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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일종의 광기

مؤلف: 랑끗
last update تاريخ النشر: 2026-07-22 12:47:16

“황 선생님-!”

“아, 오늘 오빠, 형아가 데리러 오는 날이었구나-.”

“오빠!”

“형아-!”

마지막 두 아이만 남은 교실. 

선생님 중 학교에 홀로 남은 에스더는 복도를 걸어오는 정렬을 발견하고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교실에서 조용히 놀던 아이들은 단숨에 복도로 뛰쳐나와 정렬에게 폭 안겨버렸다. 

유림과 정결은 정렬의 늦둥이 동생들이었다. 

정렬의 밑으로 한 살, 세 살 차이 나는 여동생들은 성인이 되자마자 일찌감치 서울로 독립을 한 상태였다. 

제환은 보통 자기 수업을 마치면 퇴근해 버리는 편이었다. 

조 선생은 평소에는 에스더와 함께 자리를 지키다가 느지막이 퇴근하는 편이었으나, 오늘은 일이 있다며 마지막 수업을 맡은 에스더에게 뒷정리까지 부탁하고는 먼저 떠났다. 

에스더가 소원리에 오고는 처음으로 조 선생이 그녀보다 먼저 자리를 비운 날이었다. 

“어? 오늘 조 선생님은-.”

정렬의 눈이 늘 하굣길을 지키고 있던 조 선생을 찾았다. 

“아, 개인적인 일이 있으시다고 일찍 퇴근하셨어요.”

“그랬구나.”

에스더의 말에 정렬의 얼굴이 밝아졌다. 

수줍음이 많은 편인 그는 조 선생이 함께 있으면 에스더 앞에서 행동을 유독 조심하는 편이었다.

혹시라도 소원리에 엄한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는 건 여자인 에스더일 테니. 

“아이들이 워낙 잘 있어 준 덕분에 기다리는 동안 틈틈이 뒷정리를 해두어서 이대로 정렬 씨랑 같이 나가도 될 거 같아요.”

“정말요?”

에스더의 말에 정렬이 환하게 웃었다. 넷은 자연스럽게 함께 복도를 걸어갔다. 

“나 먼저 뛰어야지!”

“같이 가!”

이내 유림과 정결이 장난을 치며 큰소리로 웃으며 앞장서서 뛰어갔다. 

기특한 녀석들. 그런 두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정렬은 속으로 기뻐했다. 

“아참, 선생님. 저랑 저녁에 한번 읍내에 나가실래요? 치킨 한번 어때요?”

에스더는 유독 치맥을 좋아했다. 

우연히 주말에 읍내 농합마트에서 마주친 그들은 정렬의 차에 함께 타서 동네로 들어오기로 하고는 저녁을 한번 같이 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알게 된 고급 정보였다.

늘 좋은 타이밍을 노리던 그는 드디어 에스더에게 말을 꺼내 본 것이었다. 엄청난 용기를 내어서. 

그는 에스더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대답하기까지 겨우 몇 초의 시간이었지만, 그의 가슴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가 희망을 품었다가 멋대로 널뛰기를 하는 중이었다. 

“좋아요!”

에스더는 웃으며 답했다.

실질적 학부모나 다름없는 정렬과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게 조심스러운 그녀였지만, 정렬의 가정사도 마을 어른들에게 들어서 잘 아는지라 그런 그를 떨쳐내는 게 쉽지 않았다. 

날마다 성실하지만 늘 버텨내듯이 살아내는 그가 한편으로는 조금이나마 즐거움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다 떠나버리고 어울릴 만한 젊은 사람 없는 이 동네에서 버텨온 정렬에게는 이런 시간이 소중할 테니 말이다. 

“언제가 좋으세요?”

“으음-. 목요일 저녁 어떠세요?”

“좋죠.”

어느새 두 사람은 교문에 다다라있었다. 정결과 유림은 교문 어귀에서 장난을 치며 꺄르르 웃고 있었다. 

“그럼, 혹시-.”

이제는 헤어져야 함에도 잠시 머뭇거리는 정렬이었다. 

그가 초조한 손길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걸 본 에스더는 미국에 있는 남동생을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서 싱긋 웃었다. 

“혹시 모르니까 번호라도 서로 받아둘까요?”

