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진은 아이비의 보랏빛 눈을 흘긋거리다 시선을 떨구었다.
눈치가 빠르고 예민하다.
아까 하녀가 한 까탈스럽고 예민하다는 이걸 말하고 싶었으려나.
“죄송하지만, 하녀입니다”
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의뢰주의 추가조항은 절대 정체를 말하지 말 것.
무슨 이런 바보같은 조항이 있나 했지만, 뭐, 돈을 그만큼 주기로 했으니 따라야지.
“그래? 그럼 네 손에 난 굳은살에 대한 변명은?”
“손이 여려서 굳은살이 잘 베깁니다”
“허술해”
“이전에 정육점에서도 일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버지가 군인이십니다”
“그래서 군인이 받는 훈련을 받는다고?”
진의 단호한 얼굴에 아이비의 미간이 좁히며 책상을 툭툭 건드렸다.
어떤 인물이 또 보낸 걸까.
이력서까지 보내서 내 손으로 뽑게 할 정도라니.
내가 그렇게나 만만해 보인 걸까.
“너…”
유리창을 타고 반짝이는 무언가에, 진은 시선을 돌려 창밖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아, 오자마자 시작이라니.
부지런하다고 해야하나.
진은 곧장 책상을 넘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바닥에 엎드렸다.
“너 이게 무슨…!”
말이 나기도 전에 깨지는 유리창과 자신이 있던 자리에 박히는 화살에 아이비는 놀라 진을 돌아보았다.
습격!
얼마 전에도 하녀로 분장한 암살자가 왔었다.
이제는 이런 식으로 온다니!
아이비의 떨리는 몸에 진은 가만히 아이비의 어깨를 쓸어주곤 그곳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이비는 당황한 채 진을 올려다보았지만, 진은 아무런 말 없이 화살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았다.
화살이 꽂힌 모양새로 볼 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반대편 4층 옥상.
몇이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는데….
이곳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거대한 창으로 이루어져 있고….
진은 창문 아래로 아이비를 숨긴후 작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 얌전히 계세요. 저 녀석들 실력이 좋으니까.”
진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에 장식된 석궁을 들고 아까의 화살을 꽂아 그곳을 향해 조준했다.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 옥상의 장식을 건드리자, 무언가 움직이는 모양새가 보여왔다.
아마 반대편은 경비대가 줄 서 있을 테니, 앞으로 내려와야겠지.
변수는 경비가 저들과 결탁하는 것.
결탁해도 대놓고 봐줄 수는 없을 테니 앞으로 내려와야 할 것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한 곳만 바라보는 진에 아이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애는 대체 뭘까.
자연스레 위치를 파악하고, 장식용 석궁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거지?
“너 정말 정체가 뭐야!”
곧 아래로 뛰어 내리는 그들에 진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유리창을 열고 그 위에 올라섰다.
“뭐, 걱정하지 마십쇼. 곧 돌아오겠습니다.”
뛰어내릴 준비를 하던 진은 다시 아이비를 돌아보았다.
“아,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아무도 방에 들이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발돋움을 하곤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진은 그들의 방향으로 가로질러 달려갔다.
곧 눈에 들어온 그들에 진은 조형물에 발돋움하곤 다리를 감아 사내를 넘어트려 그위에 올라갔다.
“남의 사업장에서 깽판을 치면 쓰나”
다른 사내들이 검을 뽑고 진에게 겨누자, 진은 사내의 위에서 한 사람씩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이놈까지 네 명이라.
많이도 보냈네.
살리는게 좋겠다만, 그게 더 어려운데!
“누구냐!”
“어우, 지긋지긋한 대사.”
허벅지를 쓸던 진은 비어있는 그것에 잠시 손을 멈추었다.
아오, 단검 챙기는 거 깜빡했네.
사내들 중 하나가 석궁을 장전하려 들자, 진은 발아래 사내의 턱을 쳐 기절을 시켰다.
너무 세게 쳤나.
죽지만 않으면 다행인데.
“근데, 너네들은 나 여자인 건 안 보이나 봐?”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진은 가장 가까이의 사내의 머리에 발을 날리곤 그의 검을 빼앗아 옆의 사내에게 집어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그에 진은 쩝 하며 입안을 가다듬었다.
“이제 너뿐이네.”
검을 든 채 벌벌 떨며 뒷걸음질을 치는 그에 빠르게 달려간 진은 검을 든 손을 발로 차곤 바로 몸을 돌려 사내의 가슴 한가운데에 발길질을 했다.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자 진은 옷을 탁탁 털며 쓰러진 사내에게 시선을 천천히 다가갔다.
