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너 이 빵 어디서 샀어!”
짜증 섞인 벤의 호통에 엘리를 안고 내려오던 진은 머리까지 새빨개진 벤에게 시선을 옮겼다.
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들어서 저러신데.
“뭐가?”
“빵 말이다. 빵!”
“베이커네. 거기 빵이 맛있잖아. 생각나서 기껏 사 왔더니?”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벤에, 진은 엘리를 앉혀주곤 옆에 앉아 턱을 괴었다.
저 성격에 어떻게 전 용병단 단장인 건지.
옛 명성이 하나도 소용이 없단 말이야.
“또 뭐가 그리 마음에 안드는건데?”
“내가 두 블록 더 가서 쿠퍼네 가서 사라고 했잖아!”
벤의 짜증에 진은 깊게 숨을 내뱉었다.
빵 하나가지고 짜증을 저렇게나 내는 심보 고얀 영감이 되다니.
분명 15년 전에는 엄청 멋있고 진중한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이게 세월의 무상함인가.
“아니, 베이커네가 왜 베이커겠어? 거기가 빵집이니까 베이커지.”
“누가 그걸 몰라! 쿠퍼네로 가야! 잼을 준다고!”
진은 에휴, 하는 소릴 내며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화를 내는 게 고작 잼이라니.
“구두쇠”
“실버 하나라도 아껴야지! 이것아!”
“그렇게 돈 아끼면 대머리 된다니까”
“이미 대머리야! 이 버릇없는 것아!”
반짝이는 벤의 머리에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난 아직 한참 멀었어.
저 정도는 해야 구두쇠 소리를 듣지.
“눈이 부셔서 안보였네. 미안!”
진의 장난 같은 말에 벤이 다시 진에게 소리를 지르자 음식을 들고나오던 벨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꼭 아버지는 진에게 그러셔요.”
“저 버르장머리 없는 것!“
“나에게 버르장머리를 수업해 주신 스승님은 없어서요. 난 저러다가 고혈압 올까, 그게 더 무섭다.”
주방에서 나오던 헤이든은 둘을 번갈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싸워라 싸워. 고모, 진 거는 제가 만들었으니까 안 줘도 돼요.”
“어머나…. 또 그런 일이 생겨버렸구나”
어두워진 진의 얼굴에 벨라는 담담하게 진의 어깨를 토닥였다.
“다들 탐내도 혼자 먹어”
“누나 빼고 다른사람에게도 나눠 주고싶은데.”
“그럴순 없지.”
“저거 봐라. 마음을 곱게 안먹으니까 천벌을 받는 거야”
낄낄거리며 손가락질 하는 벤에도 진은 시선을 떨구고 고개를 숙였다.
결국 내가 또 먹게 되다니.
분명 사막에서 돌아올 때만 해도 즐겁고, 행복했는데.
“꿈만 같아”
“아냐. 현실이야. 기대해도 좋아”
“아니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럼 깨기라도 할 거 아니냐”
헤이든은 진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자랑스럽게 음식을 건네었다.
곤죽의 형태를 가진 알 수 없는 형태의 무언가가 다소곳하게 그릇에 들어있는 모습에 진은 두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아직 당신의 곁으로 가기에는 너무 할 일이 많습니다.
저 말고 쟤 데려가세요.
“왜 맨날 음식이 보라색이냐”
“몸에 좋은 비트를 넣었어”
“그러니까 왜”
“널 위해서”
“제발 날 그만 위해”
“부끄러워하지 마. 남기지 말고 먹어야 해”
크게 한숨을 쉰 진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대체 뭘 만들려고 한 거냐?”
“서쪽 지방에서 유행하는 면 요리야”
“너 혹시 면 같은거 안 먹어 봤냐”
스푼으로 보라색의 그것을 한번 떠본 진은 고개를 저었다.
저 미친녀석은 면을 안먹어 봤나?
어떻게 하면 이게 면으로 보이는 건지.
“생면이라고 들어봤냐”
“안 듣고 싶어”
“그게 맛있다길래 내가 만들었거든. 근데 삶으려고 넣었는데 사라지더라고?”
“그래서 듣고 싶지 않다고.”
