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마리가 죽다 살아난 후, 다음날.
"하하하, 마리가 생각보다 튼튼한가 보구나."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았나 보네." 부모님은 마리가 다시 살아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젯밤, 마리가 크게 다쳐 죽을 것처럼 보였던 것은 맞지만 결국 자연스럽게 회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상처가 자연스럽게 나았냐고? 아니요. 제 기도 덕분이랍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선 내가 진짜 성녀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확인해 봐야 해.' 나는 생각난 김에 부엌에서 작은 칼을 가져왔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손가락을 칼날에 살짝 갖다 댔다. 슥. "윽." 생각보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나는 서둘러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신이시여, 기도드립니다. 제 아픈 손가락을 낫게 해 주세요." 그렇게 한동안 눈을 감은 채 간절하게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내 손가락에서는 피만 줄줄 흘러내릴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아직도 멀쩡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절함이 부족했나?" 그게 아니라면,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서 그런 걸지도?" 나는 약간 실망한 채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평소 상처가 났을 때처럼 피를 멈추기 위해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그 순간, "...어?" 베인 손가락의 통증이 사라졌다. 동시에 조금 전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던 상처가 거짓말처럼 천천히 아물기 시작했다. "......?" 나는 손가락을 입에서 뗀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혹시 몰라서 다른 손가락에도 시험해 봤는데 결과는 모두 똑같았다. 열 손가락의 상처가 완벽히 아물자 내 입꼬리는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건 확실해! 난 성녀였어!' --------------- 내가 성녀인걸 확인하고 며칠 후. 도시는 언제 와도 정신이 없었다.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갔고, 길 양옆으로 늘어선 상점에서는 저마다 손님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등에 멘 바구니를 고쳐 잡으며 시장을 향해 걸었다. 오늘 가져온 것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며칠 동안 열심히 모아 둔 약초와 농작물이었기에 어느 정도는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무조건 다 팔아야 해!"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시장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광장을 지나던 순간,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붙어 있는 커다란 벽보를 발견했다. [카시안 백작님의 원인불명의 두통을 치료할 수 있는 자에게 사례금 1만골드를 지급합니다. 의술이나 신성력을 다룰 줄 아는 자는 카시안 백작님의 저택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이건 뭘까?"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춰 벽보에 적힌 글을 읽었다. '...1만 골드? 세상에!' 1만 골드는 우리 가족이 1년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금액 이었다. 나는 다시 벽보를 바라보았다. [의술이나 신성력을 다룰 줄 아는 자] 의술은 모르지만, 신성력이라면 분명 나에게 있다. 난 성녀니까! "좋아, 일단 가보자." 결심을 내린 나는 벽보 아래에 적힌 주소를 확인했다. 그리고 곧바로 방향을 바꾸었다. 농작물과 약초를 팔기 위해 도시까지 왔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는 1만 골드 외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도시 영주의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광장 북쪽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간 끝에, 마침내 카시안 백작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눈 앞의 저택을 본 순간, 나는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상상했던 저택이랑은 좀 다른데?'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상당히 달랐다. 도시의 영주라면 당연히 화려한 저택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눈앞에 있는 저택은 생각보다 훨씬 평범했다. 물론 내가 살고 있는 작은 집과 비교하면 충분히 컸지만, 도시의 영주이자 백작이 살고 있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초라해 보였다. 넓은 정원은 있었으나, 화려한 장식이나 꽃 한송이 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저택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잠시 후, 낡은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문 안쪽에서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한 옷을 입고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자였다. 집사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목소리에는 그다지 반가운 기색이 없었다. 나는 등에 멘 바구니를 고쳐 잡으며 대답했다. "벽보를 보고 왔어요." "벽보요?" "네. 백작님의 병을 고쳐주러 왔습니다!" 