게 약간 힘든 부분이기는 했지만, 오랜만의 나들이에 나쁘진 않았다.
에스더의 맞은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정렬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한순간도 가시지를 않았다.
아무래도 데이트에 낀 건 맞는 거 같은데. 그럼, 고제환은 도대체 뭐지?
인협은 날개 부위를 뜯으며 에스더와 인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형은 어쩌다가 소원리로 다시 오게 된 거야?”
다 뜯은 날개뼈를 뼈통에 집어넣으려던 인협은 정렬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아-.”어렸을 적, 교육을 위한다는 아버지의 횡포로 인해 컴퓨터는커녕, 인터넷도 없는 집에서 살던 정렬이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렬은 돌아가는 세상사에 유독 관심 없어 했었다.
인협은 프로게이머라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죽어도 숨길 예정이었다.
애초에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 사람들만 있는 곳이 이곳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어느 날 불현듯이 소원리가 떠올랐는지도 몰랐다.
진실 여부를 떠나서, 세상에는 배반자이자 위법자가 되어버린 그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무척이나 싫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눈에는 돌팔매질 당해야 마땅한 그가 숨어들 수 있는 구석 하나쯤은 필요했으니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어낸다거나, 단단한 피난처를 만들어보겠다는 마음은 티끌조차 없었다.
한 사람이 그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그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냥. 공부 때문에 바빠서 할아버지 할머니 장례식에도 안 온 놈이 뭔 할 말이 있겠냐마는. 그냥 이곳이 떠올랐어.”
그냥이라는 말이 그냥일 리가 않으리라는 걸 모를 만큼 어리숙하지 않은 에스더와 정렬이었다.
더럽게 사연 있는 척 구네. 보나 마나 별것 아닌, 배부른 사람의 하소연이겠지.
여기서 살면서 일도 안 구하고 계속 소원리에서 이렇게 죽치고 있는 것 보면.
에스더는 속으로 몰래 인협을 비웃고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인협은 어렸을 적부터 무뚝뚝하고 직설적인 편이었지만, 마음까지 차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을에 있던 또래 그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라는 건 당시에 소원리에서 가장 약자 중 하나였던 정렬이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왜소했던 체구와 동네에 퍼진 그의 가정사에 관한 소문 때문에 그는 열 명 남짓 되는 아이들 중 왕따였다.
아이들의 부모도 폭력적인 아버지를 둔 정렬과 어울리는 걸 대놓고 싫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폭력적으로 군 건 그들의 아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서울에서 전학을 왔던 인협이 나서서 정렬을 보호해 주고 그와 함께해준 덕분에 그는 곧잘 또래 아이들과 다시 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동네에서 따돌림이 심했을 적에는 인협은 정렬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할머니를 졸라서 얻어냈던 구형 컴퓨터로 온갖 게임을 알려주고 시켜주었다.
비록 정렬이 게임에 소질이 있거나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으나, 인협과 함께할 수 있는 편안한 시간이 좋아서 그는 꼭 인협 곁에 붙어서 그가 하는 게임들을 구경하고는 했었다.
“공부를 워낙 잘했었으니까, 형은.” “너도 잘했었잖아. 근데, 너는? 너는 왜 이곳에 남아 있었어?”
인협의 질문에 에스더가 정렬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도 정렬로부터 직접 들었던 건 아니지만, 젊고 똑똑한 편인 정렬이 왜 굳이 시골에 남아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정렬은 미소 띤 얼굴로 잠시 콜라 잔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앞에서는 굳이 숨길 이유가 없겠다 싶네. 아버지 때문이지, 뭐.” “아버지 아직도 그러셔?”정렬의 말에 인협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정렬의 아버지인 원길이 술만 들어가면 폭언과 폭력을 행사한다는 소문은 그 당시의 소원리에도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마을의 맨 안쪽에, 소원리 교회가 지어지기 전에는 다른 집들로부터 유독 멀리 떨어져 있던 집이라서 소리가 많이 들리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원길이 아이들이나 그의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이젠 안 그러셔. 나도 컸고, 내가 이곳에 있으니까.”정렬의 말에 미래가 창창해 보이던 그가 이 외딴 시골에 굳이 남아 있는 이유를 모두 짐작해 낸 인협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너도 참 기구한 생을 살고 있구나.
“정아랑 정민이는 애저녁에 이곳을 떴어.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여기에는 절대로 안 돌아오겠다고 으름장을 놓고서 나갔는데, 진짜로 한 번도 안 돌아오네.”
