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
진짜 들어가기 싫네.
인협의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10미터 정도 되는 길이 마치 세상에서 제일가는 고행길이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며 서 있기만 하는 에스더였다.
“이참에 차라리 번호라도 받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굳이 대면할 필요가 없잖아.”음식만 앞에 두고 문자를 보내는 거지.
인협을 마주하기 싫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에스더는 이내 스스로를 세차게 비웃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자기 집에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기겁하는 사람이 핸드폰 번호를 잘도 주겠네.
눈앞에 절로 그려지는 상황에 에스더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잠시 눈을 꾹 감았다.
“하아, 진짜 들어가기 싫어.”그때 끼이익, 하고 철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인협이 걸어 나오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뜬 에스더는 어디 숨을 곳이 없나 싶어서 다급하게 주변을 두리번댔다.
애석하게도 길가 풀숲은 그녀를 숨겨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분명 멋대로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숨을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발각된 에스더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서 몸을 꼿꼿이 세웠다.
내가 죄지었어? 지난번처럼 무단침입 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여기는 엄연히 동네 길인데요? 동네 사람이라면 모두 마땅히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잖아요.”에스더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인협의 집으로 꺾어지는 길 어귀에 서 있었다.
그녀의 반박에 인협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오늘 아무 이유 없이 온 건 아니에요. 저 언덕 위 교회 사모님이 그쪽한테 반찬 좀 전해달라고 하셔서요.”에스더는 용기를 내어서 어느새 제게 가까워진 인협에게 봉지 중 하나를 내밀었다.
“다른 사람을 못 먹여서 죽은 귀신이라도 들러붙었습니까?” “어어, 이런 신성한 일요일에 무슨 소리예요?” “일요일은 그쪽한테나 신성하지, 나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인협은 가볍게 에스더가 내민 반찬을 무시하고 지나쳐 가려 했다.
“또 술 사러 가죠?” “그러든 말든.” “어제 내가 말했잖아요. 그쪽이 내 말 안 듣고 빈속에 술 퍼먹을 거면 나도 그냥 맘대로 하겠다고요.”이건 순 억지였다. 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에스더 장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협의 무지막지한 어둠을 마주하기만 하면 이런 억지를 부려서라도 그를 끌어내고 싶어졌다.
그가 빠져있는 곳이 어둠인지, 지옥의 구렁텅이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냥 그가 그곳에서 나왔으면 했다.
에스더는 매서운 눈빛을 보내며 인협의 손에 봉지를 억지로 쥐여주었다.
“이거 버리기만 해봐요. 오늘 그쪽 집에 무단침입이라도 해서 밤도 함께 샐 테니까. 그쪽이 그 정도까지 멋대로 무례하게 굴면, 나도 가만히 안 있어요.” “허-.” “그리고 갑순 할머니 소쿠리나 내놔요. 할머니가 필요하시대요.”이 여자라면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에스더가 어마어마한 고집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더 이상의 증거를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이내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기로 마음을 먹은 인협은 가게로 향하려던 걸음을 돌려서 반찬 봉지를 집안에 내려놓고 어제 미리 씻고 말려두었던 소쿠리를 들고나와서 에스더의 손 위에 거칠게 건네주었다.
“고마워요.”에스더는 전혀 고마워 보이지 않는 태도로 말하고는 휙 돌아서서 빠르게 갑순 할머니 집 쪽으로 걸어갔다.
“지독하네, 저 여자.”인협은 성난 황소 같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최대한 순순히 굴어서라도 저 여자와 덜 엮이는 편이 덜 귀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찰그랑. 소주병이 담긴 비닐을 바닥에 툭 내려놓은 인협은 바닥에 대충 던지듯 내려두었던 반찬이 담긴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버릴까.”반찬을 버리면 이 집에 와서 함께 밤이라도 새겠다던 에스더의 말이 빈말은 아닌 것 같아서 받은 반찬을 버리기에는 찝찝해진 인협이였다.
그럼, 열어나 볼까.
그래서 그는 결국 비닐에 담겨있던 일회용 반찬통을 하나씩 꺼냈다.
