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 선생님-!”
“아, 오늘 오빠, 형아가 데리러 오는 날이었구나-.” “오빠!” “형아-!”마지막 두 아이만 남은 교실.
선생님 중 학교에 홀로 남은 에스더는 복도를 걸어오는 정렬을 발견하고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교실에서 조용히 놀던 아이들은 단숨에 복도로 뛰쳐나와 정렬에게 폭 안겨버렸다.
유림과 정결은 정렬의 늦둥이 동생들이었다.
정렬의 밑으로 한 살, 세 살 차이 나는 여동생들은 성인이 되자마자 일찌감치 서울로 독립을 한 상태였다.
제환은 보통 자기 수업을 마치면 퇴근해 버리는 편이었다.
조 선생은 평소에는 에스더와 함께 자리를 지키다가 느지막이 퇴근하는 편이었으나, 오늘은 일이 있다며 마지막 수업을 맡은 에스더에게 뒷정리까지 부탁하고는 먼저 떠났다.
에스더가 소원리에 오고는 처음으로 조 선생이 그녀보다 먼저 자리를 비운 날이었다.
“어? 오늘 조 선생님은-.”정렬의 눈이 늘 하굣길을 지키고 있던 조 선생을 찾았다.
“아, 개인적인 일이 있으시다고 일찍 퇴근하셨어요.” “그랬구나.”에스더의 말에 정렬의 얼굴이 밝아졌다.
수줍음이 많은 편인 그는 조 선생이 함께 있으면 에스더 앞에서 행동을 유독 조심하는 편이었다.
혹시라도 소원리에 엄한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는 건 여자인 에스더일 테니.
“아이들이 워낙 잘 있어 준 덕분에 기다리는 동안 틈틈이 뒷정리를 해두어서 이대로 정렬 씨랑 같이 나가도 될 거 같아요.” “정말요?”에스더의 말에 정렬이 환하게 웃었다. 넷은 자연스럽게 함께 복도를 걸어갔다.
“나 먼저 뛰어야지!” “같이 가!”이내 유림과 정결이 장난을 치며 큰소리로 웃으며 앞장서서 뛰어갔다.
기특한 녀석들. 그런 두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정렬은 속으로 기뻐했다.
“아참, 선생님. 저랑 저녁에 한번 읍내에 나가실래요? 치킨 한번 어때요?”에스더는 유독 치맥을 좋아했다.
우연히 주말에 읍내 농합마트에서 마주친 그들은 정렬의 차에 함께 타서 동네로 들어오기로 하고는 저녁을 한번 같이 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알게 된 고급 정보였다.
늘 좋은 타이밍을 노리던 그는 드디어 에스더에게 말을 꺼내 본 것이었다. 엄청난 용기를 내어서.
그는 에스더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대답하기까지 겨우 몇 초의 시간이었지만, 그의 가슴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가 희망을 품었다가 멋대로 널뛰기를 하는 중이었다.
“좋아요!”에스더는 웃으며 답했다.
실질적 학부모나 다름없는 정렬과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게 조심스러운 그녀였지만, 정렬의 가정사도 마을 어른들에게 들어서 잘 아는지라 그런 그를 떨쳐내는 게 쉽지 않았다.
날마다 성실하지만 늘 버텨내듯이 살아내는 그가 한편으로는 조금이나마 즐거움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다 떠나버리고 어울릴 만한 젊은 사람 없는 이 동네에서 버텨온 정렬에게는 이런 시간이 소중할 테니 말이다.
“언제가 좋으세요?” “으음-. 목요일 저녁 어떠세요?” “좋죠.”어느새 두 사람은 교문에 다다라있었다. 정결과 유림은 교문 어귀에서 장난을 치며 꺄르르 웃고 있었다.
“그럼, 혹시-.”이제는 헤어져야 함에도 잠시 머뭇거리는 정렬이었다.
그가 초조한 손길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걸 본 에스더는 미국에 있는 남동생을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서 싱긋 웃었다.
“혹시 모르니까 번호라도 서로 받아둘까요?” “앗, 네-.”에스더는 정렬의 핸드폰에 자기 번호를 입력하고는 전화를 한번 걸어두었다.
“그럼, 연락해요.” “넵!”정렬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아이들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서 내리막길을 걸어갔다.
어차피 1년 후면 떠날 건데, 너무 딱딱하게는 안 굴어도 되겠지.
