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까르륵.
멀지 않은 초등학교에서 들려온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인협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떴다.
철문에 있는 반투명한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집안을 비추고 있었다.
정말이지 죽고 싶은 날이야.
어젯밤 수백 번이고 수천 번이고 한심한 자신을 향한 저주를 퍼부어대서 그럴까.
눈을 뜨자마자 무기력했고, 그것은 곧 살기 싫음으로 이어졌다.
그날 이후로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삶을 끝내야 하나?
사실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던 서울의 월세방이 그렇게 하기에는 최고의 장소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 다닥다닥 붙어서 배려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소리를 죽이며 살아가지만, 어쩌면 그곳에서 일을 치렀더라면 아무도 그렇게 된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서 한참 동안 그렇게 있다가 발견될 수 있었을 것 같아서였다.
반대로 집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서 고립된 것처럼 보이는 소원리에서의 삶은 좋든 싫든 마을 사람들과 어느 정도 엮여 있었다.
그가 이틀 이상 마을 초입에 있는 가게에 들리지 않으면 최 씨 아저씨가 신고할 것이고, 그의 집에 며칠 동안 불이라도 들어오지 않으면 에스더나 갑순 할머니가 집으로 찾아와 문을 세차게 두들겨 댈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후-.”죽고 싶어도 맘대로 죽지도 못하려나?
그 생각에 이유 모를 억울함을 느끼며 막막해진 인협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서 집을 나섰다.
집안의 고요함과 걸어 다닐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발에 채는 굴러다니는 술병이 가득한 집이 갑자기 숨 막히게 느껴진 탓이었다.
슬리퍼를 신은 그는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초등학교 쪽으로 방향을 튼 그는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꺄아아-!” ”야, 양예담!“까르륵.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신난 건지, 높은 소리를 내며 학교 운동장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점심시간인가.
인협은 소원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이는 쪽 길목에 멈추어 선 채로 멀리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잠시 감상했다.
“언니이!!”낡디낡은 초라한 놀이터 하나에도 아이들은 세상 행복을 다 가진 것처럼 놀고 있었다.
“어? 저기 삼촌이다.” “누구?”그때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 중 하나가 인협을 발견하고는 그에게로 달려왔다.
총총총.
작은 단발머리 여자아이의 뜀박질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었다. 말 그대로 총총거리며 뛰어온 여자아이는 벌게진 얼굴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작은 뒤통수에는 예쁜 리본 모양 핀이 꽂혀 있었다.
“삼촌이 김 씨 할머니네 손자예요?”아이의 물음에 인협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하여간 시골 마을이란. 이런 어린아이까지도 모르는 소식이 없다니까.
“몰라. 알아서 뭐 하게.”처음으로 들어보는 불퉁한 대답에 여섯 살 된 여자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알면 좋을 텐데.” “너한테나 좋지, 나한테 좋을 거 없어.”아이의 순진한 말에 인협이 차갑게 대꾸했다. 그의 냉대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아이의 동그란 눈에 약간의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 아이의 감정을 살피고 어루만져줄 여유 따위 인협에게는 없었다.
“왜요오-. 엄마 아빠가 마을 사람들이랑은 원래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저씨도 친하게 지내요.” “싫어.”아, 괜히 나왔나.
인협은 깊은 후회를 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대화가 더 이어지면 피곤하겠다는 생각에 그는 빨리 자리를 뜨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안녕이라는 인사를 남기고서 떠나려던 인협의 발걸음은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에 묶여버렸다.
“으아아앙-!!!” “어어?”아이의 통곡 소리에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와 여자아이에게 집중됐다.
섵마, 선생이 셋인데 또 그 여자가 나오려고. 그러면 엄청난 우연이지.
“예솜아, 무슨 일이야!”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에스더가 저 멀리서부터 그들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아, 제길-.” “으아아앙-!!!”인협이 읊조리자, 그것이 자신을 향한 욕이라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예솜의 울음이 더 거세졌다.
“예솜아, 괜찮아?”단박에 달려온 에스더는 놀란 얼굴로 예솜을 꼼꼼히 살폈다.
