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제 3화.
“……가민아, 아유..우리 귀여운 똥강아지.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맨날 그렇게 모니터만 보고 밤을 새우니까 몸이 축나지.어여 일어나”
멀리서 들려오는 다정하고 투박한 목소리. 분명 외할머니였다. 3년 전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가 저승 입구에서 손녀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죽음은 생각보다 무덤덤했고,
사후 세계는 전설속 이야기보단 훨씬 따뜻했다. 가민은 습관처럼 입술을 삐죽거리며 서러움을 토로했다.
“할머니…… 나 이번에 웹소설 유료 연재 중이었단 말이야. 이제 겨우 60화 고지 넘어서 완결까지 성실하게 타이핑만 하면 됐는데, 그거 마무리도 못 짓고 와서 어떡해. 안 그래도 조회수 미적지근해서 독자들한테 미안해 죽겠는데…… 나 능력없어서 지옥 가려나 봐.”
그런데 이상했다. 외할머니의 목소리는 분명 세월의 무게가 서린 묵직한 음성이어야 했는데,
지금 귓가에 사정없이 꽂히는 소리는 맑고 청아하다 못해 앳된 10대의 얇은 음색이었다.
“아씨! 아씨, 정신이 드시옵니까? 제발 눈 좀 떠보시옵소서! 이대로 영영 안 깨어나시는 줄 알고 이 채담이의 수명이 십 년은 단축되는 줄 알았사옵니다!”
‘아씨? ..채담? 그건 또 무슨 삼류 고전 소설 같은 이름인데…….’
가민은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르는 어둠을 헤치고 번쩍 눈을 떴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대신, 은은한 침향 냄새가 깊게 배어든 화려한 진홍빛 비단 천장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자 대륙의 황궁에서나 볼 법한 거대하고 화려한 자단나무 침상과 조선의 서원처럼 단정하게 짜인 문창살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방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금박 실로 정교하게 백호랑이가 수놓아진 대형 케노피 장막까지, 그야말로 대륙과 조선의 미감이 화려하게 섞인 독특한 공간이었다.
“미친…이거…… 실화냐? …나 지금 퓨전 사극 세트장까지 날라간거임..?”
가민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마디였다. 그녀가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침상 옆에서 눈이 퉁퉁 부은 채 울먹이던 시녀 채담이 기겁하며 가민의 가냘픈 어깨를 붙들었다.
“아씨! 갑자기 일어나시면 안 되옵니다! 어제 방 안의 분위기를 새로이 바꾸시겠다고, 비단 장막이 쳐진 침상 케노피를 직접 다려다가 낙상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바람에 이마에 밤톨만 한 혹까지 나시고 정신을 잃으셨단 말이옵니다! 지은 의원님! 의원님!! 아씨께서 깨어나셨사옵니다!”
머리를 다쳤다고? 가민은 황급히 제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킥보드에 치여 바닥에 무참히 처박혔던 그 끔찍한 두통이 아직도 생생한데, 만져보니 이마 한가운데가 밤톨만 한 크기로 볼록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그보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제 손의 감각이었다. 30대 접어들면서 하루 종일 마우스를 쥐고 사느라 굳은살이 박이고 거칠어졌던 마디는 어디 가고, 백옥처럼 투명하고 부드러운, 고생 한 번 안 해본 19세 소녀의 손이 눈앞에 있었다.
“뭐야… 몰카? 야 이거 완전 킹받네. 나 분명 퇴근길에 킥보드 중딩들한테 치여서 날아갔는데.”
그때, 단정한 흰색 약도포를 차려입은 젊은 여인이 가민의 헛소리에 놀라 다급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청연국 왕실 약방 출신의 최고 엘리트이자 연가 본가의 전담 의원인 서지은이었다. 올해 스물아홉의 나이로, 냉철하고 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지은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가민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능숙하게 맥을 짚었다. 그러더니 가민의 이마에 솟아오른 혹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다행히 맥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르시고, 낙상으로 인한 외상도 이마의 가벼운 혹 외에는 보이지 않사오나…… 어째 눈동자의 초점이 풀려 있고 정신이 온전치 않으신 듯하옵니다.”