“……….”세 사람에게 정적이 찾아왔다. 정렬은 조용히 콜라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사실은 성인이 되자마자 이 마을에서 도망칠 생각이었거든? 근데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에 막둥이 동생들 둘이 덜컥 생겨버렸지 뭐야. 웃기지?”하나도 웃기지 않은 이야기에 혼자서 푸흐흐, 웃음을 흘린 정렬은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은 그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겨우 아기들인 애들을 보는데, 그런 아기들이랑 노산에 몸이 더 약해져 버린 엄마만 이곳에 두고 도저히 갈 수가 없더라고.” “미련한 놈.”인협의 입에서 나온 욕설에 에스더는 그를 째려보았다. 그러나 정렬을 바라보는 인협의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늘 묵묵히 견뎌온 정렬을 대신해 느끼는 속상함과 잃어버린 그의 지난 몇 년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 속마음을 읽어낸 에스더는 잠시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생각보다 둘의 사이는 깊구나, 라는 생각에 에스더는 이 대화에서 잠시 빠져주기로 마음을 먹고는 치킨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아. 유림이랑 정결이가 얼마나 예쁜데. 꼭 내 자식들 같아.” “그거야 불 보듯 뻔하네. 네가 다 키웠으니까, 정이 들었겠지.” “빙고.” “진짜로 후회하지 않아?”인협의 말에 쿡쿡하고 웃는 정렬의 눈은 왠지 모르게 슬퍼 보여서 인협과 에스더를 절로 입을 다물고 그를 기다려주게 만들었다.
제 선택에 관해 후회하는 제 모습조차도 잘못으로 돌려버린 탓에 어쩌면 정렬은 후회하는 방법조차도 잊어버린 줄도 몰랐다.
“그렇다고 여기에 남은 걸 후회하면 너무 슬프잖아. 그러면 꼭 유림이랑 정결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 같으니까.”정렬의 마지막 말에 인협의 눈에도 잠시 이채가 서렸다.
서울에서 어두운 방 안에 자신을 몰아넣고서 얼마나 후회했던가.
당연한 것처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이스포츠 세계에 일찍이 발을 들였던 것, 성공이라는 걸 거머쥐기 위해 저를 돌봐주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위한 인간의 도리도 저버리고 장례식에 안 가기로 했던 선택, 그리고 저에게는 한없이 아끼면서도 가족들에게는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고생의 값을 모두 넘겨주었던 것.
절벽 아래로 떠밀린 후에는, 그동안에는 뒤돌아보지 않았던 선택들 중 후회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었다.너도 간혹 감정적으로 떠밀려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렇게 후회했었을까.
아니면 너무 그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버려서 이제는 뭘 후회해야 할지 몰라 스스로만 지독히 미워하는 지경에 다다랐을까.
인협의 혀끝에 마지막 질문이 걸렸지만, 그는 그것을 맥주와 함께 넘겨버렸다.
이미 그 선택들을 하고서 책임져 온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너무 잔인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인협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회는 후회고, 예쁜 아이들은 아이들이죠.”침묵만 흐르던 테이블 위로 에스더의 담담한 말이 툭 던져졌다.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있던 두 남자는 시선을 돌려 에스더를 바라보았다.
“후회는 내가 살아왔던 과거에 대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감정이죠. 늘 선택하지 못했던, 알 수 없는 또 다른 미래에 대한 미련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거니까요. 대신, 그게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을 잡아먹게만 두지 않으면 되는 것 같아요.” “…….” “스치듯 후회라는 감정이 올라올 수는 있죠. 우리는 어두운 감정도, 밝은 감정도 모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니까요. 그것까지 억누르느라 지금 충분히 고생하고 있는 자신을 너무 괴롭게 하지는 말아요.”에스더의 조언에 묵묵히 귀 기울이는 정렬의 얼굴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감정이나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옅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언젠가 내게 거대한 바위 같았던 감정과 기억은 시간이 흐르니 점점 삶에 더해지는 행복한 기억에 깎여나가서 작아지기는 하더라고요.”에스더는 말을 마친 후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움직임을 조용히 지켜본 인협의 눈에는 의아함이 스쳤다.
그 바위가 무엇이길래.
한치의 그늘도 없어 보이던 에스더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그림자에 인협은 궁금해졌다.
“다 저마다의 이유로 이 좋은 소원리에 오거나 남게 된 거네요, 그렇죠?” “…….” “그러니까, 우리 건배나 한번 해요!”일부러 더 쾌활한 목소리로 잔을 든 에스더의 행동에 나머지 두 사람은 얼떨결에 잔을 들어 건배했다.
