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진은 떨떠름하게 거울 속의 자신을 지켜보다 얼굴을 잔뜩 구겼다.
노란 리본을 짧은 머리에 달고, 단정한 하녀복을 입고있는 모습과 함께 저 껄렁한 자세라니.
영락없이 뒤 꿍꿍이를 가진 모양새인데.
“사장님, 혹시 삶이 지루하신가요”
진의 말에도 여전히 바닥을 구르며 웃는 헤이든에, 진은 혀를 끌끌 차며 깊이 숨을 내뱉었다.
용병단의 에이스인 내가 이리도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 단장이라는 놈은 배나 부여잡고 낄낄거리는 꼴이라니.
헤이든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던 진은 멈출생각 없는 헤이든에 인상을 찡그리곤 그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그만 웃어! 이 악덕 사장아!”
“으허…. 와, 맞은 곳보다 배가 더 아파”
“명줄이 그냥 달까지 이어져 있지?”
헤이든은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배를 쓸어내렸다.
예상은 했다만, 이 정도 일줄은 몰랐는데.
“요근래 본 것 중에 제일 웃겼어.”
”그렇게 좋으면 너가 입어“
헤이든이 손을 저으며 비죽비죽 웃자, 진의 얼굴이 다시 와락 구겨졌다.
“어우, 난 그런 취미 아니야”
“그럼 난 취미냐?”
잔뜩 불만을 내뿜는 진에 헤이든은 손을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직업이지.”
“너랑 같은 직업인 건 잊지 마라.”
이를 악문 채 말하는 진에 헤이든은 웃음을 참으며 진을 다시 천천히 훑었다.
“하녀복을 입은 소감은?”
“예. 우선 전투력은 확실히 올라갔습니다.”
어깨를 풀며 말하는 진에 헤이든은 입술을 꾹 누르며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열정이 요즘 것들과는 다르구만. 역시 내 직원이야”
미간을 팍 좁힌 채 머리에 달려있던 리본을 풀어내는 진에, 헤이든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가발 쓰는 건 어떠냐?”
“답답해 죽을것 같아서.”
“그럼, 그렇게 동네 양아치 같이 돌아다니게?”
“취향이 특이한 아가씨일 수도 있잖아”
짜증을 내며 말하는 진에 헤이든은 낮게 한숨을 뱉었다.
“아서라. 치안부에 신고당할 거다.”
“세상이 너무 좁아. 취향도 존중해야지”
“모든 취향을 다 존중했으면 법은 왜 있냐? 기다려 봐. 가발 가져올게”
헤이든이 나가자 홀로 남은 진은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와, 치마.
알 수 없는 감정이 슬쩍 얼굴을 빼 들었다.
얼마 만에 입는 치마였더라.
15년 전의 그 일이 아니었다면, 아마 아직도 입고 있을 치마였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이것에 눈길도 주지 않았기에, 이제는 낯설기까지 했다.
언니는 나 때문에 다리를 잃었으니 이런 것쯤은 감당해야 할 일이지만.
“그런데 그 집에 다시 들어가라니.”
욕지기가 나올 것만 같은 허탈함이었다.
아무리 돈이라지만, 나와 언니를 죽이려고 한 곳인데.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야! 이거 한번 써봐”
갑자기 튀어나온 헤이든에 진은 질겁을 하며 그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악! 하는 소릴 내며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그에 진은 제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를 질렀다.
“놀랐잖아!”
“아파! 너 거기 가서 성질 좀 죽여!”
진은 헤이든 손에 쥔 가발을 휙 하고 걷어 올렸다.
“흥이올시다. 나같이 친절한 용병이 어디 있다고.”
진은 단발머리의 가발을 머리에 얹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헤이든은 엉덩이를 쓸며 진의 표정을 한번 흘겨보았다.
“좀 낫다. 확실히 너는 선이 얇아서….”
“야… 있잖아”
진이 무게를 잡듯 목소리를 깔고 헤이든을 돌아보자, 말간 눈이 헤이든에게 다가왔다.
얘는 어릴 때부터 그랬지만, 조심성이라는 게 없다니까.
그런 눈으로 다가오면 다들 얘가 사내가 아니라 여자애인 걸 대번에 알 수 있는데!
“뭐..뭔데..!”