“아이고, 힘들다.”
“너…! 누가 보낸 거냐!”
“내가 할 대사를 자기가 하고 있어.”
가슴팍에 발을 날리자, 요란하게 넘어가는 사내에 진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더듬거리며 몸을 피하는 그에 진은 사내에게 다가가 가슴에 한쪽 발을 올렸다.
이 녀석이 말을 해주려나.
“누가 보냈냐?”
“이….정신 나간!”
꺽꺽이며 말을 이어가는 그에, 진은 허리를 숙여 복면 아래 가려진 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녀석이 말을 해주면 참 좋을텐데 말이지.
“정중하게 물어 볼때 말해.”
진은 천천히 체중을 실어 사내의 가슴을 압박했다.
“얌전히 물어볼 때 대답해.”
“이…!”
“지금이라도 말하면 널 풀어주겠어.”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매한가지야”
사내의 말에 진은 미간을 좁혔다.
이 녀석, 그냥 암살자가 아니다.
설마…!
“너!”
순간 눈을 까뒤집는 사내에 진은 놀라 그의 입안에 손을 집어넣어 약을 빼내었다.
또 그녀석들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 이놈들이 아이비를 노리는거지?
미간을 한껏 좁힌 채 정원을 걷던 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기분으로 언니를 만났다간,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머리나 좀 식히고 들어가보던지 해야지.“진, 괜찮아?”진의 팔을 붙잡은 헤이든은 가만히 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이야기를 해주려나.얘라면 또 혼자 꽁꽁 앓을텐데..“아까 그 이야기, 진짜야?”“헤이든, 나중에 이야기 하자. 지금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너는 괜찮아?”헤이든을 한번 쳐다본 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어느 누가 괜찮을까.나를 죽이려고 한 게 내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면.그러려니 하려고 한, 나의 그 의지들 마저도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설마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충격적이었으니까.“헤이든 너가 실망했을 거 알아.”“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실망을 해.”“내 친형제는 어린 나이에 언니와 나를 죽이려고 제 어머니를 꼬아 냈잖아. 결국 나도 같은 핏줄인 거고.”“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너도 피해자야.”아무 말 없이 시선을 피하는 진에 헤이든은 낮게 한숨을 뱉었다.제발 아니기를 그렇게 빌었는데.빌어먹을 신이 있다면 왜 진에게 이딴 일만 생기는 건지 멱살이라도 잡고 따져 물어보고 싶은 정도인데.얘가 뭘그렇게 잘못했다고.“너랑 상관 없는 것들이야.”“잘 모르겠어.”“너 때문도 아니고, 네가 그렇게 시킨 것도 아니야. 피 하나 섞였다고 네 탓으로 몰고가지마.”“헤이든”“네가 그렇게 말하면 할아버지도, 벨라도 슬퍼해.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입을 꾹 다문 진에 헤이든은 진의 두손을 잡았다.이런 말을 하면 진이 이해를 할까.정말이지, 얘가 너무 착한게 문제인것 같은데.“난 널 믿어.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말아.”“노력은 해볼게.”“진, 그 사람들과 너를 같다고 생각 하지마. 알았지?”“응”“그러니까 네 탓 하지도 말고.”고개를 끄덕이는 진을 보던 헤이든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정말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언제까지 이런 바보 같은 생각만 할지
