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진짜 들어가기 싫네.
인협의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10미터 정도 되는 길이 마치 세상에서 제일가는 고행길이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며 서 있기만 하는 에스더였다.
“이참에 차라리 번호라도 받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굳이 대면할 필요가 없잖아.”음식만 앞에 두고 문자를 보내는 거지.
인협을 마주하기 싫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에스더는 이내 스스로를 세차게 비웃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자기 집에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기겁하는 사람이 핸드폰 번호를 잘도 주겠네.
눈앞에 절로 그려지는 상황에 에스더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잠시 눈을 꾹 감았다.
“하아, 진짜 들어가기 싫어.”그때 끼이익, 하고 철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인협이 걸어 나오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뜬 에스더는 어디 숨을 곳이 없나 싶어서 다급하게 주변을 두리번댔다.
애석하게도 길가 풀숲은 그녀를 숨겨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분명 멋대로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숨을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발각된 에스더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서 몸을 꼿꼿이 세웠다.
내가 죄지었어? 지난번처럼 무단침입 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여기는 엄연히 동네 길인데요? 동네 사람이라면 모두 마땅히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잖아요.”에스더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인협의 집으로 꺾어지는 길 어귀에 서 있었다.
그녀의 반박에 인협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오늘 아무 이유 없이 온 건 아니에요. 저 언덕 위 교회 사모님이 그쪽한테 반찬 좀 전해달라고 하셔서요.”에스더는 용기를 내어서 어느새 제게 가까워진 인협에게 봉지 중 하나를 내밀었다.
“다른 사람을 못 먹여서 죽은 귀신이라도 들러붙었습니까?” “어어, 이런 신성한 일요일에 무슨 소리예요?” “일요일은 그쪽한테나 신성하지, 나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인협은 가볍게 에스더가 내민 반찬을 무시하고 지나쳐 가려 했다.
“또 술 사러 가죠?” “그러든 말든.” “어제 내가 말했잖아요. 그쪽이 내 말 안 듣고 빈속에 술 퍼먹을 거면 나도 그냥 맘대로 하겠다고요.”이건 순 억지였다. 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에스더 장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협의 무지막지한 어둠을 마주하기만 하면 이런 억지를 부려서라도 그를 끌어내고 싶어졌다.
그가 빠져있는 곳이 어둠인지, 지옥의 구렁텅이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냥 그가 그곳에서 나왔으면 했다.
에스더는 매서운 눈빛을 보내며 인협의 손에 봉지를 억지로 쥐여주었다.
“이거 버리기만 해봐요. 오늘 그쪽 집에 무단침입이라도 해서 밤도 함께 샐 테니까. 그쪽이 그 정도까지 멋대로 무례하게 굴면, 나도 가만히 안 있어요.” “허-.” “그리고 갑순 할머니 소쿠리나 내놔요. 할머니가 필요하시대요.”이 여자라면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에스더가 어마어마한 고집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더 이상의 증거를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이내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결정을 내리기로 마음을 먹은 인협은 가게로 향하려던 걸음을 돌려서 반찬 봉지를 집안에 내려놓고 어제 미리 씻고 말려두었던 소쿠리를 들고나와서 에스더의 손 위에 거칠게 건네주었다.
“고마워요.”에스더는 전혀 고마워 보이지 않는 태도로 말하고는 휙 돌아서서 빠르게 갑순 할머니 집 쪽으로 걸어갔다.
“지독하네, 저 여자.”인협은 성난 황소 같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최대한 순순히 굴어서라도 저 여자와 덜 엮이는 편이 덜 귀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찰그랑. 소주병이 담긴 비닐을 바닥에 툭 내려놓은 인협은 바닥에 대충 던지듯 내려두었던 반찬이 담긴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버릴까.”반찬을 버리면 이 집에 와서 함께 밤이라도 새겠다던 에스더의 말이 빈말은 아닌 것 같아서 받은 반찬을 버리기에는 찝찝해진 인협이였다.
그럼, 열어나 볼까.
그래서 그는 결국 비닐에 담겨있던 일회용 반찬통을 하나씩 꺼냈다.
고사리무침, 겉절이, 시금치 무침, 애호박무침, 돼지불고기, 그리고 흰밥. 그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일회용 나무젓가락.
반찬통을 모두 상 위에 내려놓자, 오래전 이곳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먹던 밥상이 떠올랐다.
쇠로 만들어진 동그란 모양의 상에 옹기종기 모여서 함께 차려 먹던 반찬들. 투박하고 밋밋했지만, 다른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던 반찬들이었다.
“…….”밥이나 나무젓가락이라도 없었으면 이 반찬들을 안 먹을 핑계라도 있었을 텐데.
인협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는 반찬통 뚜껑을 열었다.
미적지근하게 식었지만, 아직도 약간의 온기는 남아 있는 밥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밥상을 본 게 언제인지.
소원리를 떠나서 서울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되어 연습생이 되고, 1년 후 그는 리그 오브 카오스 프로 선수로 데뷔하게 되었었다.