“릴리 에반스라고 해요”
진은 가발을 쑥 하고 벗으며 식 미소를 짓자, 헤이든은 어이가 없다는 듯 힘 빠지는 소릴 내었다.
“진 그릭이야”
“넌 제발 심각성이라는 걸 좀 느껴”
진은 키득거리며 다시 가발을 쓰고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일은 일이다.
설마 나를 알아볼 리는 없다.
8살의 이네스가 아니라, 23살의 용병 진 그릭이란 말이지.
성별도 다른데, 저들이 혹시나 알아본다 해도 박박 우기면 어쩌겠어.
여차하면 도망이라도 치면 되는걸.
“아무튼 거기 가면 조심해. 상황이 이상하더라”
헤이든의 말에 진은 킥킥 웃으며 어깨를 털었다.
“뭐, 흔하지 그런거는. 고귀하신 귀족나으리들 아니냐”
“그깟 후계가 뭐라고 라고 하기엔 너무 크긴 해.”
“그래봤자 일이야.”
“그래봤자라고 하기에는 작은 소국급의 공작가야. 거기다 스피나 가문까지 얽혔잖냐”
한숨을 쉬듯 말하는 그에, 진은 관심 없다는 듯 가발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귀족네들이 그렇지 뭐. 야, 이거 고정은 잘되는 거냐?”
“낸들 알겠니”
“어우, 재수 없어.”
“아무튼 가끔 나도 갈게”
“하녀로?”
헤이든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가끔 얘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이 안 잡힌다니까.
“너는 진짜 상상력이 풍부한 거냐, 생각을 안 하는 거냐?”
“나만 당할 순 없어”
진의 말에 헤이든은 고개를 저으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멀리 안가서 다행이려나.
자주 볼수 있으면 좋을 텐데.
“조심해서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공녀님, 걱정되십니까?”아리엘의 물음에 창밖을 바라보던 아이비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입안이 마르는 것만 같았다.만일, 거절을 하러 온다면 그때는 무어라 말해야 할까.“진이 거절을 하면 어쩌지?”“그래도 진이 공녀님의 동생이심이 변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진은 공녀님을 언니로, 가족으로 이미 받아 들였습니다. 공녀님이 알지 못해도, 그 옆에서 묵묵히 지켜주었습니다.”“그게 꼭 나를 언니로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르잖아.”웅얼거리는 아이비에 아리엘은 조심스레 아이비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진이 그럴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있었지만, 그대로 공녀님께서는 계속 걱정을 했으니.어떻게 말을 해야 그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까.“사실 이번 의뢰에서 진이 이상한 행동을 많이 보였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진이 공녀님께 정이 들어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진이?”“평소에도 장난치며 일하긴 하지만, 이번에는 공녀님을 유독 신경 쓰면서 움직였습니다.”“아리엘, 난….”“공녀님이 그 사실을 몰라도, 진은 최선을 다해 공녀님을 지켰습니다.”손을 다잡아 주는 아리엘에 아이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내가 저에게 해준 것이 무어라고 그렇게 까지 했을까.자신을 알아봐 주지도 못한 언니에게.본인의 존재를 지워버린 이 공작가에 무슨 좋은 감정이 있다고.“진에게 너무 미안해.”“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의 성격이라면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떠나는 아이 아닙니까.”“…그렇지.”“늘 최선을 다하는 아이 이니까요.”창밖을 바라보는 아리엘에 아이비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진이라면, 확실히 그럴 아이였다.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이런 못난 나를 감싸 주었으니.“하지만 언니는….”“엘리라면 그리 걱정 마십시오.”“아리엘도 언니를 본적이 있나?”“아무래도 스승님과 엘리가 함께 살았으니, 자주 만났었습니다. 이제는 대공녀님이라고 불러야겠지만, 너그러이 이해해주십시오.”“그런 건