“아직 위험하다.”레이먼드의 말에 진이 욕을 뱉으려 하자, 헤이든이 다급하게 진의 입을 막았다.또 이렇게 입이 먼저 나가고.하여튼 얘는 이게 문제라니까.“진, 그만”입을 막고 있는 손을 콱 물어버리는 진에, 헤이든은 손을 털어내며 소리를 질렀다.“아파!”“누가 막으래?”“너는 진짜!”헤이든을 흘겨본 진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레이먼드에게 시선을 돌렸다.이 미친인간.내 말은 곧 죽어도 안 듣지.“그리고 저희 언니에게 다가 가지 말라는 말은 콧구멍으로도 안 들리셨습니까? 그리고 이제 나갈 거라니까요?”레이먼드는 픽 웃으며 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잔뜩 짜증난 얼굴과, 날카로운 목소리.내가 그렇게 싫으려나.제일 큰 난관이 여기 없어서 후순위로 미뤄뒀더니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내가 먼저 다가간 건 아닐세.”“그럼 우리 언니가 경에게 갔다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빼액 소리를 지르는 진에 헤이든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얘는 진짜 목에 나팔이라도 꽂은 거 아냐?이러다 누님까지 다 듣겠네.“진, 그만 진정 하라니까”“진정 같은 소리하네. 야, 헤이든 너도 문제야. 아니, 벤이랑 벨라도 문제야. 말리지는 못할 망정, 이게 뭐야?”“할아버지는 이미 스피나 경 편이야. 고모도”“둘다 협박이라도 당한 거 아냐?”레이먼드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만담꾼도 아니고, 하는 짓이 웃기긴.둘을 붙여두면 일년 치 웃을 일이 한시간만에 나올 것 같은데.“둘에게 협박보다는 선물을 많이 했네. 엘리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했지, 그들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지 않나?”“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글은 아니지. 하여간, 생각은 잘해보게. 헨리 그녀석이 아직 잡히지 않았어. 확실하게 안전해 지지 않은 이상, 다른 곳으로 이동은 어렵지 않겠나.”“아니, 그럼 아이비는 괜찮고요? 아까 제가 그 말 했을 때는 그렇게 하라면서요”“공녀의 곁에는 그 커다란 용병이 있지 않은가. 별일 없겠지.”레이먼드를
“진? 뭐야, 왜 벌써 왔어?”행주를 아무데나 집어 던진 헤이든은 자리에 앉는 진의 옆에 앉아 가만히 얼굴을 살폈다..왜 이렇게 기운이 또 없는 거야?이 정신나간 공녀가 또 한 소리 했나?“무슨 일 있어?”“계약 마치고 온 거야. 말 나온 김에”“고민한거 치고 빠르게 끝냈네? 며칠더 미적거릴줄 알았더니.”헤이든의 말에 진은 웃고있는 헤이든을 흘겨보았다.그게 그렇게나 좋은가?아주 대놓고 공작가를 싫어한다고 말하고 다니지.“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뭐든 좋은 게 좋은 거지. 공녀는 뭐래?”“여러가지 말이 많긴 했는데, 계약 정산은 나보고 가져다 달라 더라.”헤이든은 혀를 차곤 머리를 털었다.끝까지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뭐 잘났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으휴, 짜증나.“하여튼 마음에 안 들어. 내가 수당 좀 더 올려 쳐서 받아 낼게.”“야, 그래 봤자 아이비가 알겠어? 그 집 돈도 많아서 티도 안나.”“그럼 더 받아내 야지. 기대 해라.”콧노래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넌 헤이든은 주방안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그런 헤이든을 보던 진은 다시 상자로 시선을 옮겼다.이게 뭐길래 멜리나가 준 걸까.내가 공작 부인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자리를 옮기는 것 같았는데.나에게 줄만한 것이 있었을 리도 없고….“뭔데?”“언제 왔어?”“방금왔지. 선물이라도 받았어?”“아….”가만히 상자를 보던 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헤이든을 돌아보았다.“언니랑 내 유모였던 하녀장이 준거야.”“네 유모? 그럼 너 알아본거 아냐?”“괜찮아.”입을 다시던 진은 낮게 한숨을 쉬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뭐야? 인형 아냐?”헤이든의 말에도 진은 가만히 인형을 바라보았다.에메랄드가 박힌 리본을 메고 있는 곰 인형.어린시절, 멜리나가 만들어준 곰 인형이었다.멜리나는 나를 잊지 않고 있었을까.나를 잊은 그 공작성에서 유일하게 나를 기억해준.언니의 유모이자, 나의 어머니 같은 멜리나.“진, 울어? 갑자기 왜 그래?”진은 눈을 북북 닦으며
