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까르륵.
멀지 않은 초등학교에서 들려온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인협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떴다.
철문에 있는 반투명한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집안을 비추고 있었다.
정말이지 죽고 싶은 날이야.
어젯밤 수백 번이고 수천 번이고 한심한 자신을 향한 저주를 퍼부어대서 그럴까.
눈을 뜨자마자 무기력했고, 그것은 곧 살기 싫음으로 이어졌다.
그날 이후로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삶을 끝내야 하나?
사실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던 서울의 월세방이 그렇게 하기에는 최고의 장소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 다닥다닥 붙어서 배려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소리를 죽이며 살아가지만, 어쩌면 그곳에서 일을 치렀더라면 아무도 그렇게 된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서 한참 동안 그렇게 있다가 발견될 수 있었을 것 같아서였다.
반대로 집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서 고립된 것처럼 보이는 소원리에서의 삶은 좋든 싫든 마을 사람들과 어느 정도 엮여 있었다.
그가 이틀 이상 마을 초입에 있는 가게에 들리지 않으면 최 씨 아저씨가 신고할 것이고, 그의 집에 며칠 동안 불이라도 들어오지 않으면 에스더나 갑순 할머니가 집으로 찾아와 문을 세차게 두들겨 댈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후-.”죽고 싶어도 맘대로 죽지도 못하려나?
그 생각에 이유 모를 억울함을 느끼며 막막해진 인협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서 집을 나섰다.
집안의 고요함과 걸어 다닐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발에 채는 굴러다니는 술병이 가득한 집이 갑자기 숨 막히게 느껴진 탓이었다.
슬리퍼를 신은 그는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초등학교 쪽으로 방향을 튼 그는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꺄아아-!” ”야, 양예담!“까르륵.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신난 건지, 높은 소리를 내며 학교 운동장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점심시간인가.
인협은 소원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이는 쪽 길목에 멈추어 선 채로 멀리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잠시 감상했다.
“언니이!!”낡디낡은 초라한 놀이터 하나에도 아이들은 세상 행복을 다 가진 것처럼 놀고 있었다.
“어? 저기 삼촌이다.” “누구?”그때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 중 하나가 인협을 발견하고는 그에게로 달려왔다.
총총총.
작은 단발머리 여자아이의 뜀박질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었다. 말 그대로 총총거리며 뛰어온 여자아이는 벌게진 얼굴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작은 뒤통수에는 예쁜 리본 모양 핀이 꽂혀 있었다.
“삼촌이 김 씨 할머니네 손자예요?”아이의 물음에 인협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하여간 시골 마을이란. 이런 어린아이까지도 모르는 소식이 없다니까.
“몰라. 알아서 뭐 하게.”처음으로 들어보는 불퉁한 대답에 여섯 살 된 여자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알면 좋을 텐데.” “너한테나 좋지, 나한테 좋을 거 없어.”아이의 순진한 말에 인협이 차갑게 대꾸했다. 그의 냉대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아이의 동그란 눈에 약간의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 아이의 감정을 살피고 어루만져줄 여유 따위 인협에게는 없었다.
“왜요오-. 엄마 아빠가 마을 사람들이랑은 원래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저씨도 친하게 지내요.” “싫어.”아, 괜히 나왔나.
인협은 깊은 후회를 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대화가 더 이어지면 피곤하겠다는 생각에 그는 빨리 자리를 뜨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안녕이라는 인사를 남기고서 떠나려던 인협의 발걸음은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에 묶여버렸다.
“으아아앙-!!!” “어어?”아이의 통곡 소리에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와 여자아이에게 집중됐다.
섵마, 선생이 셋인데 또 그 여자가 나오려고. 그러면 엄청난 우연이지.
“예솜아, 무슨 일이야!”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에스더가 저 멀리서부터 그들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아, 제길-.” “으아아앙-!!!”인협이 읊조리자, 그것이 자신을 향한 욕이라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예솜의 울음이 더 거세졌다.
“예솜아, 괜찮아?”단박에 달려온 에스더는 놀란 얼굴로 예솜을 꼼꼼히 살폈다.
어쭈, 내가 이 조그만 아이한테 해코지라도 했을까 봐?
그 모습에 심기가 불편해진 인협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아니, 애를 왜 울린 건데요?“ ”아이가 제 신상을 물어보더군요. 그래서 알려주기 싫다고 했을 뿐이에요.“ 인협의 설명에 에스더의 입이 헤벌어졌다.아니, 실화야?
