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황 선생님!”
시골 동네의 단점은 종종 너무 고요해서 소음이 잘 들린다는 것. 옛 시골집의 단점은 방음이 잘 안된다는 것.
어떤 젊은 남자의 밝은 음성에 인협은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다.
일요일 아침.
물론 딱히 주말 주중 구분 없이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고 있는 인협이었지만, 깰 이유가 없는데 원치 않는 시간에 원치 않는 이유로 깨는 것만큼 짜증 나는 일도 없었다.
“에이씨-.”그놈의 황 선생 이름은 왜 집안까지 들리냐고.
조용히 투덜거린 인협은 숙취에 묵직한 두통이 느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서 자리에서 몸을 겨우 일으켰다.
“아, 안녕하세요!” “인사가 쓸데없이 밝아. 이른 아침부터.”이어진 에스더의 인사에 인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교회 가는 길이세요? 자전거 뒷자리에 태워드릴까요?”이름 모를 남자의 조심스러운 질문 세례에 인협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묘하게 사투리 억양이 묻어나오지만, 서울말을 하기 위해 애를 쓰는 느낌이었다.
소원리 사람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애쓴다, 애써.
물론 게임만 하느라 모태 솔로인 그였지만, 남자의 음성과 말에 담긴 진심을 읽어내지 못할 만큼 그는 최악의 눈치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저 여자가 얼마나 우악스러운지 알아야 하는데-.”여하튼 제환이 형도, 이름 모를 남자도 불쌍하네. 아, 제환이 형은 취소. 어쩌면 잘 맞는 한 쌍일지도.
인협은 옆에 놓인 2리터짜리 생수병을 통째로 들어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뇨, 걸어갈게요.” “아, 그럼 같이 걸어가요. 저도 시간이 많아서-.”아주 눈물겨운 노력이네.
꿀꺽꿀꺽 물을 삼키며 인협은 생각했다.
도란도란 대화하며 멀어지는 두 사람의 소리에 인협은 물병을 내려놓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늦잠은 물 건너갔네. 으, 머리야.”불만 가득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인협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
산뜻한 월요일 아침.
아이들이 등교하기 전, 소원 초등학교의 유일한 교사 세 명이 교무실에 모여있었다.
정부 프로그램을 통해 영어 선생님으로 1년 파견 나왔었지만, 계약을 1년 더 연장한 에스더, 고 이장의 아들이자 수학을 맡아 가르치는 제환,
그리고 그 나머지 과목을 도맡아 가르치는 데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행정까지 맡고 있는 조순옥 선생이 있었다.
조 선생은 평생 동해 시내 있는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몇 년 전에 외지에서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생겨서 분교로 전근 신청을 하게 되어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결과적으론 딸인 유진과 손녀인 주아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미혼모가 되어버린 유진을 조금이라도 보호하고, 한 다리 건너면 모두를 아는 동해시 안에서 눈초리를 덜 받게 하려고 이사를 오게 된 이유는 그들이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얼마 안 되어 더해졌다.
짧은 단발머리에 굵은 웨이브를 준 깔끔한 머리를 하고, 늘 정장 차림에 가까운 차림을 고수하는 조 선생은 겉으로 보기에는 보수적이고 융통성이 없어 보였지만, 그 누구보다 사랑이 많은 선생님이었다.
특히나 손녀인 주아가 생긴 후에는, 손녀 또래인 아이들만 보면 유독 더 상냥해지는 그녀였다.
물론 아이들을 혼낼 때는 따끔하게 혼내는 편이긴 했지만, 동시에 그 누구보다 많은 애정을 아이들에게 부어주고는 했다.
“자, 아침 조회 잠시만 할까요?” “네, 좋아요.”교장실은 특별한 일이 일어나거나 특별한 날이 아니면 늘 비어 있었다.
소원 초등학교의 교장인 구본용은 늘 조 선생에게 모든 행정 업무나 결정권을 맡기고는 학교에 오는 법이 없었다.
제환의 고자질을 고 이장을 통해서 불만이 생긴 날이 아니면, 거의 나타나는 법이 없었다.
조 선생의 부름에 개인 책상이 놓인 공간 옆에 놓여있는 작은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제환이 에스더의 옆자리에 있는 의자를 굳이 에스더 쪽으로 약간 끌어서 앉았다.
그걸 느낀 에스더는 그만큼 옆으로 물러났다. 거의 날마다 있는 일이었다.