냉정하기 짝이 없는 지은의 진단에 가민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의원님. 내가 왜 여기 누워있는지 팩트 체크부터 좀 해보세요. 여기가 대체 어디고, 나는 누구냐고요. 나 분명 오전 알바 끝나고 차기작 시놉시스 떠올라서 뇌가 풀가동된 상태로 집에 뛰어가던 중이었는데, 여기 지금 인테리어 컨셉이 너무 ‘에바’ 아니에요? 무슨 차원 이동 같은 거라면 적당히 하고 원래대로 돌려놓으시죠.”
“에바……? 팩트……?”
지은은 옅게 미간을 찌푸리며 차분한 어조로 태클을 걸었다.
“아씨, ‘에바’가 무엇을 뜻하는지, ‘팩트’가 어느 나라의 방언인지 알 수 없으나 지금 아씨의 뇌에 심각한 충격이 가해진 것은 분명한 듯하옵니다. 침착하십시오.”
“아니, 제가 지금 침착하게 생겼냐고요! 나 올해 스물 아홉이고 남한테 피해도 안주고 얌전하게 법 지키면서 살던 개찐따 방구석 웹소설 작가인데, 하…자기소개하려니까 현타오네 하..무튼 왜 갑자기 중국 황실이랑 조선 시대 반반 섞어놓은 것 같은 세계관에 휘말린 거냐고. 억까도 정도껏 하셔야죠. 의원님도 납득이가게끔 알아듣게 설명해봐요.”
지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탕약 그릇을 내려놓았다.
“스물 아홉 살이라니요. 아씨께서는 올해 갓 열아홉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뚝딱거린다’는 것은 북방 국경 지대의 목수들을 일컫는 비속어인데, 제가 왕실 약방 출신의 의원이지 어찌 목수가 되겠습니까. 아씨, 부디 진정하시고 탕약을 드십시오.”
“ 채담아.”
지은이 서늘하게 굳은 안색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려 채담을 바라보았다.
“아씨께서 높은 곳에서 떨어지며 뇌수에 심각한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다. 평생 청연국 전역을 돌아다녀 보았어도 이리 괴상한 사투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이 서역 대륙의 주술 방언이냐, 아니면 이마의 혹을 통해 다른 이계의 악귀가 접신이라도 한 것이냐!”
“아씨, 부디 정신 차리시옵소서!접신이라니요, 의원님 그게 무슨 망발이십니까!”
채담이 가민의 손을 붙잡고 울먹였다.
“이곳은 대 청연국(淸延國)의 최고 명문가인 연가(連家) 의 본가이옵고, 아씨께서는 저희 연가의 고귀하신 장녀 ‘연월린’ 아씨이옵니다! 올해로 딱 열아홉이 되셨단 말이옵니다!”
‘연월린……? 그리고 열아홉?’
가민은 멍하니 제 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가민의 오른손에는 대륙풍의 정교한 룡 문양이 새겨진 차가운 옥패가 꽉 쥐어져 있었고, 침상 옆 자단나무 책상 위에는 조선식 한지에 붉은 밀랍으로 단단히 봉인된 서찰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작가적 호기심과 직감이 발동한 가민이 서찰을 낚아채듯 열었다.
내용인즉슨, 연월린의 정실 남편인 ‘태원’이라는 자가 거대한 지단 상단을 이끌고 바다 건너 서역 대륙으로 대규모 해외 무역을 떠나있으며, 본가의 가신들이 ‘아씨가 케노피를 달다 쓰러졌는데 이틀 뒤 깨어난 후 상태가 심각하게 이상하니 상방(商坊)에 계신 서방님께 즉각 보고를 올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말들이 서찰에 담겨들었다.
가민은 이마의 혹이 다시 격렬하게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채담아, 저기…… 남편? 나 결혼했어? 이 서찰에 적힌 태원이라는 사람이 누구야? 그게 누군데?”
“아씨! 어찌 정실 남편 되시는 태원 서방님을 잊으셨단 말이옵니까! 아씨와 정식으로 대륙의 삼서육례를 치르고 혼인하신 정실 남편이시옵니다!청연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대무역상인 집안의 당당한 장남이시자, 지금은 서역과의 거대 무역을 총괄하느라 바다 건너 장기 출장을 가 계신 지 벌써 반년이 지났건만…… 아씨의 뇌 상태가 이리 위중하시니 당장 상단 전령을 보내 서방님께 보고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의원님!”