”그냥 대충 둘러대서 알려주거나, 가짜로 알려줘도 되잖아요.“ ”보다시피 나는 진실한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아, 네. 그러세요?“인협의 변명 아닌 변명에 에스더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사람을 찔러대는 게 진실인가. 무례함이지?
그간 인협의 언행을 떠올리며 에스더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이한테 좀 아이처럼 대해주면 안 되는 건가.
우는 예솜을 꼭 안아주며 에스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소리에 인협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젯밤부터 이어진 감정의 소용돌이를 겨우 꾹꾹 억누르고 있었으나, 억눌러온 만큼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선생님이시잖아요. 교육 똑바로 하세요. 아이가 이렇게 아무한테나 친근하게 굴어도 되는 건 아니니까.”저 인간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였길래 저렇게 빙빙 꼬여버렸을까. 어디서 매듭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를 만큼.
아이를 건드리자, 에스더의 눈이 한결 날카로워졌다.
“순수한 아이니까 그쪽 같은 사람에게도 친근하게 구는 거예요. 편견이 없으니까.” “뭐라고요?”인협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헛웃음을 흘리는 사이에 아직도 우는 예솜을 안아 든 에스더는 뒤로 휙 돌아서서 학교 안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짜증 나는 여자.”인협은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서 집으로 향했다.
애초에 집 밖으로 나온 내가 잘못이지. 이 후진 마을에 뭘 기대할 게 있다고.
그는 속으로 깊이 후회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다시 그만의 등딱지 안으로 숨을 시간이었다.
***
찌르르, 찌르르르-.
풀벌레가 신나게 울어대는 토요일 아침.
최 씨의 가게로 향하던 인협의 눈에 고 이장과 그의 부인인 심 씨와 길가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에스더가 눈에 띄었다.
손에 장바구니를 끄는 걸 보아하니, 장 보러 가는 길에 그들에게 잡힌 모양이었다.
나한테는 잘도 떽떽거리더니.
이장과 심 씨 앞에서는 상냥하게 구는 에스더의 옆모습을 본 인협은 조용히 코웃음을 쳤다.
고 이장의 부인인 심영신은 두꺼비 같은 인상에 입 옆에 큰 점이 하나 나 있었다.
유독 심술궂어 보이는 인상의 그녀는 마을 안 모두를 적 아니면 내 편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적으로 간주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온갖 소문을 퍼뜨리고, 그들의 삶을 고달프게 만드는 편이었다.
다행히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좋은 사람들이 유입되고 나자, 이제는 그녀의 적들이 이 작은 동네에 더 많아졌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입김은 매우 약해져 있었다.
“어어, 우리 황 선생~.” “우리 제환이 한번 만나보면 어때요? 호호호-.”고 이장의 아들 제환이라면 인협도 잘 알았다. 어렸을 적에도 야비한 인상을 갖고 있던 그였다.
그때 당시에도 제환은 30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어린 인협과 동네 동생들을 향해 치졸하고 옹졸하게 굴었다.
어린아이들을 향한 관용보다는 잘난 척과 꼰대 짓을 겸비했던 그는 이른 나이에도 앞머리가 벗겨지고 있었다.
‘이 형아처럼 멋있게 되려면 말이야-.’게다가 당시에 그는 소원리에서 제일 잘 생겼다고 굳게 믿는 듯했다.
성질도 더러운 걸 모자라 저 정도로 사람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어서야. 어쩌면 고제환이랑 잘 어울리는 한 쌍인지도.
인협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는 그들을 지나쳐가려고 했다.
“어어, 인협이-!”고 이장의 부름에 인협이 마지못해 고개만 까딱했다. 당연히 고 이장과 심 씨의 두 눈에는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인협이라고? 어머머, 너 아줌마 기억나?” “네.”심 씨는 두껍고 큰 입술을 양옆으로 쫙 벌려서 웃으며 친근한 척 말을 걸어왔다.
어렸을 적에도 사리분별력은 있었기에, 심 씨가 인협과 부모님, 그리고 더 나아가 외조부모님까지 싸잡아 신나게 입방아를 찧어댄다는 사실을 잘 알았었다.
크고도 부라리는 눈빛은 인협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피며 흥밋거리나 이야깃거리는 만들어내기 위해 애를 쓰는듯했다.