그리고 두 번의 이적을 거쳐서 그는 2인자 팀인 케이비까지 진출하게 되었었다.
그렇게 합숙 생활을 하며 급식과 식비 지원이 있어서 결코 부족하지 않은 밥을 먹으며 살아왔지만, 이런 집 반찬은 묘하게 다른 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늘 경쟁했어야만 하고, 오늘의 동료가 내일의 적이 되는 게 당연한 환경이라서 긴장감을 늘 달고 살았던 탓일까.
그 시절에 나왔던 밥이 더 화려하고 다양했었지만, 늘 살기 위해 먹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밥, 그리고 시금치 무침. 그다음에는 고사리무침.
반찬을 하나하나 입에 넣고 천천히 씹자, 그 안에 묻어있는 삼삼한 양념이 느껴졌다.
특별할 거 하나 없는 간이었다. 심지어 맛소금조차 들어가지 않은 밋밋한 맛.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떠한 자극적인 음식보다 인협의 혀를 자극했다.
지난 육 개월 동안 연명하듯이 배달 음식만 시켜 먹었던 그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입맛을 잃었던 터라, 그는 점점 더 자극적인 음식을 찾아 먹고는 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래도 돌아오지 않던 입맛이 이 보잘것없는 나물 하나에 돌아온 것이었다.
“…….”생존을 위해 씹어 삼키는 게 아니라, 천천히 식감과 맛을 음미하며 먹는 행위 자체가 인협이 살아있음을 자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음식으로 인해 살아있다는 감각이 되살아나자, 죽은 듯이 무뎌졌던 다른 감각들도 함께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날 이후로 감정은 한껏 예민했었지만, 현실 감각이나 실제적인 감각은 많이 둔한 채로 살아왔던 인협이였다.
그러나 천천히 그것이 뒤바뀌고 있었다.
감정의 파도가 조금씩 잔잔해지며, 현실적인 감각이 그 빈자리를 메꿔갔다.
그렇게 옆에 내려놓은 술병을 응시하던 인협은 이내 그것을 들어서 냉장고 안에 집어넣었다.
일단 지금은 술이 없이도 견딜만해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입안 가득 음식을 넣은 인협은 그것을 음미하며 불이 켜져 있는 집안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나 있는 물샌 자국. 그리고 구석에 조금씩 펴있는 곰팡이. 그로부터 미세하게 나는 냄새.
손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그로서는 지낼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일이었지만 동시에 이 집안의 모습은 쾌적한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손볼 곳이 많아 보였다.
우웅-.
그때, 광고나 알람 아니면 울릴 일이 도통 없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무심한 눈으로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인협의 두 눈이 커졌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김우겸.
원티드 팀의 리더이자, 리그 오브 카오스 부동의 1위 카이 선수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리그 오브 카오스와 관련된 인물들 중 인협이 유일하게 차단하지 않은 두 사람 중 하나였다.
김우겸과 봉길 코치는, 결국 인협을 위해서 나서주지는 않았었지만, 나쁠 것도 없었기에 인협은 한참의 망설임 끝에 그들을 메신저에 남겨두었다.
우겸은 우연히 마주쳤던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믿는다고 이야기해 주었던 사람이었지만, 그 이후로 인협을 위해 딱히 무언가를 해주지는 않았다.
인협을 위했더라면 충분히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우연한 만남에서 인협을 위해주던 우겸의 말은 어쩌면 한순간의 스쳐 지나가는 죄책감이나 동정심이었든지, 아니면 가식이었다고도 생각했던 인협이다.
어쩌면 우겸도 승부조작에 관해 알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고 잠시 의심도 했던 인협이다.
인협의 기준에서 가장 적나라한 승부조작이 일어났던 건 늘 원티드와의 게임에서였으니까.
이스포츠 판에서 이미지 관리 안 하는 선수는 잘 없었다.
하물며 몇 년 동안 정상을 지켜낸 것도 모자라, 전설이 되어버린 카이 선수일까.
그의 에이전시에서는 그를 더 신격화하지 못해 안달이 났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런 그의 이미지에 승부조작으로 인해 스크래치가 안 나게 하기 위해서라도 엄청나게 애를 썼을 것이었다.
물론 그간 봐왔던 카이 선수는 좋은 사람이었다.
굳이 좋은 일을 하거나 좋은 말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는 좋은 사람이라는 게 절로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총명하게 빛나는 두 눈에 그에 걸맞은 게임 매너와 인터뷰 매너까지.
나는 당신의 어떤 면을 믿어야 하나.
의심과 신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인협은 결국 용기를 내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레브님,행여나 제가 연락하는 것 자체로 인해 레브님을 기만하는 것처럼 비춰질까 봐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이렇게 연락을 보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레브님을 돕고 싶어요. 문자상으로는 세세하게 말은 못 하지만, 레브님에게 도움 될만한 증거도 들고 있고 이렇게 말하긴 부끄럽지만 레브님을 도와줄 만한 힘과 자금도 있습니다.
복귀에 관심 있으면, 언제든지 제게 연락을 주세요.]