고사리무침, 겉절이, 시금치 무침, 애호박무침, 돼지불고기, 그리고 흰밥. 그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일회용 나무젓가락.
반찬통을 모두 상 위에 내려놓자, 오래전 이곳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먹던 밥상이 떠올랐다.
쇠로 만들어진 동그란 모양의 상에 옹기종기 모여서 함께 차려 먹던 반찬들. 투박하고 밋밋했지만, 다른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던 반찬들이었다.
“…….”밥이나 나무젓가락이라도 없었으면 이 반찬들을 안 먹을 핑계라도 있었을 텐데.
인협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는 반찬통 뚜껑을 열었다.
미적지근하게 식었지만, 아직도 약간의 온기는 남아 있는 밥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밥상을 본 게 언제인지.
소원리를 떠나서 서울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되어 연습생이 되고, 1년 후 그는 리그 오브 카오스 프로 선수로 데뷔하게 되었었다.
그리고 두 번의 이적을 거쳐서 그는 2인자 팀인 케이비까지 진출하게 되었었다.
그렇게 합숙 생활을 하며 급식과 식비 지원이 있어서 결코 부족하지 않은 밥을 먹으며 살아왔지만, 이런 집 반찬은 묘하게 다른 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늘 경쟁했어야만 하고, 오늘의 동료가 내일의 적이 되는 게 당연한 환경이라서 긴장감을 늘 달고 살았던 탓일까.
그 시절에 나왔던 밥이 더 화려하고 다양했었지만, 늘 살기 위해 먹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밥, 그리고 시금치 무침. 그다음에는 고사리무침.
반찬을 하나하나 입에 넣고 천천히 씹자, 그 안에 묻어있는 삼삼한 양념이 느껴졌다.
특별할 거 하나 없는 간이었다. 심지어 맛소금조차 들어가지 않은 밋밋한 맛.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떠한 자극적인 음식보다 인협의 혀를 자극했다.
지난 육 개월 동안 연명하듯이 배달 음식만 시켜 먹었던 그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입맛을 잃었던 터라, 그는 점점 더 자극적인 음식을 찾아 먹고는 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래도 돌아오지 않던 입맛이 이 보잘것없는 나물 하나에 돌아온 것이었다.
“…….”생존을 위해 씹어 삼키는 게 아니라, 천천히 식감과 맛을 음미하며 먹는 행위 자체가 인협이 살아있음을 자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음식으로 인해 살아있다는 감각이 되살아나자, 죽은 듯이 무뎌졌던 다른 감각들도 함께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날 이후로 감정은 한껏 예민했었지만, 현실 감각이나 실제적인 감각은 많이 둔한 채로 살아왔던 인협이였다.
그러나 천천히 그것이 뒤바뀌고 있었다.
감정의 파도가 조금씩 잔잔해지며, 현실적인 감각이 그 빈자리를 메꿔갔다.
그렇게 옆에 내려놓은 술병을 응시하던 인협은 이내 그것을 들어서 냉장고 안에 집어넣었다.
일단 지금은 술이 없이도 견딜만해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입안 가득 음식을 넣은 인협은 그것을 음미하며 불이 켜져 있는 집안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나 있는 물샌 자국. 그리고 구석에 조금씩 펴있는 곰팡이. 그로부터 미세하게 나는 냄새.
손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그로서는 지낼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일이었지만 동시에 이 집안의 모습은 쾌적한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손볼 곳이 많아 보였다.
우웅-.
그때, 광고나 알람 아니면 울릴 일이 도통 없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무심한 눈으로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인협의 두 눈이 커졌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김우겸.
원티드 팀의 리더이자, 리그 오브 카오스 부동의 1위 카이 선수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리그 오브 카오스와 관련된 인물들 중 인협이 유일하게 차단하지 않은 두 사람 중 하나였다.
김우겸과 봉길 코치는, 결국 인협을 위해서 나서주지는 않았었지만, 나쁠 것도 없었기에 인협은 한참의 망설임 끝에 그들을 메신저에 남겨두었다.