“그래서, 이제 영영 떠나는 게냐?”마리아의 말에 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정말이지, 마지막이라고 말을 해도 말씀을 저렇게 하신다니까.성격 한번 고약하다고 해야하나.“앞으로는 공작가애 얼씬도 하지 않을 계획입니다.”“참으로 어리석어. 그럴 바에 내 밑에서 일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아유, 됐습니다. 저도 모아둔 돈도 많고, 일을 그만 둘 거 라서요.”진의 말에 마리아는 픽 웃으며 차를 한입 마셨다.저 재미있는 애가 이제 없으면, 한동안 공작가는 조용할 것이었다.한동안 시끌시끌해서 재밌가 있었는데.이러는걸 보면 꽤나 서운하기도 하고.“계집애라 했지. 사내 행세 한다고 고생을 꽤나 했겠어.”“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게 받겠습니다.”“독도 먹고, 공작가에서 고생을 많이 했구나.”마리아의 말에 진은 킥킥 웃으며 괜히 어깨를 풀었다.참 많고 많은 일이 있긴 했었다.어지간한 의뢰들보다 난이도는 높긴 했으니.암살자에, 독에….으휴, 다시는 귀족가 호위는 안 맡아야지.“뭐, 보너스라도 주실 거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실 없는 소리 하기는.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라. 그 정도는 들어주지.”“이야, 공녀님께서 공작부인이 저를 좋아하신다고 하시긴 하셨는데, 그 정도 일 줄은 몰랐습니다.”“이 심심한 곳에서 너 같이 격 없이 구는 녀석이 어디 있는 줄 아느냐.”“영광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공작부인께서도 성격은 좀 죽이세요.”“넌 그 입 때문에 죽을 거다.”마리아의 말에 진은 미소를 지으며 방을 훑어 보았다.따듯하고 고급 진 공작부인의 방.그리고 한 가운데에 걸려있는 어린 시절의 언니가 그려진 초상화.나를 죽이려고 한, 나의 친모와 친 형제.둘 중 누구에게서 그런 생각이 나왔을 지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지만은 않은데.뭐, 공작부인에게는 아이비가 모든 것을 말해줄 테니 내가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만.“가는 김에 그 멀대 같은 놈도 같이 데려가지 그러냐.”“그 놈은
“전 공녀님의 고용인이지 관련된 가신이 아닙니다.”“진, 무슨 말을 그렇게해?”“아니, 맞는 말이잖아. 계약까지만 하고 떠나는게 맞는거고.”미간을 좁히고 있는 아리엘에 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아이비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럼, 빠른 시일 내로 정산 부탁 드리겠습니다”까딱이며 말하는 진에 아이비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답지 않게 단 칼인 모습.이게 용병이라는 건가?아무리 기간이 잡혀 있는 계약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간의 인연을 저렇게 도끼로 내려찍듯 끊어내는 관계인 걸까?“네가 볼땐, 우리 관계가 돈이었구나?”“결국 계약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아리엘과는 다른 계약이지 않습니까?”“내가 널 잘못 보았나 봐.”“어떻게 보시든 전 이렇게 굴러 먹은 지라. 어쩔수 없는부분 아니겠습니까?”아이비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빙글빙글 웃고만 있는 얼굴.지금까지와는 다른, 그러한 위화감이 느껴졌다.몇 달간 함께했던 익숙한 저 얼굴이 낯설기까지 했고.“너,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네. 뭐, 스피나 경께 보고를 드려야 하니까 마차사고의 경위는 따로 부탁 드리겠습니다.”“너….”“아, 그리고 델란 영애는 다비드 도련님께 이야기 잘해 주십시오.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떠올랐네요.”헛웃음을 터트린 아이비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저었다.평소 처럼, 장난치듯 하는 말이 아닐 것이었다.왜인지, 속이 긁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말이 없겠네.”“감사합니다. 공녀님.”“며칠내로 정산서를 가지고와. 네가 왔으면 하는군.”“알겠습니다. 마차 사고건은 스피나 경께는 제가 전달해 드릴 터이니, 그건 서비스라고 생각하십시오.”“그래. 가기전에 공작부인께는 인사하고 가렴. 널 꽤나 예뻐 했으니까.”진은 쩝, 입을 다시다 고개를 끄덕였다.그 귀찮은 할망구한테 인사까지 해야 한다니.마지막일테니까 인사는 해야 겠지.“알겠습니다.”“나가 보렴. 지금까지 수고 했어.”진이 인사를 꾸벅 하