“앗, 네-.”

에스더는 정렬의 핸드폰에 자기 번호를 입력하고는 전화를 한번 걸어두었다. 

“그럼, 연락해요.”

“넵!”

정렬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아이들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서 내리막길을 걸어갔다.

어차피 1년 후면 떠날 건데, 너무 딱딱하게는 안 굴어도 되겠지.

“하여튼 보기 좋다니까. 참 다정한 사람이야.”

듬직한 체구의 인협이 아이들과 도란도란 대화하며 내리막을 내려가는 모습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던 에스더는 교문을 닫았다. 

***

“계세요-?”

인협의 기준에는 지나치게 상냥한 남자의 음성이 집 밖에서 들려왔다.

집 안 거실의 낡은 티브이에 드라마 하나를 틀어놓고서 멍하니 앉아 있던 인협이 얼굴을 찌푸렸다. 

또 누군데? 

그는 밖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개인 시간을 방해한 사실에 제대로 짜증 낼 각오를 하고서 문을 벌컥 열었다. 

그곳에는 인협과 비슷한 동그란 테의 안경을 쓰고서 반팔 카라티를 입은, 깔끔한 차림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단, 인협과 달리 그의 인상은 매우 선해 보였고, 일그러진 얼굴을 한 인협과는 다르게 그는 생글생글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평범하게 생긴 남자의 두 눈이 초롱초롱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남자의 손에는 인협의 눈에 익은 반찬통이 들려있었다. 

에스더가 일요일에 그에게 가져다주었던 일회용 반찬통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저기 소원리 교회에 있는 양기탁이라고 합니다.”

“아아-.”

교회 목사인가 보네. 

굳이 따지자면 종교에 아무런 뜻도, 관심도 없는 인협이기에 그는 무심한 얼굴로 대꾸했다.

싱글벙글한 얼굴을 한 데다가 호감 상인 기탁이었다. 

웃는 상인 것과는 다르게, 내면은 호락호락하지는 않은지, 기탁은 인협의 눈에 띄는 냉대에도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이런 거절 반응이 꽤나 익숙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흔들림은커녕, 표정이 더 환해질 뿐이었다. 

마치 웃는 게 정답이라도 되는 듯이. 인협은 그게 적잖이 거슬렸다.

반찬 몇 개와 환한 미소를 지어주면 내가 마음을 열어야 하나? 

기탁은 인협이 처음 만나는 유형의 사람이었지만, 직감적으로 기탁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더 강한 말이 필요할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처음에 약간 모질게 굴어서 관계성을 잡아놓는 게, 어쭙잖게 미안한 마음에 선을 넘어오는 걸 허용하다가 내치는 것보다 낫다고 인협은 굳게 믿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아내가 손맛도 좋고 손이 좀 큰 편이라서요. 요리를 하다보니, 많이 했어요.”

“……….”

“종종 이렇게 반찬을 만들어서 마를 분들께 나눠드리는 게 저희 기쁨이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받아주세요.”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데도 부담 주는 일을 멋대로 하시면서 부담 갖지 말라뇨.”

딱 봐도 기탁보다 적어도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인협의 매서운 공격에도 그는 끄떡도 없이 잔잔했다.

마치 깊은 강에다가 돌맹이 하나 던진 꼴이었다. 

“아, 부담이 되셨군요. 여태 아내가 보냈던 음식을 잘 드셔서 인협 씨 입맛에 어느정도는 맞는 거 같아서 더 갖고 온것뿐이에요.”

기탁은 생글생글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아하며 답했다. 

뾰족한 송곳같은 말에 돌아온 물렁한 말에 담긴 순한 진심은 역으로 인협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굳이 억지로 받아서 갖다 버리기도 마음이 좀 그래요.”

“아아, 버릴 수 없으시구나-.”

조금은 긁혔으려나? 

속마음을 도통 알 수 없는 단단한 미소를 띈 기탁의 얼굴을 보며 인협은 생각했다. 

“그럼, 앞으로는 반찬을 더 많이 가져와도 되겠어요! 버리는 거 아까워하시니까 앞으로 가져오는 것들, 다 먹어 주실거죠?”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기탁의 쾌활한 톤에 인협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소원리에 온 후, 처음으로 무장해제가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인협의 눈에 기탁의 행보는 외유내강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일종의 광기처럼 보였다. 