우겸은 우연히 마주쳤던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믿는다고 이야기해 주었던 사람이었지만, 그 이후로 인협을 위해 딱히 무언가를 해주지는 않았다.
인협을 위했더라면 충분히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우연한 만남에서 인협을 위해주던 우겸의 말은 어쩌면 한순간의 스쳐 지나가는 죄책감이나 동정심이었든지, 아니면 가식이었다고도 생각했던 인협이다.
어쩌면 우겸도 승부조작에 관해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고 잠시 의심도 했던 인협이다.
인협의 기준에서 가장 적나라한 승부조작이 일어났던 건 늘 원티드와의 게임에서였으니까.
이스포츠 판에서 이미지 관리 안 하는 선수는 잘 없었다.
하물며 몇 년 동안 정상을 지켜낸 것도 모자라, 전설이 되어버린 카이 선수일까.
그의 에이전시에서는 그를 더 신격화하지 못해 안달이 났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런 그의 이미지에 승부조작으로 인해 스크래치가 안 나게 하기 위해서라도 엄청나게 애를 썼을 것이었다.
물론 그간 봐왔던 카이 선수는 좋은 사람이었다.
굳이 좋은 일을 하거나 좋은 말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는 좋은 사람이라는 게 절로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총명하게 빛나는 두 눈에 그에 걸맞은 게임 매너와 인터뷰 매너까지.
나는 당신의 어떤 면을 믿어야 하나.
의심과 신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인협은 결국 용기를 내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레브님,행여나 제가 연락하는 것 자체로 인해 레브님을 기만하는 것처럼 비춰질까 봐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이렇게 연락을 보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레브님을 돕고 싶어요. 문자상으로는 세세하게 말은 못 하지만, 레브님에게 도움 될만한 증거도 들고 있고 이렇게 말하긴 부끄럽지만 레브님을 도와줄 만한 힘과 자금도 있습니다.
복귀에 관심 있으면, 언제든지 제게 연락을 주세요.]
탁.
상상치도 못했던 제안에 인협은 그대로 핸드폰을 상 위에다가 거꾸로 덮어버렸다.
함정일까? 아니면 정말로 날 도와주려는 손길일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지켜봤던 우겸을 향해 내렸던 자신의 판단과, 그 일로 인해 모든 인류애가 박살 나버린 마음이 줄다리기하고 있었다.
네가 다칠 수도 있으니, 아무도 믿지 마, 라는 음성과 네가 봤던 김우겸을 기억하라는 음성이.
머리가 터질 것 같이 고민하던 인협은 이내 문자를 잠시 덮어두기로 했다.
우겸의 문자를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희망이 피어오를 것만 같았고, 그것이 고꾸라졌을 때 그대로 함께 추락해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초라하게나마 부지하던 삶마저도 완전히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무언가 시도하고 실패할 힘 따위, 이미 쓰러져버린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나약한 놈.
이전에 기태가 인협을 손가락질하며 했던 말이 어느새 그의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있었다.
이런 기회를 잡을 힘조차 없는 스스로를 향해 밀려오는 자기혐오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들을 향한 분노가 다시 밀려와 인협은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술을 습관처럼 꺼냈다.