허망하게 중얼거리는 진에도 헤이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어차피 요리에 들어가는 면수니까 거기다가 해물 육수도 넣고 채소 육수도 넣었어. 그래서 색이 보라색이지. 색감도 좋아. 영양가도 좋아”
“죽기에도 좋겠지”
진의 중얼거림이 다시 이어지자, 벤은 음식을 보며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보양식이랜다”
“스승님”
“이럴때만 스승이지.”
“이거 먹고 만수무강한 건 어때?”
“야! 내가 너 먹으라고 만들었잖아!”
헤이든의 외침에 진은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사형대로 끌려가기 전, 그들에게 최후의 만찬을 준다던데.
차라리 그건 맛이라도 좋겠지.
난 왜 이걸로 사형집행을 당하는걸까.
“누나, 난 행복했어.”
“아이참. 진, 넌 가끔 반찬 투정을 하더라”
엘리가 숟가락을 쥐여주자, 진은 떨리는 손으로 음식에 숟가락을 꽂아 넣었다.
두 눈을 꼭 감고 한입 먹은 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맛있지? 어때?”
헤이든의 밝은 목소리에 진은 숟가락을 대충 놓은 채 의자에 기대어 앉아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더 있어. 더 먹어도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맛 평가해 봐”
“…너 문학 중에 수미상관이라고 아냐?”
헤이든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앞뒤를 똑같이 만드는 거”
“그런 맛이야. 지금 먹은 거랑 이걸 먹고 배출한 거랑 같은 맛일 거 같아.”
“그렇게 문학적으로 말하다니. 역시 맛이 좋구나”
헤이든의 말에 진은 입을 다물고 주먹을 꾹 쥐었다.
“무슨 맛인데? 나도 먹어 볼래”
엘리의 말에 진은 고개를 다급하게 손을 올려 그녀를 막았다.
“누나. 내가 다 먹고 남으면 먹어. 이딴 걸 누나에게 먹일 수 없어”
“나도 궁금한데…”
“가끔은 궁금한 걸 해결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야.”
“공녀님, 걱정되십니까?”아리엘의 물음에 창밖을 바라보던 아이비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입안이 마르는 것만 같았다.만일, 거절을 하러 온다면 그때는 무어라 말해야 할까.“진이 거절을 하면 어쩌지?”“그래도 진이 공녀님의 동생이심이 변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진은 공녀님을 언니로, 가족으로 이미 받아 들였습니다. 공녀님이 알지 못해도, 그 옆에서 묵묵히 지켜주었습니다.”“그게 꼭 나를 언니로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르잖아.”웅얼거리는 아이비에 아리엘은 조심스레 아이비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진이 그럴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있었지만, 그대로 공녀님께서는 계속 걱정을 했으니.어떻게 말을 해야 그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까.“사실 이번 의뢰에서 진이 이상한 행동을 많이 보였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진이 공녀님께 정이 들어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진이?”“평소에도 장난치며 일하긴 하지만, 이번에는 공녀님을 유독 신경 쓰면서 움직였습니다.”“아리엘, 난….”“공녀님이 그 사실을 몰라도, 진은 최선을 다해 공녀님을 지켰습니다.”손을 다잡아 주는 아리엘에 아이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내가 저에게 해준 것이 무어라고 그렇게 까지 했을까.자신을 알아봐 주지도 못한 언니에게.본인의 존재를 지워버린 이 공작가에 무슨 좋은 감정이 있다고.“진에게 너무 미안해.”“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의 성격이라면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떠나는 아이 아닙니까.”“…그렇지.”“늘 최선을 다하는 아이 이니까요.”창밖을 바라보는 아리엘에 아이비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진이라면, 확실히 그럴 아이였다.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이런 못난 나를 감싸 주었으니.“하지만 언니는….”“엘리라면 그리 걱정 마십시오.”“아리엘도 언니를 본적이 있나?”“아무래도 스승님과 엘리가 함께 살았으니, 자주 만났었습니다. 이제는 대공녀님이라고 불러야겠지만, 너그러이 이해해주십시오.”“그런 건