“하여튼 보기 좋다니까. 참 다정한 사람이야.”듬직한 체구의 인협이 아이들과 도란도란 대화하며 내리막을 내려가는 모습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던 에스더는 교문을 닫았다.
*** “계세요-?”인협의 기준에는 지나치게 상냥한 남자의 음성이 집 밖에서 들려왔다.
집 안 거실의 낡은 티브이에 드라마 하나를 틀어놓고서 멍하니 앉아 있던 인협이 얼굴을 찌푸렸다.
또 누군데?
그는 밖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개인 시간을 방해한 사실에 제대로 짜증 낼 각오를 하고서 문을 벌컥 열었다.
그곳에는 인협과 비슷한 동그란 테의 안경을 쓰고서 반팔 카라티를 입은, 깔끔한 차림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단, 인협과 달리 그의 인상은 매우 선해 보였고, 일그러진 얼굴을 한 인협과는 다르게 그는 생글생글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평범하게 생긴 남자의 두 눈이 초롱초롱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남자의 손에는 인협의 눈에 익은 반찬통이 들려있었다.
에스더가 일요일에 그에게 가져다주었던 일회용 반찬통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저기 소원리 교회에 있는 양기탁이라고 합니다.” “아아-.”교회 목사인가 보네.
굳이 따지자면 종교에 아무런 뜻도, 관심도 없는 인협이기에 그는 무심한 얼굴로 대꾸했다.
싱글벙글한 얼굴을 한 데다가 호감 상인 기탁이었다.
웃는 상인 것과는 다르게, 내면은 호락호락하지는 않은지, 기탁은 인협의 눈에 띄는 냉대에도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이런 거절 반응이 꽤나 익숙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흔들림은커녕, 표정이 더 환해질 뿐이었다.
마치 웃는 게 정답이라도 되는 듯이. 인협은 그게 적잖이 거슬렸다.
반찬 몇 개와 환한 미소를 지어주면 내가 마음을 열어야 하나?
기탁은 인협이 처음 만나는 유형의 사람이었지만, 직감적으로 기탁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더 강한 말이 필요할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처음에 약간 모질게 굴어서 관계성을 잡아놓는 게, 어쭙잖게 미안한 마음에 선을 넘어오는 걸 허용하다가 내치는 것보다 낫다고 인협은 굳게 믿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아내가 손맛도 좋고 손이 좀 큰 편이라서요. 요리를 하다보니, 많이 했어요.”
“……….” “종종 이렇게 반찬을 만들어서 마를 분들께 나눠드리는 게 저희 기쁨이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받아주세요.”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데도 부담 주는 일을 멋대로 하시면서 부담 갖지 말라뇨.”딱 봐도 기탁보다 적어도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인협의 매서운 공격에도 그는 끄떡도 없이 잔잔했다.
마치 깊은 강에다가 돌맹이 하나 던진 꼴이었다.
“아, 부담이 되셨군요. 여태 아내가 보냈던 음식을 잘 드셔서 인협 씨 입맛에 어느정도는 맞는 거 같아서 더 갖고 온것뿐이에요.”기탁은 생글생글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아하며 답했다.
뾰족한 송곳같은 말에 돌아온 물렁한 말에 담긴 순한 진심은 역으로 인협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굳이 억지로 받아서 갖다 버리기도 마음이 좀 그래요.” “아아, 버릴 수 없으시구나-.”조금은 긁혔으려나?
속마음을 도통 알 수 없는 단단한 미소를 띈 기탁의 얼굴을 보며 인협은 생각했다.
“그럼, 앞으로는 반찬을 더 많이 가져와도 되겠어요! 버리는 거 아까워하시니까 앞으로 가져오는 것들, 다 먹어 주실거죠?”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기탁의 쾌활한 톤에 인협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소원리에 온 후, 처음으로 무장해제가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인협의 눈에 기탁의 행보는 외유내강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일종의 광기처럼 보였다.
게다가 더 유감인 점은, 소원리에서 다른 마을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 중에 기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남자는 계속해서 앞으로 이런 식으로 찾아오거나, 반찬을 다른 사람을 통해 보내올 것이다.
인협은 기탁의 밝은 얼굴을 보며 직감했다. “그럼,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일게요! 잘 드셔주셔서 감사해요.”기탁은 더 밝게 웃으며 들고 있던 반찬을 얼빠진 상태의 인협에게 쥐여주었다.