진은 볼을 긁적이며 아리엘과 아이비를 번갈아 보았다.뭐야, 왕성에 갔다 와서는 왜들 저러는 거야?무슨 말이라도 해야 내가 알아 듣지.“무슨 일 있으셨어요?”“아, 아무일 아냐.”힘없이 웃는 아이비에 진은 아리엘에게 시선을 돌렸다.별말 없이 고개를 젓는 아리엘에, 진은 작게 혀를 차며 다시 아이비를 바라보았다.또 자기들끼리만 쑥덕이는건가.나도 보고할게 있어야 하는데.“뭐, 제레미랑 이야기가 잘 안 되었나 봐요?”“얻어낼건 다 얻어내었어. 그리고 스피나 경이 부탁한 것도 알았으니까, 네가 전달해줄래?”“부탁이라면….”중얼거리는 진에 아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얘가 이걸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하려나.이래저래, 안좋은 모습만 보이는데.“마차사고 말이야. 아버지께도 말씀 드려야 겠지만. 범인을 찾았어.”“…범인이요.”진은 굳은 얼굴을 애써 풀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지금 이 시점에서 찾은 것이라면, 그들이 주동자라는 말이었다.나를 죽이려고 한 사람이, 나와 같은 피가 섞인 이들이라니.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이 혐오감이 치밀어 올라왔다.“진?”“아, 아닙니다. 그럼 그들이 혈육을 죽였다는 말씀이십니까?”가만히 바라보는 진에 아이비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이딴 게 귀족이라는 것이 저 아이에게 충격이겠지.나 조차도 저런 반응이었으니, 무어라 할말도 없었고.“그렇게 되었구나. 귀족이라는 것이 정말 별 것 아니지 않니?”“그럼 스피나 경께는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요즘 다른 곳에 계시는지 연락이 잘 닿지 않더구나. 어디 계신지 알고 있니?”“아…. 대충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곧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 뒤로 잡은 손을 꾹꾹 눌렀다.이제 아이비는 안전하게 공작후계가 될 것이었다.그럼 나도 계약이 끝이 날 것이었고, 언니랑 함께 다른 지방으로 옮길 수 있겠지.그럼, 헨리 이자식은 어떻게 되는 거지?“푸른 사과 말입니다. 그쪽은 아무런 말 없었습니까?”“안 그래도 세자 저하께서 한 말씀 하
“공작가에 하녀가 암살시도 했다지?”“제일 끗발 없는 서출 공녀한테 무슨….”“그러니까 웃긴 일 아니냐.”사내들의 말에 헤이든은 테이블에 맥주를 거칠게 내려 두었다.“다 튀잖아!”“튀기는. 그리고 귀족네들 이야기 하지마. 그런 거 이야기해서 좋은 꼴 본 적이 없어.”“아니, 그렇잖아. 공작가에 아무리 적장녀가 실종되었다만, 서출 공녀까지 그러는게 이상하지 않냐?”“이상은 무슨? 주인도 없는 자리, 탐내는거겠지.”“그래서 암살자를 날려?”“왜, 가서 호위라도 해주게?”“아서라. 난 내 목숨이 더 소중하니까.”혀를
진은 눈을 굴리며 여기저기를 훑어보았다.중후한 홀과 천장 위의 벽화와 홀에 걸린 몇 대 전 공작의 초상화들이 눈에 들어왔다.어릴 적과 달라진 것이 없는것 같기도 하고.딱히 기억도 잘 안나긴 하다만.“공녀님은 어떤 분이세요?”“넌 그런게 궁금하니?”톡 쏘듯 답하는 하녀에 진은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무래도 제가 모실 분이니까요”안내하던 하녀는 고개를 저으며 진을 흘겨보았다.하긴, 얘도 알긴 해야지.얘는 며칠이나 가려나.“까탈스러우시고 예민하신 분이야. 어지간하면 말 걸지 않는 게 좋아”“까탈스러우시고 예민
진은 떨떠름하게 거울 속의 자신을 지켜보다 얼굴을 잔뜩 구겼다.노란 리본을 짧은 머리에 달고, 단정한 하녀복을 입고있는 모습과 함께 저 껄렁한 자세라니.영락없이 뒤 꿍꿍이를 가진 모양새인데.“사장님, 혹시 삶이 지루하신가요”진의 말에도 여전히 바닥을 구르며 웃는 헤이든에, 진은 혀를 끌끌 차며 깊이 숨을 내뱉었다.용병단의 에이스인 내가 이리도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 단장이라는 놈은 배나 부여잡고 낄낄거리는 꼴이라니.헤이든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던 진은 멈출생각 없는 헤이든에 인상을 찡그리곤 그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진은 계약서를 앞에 두고 머리를 파묻은 채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닦았다.내가 미쳤지 진짜.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 집에 내가 내 발로 들어가야한다니.심지어 뭐? 하녀?“나 진짜 그냥 때려 치고 싶어.”“늘 말했지만, 이래서 계약서를 꼼꼼하게 보라는 거야.”진은 계약서를 보다 다시 울상을 지었다.이씨, 레이먼드인지 그 미친 인간은 하녀 소리 하면 안할거 알고 이런거 같은데.중간에다가 그소리를 박아 넣는게 어딨어!“미친거 아냐 진짜.”“그러게나 말이자. 공녀님 옆으로 가는데 시종으로 갈 수도 없고.”“아니 경비도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