‘정실 남편……? 나 스물 아홉살 먹도록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독신으로 살았는데, 갑자기 열아홉 살 짜리 몸뚱이에 얼굴 모르는 남편이 장기 출장 중이라고? 게다가 청연국 탑티어 재벌 무역상 집안의 맏아들이라고?! 그나저나 저 의원은 동갑인데 아까부터 나한테 꼬박꼬박 아씨래!’
이건 ‘완전 에바참치’를 넘어 가민의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지독한 몰카 그 자체 였다. 퇴근길에 학생들의 킥보드에 치여 죽은 것도 억울해 미치겠는데, 깨어나 보니 졸지에 유부녀라니. 그것도 돈 냄새 펄펄 나는 거물 무역상 남편이 버젓이 존재하는 세계관이라니!
가민은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스물 아홉살인데 결혼도 안 한 처녀인데, 갑자기 열아홉 살 유부녀가 됐고, 이 세계는 요란하게 화려하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잘딱깔센하게 이해 못 해요? 중꺾마 몰라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멘탈갈리네 진심….! 나 지금 꺾이기 직전이니까 당장 내 노트북 가져와요!”
“예?..알잘…… 중꺾……? 그게 대체 무슨 신묘한 고대 주문이옵니까, 아씨! 노트북은 또 어느 나라 상단에서 들여온 보물이옵니까!”
채담과 의원 지은은 가민의 입에서 쉼 없이 터져 나오는 요즘시대 최신 MZ 신조어와 Z세대 방언의 향연에 영혼이 완전히 탈곡된 듯 집단 멘붕 상태에 빠졌다. 지은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가민의 이마 혹을 가리키며 읊조리는 ‘완전 킹받네’라는 단어 앞에서는 결국 탕약 스푼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 킹받는 것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으나…… 머리의 혹 때문이든, 혹은 다른 연유이든 아씨의 정신이 매우 혼란스러운 것은 확실하옵니다. 우선 오늘 하루는 해외 상단에 계신 서방님께 보고하는 일을 미루고, 제가 탕약을 지어 올릴 테니 부디 이 난해한 언어들은 자제하여 주십시오.”
“아우 답답해, 나 완전 ‘킹받네’. 이게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이냐고! 누칼협? 누가 나 여기 빙의하라고 협박했냐고! 나 좀 살려줘, 이거 꿈이라면 당장 깨게 해달란 말이야!”
가민은 억울함과 황당함, 그리고 이마의 통증이 스파크처럼 튀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비단 베개 위로 팍 쓰러졌다. 스물 아홉해 동안 쌓아온 가민의 이성적인 방어기제가 열아홉 연월린의 가녀린 육체 안에서 완전히 과부하를 일으킨 탓이었다.
‘망했다. 내 무협 로판 시놉시스고 대박 소재고 뭐고…… 일단 이 유부녀 세계관에서 머리통 깨지지 않고 살아남는 것부터가 문제다.’
가민의 시야가 다시 한번 암전되며 의식의 끈이 툭 끊어졌다. 방 안에는 젊은 의원 지은과 시녀 채담의 경악과 통곡이 섞인 목소리만 가득 울려 퍼졌다.
“아씨께서 신묘한 고대 상고 방언을 구사하시며 이마의 혹을 부여잡고 다시 혼절하시었도다! 서방님께 어찌 보고를 올려야 한단 말이냐, 이 일을 어찌할꼬!”
의원 지은은 굳은 얼굴로 붓을 다시 잡았다.
“상태가 심상치 않다. 태원마마께 보낼 서찰에 이리 적어야겠다. ‘부인께서 쓰러지신 후, 괴이한 방언과 함께 스스로를 스물 아홉살이라 칭하며 극심한 혼란을 겪고 계심’이라고.”
가민은 마지막으로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망할, 의원님 레알루 융통성 없네!난해한 사극 말투부터 좀 고치라니까요!’