나는 자신있게 대답했지만, 집사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아가씨, 사례금을 보고 그냥 와본거라면 지금 돌아가십시오." "사례금을 보고 온 건 맞지만...정말 고칠수 있어요!" "백작님이 무슨 병을 앓고 계시는지 아십니까?" "아뇨, 벽보에는 그냥 병이라고 써있던데...아닌가? 아니, 잠깐만요!" 나는 그대로 돌아서려는 집사를 황급히 붙잡았다. 1만 골드가 눈앞에 있는데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 "저는 신성력을 다룰 줄 압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집사는 화들짝 놀라며 그대로 멈췄다. 나는 최대한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신성력으로 백작님을 고치겠습니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나를 귀찮다는 듯 바라보던 하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신성력을 다룰 줄 아신다고요?" "네." "혹시 신관이십니까?" "그건...아니지만." "그럼 어떻게 신성력을 다룬 다는 겁니까?" 나는 말문이 막혀 잠시 머뭇거렸다. 설마 여기서 '제가 성녀 입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직 내가 성녀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한 후,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말씀드리기 곤란해요. 하지만 신성력은 사용할 수 있어요." 집사는 한동안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몰라뵈었습니다." "네? 갑자기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나는 갑자기 공손해진 그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철문 안으로 들어선 나는 하인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건물 내부를 보는 순간,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바닥은 깊게 패인 칼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고, 벽에도 무언가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 놓은 듯한 흔적들이 보였다. 일부 가구는 부서진 채 한쪽에 치워져 있었고, 복도 전체에는 어딘가 음산한 분위기까지 감돌았다. '여기가 정말 백작의 집이 맞아?' 나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귀족이라면 화려한 그림이나 값비싼 장식품이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이곳에는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집사는 복도 끝에 있는 커다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카시안 백작님. 벽보를 보고 찾아온 분이 계십니다." 잠시 후, 문 너머에서 낮고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피곤하니 그냥 돌려 보내. 어차피 또 돌팔이겠지."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닥쳐! 이 1만골드 짜리야! 얌전히 치료나 받으라고!' 백작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집사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신성력을 사용할 줄 안다고 합니다." "......"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후, "들여보내."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가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1만 골드나 미리 준비해 두시지?'"......" 응접실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레오넬은 이에노스에 가겠다는 말을 꼭 산책이라도 다녀오겠다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녀가 다가와 레오넬과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물러나자 오스틴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이에노스에 가겠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텐데." 오스틴은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 다시 썼다. "어떻게 걸을 수 있게 된 건지부터 말해." "......" 나는 찻잔에 코를 박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어쩌려고요, 황자님!! "자네 다리는 내가 제일 잘 알아. 황궁의 의원들이 줄줄이 다녀가는 것도, 신관들이 기도하는 것도 옆에서 다 봤으니까." 오스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이 탁자 모서리를 꾹 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여태까지 휠체어에 앉아 있던 사람이, 지금은 잘도 걷는군." "......" "설명해 주게, 레오넬." 레오넬은 오스틴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몹시 놀란 얼굴이군, 오스틴." "당연하지." "오스틴, 자네는 기적을 믿나?" "...기적?" 오스틴은 한참동안 레오넬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나에게로. "......" 나는 얼른 고개를 들고 자연스럽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 그냥 차 마시는 중이에요. 쳐다보지 마세요. 꿀꺽. "아, 뜨거! 켈록, 켈록." "......" 카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잡한 얼굴로 찻잔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레오넬은 기적이라 하고, 오스틴은 의아해하고, 카시안은 입을 다물고, 나는 혀를 데었다. 셋 다, 아니 넷 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침묵이었다. "...기적이라." 이윽고 오스틴이 작게 중얼거렸다. "...뭔가 있긴 있군. 일단 그렇다고 해 두지." 오스틴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다시 안경을 고쳐 썼다. 레오넬은 작게 헛기침을 한 후