헤이든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방금 내가 한 생각을 이렇게나 빨리 번복할 줄이야.얘는 확실히 생각이 나보다 짧다.아까 생각이 깊다고 한 건 그냥 길가다 돌에 맞은 그런 확률일 게 분명하고.얘는 정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무슨 동대륙 같은 소리를 해?“안돼”“언제는 고민하라며! 다 해준다며!”“위험해.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냐? 동대륙이 무슨 옆집인 줄 알아.”“아 왜! 말 바꾸는 게 어딨어!”고개를 젓는 헤이든에 진은 미간을 잔뜩 좁히고 그를 바라보았다.쫌생이 같기는.이랬다 저랬다.완전 지 맘대로잖아!“그럼 나 혼자 갈 거야. 나 정도면 동대륙 가는 거 얼마든지 구해.”“진, 거기는 왕복으로 1년이야.”“그래서 지금까지 안 갔잖아. 지금까지 길어 봤자 석달짜리 일만 계속한 것도 언니가 있으니까 그런 거고.”“네 몸으로 가는 건 무리야. 알잖아.”“아직 해류 타려면 한참 남았어. 그때까지 회복한 다니까?”“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방금전 만해도 너 떨어질 뻔 했잖아!”“안 떨어졌잖아! 너는 내가 어린애인줄 알아?”빽빽 소리를 지르는 둘에, 벤은 숨을 헐떡이며 문을 벌컥 열었다.이것들이 나이를 쳐먹어도 저러고 싸워?언제는 좋아 죽더니, 지금은 또 왜 이러고 싸우는 건지!“이 정신나간 것들아! 조용히 해!”“벤! 헤이든이 나 괴롭혀!”벤을 돌아보며 헤이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진에 벤은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싸우는 꼴은 왜 하나도 안 바뀌는 건지도 모르겠네.저 나이를 먹고 편들어 달라고 일러다 바치다니.“내가 언제 널 괴롭혔다고 그래!”“시끄러 이것들아!!”얼굴을 붉힌 채 손을 꼭 잡고 있는 둘에, 벤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이놈들은 사랑놀이를 하는 건지, 싸우는 건지.좀 조용히 싸우면 뭐가 덧나는줄 아는 건가.“똑같은 놈들끼리 잘 만났다 그냥.”“벤! 내 편 들어줘!”진의 투정에 벤은 혀를 차며 진을 바라보았다.또 보나마나 진이 헛소리하는 걸로 헤이든이랑 싸웠겠지.별일
길게 하품을 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폈다.시끌벅적한 것이, 역시 우리집이라니까.조용하지가 않으면 오히려 의심을 해야하니 원….어째 이 집으로 옮겨도 아침은 이렇게나 시끄럽냐.“아침부터 뭘 저렇게들 싸우는 거야”중얼거린 진은 창문에 걸터앉아 창밖을 내려다보았다.정원에서 소리를 지르며 헤이든을 쫓아가는 벤에, 진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저 영감탱, 아프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라니까.저렇게 팔팔하면서 맨날 아프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건지.“야이 미친 것아!”“그걸로 때리지 마라고요!”“용병단을 그만둬? 이 정신 나간 놈!”흐릿하게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진은 귀를 기울이다 중심을 잃고 놀라 창틀을 잡았다.“으앗!”소리를 지른 진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네!“와, 진짜 죽을뻔했네.”“진! 너 위험해! 안으로 들어가!”진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주저 앉았다.어후, 이런 것도 조심해야 해?미친 독,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이걸 뭘 어째야하냐….”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오는 헤이든에 진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발한번 빠르네.그걸 듣고 여기까지 올라온거야?“벌써 왔어?”“안 다쳤어?”“다치진 않고, 그냥 깜짝 놀란정도.”“너는 진짜 조심 좀 해. 애가 왜이렇게 조심성이 없어.”헤이든은 진을 일으켜 세워주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아무리 2층이었어도 지금 진의 상태면 많이 다칠 뻔했다.얘는 진짜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은 건지.제발 좀 조심하라고 해도 내 말은 어디로 듣는 거야?“놀라기만 한거지? 거긴 왜 올라가 있었어?”“너랑 벤이랑 싸우는 거 구경하려고 그랬지. 왜 그렇게 벤이 화가 난 거야?”“별일 아냐”“별일 아닌데 벤이 널 죽이려고 하냐?”침대에 진을 앉힌 헤이든은 혀를 차며 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얘는 경각심 이라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없는 건가.본인 다칠 뻔 한 것보다 그게 더 궁금하다