감사합니다 :)
본용의 집 마당. “아니, 너 내 연락을 왜 이렇게 안 받아? 걱정돼서 찾아왔잖아.”보통은 정 씨가 심 씨의 집으로 찾아가거나, 심 씨가 불러내는 곳으로 늘 나가고는 하던 정 씨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행여나 재형에 관한 소문이 안 좋게 퍼져 나갈까 봐 심 씨의 연락을 못 본 척하고서 집에만 있던 정 씨였다.잔뜩 심통 난 심 씨의 표정을 본 정 씨는 곤란한 기색을 감추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심술맞은 심 씨의 눈 밖에 나봤자, 재형에 관해 좋은 말을 할 리가 없는 그녀였기 때문이었다.“아, 우리 둘째 성모 있잖아. 성모가 아들 재형이 좀 몇 달간 돌봐달라길래.” “그래서, 내 연락을 못 받아? 말이 안 되잖아. 재형이는 지금 학교 갔지?” “그렇긴 한데, 새 식구가 집에 들어오면 할 일이 워낙 많잖아, 언니….”정 씨의 파리한 얼굴을 흰자가 유독 많은 큰 눈으로 살핀 심 씨는 코웃음을 크게 쳤다.“어쭈? 그렇다고 내 연락도 다 씹고 집에만 있었다? 야, 너 의리가 없어도 너무 없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참, 손주를 아들이 버리고 간 건 아니고?” “뭐, 뭐라고?” “거짓말하는 거지, 너? 어제 네 손주 세상 떠나가라 통곡하는 소리 다 들었어. 내가 바보야? 이런 것도 눈치 못 채게?”“언니, 아무리 그래도 버리고 갔다는 표현은 좀….” “그리고, 너 자식들이 연락 끊은 거지? 바빠서 못 오기는 못 오길. 딱 봐도 네 심보 못 견뎌서 아들들이 연락 끊은 것 같더구먼.”가까운 사이였던 사람이 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하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를 난도질해 대는 심 씨를 보며 정 씨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정 씨는 순간 화도 났지만, 누굴 탓하리오. 다 본인이 쌓아 올린 업보나 다름없었다. 심 씨의 방식이 우악스럽고 교묘해서 싫었으나, 어찌 됐든 마을의 실세인 이장에게 붙어있으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겠지라는 생각에 심 씨에게 여태 붙어있던 정 씨였다.심 씨의 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워듣다 보니, 정
소원 초등학교의 교실 안. 퉁퉁 부은 눈에다가 세상 모든 것을 미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은 재형은 맨 뒷자리에서 나름의 시위를 하는 중이었다. 본용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처음에는 상냥하게 타이르던 제환도 이내 포기해 버린 그였다. 어마어마한 똥고집으로 제환을 꺾은 재형은 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도 모두 무시한 채로 3교시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다음 시간은 음악 시간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들뜬 목소리로 나 선생님이라는 사람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지난번 수업 때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를 불렀던 모양이었다. 시골 촌뜨기 아니랄까 봐. 촌스럽기는. 요즘 스마트 보드에다가 영상 틀어놓고 수업하지, 누가 노래 부르고 박수치면서 놀아. 재형은 팔짱을 낀 채로, 속으로 쉬는 시간에 들려오는 아이들의 대화를 마음껏 무시했다. 이내 종이 치고 앞문이 열렸다. “어?!”학교에 울고불며 하는 상태로 끌려온 뒤로는 계속 반항하는 상태로 버티던 재형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재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로 넋이 나간 재형을 본 모든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뭐야?” “왜 저래?”누가 뭐래도 재형의 시선은 인협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언젠가는 재형의 최악의 얼굴보다 훨씬 더 어두웠던 그의 얼굴에. 인협은 무표정한 채로 눈썹만 올려서 그런 재형을 쳐다보았다.“고재형, 맞지? 나는 교장선생님 손자라고 안 봐줘. 수업 시작했어, 앉아.”인협의 단호한 말에도 재형은 그대로 굳은 채로, 집게손가락으로 인협을 가리켰다.“나…. 나인협이다.” “야, 고재형! 선생님 이름을 그렇게 막 부르면 어떡해!”바로 앞자리에 앉은 맏형 기훈은 재형을 매우 걱정하며 그에게 속삭였다. 인협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재밌는 선생님이었지만, 동시에 소원 초등학교에서 가장 엄한 선생님이기도 했다. “뭐야?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교장선생님 집에서 지내다 보니, 내 이름이라도 미리 들었던 건가.인협은