어렸을 적에는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그 태도가, 지금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하찮고 역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너무 반갑다, 얘.” “부모 교육 제대로 못 받아서 되바라진 애를 뭐 하러 반가워하세요.”헉.
심 씨의 상투적인 인사에 어렸을 적에는 못했던 말을 담아 매섭게 받아친 인협의 말에 에스더가 조용히 눈을 굴렸다.
찌르르르-. 벌레 우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오, 오호호호-. 예민했던 인협이가 어렸을 적에 아줌마를 단단히 오해했었나 보네.” “오해는요.”이미지 관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심 씨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꾸한 인협은 고개만 까딱하고는 제 갈 길을 갔다.
와우.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에스더는 속으로 감탄했다.
사실 그녀도 심 씨와 고 이장의 과도한 오지랖과 참견으로 불편함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최 씨가 운영하는 가게 앞 평상에서 술자리가 벌어지는 날, 그녀에 대해 마음대로 입방아를 찧어대는 게 그들의 안줏거리 중 하나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에스더는 마을 내 좋은 어르신들을 보며 적당한 무시를 택했을 뿐이었다.
어차피 벌집 같은 그들을 들쑤셔봤자 얻는 건 없을 테니까.
“저, 저 싸가지-.” “아휴, 우리 황 선생님은 요즘 사람 같지 않게 순순해서 좋아요.” “쯧즈, 어릴 적부터 좀 이상하더니, 크니까 더 이상해졌네. 이래서 애는 부모가 키워야 한다니까.”심 씨와 고 이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밭으로 돌아갔다.
다행이다. 버스 시간에는 맞출 수 있겠네.
두 사람의 관심을 티 안 나게 어떻게 돌리고 탈출해야 하나 걱정하던 중이었는데, 그 어려운 걸 인협이 가능케 만들어주었다.
이 마을에서 목소리가 제일 크고 입방아 찧어대는 걸 가장 좋아하는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스더는 장바구니를 끌며 마을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벌써 꽤 멀어진 인협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늘도 술 사러 가는 거겠지.”
뻔하디뻔한 그의 산책 이유에 에스더는 퉁명스러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기에서는 80대 노인분들도 저렇게 술 퍼먹으면서 안 사는데 말이야.
소원리 사람들은 이른 시간부터 일어나 땡볕을 피해 부지런히 밭을 돌봤다.
사업을 하거나 직장이 있는 영애 부부, 조 선생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밭을 돌보느라 바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래도 고맙긴 하네.”인협 덕분에 고 이장과 심 씨의 관심에서 더 빠르게 놓여난 공은 인정하는 바였다.
“나도 어차피 1년 후면 떠날 사람인데, 그냥 마음대로 해보는 게 좋을지도.”소원리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보였던 마을의 규칙을 전혀 따르지 않는 인협이 이제는 경이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이 동네와 이 동네 사람들이 오랜 기간 다져졌던 단단한 땅이라면 스쳐 가는 바람처럼 인협은 굴고 있었다.
평온한 소원리에 가장 뾰족하게 부딪쳐대는 인협이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 유연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부딪친 후에 단단한 땅으로부터 뒤돌아올 충격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이었으니까.
동네의 이단아의 행보는 경악스럽기 그지없었으나, 그 결과를 지켜보다 보면 괜찮아 보여서 내심 저 사람의 뒤를 한번 쫓아볼까? 라는 요상한 의문이 들고는 했다.