진이 휘청이자, 헤이든은 진의 팔을 단단히 잡아주었다.“괜찮아?”“아, 힘이 빠져서. 이거 언제까지 이러냐”“열심히 운동하고 약 먹어야지. 앉아서 좀 쉴까?”벤치에 앉은 진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풀벌레가 찌르르 우는 정원에는 이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복잡했던 머리가 이제는 제법 많이 비워진 것 같기도 하고.언니도, 아이비도. 모두들 이제는 잘할 수 있겠지.“공기 좋다.”“안 쉬고 가도 되겠어?”“조금만 이러고 있을래.”가만히 몸을 흔들전 진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나뭇잎이 시각이는 소리와 밤부엉이의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이렇게 마음 편하던 날이 또 있었나.앞으로의 일은 전혀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결과는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뭐, 라파도 부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헤이든”“응?”“언니의 선택이 옳겠지?”“글쎄. 누님의 생각이잖아.”“언니의 말 대로 한다면 그들이 언니와 나를 다시 공녀로 삼으려 할거야. 신분을 복위 시키겠지. 언니는 적통성 있는 적장녀니까.”“그렇겠지.”“물론 공작부인이 어떻게 받아 들일 지는 모르겠다만.”눈을 감은 채 이야기하는 진에 헤이든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살이 빠져 아직은 수척했지만, 제법 얼굴에는 혈기가 돌았다.바람에 머리칼이 날러 진의 얼굴을 간질이고 있었다.아름답고, 강인한 나의 연인.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을 지금까지 본적이 있었을까.“그래서 언니가 원한다면, 언니는 공작가의 일원으로 받아 질거야.”“너는?”“나?”진은 슬적 눈을 뜨고 헤이든과 눈을 마주쳤다.진짜 헤이든은 나만 보이는 걸까.항상 내가 모든 일의 중심인 것 마냥 나를 대했다.집착이나 이런 것보다는, 그냥 나만을 따라다니는 것처럼.“넌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내가 물어 본거나 대답하지?”픽 웃음을 터트린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헤이든의 무릎위에 앉았다.“또 뭘 하려고 그러는 거야?”“앉아 있어보니까 자리가 차가워서.”“이
고개를 푹 숙이는 엘리에 진은 작게 한숨을 뱉으며 쇼파에 등을 기대었다.뭐,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있나.섭섭해도 언니가 싫으면 끝인데.“언니가 싫으면 거절할거야. 우선 공작저에 아는 건 아이비뿐 이니까.”“아이비만 알아?”“응. 내가 비밀 지켜 달라고 했어. 아무래도 아이비라면 언니의 선택을 존중할 거야. 아, 멜리나한테는 들켰지.”“멜리나?”“걱정말아. 멜리나는 말 안할거니까.”엘리를 바라보던 진은 쓰게 웃으며 레이먼드와 눈을 마주쳤다.이사람도 뭐라고 한마디 얹을 게 없는 건가.우선 아이비는 언니를 보고 싶어했다.그렇다고 싫다는 언니를 억지로 끌고가서 만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그냥, 언니의 마음이 중요하니까.“언니는 아이비 안 보고 싶어?”“…보고싶지.”“언니의 어머니 이신 공작부인께서도 언니를 그리워해.”“어머니께서는, 건강하셔?”“병약하시긴 하셔도 정정 하시더라. 레이먼드도 알잖아요?”“여전히 무서우신 분이시지.”레이먼드의 말에 엘리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이전부터 다들 어머니를 무서워했다.나에게는 다정하셨던 분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어머니를 어렵게 대했으니까.달라 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는데.“여전하시구나. 어머니는.”“언니, 어떻게 부탁을 하면 공작…그러니까, 아버지께는 귀에 안 들어갈 것 같아.”“진”“난 아버지는 용서할 생각이 없어. 그건 어떻게 안되겠네.”힘없이 웃는 진에 헤이든은 진의 손을 잡아주었다.지금까지 들은 말로도 진은 공작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었다.애써 티 내지 않는 것이겠지.“괜찮아?”“뭐, 한두 번 생각한 것도 아닌 걸.”진의 대답에 벤은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아무리 생각해도 맹추 같은 놈이야. 가문 하나 살리겠다고 자식을 내다버리다니.”“별수 있나. 권력이라는 게 더럽고 그런 거잖아.”“그래서 너랑 네 언니가 이 개고생을 해?”“또, 화내신다. 화 좀 그만 내. 그러다 진짜 고혈압 온다니까.”진의 투덜거림에 벤은 쯧,