“어? 다시 오셨네요.”마스크를 쓴 우겸이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온 걸 발견한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말했다.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선수던데. 전 세계적으로 팬도 많고. 유진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기 짝이 없는 우겸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한곳에서 정점을 찍은 사람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아우라는 있었으나, 외모로는 크게 특출난 기색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아, 제가 지인한테 간곡한 부탁을 받아서요.” “네?” “제가 여기로 올 수 없던 그분 대신 부끄러움을 느끼며 한번 말을 전해보도록 할게요.” “…….”뭐지? 저렇게 유명한 사람의 지인이 날 알 리가 있나?도통 뜻을 알 수 없는 우겸의 말에 유진은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조봉길, 혹시 기억나시나요?”잊어본 적 없는 이름을 우겸이 언급하자, 유진의 눈이 커졌다. 맞다. 그 사람도 리그 오브 카오스 팀 코치라고 했었는데. 명함을 받은 날 검색해 봤던 내용들을 떠올린 그녀였다. “표정 보니까 기억하시나 보네요.” “네, 기억은 하죠. 알바하다가 누군가로부터 명함을 받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니까요.”유진의 말에 우겸은 조용히 속으로 감탄했다. 생각보다 저돌적인 분이시네, 우리 봉길 코치님.“그런데요?” “네?” “근데 왜 연락 안 하세요?” “제가 왜 꼭 연락해야 하나요?”유진의 역질문에 우겸은 당황도 하지 않고서 씩 웃었다. 재밌는 분이시네. 꼭 봉길 코치님이랑 이어드리고 싶어질 만큼. “당사자는 오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나 보내고…. 혹시 사람 갖고 장난하시는 게 아닌가 싶은 정도인데요.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거라면 매우 불쾌하고요.” “아…. 장난은 전혀 아니에요. 제가 봉길 코치님의 마음을 잘못 전달한 거라면 정말 죄송해요.” “…….” “봉길 코치님은 매우 진지하세요. 진지하게 만나고 싶어 하세요.” “…….”그놈의 진지함. 진심 빼면 시체인양 주아의 친부는 늘 그것을 남발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걸 진심이라고 바보같이 믿었던 그녀였고.
토요일. 이른 아침의 소원리 앞 버스 정류장. “그래서, 둘이서만 가니까 좋아?” “또 놀리지?”인협과 에스더는 정류장 의자에 함께 붙어 앉은 채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무더운 7월 말의 날씨도 새롭게 사귀기 시작한 이들의 애정행각을 막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맞잡은 손 사이에는 땀이 가득 차 있었으나, 잠시 열기를 식히기 위해 손을 살짝 펼칠 때를 제외하고는 두 사람은 손을 굳게 붙들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귀기 전에는 이런 미련한 짓을 왜 굳이 하는 거지, 라고 생각해 왔던 인협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내일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찰나의 스킨십도 참지 못하는 연인들을 보며 한심해했던 그였다. 애초에 사랑이 미련한 짓인데 말이야. 이 험한 세상에서 상대를 위해 나를 다 내놓는 거라는 게.애초에 사랑부터가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이니, 무더운 날 손잡는 거쯤이야. 인협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며 에스더의 손을 더 꼭 붙들었다. “정렬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았어?” “몰랐다면 거짓말이겠지.” “허어, 근데 그런 애를 밀어내지도 않고….” “어쩔 수 없잖아. 그렇게 되면 이 좁은 동네에서 마주칠 때마다 얼마나 껄끄러워. 나야 어차피 떠날 사람이고, 정렬 씨도 높은 확률로 풋사랑을 하는 걸 거고. 어차피 내가 기를 쓰고서 마음을 모르는 척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백 못 해.”에스더의 설명에 인협은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너, 연애 고수지?” “고수는. 중학생 때 풋내기 연애 두 주 해본 거 외에는 나도 연애 경험 없네요.” “근데 뭐가 이렇게 여유로워?”인협은 괜스레 억울해지는 마음에 물었다. “사람 경험의 차이랄까? 교회도 그렇고, 교육계라는 것도 그렇고 은근히 진상 집합소거든.” “응?” “교회에는 의지할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도 해. 대체로 상처 입고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종교에 잘 기대고는 하니. 또, 교사 실습을 하다 보면 별의별 애들도 만나고, 그 문제적 행동의 근원인 어마어마한
