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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화 탈출은 지능 순……이 아니었네

ผู้เขียน: 요정리더
last update วันที่เผยแพร่: 2026-08-07 12:28:26

제 4화. 

“자, 임(壬), 계(癸), 축(丑), 인(寅)…… 아, 옘병. 이순서가 아닌가?”

침상 안쪽, 두꺼운 황금빛 비단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가민은 희고 가녀린 손가락을 바쁘게 꼬며 헛손질을 해댔다. 과거 학창 시절부터 시작해 골방 작가 생활에 이르기까지, 온갖 액션 판타지 만화와 연재 소설을 섭렵했던 유서 깊은 오타쿠로서의 이력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건 차원 이동이나 영혼 빙의 같은 장르소설 속 진부한 설정이 아니라 엄청난 내공을 가진 무림 고수가 자신에게 걸어버린 지독한 환술이나 흑마술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남았던 탓이다.

“파병(破兵)! 해(解)!육체의 영혼이 명한다 해체!이것도 아닌가?왜 인술이 안 풀리냐고, 왜!”

어릴 적 화면으로 보며 밤새 따라 하던 고전 닌자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마디마디 관절이 뚝뚝 꺾이도록 야무지게 인(印)을 맺어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슬그머니 이불을 걷어냈을 때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화려함 극치를 달리는 대륙풍 자단나무 침상과 조선의 선비 방처럼 정갈하게 짜인 문창살이었다. 환술 브레이크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가민은 제 처지가 너무 기가 막히고 황당해서 이불 속에서 허탈하게 헛웃음을 연신 터뜨렸다. 

대한민국에서 스물 아홉해를 버티며 진상들과 싸워온 차가운 이성은 이제 잔인한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건 꿈도 아니고 연출도 아니며 백 퍼센트 순도의 현실이었다.

“아씨! 또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신묘한 수신호를 하시며 흐느끼시면 어찌합니까!지은 의원님이 낙상으로 인해 뇌수가 세차게 흔들려 그러는 것이니, 무조건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사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이불을 홱 걷어낸 전담 시녀 채담은 얼이 빠져 있는 가민—아니, 이제는 연월린이 된 그녀를 향해 속사포 같은 잔소리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채담은 주인의 머리가 아주 깨끗하게 포맷되었다고 굳게 믿는지, 빗질을 해주는 내내 가문의 계보와 청연국의 정세를

 쉴 새 없이 귀에 주입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셔야 하옵니다, 아씨. 저희 연가(連 家)는 대륙과 바다를 잇는 우사 계층에 속하는 청연국 최고의 명문 귀족이자 재벌 가문이옵니다. 아씨께서는 그 가문의 가장 귀하신 장녀이시고, 바다 건너 서역으로 대규모 무역 선단을 이끌고 떠나신 태원 서방님께서는 청연국 상권을 쥐락펴락하시는 거물 상단의 장남이시옵니다. 그러니 서방님이 없는 동안 본가를 굳건히 지키셔야…….”

채담이 정성스레 수놓아진 최고급 비단옷을 갈아입히고, 입가에 따끈하고 고소한 전복죽을 수저로 친히 떠먹여 주는 호사를 누리면서도 가민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극도의 내향인(I)이자 대인관계 회피형 방어기제로 평생을 독야청청 살아온 가민에게,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거대 재벌 귀족 가문의 안주인 노릇이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심지어 반년 넘게 해외 장기 출장 중인 남편이 있는 유부녀라니.

‘낼 모레 서른 살 처녀 작가 인생에 뜬금없이 열아홉 살 유부녀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웹소설 독자들도 이런 전개는 개연성 없다고 별점 테러를 할 거라고!’

가민의 소심하고 현실적인 방구석 작가 마인드가 내린 결론은 아주 심플하고 명쾌했다.

‘탈출은 지능 순이다. 더 판이 커져서 상황 복잡해지기 전에 여길 뜨는 게 답이야.’

인생 최고의 위기 앞에서 가민이 선택한 것은 바로 클래식한 ‘야반도주’였다.

그날 밤, 시녀 채담의 코 고는 소리가 문밖까지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것을 확인한 가민은 숨을 죽였다. 거추장스러운 비단치마를 허리춤까지 질끈 묶어 올린 채, 버선발로 살금살금 방 문을 열고 나섰다. 대륙의 웅장함과 조선의 미감이 묘하게 섞인 고풍스러운 복도에는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저 멀리 보이는 마당만 잽싸게 가로지르면 이 지옥 같은 유부녀 세계관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민이 마당의 디딤돌을 밟고 채 세 걸음도 떼지 못한 바로 그 찰나였다.

스스스슥-.

“귀하신 몸이 이 깊은 야밤에 어딜 가시옵니까, 아씨.”

사방의 어둠 속에서 푸른 사극 무복을 입은 장신들이 귀신처럼 허공을 가르며 내려앉았다. 

가민의 앞을 완벽하게 가로막은 것은, 한눈에 봐도 안구 정화가 제대로 되는 조각 같은 비주얼의 절세미남 호위무사 두 명이었다. 그들의 뒤로 수십 명의 무사들과 횃불을 든 시녀들이 빛의 속도로 몰려와 물 샐 틈 없는 겹겹이 포위망을 순식간에 구축했다. 그 삼엄한 기세에 가민은 숨이 턱 막혔다.