“고 선생님은 늘 제 옆자리가 싫으신가 봐요?”그 미세한 움직임을 놓칠 리가 없는 조 선생은 상냥한 미소를 띠고서 물었다.
“맞은편에 앉으면 선생님 얼굴 뵙기가 편하니까요.”제환은 태연하게 둘러대고는 싱긋 웃었다. 월요일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유독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창백했다.
게다가 평소에도 눈이 웃지 않는 편이 그가 씩 미소를 짓자, 그는 흡사 뱀파이어 백작 같아 보였다.
“아하, 그렇군요. 그래도 제 옆에 한 번씩 앉아주세요, 서운하니까. 흠흠, 그럼 회의를 시작하죠.”말을 하며 에스더를 향해 찡긋 웃어 보인 조 선생은 이번 주 진행될 수업에 관해 숙지해야 할 내용들을 읊어주었다.
조 선생이 워낙 많은 과목을 맡은 지라 종종 도움이 필요한 때가 있었다.
특히나 체육 같은 경우는.
보통 조 선생의 도움 요청에 응하는 건 에스더였다. 두 사람뿐인데도 불구하고 제환은 늘 덤으로 주어지는 일은 회피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 비겁한 태도를 지켜보는 것조차 불편한 탓에 자연스럽게 에스더는 그 일들을 자처하게 됐다.
“이번 주는 이런 식으로 수업이 진행될 예정이에요. 혹시 질문 사항 있으실까요?” “없습니다.” “그럼, 이번 주도 우리 아이들 많이 예뻐해 주도록 합시다.”에스더의 시원시원한 답에 조 선생은 환하게 웃으며 회의를 마무리했다.
“아, 곧 장마철이 다가오네요.” “그러네요.” “좀 대비해 놓아야겠어요.”조 선생과 에스더의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빠진 제환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행여나 누군가가 일을 맡길까 봐 자리로 숨어 들어간 것이 뻔했다.
이렇게 소원 초등학교의 6월 중순이 흘러가고 있었다.
***
“곧 장마철인가, 온몸이 쑤시네.”
듀오 할머니, 곧 갑순과 복란은 집 대청마루에 모여 앉아 마늘을 까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종종 이렇게 함께 일하는 편이었다.
갑순의 앓는 소리에 복란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언니, 파스라도 붙이라니까.” “아휴, 붙이기도 귀찮아. 효과도 거의 없는 거.” “지난번에 딸내미가 바르는 파스 사다 줬잖아. 그게 더 세다며. 발라. 밤마다 끙끙 앓지 말고.”복란이 딸 이야기를 꺼내자, 잠시 갑순의 얼굴에 걱정이 깃들었다. 그 찰나의 침묵의 이유를 알아차린 복란이 혀를 끌끌 찼다.
“또, 또. 자식 걱정하지. 잘 살고 있을 자식, 뭐 하러 걱정해. 다 지 삶 잘 살고 있어.”복란의 말에도 먼 산만 응시하는 갑순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서울이 이 시골보다는 훨씬 더 잘 되어있지. 장마 오기 전에 우리 밭에 고랑이나 잘 살피자고.” “그래-.” “또, 또. 아휴, 그렇게 자식들이 걱정되면 전화 한번 쭉 돌리고 와. 이렇게 넋 놓고 있다간 나만 이 마늘을 다 까겠네.” “그래, 나 좀 다녀올게.”복란의 잔소리에 갑순은 굽은 허리로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미닫이문이 열렸다가 닫히고는 복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서울에 사는 세 명의 자녀가 전화받을 때까지 연락을 돌려야 저 불안감이 해소될 터였다.
이제는 천국으로 가버린 남편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늘 살아왔던 복란. 젊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갑순의 남편의 가혹했던 가정폭력.
어렸던 자식을 이름 모를 병인지, 영양실조인지로 잃어본 갑순. 자식들이 모두 도시에서 풍족하게 잘 자랐던 복란.
남편을 보내고 갑순과 함께 살게 되면서 복란은 이런 갑순의 자식을 향한 불안감에 대해 굉장히 답답해했었다.
그러나 언젠가 이 대조된 삶의 결과가 어쩌면 자식들을 향한 큰 불안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복란은, 그 이후로 갑순에게 이 일로 짜증을 내지 않게 되었다.
나도 이 사람의 삶을 살았더라면, 비슷하거나 더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에휴, 자식들이 뭐라고. 지 삶 제 몫 해내면서 아주 잘 사는 게 좋으면서도 또 안 찾아오면 아쉽고.