“뭐지….”인협은 관사 거실 소파에 앉은 채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고 보낸 문자에도 에스더는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해진 인협은 용기를 내어 그녀의 관사 문도 두들겨보았으나, 에스더는 침묵할 뿐이었다. “나도 나름의 은인인데, 은인을 왜 이렇게 대하냐고….”시무룩한 얼굴로 인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외로움 따위는 모르는 줄 알았더니, 워낙 따스한 사람이 곁에 있다가 확 사라지니 외로움이 하루 사이에 사무칠 지경이었다.“너무하다, 에스더야….”인협은 꿍얼거리듯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후-.”너무해. 알려주지도 않고. 정렬이랑 읍내 나가는 게 왜 그렇게 화가 날 일이야!인협은 답답함에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다시 다짐했다.“대답할 때까지 두드린다, 내가.”오랜만에 그의 승부욕이 발동된 것이었다. 인협은 성큼성큼 걸어서 집에서 나가, 에스더의 집 문 앞에 섰다.큰소리를 내면 동네 창피해서라도 나오겠지.쾅쾅쾅쾅! 그는 힘을 꽉 준 주먹으로 최대한 큰 소리로 문을 두들겼다. “황 선생님! 황 선생님!!”쪽팔림도 무릅쓰고 인협은 목소리 높여서 애타게 외쳐댔다.몇 초가 채 지나지 않아서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물론 인협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에스더가 맞은편에 나타나긴 했지만 말이다.인협은 흠칫 놀랐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입을 열었다.“아무런 답이 없길래 걱정이 돼서 말이지.” “그게 말이야, 방구야?” “당연히 말이지. 그것도 아주 다정한 말.”인협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에스더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미간의 주름은 덤이었다. “뭐?” “나 안으로 좀 들어가도 돼?” “…….” “나도 나름 손님인데.”힘껏 인협을 노려본 에스더는 마지못해 인협이 집안에 들어오는 걸 허락해 주었다. 이대로 인협을 문전박대했다가는 또 어떤 미친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협의 등 뒤로 에스더가 일부러 더 힘주어 당긴 현관문이 굉음을
“아이고! 순옥이 잘 왔어?”최 씨의 가게 앞. 간만에 마을에 방문한 딸 덕분에 읍내에서 살뜰하게 장을 본 갑순은 흡족한 얼굴로 복란에게 음료수를 쏘는 중이었다. 가게 앞에 평상에 앉아서 시원한 음료를 들이키던 두 사람은 순옥과 철호가 탄 차가 마을로 들어오는 걸 보고는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네!” “안 그래도 차 들어온 거 보고 한번 보러 가야겠다 했는데, 몸 상태가 어떤지 알 수가 없어서 조용히 있었지.”순옥이 차에서 내리려 하자, 철호와 할머니들이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떽! 병자가 뭘 내려! 그냥 차 안에서 인사나 받아.” “아휴, 그래도요.” “그래도요는 무슨!”갑순의 호탕한 다그침에 순옥은 곤란한 표정으로 웃기만 했다. 근황을 두런두런 이야기하다가 철호의 차는 먼저 마을 쪽으로 들어갔다. 그때 정 씨가 마을에서 걸어 나오다가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차가 지나가고 나서야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급하게 필요한 게 있어서 최 씨의 가게에 들리러 가던 정 씨는 가게 쪽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흠칫하고선 뒤로 돌았다. “기순아! 어디 가냐!”아니나 다를까. 그 찰나 동안 정 씨를 보았던 갑순의 우렁찬 부름에 결국 그녀는 울상을 했다. 모르는척하고 그냥 빨리 집으로 뛰어갈까? 심 씨의 술수로 보나 마나 그녀에 관한 악소문이 퍼져있을 터였다. 정 씨는 과거에 심 씨와 함께 열심히 씹어댔던 사람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을 보고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에 언니가 악의적으로 내가 모두를 안 좋게 말했다는 식으로 퍼뜨렸다면?정 씨는 과거의 뿌렸던 말의 씨앗이 덤불이 되어서 모두 덮쳐오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후-.”그래도 나가서 죗값은 받아야지. 늘 회피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죄인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평소에는 우악스럽고 큰 목소리의 정 씨가 힘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나머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본용의 집 마당. “아니, 너 내 연락을 왜 이렇게 안 받아? 