헤이든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방금 내가 한 생각을 이렇게나 빨리 번복할 줄이야.얘는 확실히 생각이 나보다 짧다.아까 생각이 깊다고 한 건 그냥 길가다 돌에 맞은 그런 확률일 게 분명하고.얘는 정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무슨 동대륙 같은 소리를 해?“안돼”“언제는 고민하라며! 다 해준다며!”“위험해.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냐? 동대륙이 무슨 옆집인 줄 알아.”“아 왜! 말 바꾸는 게 어딨어!”고개를 젓는 헤이든에 진은 미간을 잔뜩 좁히고 그를 바라보았다.쫌생이 같기는.이랬다 저랬다.완전 지 맘대로잖아!“그럼 나 혼자 갈 거야. 나 정도면 동대륙 가는 거 얼마든지 구해.”“진, 거기는 왕복으로 1년이야.”“그래서 지금까지 안 갔잖아. 지금까지 길어 봤자 석달짜리 일만 계속한 것도 언니가 있으니까 그런 거고.”“네 몸으로 가는 건 무리야. 알잖아.”“아직 해류 타려면 한참 남았어. 그때까지 회복한 다니까?”“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방금전 만해도 너 떨어질 뻔 했잖아!”“안 떨어졌잖아! 너는 내가 어린애인줄 알아?”빽빽 소리를 지르는 둘에, 벤은 숨을 헐떡이며 문을 벌컥 열었다.이것들이 나이를 쳐먹어도 저러고 싸워?언제는 좋아 죽더니, 지금은 또 왜 이러고 싸우는 건지!“이 정신나간 것들아! 조용히 해!”“벤! 헤이든이 나 괴롭혀!”벤을 돌아보며 헤이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진에 벤은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싸우는 꼴은 왜 하나도 안 바뀌는 건지도 모르겠네.저 나이를 먹고 편들어 달라고 일러다 바치다니.“내가 언제 널 괴롭혔다고 그래!”“시끄러 이것들아!!”얼굴을 붉힌 채 손을 꼭 잡고 있는 둘에, 벤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이놈들은 사랑놀이를 하는 건지, 싸우는 건지.좀 조용히 싸우면 뭐가 덧나는줄 아는 건가.“똑같은 놈들끼리 잘 만났다 그냥.”“벤! 내 편 들어줘!”진의 투정에 벤은 혀를 차며 진을 바라보았다.또 보나마나 진이 헛소리하는 걸로 헤이든이랑 싸웠겠지.별일
길게 하품을 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폈다.시끌벅적한 것이, 역시 우리집이라니까.조용하지가 않으면 오히려 의심을 해야하니 원….어째 이 집으로 옮겨도 아침은 이렇게나 시끄럽냐.“아침부터 뭘 저렇게들 싸우는 거야”중얼거린 진은 창문에 걸터앉아 창밖을 내려다보았다.정원에서 소리를 지르며 헤이든을 쫓아가는 벤에, 진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저 영감탱, 아프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라니까.저렇게 팔팔하면서 맨날 아프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건지.“야이 미친 것아!”“그걸로 때리지 마라고요!”“용병단을 그만둬? 이 정신 나간 놈!”흐릿하게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진은 귀를 기울이다 중심을 잃고 놀라 창틀을 잡았다.“으앗!”소리를 지른 진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네!“와, 진짜 죽을뻔했네.”“진! 너 위험해! 안으로 들어가!”진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주저 앉았다.어후, 이런 것도 조심해야 해?미친 독,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이걸 뭘 어째야하냐….”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오는 헤이든에 진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발한번 빠르네.그걸 듣고 여기까지 올라온거야?“벌써 왔어?”“안 다쳤어?”“다치진 않고, 그냥 깜짝 놀란정도.”“너는 진짜 조심 좀 해. 애가 왜이렇게 조심성이 없어.”헤이든은 진을 일으켜 세워주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아무리 2층이었어도 지금 진의 상태면 많이 다칠 뻔했다.얘는 진짜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은 건지.제발 좀 조심하라고 해도 내 말은 어디로 듣는 거야?“놀라기만 한거지? 거긴 왜 올라가 있었어?”“너랑 벤이랑 싸우는 거 구경하려고 그랬지. 왜 그렇게 벤이 화가 난 거야?”“별일 아냐”“별일 아닌데 벤이 널 죽이려고 하냐?”침대에 진을 앉힌 헤이든은 혀를 차며 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얘는 경각심 이라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없는 건가.본인 다칠 뻔 한 것보다 그게 더 궁금하다