낳고 어느 정도 큰 순간부터는 애물단지야, 애물단지.
심란해진 복란의 손놀림이 더 빨라졌고, 어느새 대청마루에는 마늘 향이 가득했다.
그리고 큰 바구니에는 곱게 까진 마늘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래, 당연하지.”자식 걱정은 눈 감을 때까지 한다던데. 복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모두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이 배 아파 낳았던 작은 골칫덩어리는 그들에게 충분한 기쁨이기도 하다는 것을.
언젠가는 각자의 이유로 버거웠던 삶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던 버팀목이었다는 걸.
이렇게 올리는 게 맞을지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연재가 매우 뜸해진 이유를 설명드리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ㅜ ㅜ 다름이 아니라, 제가 9월부터 학업을 병행하게 되었는데, 워낙에 해야할 양이 많다보니 소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리 불성실한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리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ㅜ ㅜ 작품을 지켜봐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마도 앞으로 10회 이내에 이 작품은 완결될 예정이오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아이씨, 정현이만 아니었어도 이런 개고생 안 하는 건데 말이야.”“행님도, 참. 의리가 너무 좋으시다 아닙니까?”폐건물의 구석진 곳. 남자들의 대화 소리를 못 들은 척, 기절한 척을 한 인섭이었다. 불과 10분 전쯤 남자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고, 머리를 발에 차인 인섭은 기절한 척을 하기로 했다. 녹음기는 잘 켜져 있을 거야. 인섭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강의 때 챙겨 다니던 녹음기를 몸에 지니고 온 터였다. 늘 강의 내용을 녹음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것으로 인협에게 유리한 단서를 잡아내 볼까 싶어서였다. 일단 박정현 감독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나왔네. 인섭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똑똑. 누군가가 문에다가 노크를 했다. “뭐야? 그 형 놈인가?”“저…. 세분 드실 것 좀 사 왔어요.”부용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상냥한 그녀의 음성에 세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문을 열어주었다. 이곳에 온 지 어언 세 시간째. 슬슬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아까 쟤 오기 전에 혼자 내뺀 거 아니었어?”“내빼기는요. 사실 아들을 이런 일로 보기도 껄끄럽고,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잠시 나가 있다가 세분이 좀 허기질 것 같아서요.”“…….”아들을 향한 일말의 모성애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에 가담했을까.부용의 말에 한 남자는 코웃음을 쳤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박판에 온 사람치고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없기 때문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도박할 돈을 그때그때 뜯어내고는, 가족들이 얼마나 빈곤하거나 곤란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들이야 도박판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남자가 말을 얹지 않은 것은 부용이 가져온 음식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찔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장남 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글쎄요. 30분이면 올 거리일 텐데요….”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때, 건물 밖에서부터 차 소리가 들렸다. 셋 중 하나가 황급히 일어나 바깥 상황을
지이잉. 지이잉.“어? 인섭 씨!”인섭이 씻는동안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본 봉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엄마]어머니? 인협 선수의 어머니겠지? 봉길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세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끊겼고, 동시에 인섭이 욕실에서 물기를 털며 나왔다.“어? 코치님, 저 부르셨어요?”“아, 네.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요.”봉길은 인섭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인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전에 차단을 안 해뒀었나. 아, 죄송해요. 저희 가족사는 어느 정도 아시죠?”“그럼요, 지난번에 인섭 씨가 해줬던 인터뷰 덕분에 인협 선수가 얼마나 덕을 봤는데요.”“네…. 그 이후로 연락하신 거라고는 욕에 가까운 문자뿐이더니, 웬일로 전화를 이렇게 급하게….”인섭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길도 미간을 찌푸렸다.“뭔가….”움직이고 있나?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인 정현은 이미 구속 영장으로 인해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다.“뭔가 이상하죠? 코치님도 느껴져요?”“그게….”봉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아침에 인협에게 있었던 일을 인섭에게 알려주었다. 게다가 그 후로 봉길이 엘비 본사와 우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그들 쪽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단정하기에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흠….”지이잉. 두 사람이 고민하던 순간, 인섭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인섭은 이내 그것을 받았다.“여보세요?”[인섭아! 아이고, 우리 인섭이가 드디어 받았구나.]다급한 부용의 음성에 인섭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또 어떤 이기적인 소리를 하려고. 인섭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인섭아, 정말 한 번만 도와줘. 지금 엄마,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엄마가 쫓긴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