“내일이면 드디어 퇴원을 하네.”청천벽력 같던 암 진단에 과연 이번 여름은 잘 넘길 수 있을까, 라고 고민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순옥이 미소 띤 얼굴로 말하자, 투박한 손을 열심히 움직여 사과껍질을 까던 철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시간이 참 빨라, 그렇지?” “그러니까….”순옥은 아직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수술 부위 쪽에다가 손을 갖다 댔다. “이제 추적검사만 남았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 집에 돌아가서 관리 잘하면서 살아보자.” “그래요.”철호의 응원에 순옥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6인실에 있느라 방을 같이 쓰는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살뜰히 챙겨주는 의료진과 정이 어느 정도 들었지만, 동시에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다. “어서 돌아가자. 그리고 편하게 발 뻗고 우리 침대에서 자자고.” “그러게. 당신이 불편한 간이침대에서 자느라 고생 많았어.” “그간 고생은 당신이 더 했지. 원래 환자 본인이 제일 힘든 거야.”철호의 말에 순옥은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에 미소를 지었다. “소원리 사람들 소식 듣고는 모두 병문안 온다고 난리를 쳐댔었는데, 사실 내가 당신 몰래 다 막았어.” “그런 것 같았어.”“당신, 주변 사람들한테 워낙 약한 모습 보이는 거 안 좋아하니까.”철호의 배려에 감동한 순옥은 그의 허벅지 위에 손을 살짝 올렸다. 철호는 이내 다 깎은 사과 한 점을 이쑤시개로 집어서 순옥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눈앞에 안 보여도 이리 모두를 신경 쓰는데, 눈앞에 보이기라도 하면 또 그 사람들 배려하느라 당신은 못 챙겼겠지. 이런 상황에서만큼은 나 당신이 그러는 거 못 보겠더라고.” “그랬을 거야. 덕분에 회복 잘했네. 고마워.”순옥은 철호의 말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장장 30년이 넘는 결혼생활 끝에 그녀를 그녀보다 잘 아는 철호였다. “내가 당신의 예쁜 얼굴에 버금가는 예쁜 마음씨에 반해서 내가 쫓아다닌 거긴 하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어.”철호
“어때? 인협이랑은 잘 이야기해 봤어?”해가 진 늦은 저녁 시간. 갑순이 대뜸 영애의 집에 복란과 함께 쳐들어왔다. “어르신, 이러시면 저는 무섭습니다. 내일 아침에 물으셔도 될 텐데요.” “내일 새벽에 출근하고 해 떨어지고 퇴근할 거잖아. 오늘이나 내일이나 같은 시간에 찾아오게 생겼구먼.“막무가내로 구는 갑순의 말에 소리를 내어서 웃음을 터뜨린 영애는 순순히 갑순과 복란을 집안으로 인도했다. “어? 할머니,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기훈과 기정이 편한 내복 차림으로 놀다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영애가 태욱에게 눈짓하자, 태욱이 거실 소파에서 일어났다.“얘들아, 고모부가 책 좀 읽어줄까?” “네!“ ”그럼 방안으로 같이 들어가자!“ ”와아아!!“태욱의 제안에 신이 난 어린이들은 단숨에 복도를 향해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문을 닫자, 거실에는 정적이 흘렀다.”인협이 때문에 오신 거죠?“ ”말해 뭐 해. 뭐라든? 그 녀석,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있었어?”갑순의 퉁명스러운 어투에 묻어나오는 애정에 영애는 또다시 웃고 말았다.“참, 이렇게 애정이 많으신데 말투만 좀 부드럽게 해봐요 아주머니. 그래야 상대가 어떤 애정을 받는지 알지.”“됐어. 나이를 먹더니 잔소리가 늘었다, 영애야?” “그럼요, 저도 이제 인생 후반부에 다다랐는데요. 잔소리 좀 할 줄 알게 됐죠.“ “허이고, 참. 시간 없어. 빨리 본론부터 알려줘.”갑순의 재촉에 영애는 미소 띤 얼굴로 팔짱을 꼈다.“인협이,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똑 부러지고 야무진 아이예요. 상처가 많아서 그렇지, 요새 애들 같지 않게 속도 깊고요.” “그래서? 땅은 바로 받겠대?” “아뇨, 땅 명의는 아무나 열람할 수 있다고 하니까 나중에 돈이 필요해지면 현금화해서 천천히 받겠대요.” “그 야무진 녀석. 다행이다, 다행이야.” “지난번에 부용이가 찾아왔을 때, 인협이를 보고 갔다고 하셨죠?” “그래, 걔네가 학교로 갈 일이 그거 아니면 뭐가 있었겠어.” “…….