제 36화 비파 덕후 가주를 위한 두 무사의 선물연가의 집무실, 오늘도 어김없이 괴이한 소리가 담장을 넘었다.뚱땅, 뚱땅, 콰광!비파의 선율이라기보다는 전장에서 방패를 내리치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이었다. 월린은 비파 위에 밥주걱을 세워 쥔 채, 온몸으로 락 스피릿을 불태우며 비파의 현을 사정없이 뜯고 있었다.하지만 가주의 독특한 방식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악보까지 구상했던 예음조차 눈가에 미세한 실룩거림이 일었다.'그래... 내가 가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맹세했거늘... 저것 또한 저분만의 깊은 뜻이 있겠지...'머리로는 이해하려 애썼지만, 귓가를 강타하는 이색적인 타격음 앞에서 도저히 성자의 경지에 오르기는 힘들었다.그녀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이 웅장한(?) 연주가 끝나기만을 경건하게 기도할 뿐이었다.연가 집무실 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고요하고 우아한 비파의 선율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연무장에서 땀을 식히며 지나가던 연호와 유현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창호지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흡사 징을 치거나 전장에서 방패를 내리치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소리였다. 두 무사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가주께서 즐거워하시는 그 '음악'이, 비록 세간의 미학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두 사람의 눈에는 그저 눈부신 광경일 뿐이었다. 하지만, 월린의 기행을 깎아내리려는 연가의 외부 세력이나 시기하는 눈초리들이 언제 어디서 혀를 찰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 사람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형님."유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무뚝뚝한 그의 말투에는 가주를 향한 맹목적이고도 처절한 애정이 묻어 있었다."가주님께서는 가주님만의 세계를 구현하시는 중입니다. 허나, 저 밥주걱이 월린님의 고귀한 손을 더럽히고, 타인의 입방아에 오르게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가주의 체통은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손끝은 이미 검집을 꽉 쥐고 있었다."옳은 말이다. 우리가 할 일은, 가주님의 그 열정을 가장 완벽하게 뒷
제 35화 현의 선율과 검의 궤적 정자 위에 자리를 잡은 월린은 그 광경을 보며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사실 월린의 머릿속은 현재 연가의 훈련장이 아니라, 과거 웹소설 작가 시절 밤을 지새우며 써 내려갔던 무협지의 한 장면 그 자체였다.'그래, 바로 저거야. 연호가 왼쪽에서 공격을 흘리면 유현이가 오른쪽 빈틈을 완벽하게 커버하며 들어오는 저 흐름! 저건 단순히 검술이 아니야. 두 무사 간의 관계성이 쌓인 서사지, 서사! 서로를 믿지 않는 척, 무심한 척하면서도 실상은 위기의 순간에 등을 맞대고 서로의 목숨을 지켜주는 저 묵묵한 브로맨스! 이게 바로 무협의 낭만 아니겠어? 현실에서 직관하는 맛은 차원이 다르구나!'월린의 눈동자가 오타쿠 광기로 번뜩였다. 뇌내에서는 이미 연호와 유현이 겪을 험난한 고난과, 그 과정에서 피어날 끈끈한 유대, 그리고 비극적인 서사까지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월린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망상을 이어갔다."캬, 좋다! 저 찰나의 눈빛 교환! 저게 바로 '쌍벽'의 진수지. 연호의 검이 호랑이라면 유현의 검은 용이라. 둘이 합쳐지면 가히 천하무적일 것이야. 저 조합이라면 독자들 반응은 무조건 폭발인데... 하필 이 세계엔 웹소설 플랫폼이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월린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무장 아래에서 두 무사는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합을 맞추고 있었다. 유현은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예리한 눈빛으로 연호의 등 뒤를 살폈다."형님, 셋을 셀 때 공중으로 도약하십시오. 제가 하단을 휩쓸겠습니다.""알았다."단 세 마디의 대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호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내리찍자 유현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회전하며 상대의 하단을 쓸어버렸다. 연호의 검이 회전할 때 유현은 마치 그림자처럼 그의 빈틈을 채웠다. 둘의 검이 맞물리며 발생하는 금속음은 규칙적이고도 위협적이었다. 제 형님의 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의 움직임을 지배하고 있었다. 월린은