***
아이들을 모두 집으로 보낸 후, 마을 입구 앞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던 에스더는 이내 들려온 익숙한 차를 향해서 미소를 지으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앞에 포터가 섰다.
“선생님!”포터 조수석 쪽 창문이 내려감과 동시에 운전대를 잡은 정렬이 환하게 웃으며 에스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보통 출퇴근 용이나, 아버지가 농사지은 농작물들을 운반하기 위해 실어 나를 때 사용하는 유일한 차였다.
조용히 미소 짓는 얼굴로 손을 흔든 에스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수석 문을 열었다.그곳에 타서 문을 닫자마자, 조수석 창문을 닫고서 차를 출발시키려던 정렬이 창밖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정렬이 낸 소리에 에스더는 호기심에 그쪽을 돌아보았고, 그곳에는 최 씨 가게 문 앞에 서 있는 인협이 보였다.
그는 역시나 오늘도 기분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
어휴, 괜히 봤네.
그런 인협을 본 에스더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정렬이 곧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뛰쳐나갔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인협의 시선이 제게로 빠르게 다가오는 정렬에게로 향했다.
정렬의 얼굴이 환해졌다.
“형! 인협이 형 맞아?” “…?”정렬의 밝은 목소리에 잠시 찌푸려졌던 인협의 얼굴이 이내 펴졌다.
“정렬이?” “맞아, 나 이정렬!”정렬은 단숨에 다가가 인협이 피할 새도 없이 그를 품에 꽉 안았다.
어린 시절, 유독 인협을 잘 따르던 정렬은 종종 이렇게 인협에게 안기고는 했었다.
그 시절엔 인협이 정렬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었지만, 지금은 키가 역전이 되어 정렬보다 작아진 인협이 정렬의 품에 안긴 꼴이 되어버렸다.
심드렁한 얼굴의 인협은 정렬의 팔힘에 양팔을 몸에 딱 붙인 채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형, 마을에는 언제 왔어?” “한두 주 정도 됐지? 너는 소식 못 들었어?” “나 요새는 거의 매일 읍내로 출근해서 일하느라, 어르신들 마주칠 일도 잘 없어서 못 들었나 봐.”여전히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 같네, 이 녀석은.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라면, 몸의 크기?
인협의 시선이 어렸을 적의 모습이 남아 있지만, 군데군데 고생의 흔적이 보이는 정렬의 얼굴을 훑었다.
햇빛에 까맣게 그을린 피부, 또래보다 조금 더 많아 보이는 주름, 그리고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손이 그의 눈에 띄었다.
‘혀엉-!’어쩌면 힘든 사람이 가득했던 그 시절의 소원리에서 가장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던 정렬은, 늘 환한 웃음을 지으며 역으로 인협의 삶을 밝혀주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그대로였다. 소원리의 풍경만큼.
“형, 지금 읍내에 치맥 하러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갈래?”정렬의 제안에 인협이 그의 뒤에 세워져 있는 포터를 힐끗 쳐다보았다. 해봤자 여태 택시를 타고 한번 읍내에 나가서 장을 보고 온 게 다였다.
이참에 나가서 정렬이한테 부탁해서 장이나 한번 보고 올까.
기탁이 살뜰하게 챙겨준 반찬은 있었지만, 마침 생수라던지 자질구레한 생필품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좋지.”어렸을 적에 영특하단 말을 곧잘 듣던 정렬이 어쩌다 이 시골 마을에 남았는지에 관한 그간의 이야기도 문득 궁금해진 인협이었다.
“차에 타.” “그래.” “아, 잠깐-.”앞에 중간 좌석까지 있는 3인승 포터였다. 인협은 당연히 조수석 문을 열어젖혔고, 문이 열리자마자 인협의 눈이 당황한 에스더의 시선과 맞닥뜨렸다.
둘의 표정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처럼 한없이 구겨져 버렸다.
“아-.” “으-.”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반응은 서로를 향한 혐오, 그 자체였다.
“어? 형, 황 선생님 알아?”차 안에서 얼굴이 인협에게 보이지 않도록 몸을 일부러 앞으로 숙인 채 정렬을 기다리던 에스더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는 속으로 절규하던 중이었다.
저 인간이랑? 밥을 먹어? 아냐, 날 보면 당연히 안 간다고 하겠지.