진이 헤이든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자, 벤과 벨라는 다급하게 진에게 다가왔다.그런 그들에 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헤이든을 돌아보았다.벤한테 또 혼날 거 같은데.하루이틀 혼나는것도 아니다만, 아씨. 벌써 무섭잖아?“그…. 생각한것보다는 안다쳤어.”“안다치기는! 며칠째 거기 있었는데! 소식 듣고 얼마나 돌랐던지! 하여튼 너는 진짜….”“아, 아버지, 진정부터 하시고. 진,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많이 좋아졌어. 진짜 괜찮아.”진의 말에 벤은 미간을 좁힌채 진을 바라보다 한숨을 뱉었다.또 무모하게 몸으로 막았을 게 분명했다.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게 늘 문제라고 말했는데.“헤이든, 치료는 다 한 거 맞냐?”“약만 먹고, 운동만 잘하면 된데요. 후유증도 있을 수도 있고….”“후유증?”벨라의 물음에 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다들 혼을 내는 건지 걱정을 하는 건지.헤이든도 말을 잘 해야지 걱정하게 굳이 저런 말까지 하고 그러냐.“없을 수도 있고. 진짜야. 의사가 그랬어. 근육 쪽 독이라서. 가끔 힘이 좀 안 들어 갈 수 있다 던데?”“진, 너는 그걸 그렇게 가볍게 말해?”“그야 다들 걱정하니까 그러지. 진짜 괜찮아. 나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니까?”벤은 진의 얼굴을 바라보다 작게
진은 아이비의 보랏빛 눈을 흘긋거리다 시선을 떨구었다.눈치가 빠르고 예민하다.아까 하녀가 한 까탈스럽고 예민하다는 이걸 말하고 싶었으려나.“죄송하지만, 하녀입니다”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의뢰주의 추가조항은 절대 정체를 말하지 말 것.무슨 이런 바보같은 조항이 있나 했지만, 뭐, 돈을 그만큼 주기로 했으니 따라야지.“그래? 그럼 네 손에 난 굳은살에 대한 변명은?”“손이 여려서 굳은살이 잘 베깁니다”“허술해”“이전에 정육점에서도 일했습니다”“말도 안 되는 소리.”“아버지가 군인이십니다”“
진은 눈을 굴리며 여기저기를 훑어보았다.중후한 홀과 천장 위의 벽화와 홀에 걸린 몇 대 전 공작의 초상화들이 눈에 들어왔다.어릴 적과 달라진 것이 없는것 같기도 하고.딱히 기억도 잘 안나긴 하다만.“공녀님은 어떤 분이세요?”“넌 그런게 궁금하니?”톡 쏘듯 답하는 하녀에 진은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무래도 제가 모실 분이니까요”안내하던 하녀는 고개를 저으며 진을 흘겨보았다.하긴, 얘도 알긴 해야지.얘는 며칠이나 가려나.“까탈스러우시고 예민하신 분이야. 어지간하면 말 걸지 않는 게 좋아”“까탈스러우시고 예민
진은 계약서를 앞에 두고 머리를 파묻은 채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닦았다.내가 미쳤지 진짜.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 집에 내가 내 발로 들어가야한다니.심지어 뭐? 하녀?“나 진짜 그냥 때려 치고 싶어.”“늘 말했지만, 이래서 계약서를 꼼꼼하게 보라는 거야.”진은 계약서를 보다 다시 울상을 지었다.이씨, 레이먼드인지 그 미친 인간은 하녀 소리 하면 안할거 알고 이런거 같은데.중간에다가 그소리를 박아 넣는게 어딨어!“미친거 아냐 진짜.”“그러게나 말이자. 공녀님 옆으로 가는데 시종으로 갈 수도 없고.”“아니 경비도 있
“너 이 빵 어디서 샀어!”짜증 섞인 벤의 호통에 엘리를 안고 내려오던 진은 머리까지 새빨개진 벤에게 시선을 옮겼다.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들어서 저러신데.“뭐가?”“빵 말이다. 빵!”“베이커네. 거기 빵이 맛있잖아. 생각나서 기껏 사 왔더니?”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벤에, 진은 엘리를 앉혀주곤 옆에 앉아 턱을 괴었다.저 성격에 어떻게 전 용병단 단장인 건지.옛 명성이 하나도 소용이 없단 말이야.“또 뭐가 그리 마음에 안드는건데?”“내가 두 블록 더 가서 쿠퍼네 가서 사라고 했잖아!”벤의 짜증에 진은 깊게 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