제 34화 ‘어머니’라는 어두운 그늘 연가의 정문 앞, 평화롭던 공기가 소란에 휩싸였다. 정문 수문장들이 문 앞의 여인과 사내들을 막아 세우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서서 연가를 올려다보던 은교는 비단옷을 걸치고도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내가 연호의 어미다! 왜 가주를 만나게 해주지 않는 거냐!"연호가 연가에 들어간 뒤로 은교의 삶은 통째로 변했다. 연호가 매달 부치는 돈으로 집안은 살만해졌고, '연호의 본가'라는 소문 덕분에 침선가는 손님들로 붐볐다. 하지만 은교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녀에게 연호는 가문을 일으킬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훈련 중 소란을 듣고 달려온 연호는 정문 앞의 은교를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꺼이 지우고 싶었던 과거의 악몽이 현재의 평온을 침범하고 있었다."연호야!"은교는 아들을 보자마자 계산적인 미소를 지었다."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대박이 났다. 이제는 옷감뿐만 아니라 상단들도 우리를 찾더구나. 연호야, 이젠 엄연히 차기 가주의 남첩 아니냐? 대상단이라던 정실 남편 분은 육촌까지 특혜가 있다던데, 우리가 연가의 인맥을 빌려 무역권을 따내면 우리도 금방 대상단이 될 거다. 당장 가주에게 말해라!"연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흉터가 남은 손바닥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곁에서 유현은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현은 연호를 걱정하면서도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어머니,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가주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일 수 없습니다.""허락? 내가 네 어미다! 네가 내 덕에 사람 구실하고 사는 거 아니냐? 그까짓 가주가 뭐 대단하다고 유세냐!"분을 못 이긴 은교가 연호의 뺨을 치려 손을 번쩍 치켜올렸다.그 찰나, 유현이 움직였다."악!"은교의 손목이 허공에서 멈췄다. 어느새 다가온 유현이 은교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그의 눈빛은 서늘했다."어머니라고 하셨습니까."유현의 말투는 건조하고 딱딱했다. 그는 은교를 보지도 않은 채 손목을
제 33화 흉터를 들여다보는 시선연가의 식사 자리는 늘 북적였다. 가문의 세력만큼이나 식탁 위는 풍성했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온기를 채워주는 것은 차기 가주인 월린과 좌우에 나란히 앉은 연호와유현이었다. 그들은 월린의 가장 든든한 방패이자, 차가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뉘일 수 있는 안식처였다.월린은 양옆에 앉은 두 사내의 커다란 손을 하나씩 덥석 잡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자, 오늘 반찬은 태원 씨가 특별히 보내준 고기 요리야! 우리 대장님들, 이 넓은 저택과 나를 지키려면 덩치 유지하는 데 이 정도는 당연히 먹어줘야지."월린의 엉뚱하면서도 다정한 행동에 연호와 유현은 익숙한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유현은 그녀의 밝은 표정 이면에 문득 멈춰 선 시선을 눈치채곤 눈빛을 가라앉혔다.월린의 시선이 향한 곳은 연호의 왼쪽 손바닥이었다. 젓가락을 쥔 손바닥 한가운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하얗게 뒤틀린 흉터가 유독 도드라져 있었다. 훈련 중 스치듯 생긴 가벼운 상처가 아니었다. 아주 깊고 무자비한 무언가에 강하게 짓눌렸던 처절한 흔적이었다.유현은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정적을 지켜보았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말없는 아픔이 묵직하게 배어 있었다.밤이 깊어가고, 월린은 결국 연호를 자신의 처소로 불렀다.달빛이 창호지 문을 비추는 고요한 방 안. 월린은 달콤한 설탕 과자가 담긴 접시를 연호에게 밀어주었다. 연호가 긴장한 마른침을 삼키는 동안, 월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과자 하나를 집어 그의 입가로 가져다주었다."연호, 이거 먹어봐. 오늘 시장에서 가장 달콤한 걸로 구해온 거야."자연스럽게 과자를 먹여주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커다란 왼쪽 손을 펼쳤다. 손가락 마디마디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바닥, 그 중심을 가로지르는 선명한 흉터가 달빛 아래 드러났다.월린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묻어났다."이거... 옛날에 엄청 아프지 않았어? 무사 훈련 중 생긴 흔한