어쭈, 내가 이 조그만 아이한테 해코지라도 했을까 봐?
그 모습에 심기가 불편해진 인협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아니, 애를 왜 울린 건데요?“ ”아이가 제 신상을 물어보더군요. 그래서 알려주기 싫다고 했을 뿐이에요.“ 인협의 설명에 에스더의 입이 헤벌어졌다.아니, 실화야?
”그냥 대충 둘러대서 알려주거나, 가짜로 알려줘도 되잖아요.“ ”보다시피 나는 진실한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아, 네. 그러세요?“인협의 변명 아닌 변명에 에스더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사람을 찔러대는 게 진실인가. 무례함이지?
그간 인협의 언행을 떠올리며 에스더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이한테 좀 아이처럼 대해주면 안 되는 건가.
우는 예솜을 꼭 안아주며 에스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소리에 인협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젯밤부터 이어진 감정의 소용돌이를 겨우 꾹꾹 억누르고 있었으나, 억눌러온 만큼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선생님이시잖아요. 교육 똑바로 하세요. 아이가 이렇게 아무한테나 친근하게 굴어도 되는 건 아니니까.”저 인간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였길래 저렇게 빙빙 꼬여버렸을까. 어디서 매듭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를 만큼.
아이를 건드리자, 에스더의 눈이 한결 날카로워졌다.
“순수한 아이니까 그쪽 같은 사람에게도 친근하게 구는 거예요. 편견이 없으니까.” “뭐라고요?”인협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헛웃음을 흘리는 사이에 아직도 우는 예솜을 안아 든 에스더는 뒤로 휙 돌아서서 학교 안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짜증 나는 여자.”인협은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서 집으로 향했다.
애초에 집 밖으로 나온 내가 잘못이지. 이 후진 마을에 뭘 기대할 게 있다고.
그는 속으로 깊이 후회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다시 그만의 등딱지 안으로 숨을 시간이었다.
***
찌르르, 찌르르르-.
풀벌레가 신나게 울어대는 토요일 아침.
최 씨의 가게로 향하던 인협의 눈에 고 이장과 그의 부인인 심 씨와 길가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에스더가 눈에 띄었다.
손에 장바구니를 끄는 걸 보아하니, 장 보러 가는 길에 그들에게 잡힌 모양이었다.
나한테는 잘도 떽떽거리더니.
이장과 심 씨 앞에서는 상냥하게 구는 에스더의 옆모습을 본 인협은 조용히 코웃음을 쳤다.
고 이장의 부인인 심영신은 두꺼비 같은 인상에 입 옆에 큰 점이 하나 나 있었다.
유독 심술궂어 보이는 인상의 그녀는 마을 안 모두를 적 아니면 내 편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적으로 간주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온갖 소문을 퍼뜨리고, 그들의 삶을 고달프게 만드는 편이었다.
다행히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좋은 사람들이 유입되고 나자, 이제는 그녀의 적들이 이 작은 동네에 더 많아졌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입김은 매우 약해져 있었다.
“어어, 우리 황 선생~.” “우리 제환이 한번 만나보면 어때요? 호호호-.”고 이장의 아들 제환이라면 인협도 잘 알았다. 어렸을 적에도 야비한 인상을 갖고 있던 그였다.
그때 당시에도 제환은 30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어린 인협과 동네 동생들을 향해 치졸하고 옹졸하게 굴었다.
어린아이들을 향한 관용보다는 잘난 척과 꼰대 짓을 겸비했던 그는 이른 나이에도 앞머리가 벗겨지고 있었다.
‘이 형아처럼 멋있게 되려면 말이야-.’게다가 당시에 그는 소원리에서 제일 잘 생겼다고 굳게 믿는 듯했다.
성질도 더러운 걸 모자라 저 정도로 사람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어서야. 어쩌면 고제환이랑 잘 어울리는 한 쌍인지도.
인협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는 그들을 지나쳐가려고 했다.