게다가 더 유감인 점은, 소원리에서 다른 마을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 중에 기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남자는 계속해서 앞으로 이런 식으로 찾아오거나, 반찬을 다른 사람을 통해 보내올 것이다.

 

인협은 기탁의 밝은 얼굴을 보며 직감했다. 

“그럼,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일게요! 잘 드셔주셔서 감사해요.”

기탁은 더 밝게 웃으며 들고 있던 반찬을 얼빠진 상태의 인협에게 쥐여주었다. 

***

아이들을 모두 집으로 보낸 후, 마을 입구 앞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던 에스더는 이내 들려온 익숙한 차를 향해서 미소를 지으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앞에 포터가 섰다. 

“선생님!”

포터 조수석 쪽 창문이 내려감과 동시에 운전대를 잡은 정렬이 환하게 웃으며 에스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보통 출퇴근 용이나, 아버지가 농사지은 농작물들을 운반하기 위해 실어 나를 때 사용하는 유일한 차였다.

 

조용히 미소 짓는 얼굴로 손을 흔든 에스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곳에 타서 문을 닫자마자, 조수석 창문을 닫고서 차를 출발시키려던 정렬이 창밖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정렬이 낸 소리에 에스더는 호기심에 그쪽을 돌아보았고, 그곳에는 최 씨 가게 문 앞에 서 있는 인협이 보였다.

그는 역시나 오늘도 기분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 

어휴, 괜히 봤네.

그런 인협을 본 에스더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정렬이 곧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뛰쳐나갔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인협의 시선이 제게로 빠르게 다가오는 정렬에게로 향했다.

정렬의 얼굴이 환해졌다. 

“형! 인협이 형 맞아?”

“…?”

정렬의 밝은 목소리에 잠시 찌푸려졌던 인협의 얼굴이 이내 펴졌다.

“정렬이?”

“맞아, 나 이정렬!”

정렬은 단숨에 다가가 인협이 피할 새도 없이 그를 품에 꽉 안았다. 

어린 시절, 유독 인협을 잘 따르던 정렬은 종종 이렇게 인협에게 안기고는 했었다.

그 시절엔 인협이 정렬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었지만, 지금은 키가 역전이 되어 정렬보다 작아진 인협이 정렬의 품에 안긴 꼴이 되어버렸다.

심드렁한 얼굴의 인협은 정렬의 팔힘에 양팔을 몸에 딱 붙인 채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형, 마을에는 언제 왔어?”

“한두 주 정도 됐지? 너는 소식 못 들었어?”

“나 요새는 거의 매일 읍내로 출근해서 일하느라, 어르신들 마주칠 일도 잘 없어서 못 들었나 봐.”

여전히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 같네, 이 녀석은.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라면, 몸의 크기?

인협의 시선이 어렸을 적의 모습이 남아 있지만, 군데군데 고생의 흔적이 보이는 정렬의 얼굴을 훑었다. 

햇빛에 까맣게 그을린 피부, 또래보다 조금 더 많아 보이는 주름, 그리고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손이 그의 눈에 띄었다. 

‘혀엉-!’

어쩌면 힘든 사람이 가득했던 그 시절의 소원리에서 가장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던 정렬은, 늘 환한 웃음을 지으며 역으로 인협의 삶을 밝혀주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그대로였다. 소원리의 풍경만큼.

“형, 지금 읍내에 치맥 하러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갈래?”

정렬의 제안에 인협이 그의 뒤에 세워져 있는 포터를 힐끗 쳐다보았다. 해봤자 여태 택시를 타고 한번 읍내에 나가서 장을 보고 온 게 다였다. 

이참에 나가서 정렬이한테 부탁해서 장이나 한번 보고 올까. 

기탁이 살뜰하게 챙겨준 반찬은 있었지만, 마침 생수라던지 자질구레한 생필품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좋지.”

어렸을 적에 영특하단 말을 곧잘 듣던 정렬이 어쩌다 이 시골 마을에 남았는지에 관한 그간의 이야기도 문득 궁금해진 인협이었다. 

“차에 타.”

“그래.”