탁.
상상치도 못했던 제안에 인협은 그대로 핸드폰을 상 위에다가 거꾸로 덮어버렸다.
함정일까? 아니면 정말로 날 도와주려는 손길일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지켜봤던 우겸을 향해 내렸던 자신의 판단과, 그 일로 인해 모든 인류애가 박살 나버린 마음이 줄다리기하고 있었다.
네가 다칠 수도 있으니, 아무도 믿지 마, 라는 음성과 네가 봤던 김우겸을 기억하라는 음성이.
머리가 터질 것 같이 고민하던 인협은 이내 문자를 잠시 덮어두기로 했다.
우겸의 문자를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희망이 피어오를 것만 같았고, 그것이 고꾸라졌을 때 그대로 함께 추락해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초라하게나마 부지하던 삶마저도 완전히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무언가 시도하고 실패할 힘 따위, 이미 쓰러져버린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나약한 놈.
이전에 기태가 인협을 손가락질하며 했던 말이 어느새 그의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있었다.
이런 기회를 잡을 힘조차 없는 스스로를 향해 밀려오는 자기혐오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들을 향한 분노가 다시 밀려와 인협은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술을 습관처럼 꺼냈다.
이렇게 올리는 게 맞을지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연재가 매우 뜸해진 이유를 설명드리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ㅜ ㅜ 다름이 아니라, 제가 9월부터 학업을 병행하게 되었는데, 워낙에 해야할 양이 많다보니 소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리 불성실한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리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ㅜ ㅜ 작품을 지켜봐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마도 앞으로 10회 이내에 이 작품은 완결될 예정이오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아이씨, 정현이만 아니었어도 이런 개고생 안 하는 건데 말이야.”“행님도, 참. 의리가 너무 좋으시다 아닙니까?”폐건물의 구석진 곳. 남자들의 대화 소리를 못 들은 척, 기절한 척을 한 인섭이었다. 불과 10분 전쯤 남자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고, 머리를 발에 차인 인섭은 기절한 척을 하기로 했다. 녹음기는 잘 켜져 있을 거야. 인섭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강의 때 챙겨 다니던 녹음기를 몸에 지니고 온 터였다. 늘 강의 내용을 녹음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것으로 인협에게 유리한 단서를 잡아내 볼까 싶어서였다. 일단 박정현 감독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나왔네. 인섭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똑똑. 누군가가 문에다가 노크를 했다. “뭐야? 그 형 놈인가?”“저…. 세분 드실 것 좀 사 왔어요.”부용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상냥한 그녀의 음성에 세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문을 열어주었다. 이곳에 온 지 어언 세 시간째. 슬슬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아까 쟤 오기 전에 혼자 내뺀 거 아니었어?”“내빼기는요. 사실 아들을 이런 일로 보기도 껄끄럽고,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잠시 나가 있다가 세분이 좀 허기질 것 같아서요.”“…….”아들을 향한 일말의 모성애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에 가담했을까.부용의 말에 한 남자는 코웃음을 쳤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박판에 온 사람치고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없기 때문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도박할 돈을 그때그때 뜯어내고는, 가족들이 얼마나 빈곤하거나 곤란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들이야 도박판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남자가 말을 얹지 않은 것은 부용이 가져온 음식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찔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장남 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글쎄요. 30분이면 올 거리일 텐데요….”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때, 건물 밖에서부터 차 소리가 들렸다. 셋 중 하나가 황급히 일어나 바깥 상황을
지이잉. 지이잉.“어? 인섭 씨!”인섭이 씻는동안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본 봉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엄마]어머니? 인협 선수의 어머니겠지? 봉길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세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끊겼고, 동시에 인섭이 욕실에서 물기를 털며 나왔다.“어? 코치님, 저 부르셨어요?”“아, 네.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요.”봉길은 인섭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인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전에 차단을 안 해뒀었나. 아, 죄송해요. 저희 가족사는 어느 정도 아시죠?”“그럼요, 지난번에 인섭 씨가 해줬던 인터뷰 덕분에 인협 선수가 얼마나 덕을 봤는데요.”“네…. 그 이후로 연락하신 거라고는 욕에 가까운 문자뿐이더니, 웬일로 전화를 이렇게 급하게….”인섭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길도 미간을 찌푸렸다.“뭔가….”움직이고 있나?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인 정현은 이미 구속 영장으로 인해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다.“뭔가 이상하죠? 코치님도 느껴져요?”“그게….”봉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아침에 인협에게 있었던 일을 인섭에게 알려주었다. 게다가 그 후로 봉길이 엘비 본사와 우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그들 쪽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단정하기에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흠….”지이잉. 두 사람이 고민하던 순간, 인섭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인섭은 이내 그것을 받았다.“여보세요?”[인섭아! 아이고, 우리 인섭이가 드디어 받았구나.]다급한 부용의 음성에 인섭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또 어떤 이기적인 소리를 하려고. 인섭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인섭아, 정말 한 번만 도와줘. 지금 엄마,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엄마가 쫓긴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