“어어, 인협이-!”고 이장의 부름에 인협이 마지못해 고개만 까딱했다. 당연히 고 이장과 심 씨의 두 눈에는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인협이라고? 어머머, 너 아줌마 기억나?” “네.”심 씨는 두껍고 큰 입술을 양옆으로 쫙 벌려서 웃으며 친근한 척 말을 걸어왔다.
어렸을 적에도 사리분별력은 있었기에, 심 씨가 인협과 부모님, 그리고 더 나아가 외조부모님까지 싸잡아 신나게 입방아를 찧어댄다는 사실을 잘 알았었다.
크고도 부라리는 눈빛은 인협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피며 흥밋거리나 이야깃거리는 만들어내기 위해 애를 쓰는듯했다.
어렸을 적에는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그 태도가, 지금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하찮고 역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너무 반갑다, 얘.” “부모 교육 제대로 못 받아서 되바라진 애를 뭐 하러 반가워하세요.”헉.
심 씨의 상투적인 인사에 어렸을 적에는 못했던 말을 담아 매섭게 받아친 인협의 말에 에스더가 조용히 눈을 굴렸다.
찌르르르-. 벌레 우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오, 오호호호-. 예민했던 인협이가 어렸을 적에 아줌마를 단단히 오해했었나 보네.” “오해는요.”이미지 관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심 씨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꾸한 인협은 고개만 까딱하고는 제 갈 길을 갔다.
와우.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에스더는 속으로 감탄했다.
사실 그녀도 심 씨와 고 이장의 과도한 오지랖과 참견으로 불편함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최 씨가 운영하는 가게 앞 평상에서 술자리가 벌어지는 날, 그녀에 대해 마음대로 입방아를 찧어대는 게 그들의 안줏거리 중 하나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에스더는 마을 내 좋은 어르신들을 보며 적당한 무시를 택했을 뿐이었다.
어차피 벌집 같은 그들을 들쑤셔봤자 얻는 건 없을 테니까.
“저, 저 싸가지-.” “아휴, 우리 황 선생님은 요즘 사람 같지 않게 순순해서 좋아요.” “쯧즈, 어릴 적부터 좀 이상하더니, 크니까 더 이상해졌네. 이래서 애는 부모가 키워야 한다니까.”심 씨와 고 이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밭으로 돌아갔다.
다행이다. 버스 시간에는 맞출 수 있겠네.
두 사람의 관심을 티 안 나게 어떻게 돌리고 탈출해야 하나 걱정하던 중이었는데, 그 어려운 걸 인협이 가능케 만들어주었다.
이 마을에서 목소리가 제일 크고 입방아 찧어대는 걸 가장 좋아하는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스더는 장바구니를 끌며 마을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벌써 꽤 멀어진 인협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늘도 술 사러 가는 거겠지.”
뻔하디뻔한 그의 산책 이유에 에스더는 퉁명스러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기에서는 80대 노인분들도 저렇게 술 퍼먹으면서 안 사는데 말이야.
소원리 사람들은 이른 시간부터 일어나 땡볕을 피해 부지런히 밭을 돌봤다.
사업을 하거나 직장이 있는 영애 부부, 조 선생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밭을 돌보느라 바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래도 고맙긴 하네.”인협 덕분에 고 이장과 심 씨의 관심에서 더 빠르게 놓여난 공은 인정하는 바였다.
“나도 어차피 1년 후면 떠날 사람인데, 그냥 마음대로 해보는 게 좋을지도.”소원리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보였던 마을의 규칙을 전혀 따르지 않는 인협이 이제는 경이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이 동네와 이 동네 사람들이 오랜 기간 다져졌던 단단한 땅이라면 스쳐 가는 바람처럼 인협은 굴고 있었다.
평온한 소원리에 가장 뾰족하게 부딪쳐대는 인협이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 유연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부딪친 후에 단단한 땅으로부터 뒤돌아올 충격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이었으니까.
동네의 이단아의 행보는 경악스럽기 그지없었으나, 그 결과를 지켜보다 보면 괜찮아 보여서 내심 저 사람의 뒤를 한번 쫓아볼까? 라는 요상한 의문이 들고는 했다.