“아, 잠깐-.”

앞에 중간 좌석까지 있는 3인승 포터였다. 인협은 당연히 조수석 문을 열어젖혔고, 문이 열리자마자 인협의 눈이 당황한 에스더의 시선과 맞닥뜨렸다. 

둘의 표정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처럼 한없이 구겨져 버렸다. 

“아-.”

“으-.”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반응은 서로를 향한 혐오, 그 자체였다.

“어? 형, 황 선생님 알아?”

차 안에서 얼굴이 인협에게 보이지 않도록 몸을 일부러 앞으로 숙인 채 정렬을 기다리던 에스더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는 속으로 절규하던 중이었다.

저 인간이랑? 밥을 먹어? 아냐, 날 보면 당연히 안 간다고 하겠지. 

인협이 차로 다가오던 순간부터 그녀는 몸을 꼿꼿하게 세우며 인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그렇게 인협을 마주할 걸 미리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원수라도 보는 듯이 경멸에 가득 찬 인협의 눈빛을 직접 마주하니 표정 관리가 영 안 되는 것이었다. 

 

“형?”

인협과 에스더 사이의 침묵이 길어지자, 분위기를 살핀 정렬이 쩔쩔매며 물었다. 

정렬의 가정사를 잘 아는 두 사람인지라, 그가 이 대치 상황에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정렬의 모습에 둘은 마지못해 표정을 풀었다.

저기요, 정렬 씨 앞에서는 작작 좀 합시다? 

에스더는 인협을 향해 눈으로 레이저를 쏘아댔다. 

“응, 우리 집 바로 옆에 사시잖아. 한번 자기 집처럼 우리 집 옆길을 지나가시더라고.”

“말은 똑바로 하죠. 집안으로는 안 들어갔어요. 정렬 씨도 아시죠? 관사에서 바로 내려가는 지름길 있는 거요. 저는 사람이 안 사는 줄 알았거든요.”

“아, 그렇게 형을 마주치게 되신 거예요?”

정렬은 크게 안도하며 물었고, 에스더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내 에스더는 조수석에서 내리고는 인협에게 먼저 타라는 손짓을 했다.

그 모습에 인협은 티 나게 얼굴을 구겼다. 

“내가 중간에 타라고요?”

“네, 당연하죠.”

“왜 당연한 거죠? 중간 자리가 가장 좁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양옆에 두 남자를 두고서 타기엔 좀 그렇잖아요?”

에스더는 입꼬리를 올려서 싱긋 웃었지만, 그녀의 눈은 협박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협박꾼이 따로 없네, 진짜. 

둘의 눈치를 다시 살피기 시작한 정렬의 표정을 힐끗 본 인협은 손으로 뒷머리를 한번 거칠게 쓸고는 마지못해 중간 좌석에 탔다. 

그래, 차 태워 준다는데 그냥 조용히 타야지. 보나 마나 저 녀석은 이 여자의 실체도 모르고 좋아하는 모양인데. 

지난번 제 집에서 들었던, 에스더 앞에서 수줍게 굴던 남자의 음성이 정렬의 것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린 인협은 무언가 따지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모두가 자리에 타서 벨트를 매자마자 정렬은 차에 시동을 다시 걸었다. 

“자, 이제 진짜 출발-!”

미묘한 신경전으로 인해 적막한 차 안. 들뜬 정렬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출바알!”

정렬에게는 한없이 상냥한 에스더는 그의 텐션에 맞추며 외쳤다. 

아, 저 이상한 여자의 연애사나 구경하느니 집에 있을걸. 

그 사이에서 양옆 사람을 위해 어깨를 좁히고 팔짱을 끼고서 앉은 인협은 얼굴을 구기며 후회했다.