"...황자님.""예.""그럼 다리가 움직이면, 에단님을 도와주실 수 있는 거예요?""......"레오넬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물론입니다."그리고 담요 위에 놓인 두 손을 모았다."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너무 진지한 목소리였다. 장난처럼 넘길 틈도 없이."그, 그럼 시작하겠습니다..."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휠체어 앞으로 다가갔다.'으... 괜히 긴장되네...'지난번에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때는 진흙탕 한가운데였고, 등 뒤에서 함성이 들렸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햇빛이 쏟아지는 조용한 방이었다.창밖의 새소리까지 다 들렸다. 내 심장 소리도.나는 휠체어 앞에 쪼그려 앉아 레오넬과 눈높이를 맞췄다.레오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촉하지도,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준비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그 눈이 너무 가까워서, 결국 내가 먼저 눈을 질끈 감았다.쪽.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천천히 눈을 뜨자, 레오넬이 나를 보고 있었다. 조금 붉어진 얼굴로.그때, 레오넬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구두 끝이 바닥을 더듬듯 움직였다.레오넬은 팔걸이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담요가 바닥으로 스르르 미끄러졌다.그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햇빛이 고인 바닥 위에 멈춰 섰다."......"레오넬은 한동안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일어섰던 그날처럼, 아주 신기한 것을 보는 얼굴로."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네요."그건 저도 마찬가지랍니다...나는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주워 들고, 괜히 코끝을 문질렀다.레오넬이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고맙습니다, 영애. 이제 오스틴에게 가 봐야겠습니다."--------------같은 시각, 응접실."그래서 반란군의 병력은 얼마나 되던가?""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로웬을 함락할 만큼은 됐겠지요.""흠. 로웬이라."오스틴은 안경을 고쳐 쓰고, 탁자 위에 펼쳐 둔 지도를 손가
해가 중천에 걸릴 무렵,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백작님." 마부가 문을 열었다. 나는 카시안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리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와." 반듯하게 깎인 정원수.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깔린 돌길. 창문마다 똑같은 높이로 걷힌 커튼. 그 정교함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군, 카시안 백작." 현관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콧등에 걸친 둥근 안경.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오랜만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오스틴이 내민 손을 카시안이 부드럽게 잡으며 악수를 나눴다. "서신이 무례했지? 사정이 급해서 그리 썼으니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괜찮습니다." 그리고 오스틴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 왔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나를 차분히 훑었다. 머리부터, 드레스, 그리고 손끝까지. "이분이 사촌 동생인가?" "아, 안녕하세요." 나는 최대한 우아하게 치마 자락을 잡고 인사했다. 연회 때 수십 번 연습했던 그 인사였다. "반갑습니다, 영애. 오스틴 레브란트라고 합니다." "아, 아이린입니다!" 오스틴은 내 인사에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사람, 웃고 있는데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선한 얼굴에 미소까지 지어 보이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일단 안으로 들지." 나와 카시안은 오스틴을 따라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택 안 응접실로 안내받은 우리는 고급스러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책장의 책들은 키 순서대로 꽂혀 있었고, 탁자 위의 꽃병은 정확히 한가운데에 놓여 있어서 내 눈길을 끌었다. ...음, 이 저택에서 일하는 건 굉장히 피곤할 것 같아. 그때, 하녀가 소리 없이 차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은은한 꽃향기가 김을 타고 피어올랐다. "레브란트에서 나는 찻잎일세.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 "향이 좋네요." 나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새끼
루텐부르크 영지, 칼튼 상단의 집무실. 사각, 사각. 에단은 서류 더미 사이에서 펜을 굴리고 있었다. "후... 지루하네." 에단은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카르디아 영지 쪽 하늘이었다. '누나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벌컥! 순간,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도, 도련님!" 상단 직원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손에는 서신이 들려 있었다. "...노크하는 법도 잊어버린 건가?" "죄, 죄송합니다. 워낙 급한 건이라..." "뭔데 그러지?" "그, 그게 이에노스에서..." "이에노스?"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병에 걸린 이에노스 사람들이... 몸이 굳어서 쓰러지고 있답니다. 팔이며 다리며, 하룻밤 새 수십 명이..." "역병이 그런 병이었나?" "아닙니다. 다들... 성수를 마셨답니다." "...