진이 휘청이자, 헤이든은 진의 팔을 단단히 잡아주었다.“괜찮아?”“아, 힘이 빠져서. 이거 언제까지 이러냐”“열심히 운동하고 약 먹어야지. 앉아서 좀 쉴까?”벤치에 앉은 진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풀벌레가 찌르르 우는 정원에는 이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복잡했던 머리가 이제는 제법 많이 비워진 것 같기도 하고.언니도, 아이비도. 모두들 이제는 잘할 수 있겠지.“공기 좋다.”“안 쉬고 가도 되겠어?”“조금만 이러고 있을래.”가만히 몸을 흔들전 진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나뭇잎이 시각이는 소리와 밤부엉이의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이렇게 마음 편하던 날이 또 있었나.앞으로의 일은 전혀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결과는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뭐, 라파도 부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헤이든”“응?”“언니의 선택이 옳겠지?”“글쎄. 누님의 생각이잖아.”“언니의 말 대로 한다면 그들이 언니와 나를 다시 공녀로 삼으려 할거야. 신분을 복위 시키겠지. 언니는 적통성 있는 적장녀니까.”“그렇겠지.”“물론 공작부인이 어떻게 받아 들일 지는 모르겠다만.”눈을 감은 채 이야기하는 진에 헤이든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살이 빠져 아직은 수척했지만, 제법 얼굴에는 혈기가 돌았다.바람에 머리칼이 날러 진의 얼굴을 간질이고 있었다.아름답고, 강인한 나의 연인.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을 지금까지 본적이 있었을까.“그래서 언니가 원한다면, 언니는 공작가의 일원으로 받아 질거야.”“너는?”“나?”진은 슬적 눈을 뜨고 헤이든과 눈을 마주쳤다.진짜 헤이든은 나만 보이는 걸까.항상 내가 모든 일의 중심인 것 마냥 나를 대했다.집착이나 이런 것보다는, 그냥 나만을 따라다니는 것처럼.“넌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내가 물어 본거나 대답하지?”픽 웃음을 터트린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헤이든의 무릎위에 앉았다.“또 뭘 하려고 그러는 거야?”“앉아 있어보니까 자리가 차가워서.”“이
고개를 푹 숙이는 엘리에 진은 작게 한숨을 뱉으며 쇼파에 등을 기대었다.뭐,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있나.섭섭해도 언니가 싫으면 끝인데.“언니가 싫으면 거절할거야. 우선 공작저에 아는 건 아이비뿐 이니까.”“아이비만 알아?”“응. 내가 비밀 지켜 달라고 했어. 아무래도 아이비라면 언니의 선택을 존중할 거야. 아, 멜리나한테는 들켰지.”“멜리나?”“걱정말아. 멜리나는 말 안할거니까.”엘리를 바라보던 진은 쓰게 웃으며 레이먼드와 눈을 마주쳤다.이사람도 뭐라고 한마디 얹을 게 없는 건가.우선 아이비는 언니를 보고 싶어했다.그렇다고 싫다는 언니를 억지로 끌고가서 만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그냥, 언니의 마음이 중요하니까.“언니는 아이비 안 보고 싶어?”“…보고싶지.”“언니의 어머니 이신 공작부인께서도 언니를 그리워해.”“어머니께서는, 건강하셔?”“병약하시긴 하셔도 정정 하시더라. 레이먼드도 알잖아요?”“여전히 무서우신 분이시지.”레이먼드의 말에 엘리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이전부터 다들 어머니를 무서워했다.나에게는 다정하셨던 분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어머니를 어렵게 대했으니까.달라 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는데.“여전하시구나. 어머니는.”“언니, 어떻게 부탁을 하면 공작…그러니까, 아버지께는 귀에 안 들어갈 것 같아.”“진”“난 아버지는 용서할 생각이 없어. 그건 어떻게 안되겠네.”힘없이 웃는 진에 헤이든은 진의 손을 잡아주었다.지금까지 들은 말로도 진은 공작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었다.애써 티 내지 않는 것이겠지.“괜찮아?”“뭐, 한두 번 생각한 것도 아닌 걸.”진의 대답에 벤은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아무리 생각해도 맹추 같은 놈이야. 가문 하나 살리겠다고 자식을 내다버리다니.”“별수 있나. 권력이라는 게 더럽고 그런 거잖아.”“그래서 너랑 네 언니가 이 개고생을 해?”“또, 화내신다. 화 좀 그만 내. 그러다 진짜 고혈압 온다니까.”진의 투덜거림에 벤은 쯧,