랑끗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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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웰컴 투 소원리   18. 그만 미워해요

    똑똑. “미치겠네.”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 웰컴 투 소원리   17. 각자의 고민

    “끄으응-.”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

  • 웰컴 투 소원리   16. 장마의 시작

    같은 날 점심시간 무렵. 카페가 유독 바쁜 날이라 카페 사장인 아내 영애를 도우러 출근한 태욱이었다.그는 가게 일을 돕다가 잠시 한산해진 틈을 타 커피 한잔을 하며 쉬는 중이었다. “철호!”태욱은 그때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뜻밖의 손님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비싼 커피보다는 인스턴트커피가 제 입맛에는 제격이라며 읍내에서 일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에 절대 들리지 않던 철호였다. 대개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철호의 얼굴이었지만,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서글서글해지는 얼굴이 웬일로 가장 친한 태욱을 발견해 내고 나서도 여전히 굳어있었다. 어딘가에 영혼을 빼앗겨버린 듯한 철호의 모습에 태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태 봐왔던 철호의 모습 중 새로운 모습이었다. ”태욱아.” “웬일이야, 여기에는? 철물점은?”카페 한구석에 빈자리에 앉아 있던 태욱 맞은편 의자에 철호는 쓰러지듯 앉았다. 다리가 풀려버린 사람처럼. “태욱아.” “커피 한잔 내려줄까? 달달하고 따끈한 거로?”평소에 펄펄 끓는 물로 만든 인스턴트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하는 철호였다. 뜨끈한 기운이 몸을 데워줘서 좋다나. 그런 철호의 취향을 아는 태욱은 인스턴트커피와 얼추 비슷한 달달한 라떼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시원한 걸로 내려주라. 내 속에 천불 좀 끄게.” “뭐?” “……..”놀란 태욱이 되물어도 철호는 말없이 카페의 자랑인 바다 풍경만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잠시 답을 거부하는 그 옆모습을 읽어낸 태욱은 바로 향해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영애가 이 카페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만 고생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태욱은 그녀 옆에서 부지런히 카페 일을 배워서 그녀를 보좌했었다.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고정으로 돌릴 직원이 생겨난 데다가, 갑자기 맡게 된 영애의 조카들 때문에 태욱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 여보? 커피 한잔만 하고 바로 집에 들어간다면서?”카운

  • 웰컴 투 소원리   15. 어른의 정의

    주중 어느 평범한 날 낮.“아니, 거기 김씨네 첫째 손주 만나봤나?”“아휴, 말도 마. 성질이 어찌나 고약한지. 지난번에는 지나가다 나를 맞은편에서 이렇게 딱 맞닥뜨려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지나가더라니까-.”“하여튼, 그 버르장머리 보면 김 씨 아주머니네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거야.”고 이장의 부인 심 씨가 부쳐다 놓은 전 몇 장을 중간에 두고서 막걸리와 함께 어른 몇이 함께 밭일을 하던 차림으로 새참을 먹고 있었다. 6월 중순으로 치닫는 시간 속 햇볕은 매우 뜨거웠다. 멋보다는 기능에 더 치중한 모자나 토시 같은 걸 잔뜩 걸친 모두는 고 이장의 넓은 밭 한 귀퉁이에 그늘진 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오늘의 멤버는 고 이장, 심 씨, 소원 초등학교 교장 구본용, 그의 부인 정 씨, 그리고 정렬의 아버지 원길이었다. 여기다 종종 최 씨까지 함께 자리하고는 했는데, 최 씨의 밭은 동떨어져 있기도 했고, 그는 가게 핑계로 밭일 품앗이에서 종종 제외되고는 했다. 오늘은 마을에서 가장 넓은 고 이장의 밭에 나 있는 물꼬를 점검하고 보수하는 날이었다. 보통은 6월 말에 찾아오는 끈질긴 장마 때문에 소원리는 6월을 기점으로 많이 바빠졌다. 이전해 장마로 인해 모양을 잃은 물꼬를 보수하고, 그곳에 있는 이물질들을 잘 치워줘야 장마철에 밭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양은 주전자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서로의 잔에 채워주며 그들은 아침 노동의 피로를 덜어내고 있었다. “아휴, 매년 도와줘서 고마워요.”“아이, 우리 형님들 일이면 나서서 도와야죠.”심 씨는 원길의 잔에 막걸리를 채워주며 감사 인사를 했고, 원길은 쑥스러워하며 대꾸했다. “크으-.”원길이 시원하게 막걸리를 들이키자, 심 씨와 정 씨가 순간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원길이 거나하게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온 마을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김 씨 아주머니네 첫째 손주가 어떤데 그래요? 어렸을 땐 그래도 고분고분하더니만.”원길의 질문에 최근에 인