성수?" "예. 칼튼 상단 깃발을 단 마차에서 샀다고 합니다." 집무실 안이 조용해졌다. "우린 이에노스에 그런 걸 보낸 적 없잖아." "맞습니다! 그런데..." 직원이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내밀었다. "버려진 병마다, 저희 인장이 찍혀 있었답니다. 벌써 황도에도 소문이..." 에단은 서신을 받아 들었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 동안 표정이 지워졌다. 상단 인장. 성수. 이에노스. 쾅! 에단은 한 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이런, 젠장. 당했어." 에단의 머릿속에 연회장에서 이에노스 이야기를 꺼내던 아르덴 공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예? 뭘 말입니까?" "아니야." 에단은 서신을 신경질적으로 구겼다. 다그닥, 다그닥. 그때, 창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칫, 벌써 온 건가." 쿵, 쿵, 쿵.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도, 도련님.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손님 맞을 준비해야지." 에단은 구겨진 서신을 서랍에 밀어 넣고,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했다. 벌컥. 이번에도 노크는 없었다. 황실 문장을
동이 틀 무렵, 크로이츠는 병사들과 함께 진영으로 돌아왔다. 검 끝에 묻은 피는 이미 검게 굳어 있었다."...후, 토벌군도 꽤 하는군."카시안이 이끄는 토벌군은 결국 퇴각했다. 기습은 날카로웠지만, 적은 병력으로 반란군을 제압하기는 쉽지 않았다."크로이츠 님."부관이 굳은 얼굴로 크로이츠에게 다가왔다."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황자가... 사라졌습니다."크로이츠의 걸음이 멈췄다."...뭐?""천막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격리해 두었던 그 여자도 보이지 않습니다.""...보초병은 뭘 하고 있었지?""여기 데려왔습니다."병사 둘이 한 남자를 끌고 왔다. 황자의 천막을 지키던 보초였다. 그는 크로이츠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말해. 무슨 일이 있었지?""그, 그게... 습격이 시작되자 황자가 도망치려 해서 붙잡았습니다... 그, 근데 갑자기 역병에 걸린 그 여자가 나타났습니다.""......""기침을 막 하면서... 크로이츠 님께서 이쪽으로 가라고 하셨다고... 그래서 저는 역병이 옮을까 봐, 그만...""내가?"크로이츠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내가 언제 그런 명령을 내렸지?"보초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크로이츠는 말없이 황자의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진흙탕 한가운데에 텅 빈 휠체어 한 대가 기우뚱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 진흙 위로, 숲을 향해 나란히 찍힌 두 줄의 발자국.하나는 작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비틀거리며 끌리듯 찍힌 남자의 발자국이었다."......"걸을 수 없는 황자가, 휠체어를 두고 사라졌다.길을 잃었다던 여자. 식량을 훔치려 했다던 여자. 역병 환자 흉내를 내던 여자. 오빠를 찾으러 왔다던 여자.그 여자가, 자신의 이름까지 팔았다.뿌드득.크로이츠가 쥐고 있던 검 손잡이에서 소리가 났다."...감히 날 속였구나.""예?""그 여자를 찾아라. 제국을 다 뒤져서라도 내 앞에 데려와!"---------------
"물 온도는 어떻습니까?""아주 좋아. 역시 대부호 상단의 후계자라 그런지, 저택에 이만한 온천이 있다니. 대단하군."레오넬과 에단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에 앉아 피로를 풀고 있었다.정확히는 탕의 양쪽 끝에,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과찬이십니다. 상단 일로 지친 몸을 풀려고 만든 곳이죠.""그대도 지칠 때가 있나 보군.""요즘은 꽤 자주 지칩니다. 누나 덕분에.""......"온천물 흐르는 소리만 졸졸 울렸다.레오넬은 물속에서 천천히 자신의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발끝이, 무릎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였다.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각이었다.에단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조용히 따라갔다."...정말 다리가 나으셨군요.""그래, 정말 믿기지 않는군.""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에단이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김 사이로 드러난 왼쪽 뺨에는 오래된 화상 자국 대신 매끄러운 피부만 남아 있었다.레오넬의 눈이 그 뺨에 잠시 머물렀다.에단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제 왼쪽 뺨에는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습니다. 제국의 어떤 의원도 고치지 못했죠.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습니다.""...설마 영애가?""예. 그래서 잘 압니다. 누나가 가진 힘이 얼마나 위험한지."에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그 힘이 알려지는 순간, 누나는 더 이상 평범하게 살 수 없을 겁니다. 아르덴 공작은 성수를 만든 자를 찾고 있고, 반란군도 마찬가지예요.""알고 있네.""그럼 묻겠습니다. 황궁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아니."레오넬의 대답은 짧았다."황궁으로 돌아간다면, 다들 묻겠지. 어떻게 반란군 진영에서 도망쳤는지.""......""그 질문의 끝에는 영애와 자네가 있을 거고."에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영애가 나를 구하려고 무엇을 감수했는지 알고 있네. 그러니 내가 그녀를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어.""...그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에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당분간 실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