진이 헤이든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자, 벤과 벨라는 다급하게 진에게 다가왔다.그런 그들에 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헤이든을 돌아보았다.벤한테 또 혼날 거 같은데.하루이틀 혼나는것도 아니다만, 아씨. 벌써 무섭잖아?“그…. 생각한것보다는 안다쳤어.”“안다치기는! 며칠째 거기 있었는데! 소식 듣고 얼마나 돌랐던지! 하여튼 너는 진짜….”“아, 아버지, 진정부터 하시고. 진,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많이 좋아졌어. 진짜 괜찮아.”진의 말에 벤은 미간을 좁힌채 진을 바라보다 한숨을 뱉었다.또 무모하게 몸으로 막았을 게 분명했다.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게 늘 문제라고 말했는데.“헤이든, 치료는 다 한 거 맞냐?”“약만 먹고, 운동만 잘하면 된데요. 후유증도 있을 수도 있고….”“후유증?”벨라의 물음에 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다들 혼을 내는 건지 걱정을 하는 건지.헤이든도 말을 잘 해야지 걱정하게 굳이 저런 말까지 하고 그러냐.“없을 수도 있고. 진짜야. 의사가 그랬어. 근육 쪽 독이라서. 가끔 힘이 좀 안 들어 갈 수 있다 던데?”“진, 너는 그걸 그렇게 가볍게 말해?”“그야 다들 걱정하니까 그러지. 진짜 괜찮아. 나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니까?”벤은 진의 얼굴을 바라보다 작게
“파말라 공녀?”헤이든의 외침에 진은 머리를 뜯으며 한껏 울상을 지었다.아씨, 이자식도 그소리 할줄 알았다.“그냥 포기할까? 근데 한두 푼이 아니란 말이야.”“너 진짜 어쩌려고 덥석 받은 거야?”“나 없는 동안 뭔 일 있었냐?”헤이든은 괜히 아무도 없는 주변을 한번 두리번거리곤 진에게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거기 공녀의 하녀가 암살 시도했다잖아. 한두번이 아냐.”“내가 내 발로 사형장에 들어가는 거구나”“너무 그러진 마라. 위험하긴 한데, 너를 콕 집어서 찾으니까.”울상을 짓는 진에 헤이든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뭐?”짜증 섞인 그의 말에 진은 괜히 손톱을 바라보다 다시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그냥 하기 싫어서요. 딱 듣기만 해도 위험할 것 같은데.”“위험하다고 안 하는 타입이 아닐 텐데. 타말 사막에도 다녀왔다고 들었네”“소식도 빠르셔라. 전부 다 알고 오신 겁니까?”“중요한 일에 아무나 쓸 것 같은가?”“영광이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는데요.”사내는 혀를 차며 가만히 진을 바라보았다.이 녀석에 대한 평가같은 걸 들었을때 가장 쓸만 했는데.공작가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던건가.이러면 귀찮아 지는데.“자네에 대한 경력과 일
“고마워라.”진의 말에 헤이든은 혀를 차며 올리버에게 시선을 돌렸다.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짓을 하고 있어.“올리버, 그만하고 가라. 50실버 내가 줄 테니까 갚고”“나 먼저 간다!”“야! 올리버!”진은 헤이든의 팔 안에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도망가는 올리버를 째려보았다.저 자식, 끝까지 돈 안 주고 가네.“그걸 왜 니가 갚아주냐?”“입만 살았지 아주.”머리를 쥐어박는 헤이든에 진은 머리를 비비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아프잖아!”“이 꼬라지들 봐라. 진짜. 전부다 배상 청구할 거야”“올리버한테 달아”“전부다
“이제 누나 만나고 좀 쉬어야지.”“아, 너 바로 자지 말고 저녁 먹고 자.”헤이든의 말에 진의 몸이 굳었다.설마. 아니겠지.“뭐..?”“너 사막 가서 고생했잖아. 내가 보양식 만들어 줄게”해맑은 그의 미소에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거짓말”“튕기기는. 내가 몸에 좋은 거 만들어 줄 테니까 딱 기다려”“나 방금 사막에서 돌아왔잖아! 석 달 동안 개고생을 했는데 내가 왜 그걸 먹어!”자리에 주저앉아 울부짖는 진에 헤이든은 미소를 지으며 진의 손을 잡았다.“해준다고 할 때 먹어. 너 진짜 감동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