“나도 덩달아 이상해진 건가 봐.”에스더는 걸음을 늦추어 인협과의 거리를 더 벌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야 이 칸을 발견했네요. 여기까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어때? 인협이랑은 잘 이야기해 봤어?”해가 진 늦은 저녁 시간. 갑순이 대뜸 영애의 집에 복란과 함께 쳐들어왔다. “어르신, 이러시면 저는 무섭습니다. 내일 아침에 물으셔도 될 텐데요.” “내일 새벽에 출근하고 해 떨어지고 퇴근할 거잖아. 오늘이나 내일이나 같은 시간에 찾아오게 생겼구먼.“막무가내로 구는 갑순의 말에 소리를 내어서 웃음을 터뜨린 영애는 순순히 갑순과 복란을 집안으로 인도했다. “어? 할머니,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기훈과 기정이 편한 내복 차림으로 놀다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영애가 태욱에게 눈짓하자, 태욱이 거실 소파에서 일어났다.“얘들아, 고모부가 책 좀 읽어줄까?” “네!“ ”그럼 방안으로 같이 들어가자!“ ”와아아!!“태욱의 제안에 신이 난 어린이들은 단숨에 복도를 향해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문을 닫자, 거실에는 정적이 흘렀다.”인협이 때문에 오신 거죠?“ ”말해 뭐 해. 뭐라든? 그 녀석,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있었어?”갑순의 퉁명스러운 어투에 묻어나오는 애정에 영애는 또다시 웃고 말았다.“참, 이렇게 애정이 많으신데 말투만 좀 부드럽게 해봐요 아주머니. 그래야 상대가 어떤 애정을 받는지 알지.”“됐어. 나이를 먹더니 잔소리가 늘었다, 영애야?” “그럼요, 저도 이제 인생 후반부에 다다랐는데요. 잔소리 좀 할 줄 알게 됐죠.“ “허이고, 참. 시간 없어. 빨리 본론부터 알려줘.”갑순의 재촉에 영애는 미소 띤 얼굴로 팔짱을 꼈다.“인협이,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똑 부러지고 야무진 아이예요. 상처가 많아서 그렇지, 요새 애들 같지 않게 속도 깊고요.” “그래서? 땅은 바로 받겠대?” “아뇨, 땅 명의는 아무나 열람할 수 있다고 하니까 나중에 돈이 필요해지면 현금화해서 천천히 받겠대요.” “그 야무진 녀석. 다행이다, 다행이야.” “지난번에 부용이가 찾아왔을 때, 인협이를 보고 갔다고 하셨죠?” “그래, 걔네가 학교로 갈 일이 그거 아니면 뭐가 있었겠어.” “…….
춘천의 대학병원 앞 정원. “우리 유진이랑 주아는 잘 있으려나?”링거대를 끌며 철호와 천천히 정원을 거닐던 순옥이 무성한 나무들을 둘러보며 철호에게 물었다. 그녀의 팔짱을 끼고서 걷던 철호는 그녀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온종일 옆에서 고생하는 나는 안 보여?” “아이, 당연히 알지.” “일단 눈앞의 나랑 당신만 생각해. 뭐 하러 잘 살고 있는 애들 걱정을 해?” “아니, 잠깐씩 집을 비운 적은 있어도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유진이랑 주아만 있는 건 처음이잖아.” “으이그, 자식 걱정은 눈 감을 때에야 끝난다더니. 30이 넘은 딸아이를 뭘 그리 걱정해. 걱정하지 마, 당신이 유진이 아주 번듯하고 예쁜 어른으로 잘 키워냈고, 그렇게 잘 큰 유진이가 예쁜 주아를 잘 돌보고 있을 거야. 야무지게.”철호의 잔소리에도 완전히 걱정을 놓지 못한 순옥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같은 나라에 있어도 이리 오랫동안 볼 수가 없다니.“주아 데리고 병문안이라도 오라고 해? 왜, 당신이 주아랑 유진이가 먼 길 오는 건 또 싫다며.” “응.” “아휴, 어젯밤에도 영상 통화 해놓고 참 걱정도 많아요.” “몸이 아프니까 되려 더 걱정돼. 평소에는 괜찮겠거니, 했던 일들도 걱정거리가 되고.”순옥의 힘없는 음성에 철호는 그녀를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예쁜 아주머니. 걱정 그만하세요. 오늘 회진 때 의사 선생님이 이 정도 속도면 다음 주에 퇴원하고 통원 치료만 받으면 된다고 하셨잖아.” “응.” “그러니까, 다음 주에 퇴원하는 거에만 집중해. 돌아가면 귀찮을 만큼 애들 볼 수 있으니까.” “응.” “당신도 참. 육아가 체질인 사람인가 봐. 누구는 황혼에 하는 손주 육아가 그렇게 힘에 부치고 귀찮다던데. 손주도 모자라서 소원 초등학교 아이들도 늘 마음에 품고 살고. 다 큰 딸내미도 마음속에 끌어안고 놓아주지를 않고.” “……”이어진 철호의 잔소리에 순옥은 그저 조용히 웃고 말았다.“그러게, 육아가 체질인가 봐. 세상 모든