춘천의 대학병원 앞 정원. “우리 유진이랑 주아는 잘 있으려나?”링거대를 끌며 철호와 천천히 정원을 거닐던 순옥이 무성한 나무들을 둘러보며 철호에게 물었다. 그녀의 팔짱을 끼고서 걷던 철호는 그녀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온종일 옆에서 고생하는 나는 안 보여?” “아이, 당연히 알지.” “일단 눈앞의 나랑 당신만 생각해. 뭐 하러 잘 살고 있는 애들 걱정을 해?” “아니, 잠깐씩 집을 비운 적은 있어도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유진이랑 주아만 있는 건 처음이잖아.” “으이그, 자식 걱정은 눈 감을 때에야 끝난다더니. 30이 넘은 딸아이를 뭘 그리 걱정해. 걱정하지 마, 당신이 유진이 아주 번듯하고 예쁜 어른으로 잘 키워냈고, 그렇게 잘 큰 유진이가 예쁜 주아를 잘 돌보고 있을 거야. 야무지게.”철호의 잔소리에도 완전히 걱정을 놓지 못한 순옥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같은 나라에 있어도 이리 오랫동안 볼 수가 없다니.“주아 데리고 병문안이라도 오라고 해? 왜, 당신이 주아랑 유진이가 먼 길 오는 건 또 싫다며.” “응.” “아휴, 어젯밤에도 영상 통화 해놓고 참 걱정도 많아요.” “몸이 아프니까 되려 더 걱정돼. 평소에는 괜찮겠거니, 했던 일들도 걱정거리가 되고.”순옥의 힘없는 음성에 철호는 그녀를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예쁜 아주머니. 걱정 그만하세요. 오늘 회진 때 의사 선생님이 이 정도 속도면 다음 주에 퇴원하고 통원 치료만 받으면 된다고 하셨잖아.” “응.” “그러니까, 다음 주에 퇴원하는 거에만 집중해. 돌아가면 귀찮을 만큼 애들 볼 수 있으니까.” “응.” “당신도 참. 육아가 체질인 사람인가 봐. 누구는 황혼에 하는 손주 육아가 그렇게 힘에 부치고 귀찮다던데. 손주도 모자라서 소원 초등학교 아이들도 늘 마음에 품고 살고. 다 큰 딸내미도 마음속에 끌어안고 놓아주지를 않고.” “……”이어진 철호의 잔소리에 순옥은 그저 조용히 웃고 말았다.“그러게, 육아가 체질인가 봐. 세상 모든
“미혼모…..”봉길은 넋이 나간 채로 운전하다 말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유진의 충격선언 이후로 어떤 말을 하고 나온 지도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일단은 명함이라도 카운터에 두고 나왔다. 하도 횡설수설하다가 나온 탓에 제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딱히 기억도 나지 않았다. “후-.”유진은 귀여운 외모와는 다르게 매우 강단이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봉길을 더 설레게 만들어버렸다. 외유내강. 유진은 완벽한 그의 이상형이었다. “애기….”화목하게 사는 부모님을 보며 막연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해왔었다. 하지만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아이까지 품을 그릇이 될까? “뭔 생각하는 거야. 정신 차려라, 조봉길.”봉길은 빨간불에 차가 정차한 틈을 타서 머리를 아주 세게 흔들어댔다. 카페에서 봤던 여자에 관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함이었다. “이제 떠나왔으니까 점점 더 잊힐 거야. 아주 잠깐 본 분이잖아. 잠깐 외모에만 혹한 거라고.”봉길은 핸들을 꽉 쥔 채로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이 되뇌었다. ***영애가 모는 차가 소원 초등학교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이미 저녁 시간이 된 탓에 초등학교 교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평소에는 카페 마감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오는 편인 그녀였으나, 오늘은 평소보다 더 일찍 퇴근했다. “아, 맞다. 그날 인협이한테 못 들렀네.”부용이 소원리를 찾았던 날. 인협에게 바로 땅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려던 차에 카페 일이 너무 바빠져서 그날은 그에게 말을 못 한 영애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뭐 대단한 것도 없는 이야기인데.”무언가 결심한 듯, 영애는 차를 교문 앞에다가 붙였다. 차 안에서 닫힌 교문만 바라보던 영애는 핸드폰을 꺼내 인협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협이도 이제 알만한 나이가 됐으니까. [여보세요?] “인협아, 나 영애 이모야.” [아, 네. 안녕하세요]소문으로 들리는 것보다는 훨씬 더 공손하네.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