인협이 차로 다가오던 순간부터 그녀는 몸을 꼿꼿하게 세우며 인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그렇게 인협을 마주할 걸 미리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원수라도 보는 듯이 경멸에 가득 찬 인협의 눈빛을 직접 마주하니 표정 관리가 영 안 되는 것이었다.
“형?”
인협과 에스더 사이의 침묵이 길어지자, 분위기를 살핀 정렬이 쩔쩔매며 물었다.
정렬의 가정사를 잘 아는 두 사람인지라, 그가 이 대치 상황에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정렬의 모습에 둘은 마지못해 표정을 풀었다.
저기요, 정렬 씨 앞에서는 작작 좀 합시다?
에스더는 인협을 향해 눈으로 레이저를 쏘아댔다.
“응, 우리 집 바로 옆에 사시잖아. 한번 자기 집처럼 우리 집 옆길을 지나가시더라고.” “말은 똑바로 하죠. 집안으로는 안 들어갔어요. 정렬 씨도 아시죠? 관사에서 바로 내려가는 지름길 있는 거요. 저는 사람이 안 사는 줄 알았거든요.” “아, 그렇게 형을 마주치게 되신 거예요?”정렬은 크게 안도하며 물었고, 에스더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내 에스더는 조수석에서 내리고는 인협에게 먼저 타라는 손짓을 했다.
그 모습에 인협은 티 나게 얼굴을 구겼다.
“내가 중간에 타라고요?” “네, 당연하죠.” “왜 당연한 거죠? 중간 자리가 가장 좁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양옆에 두 남자를 두고서 타기엔 좀 그렇잖아요?”에스더는 입꼬리를 올려서 싱긋 웃었지만, 그녀의 눈은 협박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협박꾼이 따로 없네, 진짜.
둘의 눈치를 다시 살피기 시작한 정렬의 표정을 힐끗 본 인협은 손으로 뒷머리를 한번 거칠게 쓸고는 마지못해 중간 좌석에 탔다.
그래, 차 태워 준다는데 그냥 조용히 타야지. 보나 마나 저 녀석은 이 여자의 실체도 모르고 좋아하는 모양인데.
지난번 제 집에서 들었던, 에스더 앞에서 수줍게 굴던 남자의 음성이 정렬의 것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린 인협은 무언가 따지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모두가 자리에 타서 벨트를 매자마자 정렬은 차에 시동을 다시 걸었다.
“자, 이제 진짜 출발-!”미묘한 신경전으로 인해 적막한 차 안. 들뜬 정렬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출바알!”정렬에게는 한없이 상냥한 에스더는 그의 텐션에 맞추며 외쳤다.
아, 저 이상한 여자의 연애사나 구경하느니 집에 있을걸.
그 사이에서 양옆 사람을 위해 어깨를 좁히고 팔짱을 끼고서 앉은 인협은 얼굴을 구기며 후회했다.
감사합니다 :)
이렇게 올리는 게 맞을지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연재가 매우 뜸해진 이유를 설명드리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ㅜ ㅜ 다름이 아니라, 제가 9월부터 학업을 병행하게 되었는데, 워낙에 해야할 양이 많다보니 소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리 불성실한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리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ㅜ ㅜ 작품을 지켜봐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아마도 앞으로 10회 이내에 이 작품은 완결될 예정이오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저로서는 굉장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아이씨, 정현이만 아니었어도 이런 개고생 안 하는 건데 말이야.”“행님도, 참. 의리가 너무 좋으시다 아닙니까?”폐건물의 구석진 곳. 남자들의 대화 소리를 못 들은 척, 기절한 척을 한 인섭이었다. 불과 10분 전쯤 남자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고, 머리를 발에 차인 인섭은 기절한 척을 하기로 했다. 녹음기는 잘 켜져 있을 거야. 인섭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강의 때 챙겨 다니던 녹음기를 몸에 지니고 온 터였다. 늘 강의 내용을 녹음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것으로 인협에게 유리한 단서를 잡아내 볼까 싶어서였다. 일단 박정현 감독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나왔네. 인섭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똑똑. 누군가가 문에다가 노크를 했다. “뭐야? 그 형 놈인가?”“저…. 세분 드실 것 좀 사 왔어요.”부용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상냥한 그녀의 음성에 세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문을 열어주었다. 이곳에 온 지 어언 세 시간째. 슬슬 배가 고플 시간이었다. “아까 쟤 오기 전에 혼자 내뺀 거 아니었어?”“내빼기는요. 사실 아들을 이런 일로 보기도 껄끄럽고,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잠시 나가 있다가 세분이 좀 허기질 것 같아서요.”“…….”아들을 향한 일말의 모성애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에 가담했을까.부용의 말에 한 남자는 코웃음을 쳤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박판에 온 사람치고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없기 때문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도박할 돈을 그때그때 뜯어내고는, 가족들이 얼마나 빈곤하거나 곤란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들이야 도박판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남자가 말을 얹지 않은 것은 부용이 가져온 음식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찔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장남 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글쎄요. 30분이면 올 거리일 텐데요….”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때, 건물 밖에서부터 차 소리가 들렸다. 셋 중 하나가 황급히 일어나 바깥 상황을