“미혼모…..”봉길은 넋이 나간 채로 운전하다 말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유진의 충격선언 이후로 어떤 말을 하고 나온 지도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일단은 명함이라도 카운터에 두고 나왔다. 하도 횡설수설하다가 나온 탓에 제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딱히 기억도 나지 않았다. “후-.”유진은 귀여운 외모와는 다르게 매우 강단이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봉길을 더 설레게 만들어버렸다. 외유내강. 유진은 완벽한 그의 이상형이었다. “애기….”화목하게 사는 부모님을 보며 막연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해왔었다. 하지만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아이까지 품을 그릇이 될까? “뭔 생각하는 거야. 정신 차려라, 조봉길.”봉길은 빨간불에 차가 정차한 틈을 타서 머리를 아주 세게 흔들어댔다. 카페에서 봤던 여자에 관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함이었다. “이제 떠나왔으니까 점점 더 잊힐 거야. 아주 잠깐 본 분이잖아. 잠깐 외모에만 혹한 거라고.”봉길은 핸들을 꽉 쥔 채로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이 되뇌었다. ***영애가 모는 차가 소원 초등학교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이미 저녁 시간이 된 탓에 초등학교 교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평소에는 카페 마감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오는 편인 그녀였으나, 오늘은 평소보다 더 일찍 퇴근했다. “아, 맞다. 그날 인협이한테 못 들렀네.”부용이 소원리를 찾았던 날. 인협에게 바로 땅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려던 차에 카페 일이 너무 바빠져서 그날은 그에게 말을 못 한 영애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뭐 대단한 것도 없는 이야기인데.”무언가 결심한 듯, 영애는 차를 교문 앞에다가 붙였다. 차 안에서 닫힌 교문만 바라보던 영애는 핸드폰을 꺼내 인협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협이도 이제 알만한 나이가 됐으니까. [여보세요?] “인협아, 나 영애 이모야.” [아, 네. 안녕하세요]소문으로 들리는 것보다는 훨씬 더 공손하네.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뭐야? 명함이라니….” “글쎄.”인협은 에스더에게 보이지 않도록 명함을 확인했다. 이름을 확인한 인협의 두 눈에 당황함이 깃들었다. 그는 황급히 그것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뭔데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구나.”에스더는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었으나,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두 사람은 생각에 잠긴 채로 길을 걸어서 가게에 다다랐다. “어어, 이 시간에 웬 애들이 이렇게 왔나 했더니 선생님들이 쏘는 거였어? 아, 안녕하세요 황 선생님.”웬일로 아이들로 복작거리는 가게에서 신이 난 최 씨가 에스더와 인협을 맞아주었다. “네, 축구 내기를 했는데 저희 팀이 져서요.” “인협이 네가 졌어?”최 씨의 당황한 시선이 에스더에게로 향했다. “네, 저희 팀이 이겼어요.” “네, 황 선생님이 보기보다 운동신경이 좋더라고요.” “나 참, 남자 체면이 있지 인마.”최 씨가 껄껄 웃으며 인협을 놀려댔다. 아이들은 벌써 아이스크림을 고르고는 인협만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인협은 이내 지갑을 꺼내 들었으나, 에스더가 더 빨랐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꺼낸 현금을 최 씨를 향해 내밀었다. “어째 인협이 네가 졌다더니.”최 씨는 선뜻 돈을 받지 못하고선 인협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건 인협도 마찬가지였다. “나 선생님이 저를 많이 도와주고 있어서 고마워서요. 나 선생님 없었으면 전 이미 과로로 쓰러지고도 남았을 거예요. 은혜 갚을 겸, 제가 사려고요.”에스더의 넉살 좋은 미소에 최 씨는 마지못해 그 돈을 받고는 거스름돈을 그녀에게 내어주었다. 최 씨는 두 사람의 손이 빈 것을 보고는 이내 워드콘을 두 개 꺼내서 두 사람에게 쥐여주었다.“서비스야. 가져가.” “감사합니다!”최 씨가 내민 아이스크림을 거절하려고 입을 떼던 인협을 가로막고선 에스더는 냉큼 그것을 받았다.“공짜 되게 좋아하시네요.” “그럼요. 게다가 다른 아이스크림도 아니고, 비싼 편인 워드콘이잖아요.”인협의 말에 에스더는 능청스럽게 대