  • 웰컴 투 소원리   14. 사람이긴 하구나

    가로등도 제대로 없는 어두운 시골길을 포터는 열심히 내달렸다. 읍내로 나가던 길의 차 안 분위기와 돌아오는 길의 차 안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차 안은 여전히 고요했으나, 에스더와 인협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이 많이 완화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직접 나눈 대화는 거의 없었으나,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있었다.서로가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 서로가 아닌 정렬을 향해 보내던 따스한 모습들은 두 사람 모두에게 ‘이 사람도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 심어준 듯싶었다.정렬 씨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 사람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던데. 묵묵히 창밖만 내다보던 에스더는 치킨집에서 보았던 인협의 여러 모습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녀 앞에서나 다른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성격 파탄자처럼 굴던 그가 유일하게 정상인처럼 보이던 시간이었다.저 사람도 사람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할 만큼. 인협을 속으로 마음껏 비웃고 미워하던 시간만큼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와 동시에 인협이 소원리로 오게 된 이유를 가볍게 치부했던 것도 떠올랐다. 어쩌면 저 사람에게도 타당하고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는지도 몰라, 라는 생각과 함께.어느새 포터는 소원리 입구로 진입했다. 차 한 대만 겨우 지나다닐 만한 길을 어둠 속에서도 정렬은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그만큼 이 동네에 익숙한 그였다. “어어-.”그때 포터가 소원 초등학교 교문 앞을 지나쳐 내리막으로 향한 탓에 에스더가 놀란 소리를 냈다. “아, 형 먼저 내려주고 선생님 내려드릴게요.” 정렬이는 다 생각이 있었구나. 인협은 어둠 속에서 고요히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늦은 시간에 핑계를 대고 관사 앞까지 걸어가서 데려다주기 딱 좋을 터였다. “응, 나 먼저 내려줘.”물론 에스더에게 정렬이 아깝다고 생각한 인협이었지만, 저 정도로 좋아 죽으려는 정렬의 마음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인협의 말에 정렬은 재빠르게 인협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 앞에 차를 세웠다

  • 웰컴 투 소원리   13. 그 바위가 무엇이길래

    신화읍의 어느 한 옛날 통닭집.다섯 자리 남짓 있는 홀 한구석에는 세 사람이 앉아서 치킨을 시켜두고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에스더와 정렬만 신나서 이야기하는 동안, 인협은 묵묵히 500cc 잔을 말끔히 비워내는 중이었다.정렬은 앞에 콜라를 두고 있었다. 술만 들어가면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로 인해 정렬부터 시작해 그의 동생들까지도 술이라면 입에 대기도 싫어했다. “그래서 유림이가요-.” “하하하-.”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정렬의 막둥이 동생들의 학교생활 이야기에 인협은 조용히 술잔을 다 비워냈다. 차라리 이 편이 나았다. 이런 불편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이 어쭙잖게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면, 인협은 다시는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을 터였다. 그러나, 서로로 인해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듯한 두 사람을 인협은 묵묵히 구경만 하면 됐다. 사실 에스더가 주로 떠들고, 정렬은 떠드는 에스더를 사랑스러워하며 중간중간에 그녀가 필요한 것을 굳이 말을 하거나 내색하지 않아도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그게 약간 힘든 부분이기는 했지만, 오랜만의 나들이에 나쁘진 않았다. 에스더의 맞은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정렬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한순간도 가시지를 않았다.아무래도 데이트에 낀 건 맞는 거 같은데. 그럼, 고제환은 도대체 뭐지? 인협은 날개 부위를 뜯으며 에스더와 인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형은 어쩌다가 소원리로 다시 오게 된 거야?”다 뜯은 날개뼈를 뼈통에 집어넣으려던 인협은 정렬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아-.”어렸을 적, 교육을 위한다는 아버지의 횡포로 인해 컴퓨터는커녕, 인터넷도 없는 집에서 살던 정렬이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렬은 돌아가는 세상사에 유독 관심 없어 했었다. 인협은 프로게이머라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죽어도 숨길 예정이었다. 애초에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 사람들만 있는 곳이 이곳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어느 날 불현듯이 소원리가 떠올랐는지도 몰랐다. 진실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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