“나도 덩달아 이상해진 건가 봐.”에스더는 걸음을 늦추어 인협과의 거리를 더 벌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야 이 칸을 발견했네요. 여기까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렇게 올리는 게 맞을지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연재가 매우 뜸해진 이유를 설명드리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ㅜ ㅜ 다름이 아니라, 제가 9월부터 학업을 병행하게 되었는데, 워낙에 해야할 양이 많다보니 소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리 불성실한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리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ㅜ ㅜ 작품을 지켜봐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마도 앞으로 10회 이내에 이 작품은 완결될 예정이오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아이씨, 정현이만 아니었어도 이런 개고생 안 하는 건데 말이야.”“행님도, 참. 의리가 너무 좋으시다 아닙니까?”폐건물의 구석진 곳. 남자들의 대화 소리를 못 들은 척, 기절한 척을 한 인섭이었다. 불과 10분 전쯤 남자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고, 머리를 발에 차인 인섭은 기절한 척을 하기로 했다. 녹음기는 잘 켜져 있을 거야. 인섭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강의 때 챙겨 다니던 녹음기를 몸에 지니고 온 터였다. 늘 강의 내용을 녹음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것으로 인협에게 유리한 단서를 잡아내 볼까 싶어서였다. 일단 박정현 감독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나왔네. 인섭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똑똑. 누군가가 문에다가 노크를 했다. “뭐야? 그 형 놈인가?”“저…. 세분 드실 것 좀 사 왔어요.”부용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상냥한 그녀의 음성에 세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문을 열어주었다. 이곳에 온 지 어언 세 시간째. 슬슬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아까 쟤 오기 전에 혼자 내뺀 거 아니었어?”“내빼기는요. 사실 아들을 이런 일로 보기도 껄끄럽고,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잠시 나가 있다가 세분이 좀 허기질 것 같아서요.”“…….”아들을 향한 일말의 모성애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에 가담했을까.부용의 말에 한 남자는 코웃음을 쳤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박판에 온 사람치고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없기 때문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도박할 돈을 그때그때 뜯어내고는, 가족들이 얼마나 빈곤하거나 곤란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들이야 도박판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남자가 말을 얹지 않은 것은 부용이 가져온 음식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찔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장남 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글쎄요. 30분이면 올 거리일 텐데요….”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때, 건물 밖에서부터 차 소리가 들렸다. 셋 중 하나가 황급히 일어나 바깥 상황을
지이잉. 지이잉.“어? 인섭 씨!”인섭이 씻는동안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본 봉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엄마]어머니? 인협 선수의 어머니겠지? 봉길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세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끊겼고, 동시에 인섭이 욕실에서 물기를 털며 나왔다.“어? 코치님, 저 부르셨어요?”“아, 네.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요.”봉길은 인섭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인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전에 차단을 안 해뒀었나. 아, 죄송해요. 저희 가족사는 어느 정도 아시죠?”“그럼요, 지난번에 인섭 씨가 해줬던 인터뷰 덕분에 인협 선수가 얼마나 덕을 봤는데요.”“네…. 그 이후로 연락하신 거라고는 욕에 가까운 문자뿐이더니, 웬일로 전화를 이렇게 급하게….”인섭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길도 미간을 찌푸렸다.“뭔가….”움직이고 있나?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인 정현은 이미 구속 영장으로 인해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다.“뭔가 이상하죠? 코치님도 느껴져요?”“그게….”봉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아침에 인협에게 있었던 일을 인섭에게 알려주었다. 게다가 그 후로 봉길이 엘비 본사와 우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그들 쪽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단정하기에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흠….”지이잉. 두 사람이 고민하던 순간, 인섭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인섭은 이내 그것을 받았다.“여보세요?”[인섭아! 아이고, 우리 인섭이가 드디어 받았구나.]다급한 부용의 음성에 인섭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또 어떤 이기적인 소리를 하려고. 인섭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인섭아, 정말 한 번만 도와줘. 지금 엄마,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엄마가 쫓긴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