“여기네.”소원리라고 쓰인 표지판을 발견한 봉길이 차를 자연스럽게 마을 길 쪽으로 틀었다. “어휴, 차 한 대나 겨우 지나다니겠네.”그때 봉길의 눈에 최 씨의 가게가 눈에 띄었다. 일단 차를 가게 옆쪽에다가 세우고 인협을 수소문해 볼 예정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마을이면, 비밀은 없을 테니까.차를 길가에 세운 봉길은 운전석에서 내려서 가게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이미 가게 문을 열고서 가게 안에 있는 주인에게 무언가를 묻는 할머니 두 사람이 서 있었다.“소주 없어? 고기 잡내 잡을 때 그것만 한 게 없는데.” “아이, 없다니까요 누님.” “그러게, 술 좀 작작 처먹지! 웬 소주를 팔 생각은 안 하고 맨날 무식한 술꾼들이랑 술판만 벌여서 처먹어대니까 없지!” “아이, 다짜고짜 와서 화만 낼 거면 집으로 가세요!”갑순의 야단에 최 씨가 덩달아 거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눈치만 살피며 기웃거리던 봉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냥, 마을 안에서 한번 여쭤봐야 하나? 망설이던 봉길이 이내 발길을 돌리려 하자, 그런 그를 갑순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복란이 발견했다.“어어? 청년, 뭐 사러 왔어요?”복란의 부드러운 음성에 갑순의 시선이 동시에 봉길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그들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번에 받게 된 봉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아, 뭐 좀 여쭤보려고요.” “뭔데요?”갑순의 무뚝뚝한 말투에 봉길은 긴장한 채로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조금 전 최 씨와 실랑이하던 그녀의 모습을 본 탓이었다. “저…. 혹시 나인협이라고 아세요? 지금 찾고 있는데….”봉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갑순의 눈빛에 의심이 깃들었다. “왜요?” “아, 인협이!”가게 문 쪽으로 걸어온 최 씨의 목소리에 갑순이 그를 바로 째려보았다. 당장 입을 다물라는 경고였다. “가게 주인분은 인협이를 아시나 봐요?”봉길의 희망찬 눈빛을 본 갑순이 그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안 그래도 최근에 부용의 방문으로 인해 심기가 불편한 그녀였다.
우겸의 차 안. 주변에 들킬까 봐 어느 한적한 공원 주차장에서 만난 봉길과 우겸이었다. “레브님은 컨택해 보셨어요?” “네.” “어땠어요?” “많이 침울해 보였어요. 상처가 커서 앞으로 리그 오브 카오스 판으로 다시 돌아올 의향이 있는지도 의문이고요.”봉길의 말에 우겸은 탄식했다. 분명 좋은 팀을 만나고, 좋은 기회를 하나라도 잡을 수 있었더라면 어쩌면 인협은 우겸에 견줄만한 선수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참 어렵네요.” “우겸 씨는 이제 곧 원티드랑 계약 종료되죠?” “네. 그래서 때맞춰서 이적해서 제가 직접 팀을 꾸릴 예정이었어요. 엘비 그룹 아시죠? 거기서 신생팀을 하나 꾸리고 싶다면서 제게 컨택을 해오셨거든요.” “엘비 그룹이요?”엘비라면 가전제품부터 시작해, 몸집을 키워온 대기업이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절대로 모를 수 없는 거물이었다. “네, 그리고 그쪽에서 저를 중심으로 새로 출발하는 만큼 저만 제안을 승낙하면 제가 원하는 것을 모두 맞춰주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봉길 코치님께 직접 감독 제안을 할 수 있는 거고요.” “……”엘비 그룹이 서포트해주는 팀에다가 우겸이 수장인 조합이라면 훨훨 날 일만 있을 팀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인협이가 이 팀으로 복귀했으면 좋겠는데. 팀의 새로운 시작에 걸맞게, 인협도 새롭게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처음에는 저의를 의심했으나, 우겸은 지켜보면 볼수록 올곧은 심성의 사람이었다. 제 팀의 스폰서와 코치진이 손을 잡고서 일방적으로 승부조작을 해서 장장 2년여 간의 시간 동안 1위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밝혀내자마자 우겸은 그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인협의 복귀를 위해서 가장 먼저 힘을 쓰고 있었다. 비리와 조작으로 쓰게 된 왕관은 수치심을 일으킬 뿐이었다. 리그 오브 카오스에서 최고라고 여겨지는 우겸마저도 다 내던지고 도망가 버리고 싶어질 정도로. “월말쯤 이적해서 훈련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그리고 두세 달 정도 집중 훈련 후, 실전에서 손발을 맞추는 연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