“혹시 몸에 아직 열증이 가시지 않아 몽유병을 앓으시는 것입니까? 지은 의원님을 당장 불러라!”

“아씨를 즉시 처소로 안전하게 송환해라!하나라도 상처가 나면 태원마마님께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으실 것이다!”

“아니, 잠깐만요! 나 몽유병 환자 아닌데?.. 이거 과잉보호 아니에요? 사생활 보호…아니지 인권침해라고요, 저기요?!”

가민의 가냘픈 외침은 서슬 퍼런 무사들의 귀에 씨도 먹히지 않았다. 일류 고수들의 삼엄하고도 극진한 호위 속에서, 가민은 발바닥에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채 빛의 속도로 다시 방 안으로 송환되어 푹신한 침상 위로 처박혔다. 탈출은 지능 순이라더니, 이 가문의 24시간 철통 보안 시스템은 2026년 대한민국의 첨단 CCTV나 사설 경비업체보다 백 배는 더 지독하고 촘촘했다.

뻘쭘하게 방에 갇혀 씩씩대던 가민은 침상 옆 탁자 위에 놓인 거대하고 번쩍이는 놋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이 세계에 빙의한 지 꼬박 하루 만에, 드디어 제 외모를 제대로 마주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마른침을 꼴컥 삼키며 거울 앞으로 기어가듯 다가간 가민은 거울 속에 비친 형상을 보자마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허..……미친, 대박.”

놋거울 속에는 현생의 주 5일 오전 편의점 알바, 그리고 매일 밤 독자들의 반응을 눈치를 보며 마감 압박에 쩔어 푸석하고 칙칙했던 30살 흔녀의 얼굴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대신 투명하다 못해 속이 비칠 것 같은 우윳빛 피부에, 은하수를 통째로 박아넣은 듯 깊고 청초한 눈망울을 가진 19세의 절세미녀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에 볼록하게 솟아오른 밤톨만 한 혹마저도 무슨 대륙 황실 미녀의 독특한 이마 장식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피곤에 24시간 쩔어있던 반올림30대 작가에서 청순 가련한 10대 리즈 시절 미녀로의 엄청난 신분 상승과 역변이라는 2차 충격에, 가민은 꿈이 아님을 확인하려 제 뺨을 사정없이 세차게 꼬집었다. 아야-, 소리가 절로 나는 통증과 함께 거울 속 미녀도 똑같이 미간을 찌푸렸다.

미모만큼은 그야말로 탑티어 주인공 스펙이었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단나무 책상 앞으로 돌아온 가민의 눈에, 아까 채담이 신주단지 모시듯 보여주었던 정실 남편 태원의 서찰이 들어왔다. 붉은 밀랍이 뜯어진 두꺼운 한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글씨는 확실히 한글이 아니었다. 한자 비스무리하면서도 획이 훨씬 더 화려하고 기묘한, 이 세계만의 독특한 문자 체계였다. 당연히 문맹이 되어 읽지 못해야 정상인데 신기하게도 연월린의 육체와 완벽히 동기화된 가민의 눈에는 그 수려하고 힘 있는 붓글씨들이 한 자 한 자 매끄러운 한국어로 자동 해석되어 뇌리에 박혔다.

[……서역의 거친 바닷바람이 찰 때마다, 청연국 본가에 홀로 두고 온 내사람의 건강이 심히 염려되오. 내가 떠나기 전 직접 달아주었던 침상의 진홍빛 비단 장막은 마음에 드시는지 모르겠소. 그대의 처소에 머리를 맑게 해줄 향 가득한 최고급 침향을 새로이 보냈으니, 부디 내가 먼 길을 돌아 부인의 곁으로 무탈히 귀환할 때까지 아프지 말고 지내어 주시오. 나의 유일하고 귀한 사람아.]

사내의 묵직하고도 정갈한 필체 속에는 가민이 이제까지 살면서 그 어떤 이성에게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가슴이 간질거리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은 정성스러운 걱정과 다정한 일상, 

그리고 깊고 진한 애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인간으로 향할 연애 세포가 2D종이남친으로 덕질하던 29살방구석 작가의 메마른 심장에, 낯설고 뜨거운 온기가 순식간에 훅 끼쳐왔다.

가민은 놋거울 속의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과 손에 쥔 다정다감한 서찰을 번갈아 바라보며 얼굴을 붉힌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성격은 완전 내 차기작 메인 남주로 쓰고 싶을 만큼 내 취향저격 육각형 사내인데…… 얼굴도 모르는 남편이라는 남자는 글씨체랑 멘트마저 아주 유죄 인간이네. 와.. 레알.. 어떡하냐…….”

돈 많고, 가문 빵빵하고, 심지어 멀리서도 조강지처만 끔찍이 아끼는 다정한 무역 재벌 유부남 남편과, 거울을 볼 때마다 도파민이 터지는 절세미녀의 육체.

지독한 인간관계의 정치질을 피해 방구석 요새로 탈출을 꿈꾸던 은둔형 작가 최가민의 청연국 빙의 생존기는, 이미 그녀의 소심한 통제 범위를 한참 벗어나 아주 기묘하고도 설레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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