걱정돼서 찾아왔잖아.”보통은 정 씨가 심 씨의 집으로 찾아가거나, 심 씨가 불러내는 곳으로 늘 나가고는 하던 정 씨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행여나 재형에 관한 소문이 안 좋게 퍼져 나갈까 봐 심 씨의 연락을 못 본 척하고서 집에만 있던 정 씨였다.잔뜩 심통 난 심 씨의 표정을 본 정 씨는 곤란한 기색을 감추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심술맞은 심 씨의 눈 밖에 나봤자, 재형에 관해 좋은 말을 할 리가 없는 그녀였기 때문이었다.“아, 우리 둘째 성모 있잖아. 성모가 아들 재형이 좀 몇 달간 돌봐달라길래.” “그래서, 내 연락을 못 받아? 말이 안 되잖아. 재형이는 지금 학교 갔지?” “그렇긴 한데, 새 식구가 집에 들어오면 할 일이 워낙 많잖아, 언니….”정 씨의 파리한 얼굴을 흰자가 유독 많은 큰 눈으로 살핀 심 씨는 코웃음을 크게 쳤다.“어쭈? 그렇다고 내 연락도 다 씹고 집에만 있었다? 야, 너 의리가 없어도 너무 없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참, 손주를 아들이 버리고 간 건 아니고?” “뭐, 뭐라고?” “거짓말하는 거지, 너? 어제 네 손주 세상 떠나가라 통곡하는 소리 다 들었어. 내가 바보야? 이런 것도 눈치 못 채게?”“언니, 아무리 그래도 버리고 갔다는 표현은 좀….” “그리고, 너 자식들이 연락 끊은 거지? 바빠서 못 오기는 못 오길. 딱 봐도 네 심보 못 견뎌서 아들들이 연락 끊은 것 같더구먼.”가까운 사이였던 사람이 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하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를 난도질해 대는 심 씨를 보며 정 씨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정 씨는 순간 화도 났지만, 누굴 탓하리오. 다 본인이 쌓아 올린 업보나 다름없었다. 심 씨의 방식이 우악스럽고 교묘해서 싫었으나, 어찌 됐든 마을의 실세인 이장에게 붙어있으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겠지라는 생각에 심 씨에게 여태 붙어있던 정 씨였다.심 씨의 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워듣다 보니, 정
소원 초등학교의 교실 안. 퉁퉁 부은 눈에다가 세상 모든 것을 미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은 재형은 맨 뒷자리에서 나름의 시위를 하는 중이었다. 본용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처음에는 상냥하게 타이르던 제환도 이내 포기해 버린 그였다. 어마어마한 똥고집으로 제환을 꺾은 재형은 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도 모두 무시한 채로 3교시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다음 시간은 음악 시간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들뜬 목소리로 나 선생님이라는 사람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지난번 수업 때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를 불렀던 모양이었다. 시골 촌뜨기 아니랄까 봐. 촌스럽기는. 요즘 스마트 보드에다가 영상 틀어놓고 수업하지, 누가 노래 부르고 박수치면서 놀아. 재형은 팔짱을 낀 채로, 속으로 쉬는 시간에 들려오는 아이들의 대화를 마음껏 무시했다. 이내 종이 치고 앞문이 열렸다. “어?!”학교에 울고불며 하는 상태로 끌려온 뒤로는 계속 반항하는 상태로 버티던 재형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재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로 넋이 나간 재형을 본 모든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뭐야?” “왜 저래?”누가 뭐래도 재형의 시선은 인협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언젠가는 재형의 최악의 얼굴보다 훨씬 더 어두웠던 그의 얼굴에. 인협은 무표정한 채로 눈썹만 올려서 그런 재형을 쳐다보았다.“고재형, 맞지? 나는 교장선생님 손자라고 안 봐줘. 수업 시작했어, 앉아.”인협의 단호한 말에도 재형은 그대로 굳은 채로, 집게손가락으로 인협을 가리켰다.“나…. 나인협이다.” “야, 고재형! 선생님 이름을 그렇게 막 부르면 어떡해!”바로 앞자리에 앉은 맏형 기훈은 재형을 매우 걱정하며 그에게 속삭였다. 인협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재밌는 선생님이었지만, 동시에 소원 초등학교에서 가장 엄한 선생님이기도 했다. “뭐야?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교장선생님 집에서 지내다 보니, 내 이름이라도 미리 들었던 건가.인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