지이잉. 지이잉.“어? 인섭 씨!”인섭이 씻는동안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을 본 봉길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엄마]어머니? 인협 선수의 어머니겠지? 봉길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그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세 번째로 걸려 온 전화가 끊겼고, 동시에 인섭이 욕실에서 물기를 털며 나왔다.“어? 코치님, 저 부르셨어요?”“아, 네.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요.”봉길은 인섭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인섭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기나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전에 차단을 안 해뒀었나. 아, 죄송해요. 저희 가족사는 어느 정도 아시죠?”“그럼요, 지난번에 인섭 씨가 해줬던 인터뷰 덕분에 인협 선수가 얼마나 덕을 봤는데요.”“네…. 그 이후로 연락하신 거라고는 욕에 가까운 문자뿐이더니, 웬일로 전화를 이렇게 급하게….”인섭은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봉길도 미간을 찌푸렸다.“뭔가….”움직이고 있나?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의 중심인 정현은 이미 구속 영장으로 인해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그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다.“뭔가 이상하죠? 코치님도 느껴져요?”“그게….”봉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아침에 인협에게 있었던 일을 인섭에게 알려주었다. 게다가 그 후로 봉길이 엘비 본사와 우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그들 쪽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판명이 났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단정하기에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흠….”지이잉. 두 사람이 고민하던 순간, 인섭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인섭은 이내 그것을 받았다.“여보세요?”[인섭아! 아이고, 우리 인섭이가 드디어 받았구나.]다급한 부용의 음성에 인섭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또 어떤 이기적인 소리를 하려고. 인섭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인섭아, 정말 한 번만 도와줘. 지금 엄마, 아빠가 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있어]“엄마가 쫓긴
“이제 보니, 박정현이가 완전 악질이네.”모두가 떠난 후. 조사실 안. 수사관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수사관에게 말했다.“시종일관 거짓말이고. 근데 너무 그럴듯한 말만 하고, 절묘하게 모두의 진술과 맞는 이야기를 해서 수사 초반에는 하마터면 모두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까요?”“그러니까.”“조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박정현이 진술에 구멍이 조금씩 보였던 거죠.”“그리고 이런 박정현이를 점점 더 못미더워한 팀 애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박정현이를 배신하고 그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도 했고.”고참 수사관은 팔짱을 낀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도 머리가 좋아야 잘하는 건가 봐?”“그러니까요. 사건에 여러 사람이 연루됐는데 이렇게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오래 걸리는 건 처음 봅니다.”“보통 이 정도로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있으면 진술이 너무 일치하지 않아서 금방 거짓인 걸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다 한통속으로 말을 맞춘 티가 나서 거기에서 심층 수사를 들어가든지 하는데….”수사관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하튼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들이다 보니까 판을 까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네요.”젊은 수사관은 그들이 모아둔 진술서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만 보이던 진실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박정현이 이 모든 승부조작의 중심점. 곧 시작이자 뿌리였다. 그가 코치진 중 마음이 맞는 몇 명과 팀장인 기태를 가장 먼저 꼬셨다. 그리고 기태에게 팀원들을 부리는 것을 일임했다. 승승장구하던 팀의 멤버들과 코치진이 왜 커리어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고서 속아 넘어갔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사 중 보게 됐던 정현의 언변에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정현은 때에 맞춰서 적절한 말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말했던 것에 빈공간이 생기거나 상충하는 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박정현이 받아 챙긴 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모두 합치면 30억에 달했다. 그마저도 현재 밝혀진 액수라는 것.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