제 32화 [연호 과거]버려진 자식의 기억바람을 가르는 칼날은 연무장의 적막을 찢어 놓았다. 연호의 상체는 쉼 없이 흐르는 땀으로 젖어, 햇빛을 받아 구릿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결이 살아있는 탄탄한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남성적인 매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죽이게 했다. 연가의 모든 무사들이 그를 보며 감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에게 연호는 정점에 선 대장이자, 완벽한 신체의 소유자였으니까.하지만 그 화려한 근육 속에 깃든 깊은 골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매일의 루틴은 단련이 아닌 생존이었고 맹목적인 인정 욕구의 결과물이었다.연호의 과거 기억 속에서 친 어머니 이은교는 ‘가문의 서열'을 먼저 쥐고 있었다.몰락해가는 귀족 가문의 차녀였던 은교는 대대로 정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는 '박복한 집안'의 징크스를 안고 있었다. 그녀 역시 가문의 명맥을 잇기 위해 비슷한 수준의 귀족과 혼인했으나 자식 하나 없이 남편마저 병으로 일찍 여의고 말았다. 가문이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급박하게 남첩을 들였다. 그가 바로 침선가(針線家)를 운영하던 중소 상인, 연호의 아버지 재우였다.어머니에게 이 결혼은 애정이 아닌 수단이었다. 그녀는 재우의 손재주를 이용해 침선가를 일으켰다. 재우가 밤낮으로 옷을 짓고 기물을 수선하면, 은교는 그 옷감을 들고 귀족가를 돌며 영업을 했다."너는 귀족인 아들이다. .. 네가 정녕 평생 옷감이나 깁다가 죽을 셈이냐?"어머니의 히스테리는 매일 밤 집안을 울렸다. 귀족의 혈통을 가졌음에도 '상인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귀족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현실. 은교는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귀족가의 품위’를 갉는다며집안 등급에 막혀 큰 상단이 되지 못한다는 열등감은 고스란히 연호에게 투사되었다. 맛있는 간식이 생기면 은교는 한 살 위 누나인 수빈의 입에 먼저 넣어주었다. 연호는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는 아버지 재우를 도와 수선하는 기물을 만들며 상인으로서의 기술을 익
제 31화. 청연(淸延)의 위계 그리고 연가(連家)의 무인들청연국(淸延國)은 철저히 계급과 직업이 명시된 나라였다. 이 땅에서 사내들이 택할 수 있는 삶의 궤적은 대개 그들이 발붙인 땅의 비옥함과 가문의 뿌리, 그리고 타고난 기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기생으로 화려한 막을 올리거나, 시종으로 평생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거나 상단에 몸을 실어 부를 쫓거나, 혹은 무인으로서 칼을 쥐는 것.그중에서도 무인이라는 직업은 단순한 힘의 논리로만 설명되지 않았다.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해서 전장에 나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태를 파악하는 지적 능력, 전술적 전투 센스 그리고 결정적으로 ‘누구의 칼이 되어줄 것인가’라는 가문빨이 뒤섞인 복합적인 체계였다.월린은 책상 위에 펼쳐진 두꺼운 서적들을 정리하며 청연국의 사회를 분석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계급도는 명확했다. 황실 전속 무사가 정점에 있고, 그 아래로 귀족 가문의 호위무사들이 있었다. 중소 상인 그 이하 집안에서 올라온 이들은 흔히 ‘문지기’라 일컬어지는 하급 무사의 범주에 묶였다.하지만 연가는 달랐다. 본래 무사양성기관에서 하급 무사로 키워졌으나 연호와 유현은 월린의 어머니, 즉 전대 가주에게 무인대회에서 발탁되어 간택받았다. 그들은 연가 라는 가문의 울타리 안에서 뼈를 깎는 훈련을 견뎌냈고, 마침내 실력을 인정받아 무사들의 우두머리, ‘대장’의 위치에 올랐다.‘이세계는 설정이 되게 복잡하네…. 강한 무사들이 왜 그토록 귀족이나 부유층의 첩으로 간택당하길 바라는지 이해가 돼.’가민은 망원경으로 멀리 시장을 살폈다. 황실의 전속 무사가 되어 쳇바퀴 돌듯 궁을 지키는 것보다, 세력 있는 귀족 가문의 남첩으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빠른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되어주기 때문이었다. 무사라는 계급은 첩으로서 간택당하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재료였다. 튼튼한 체구와 단련된 정신, 그리고 복종이라는 가치를 체득한 이들이니까. 연호와 유현은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 귀족 호위무사라는 정점에 도달한 산증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