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자, 임(壬), 계(癸), 축(丑), 인(寅)…… 아, 옘병. 이순서가 아닌가?”침상 안쪽, 두꺼운 황금빛 비단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가민은 희고 가녀린 손가락을 바쁘게 꼬며 헛손질을 해댔다. 과거 학창 시절부터 시작해 골방 작가 생활에 이르기까지, 온갖 액션 판타지 만화와 연재 소설을 섭렵했던 유서 깊은 오타쿠로서의 이력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건 차원 이동이나 영혼 빙의 같은 장르소설 속 진부한 설정이 아니라 엄청난 내공을 가진 무림 고수가 자신에게 걸어버린 지독한 환술이나 흑마술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남았던 탓이다.“파병(破兵)! 해(解)!육체의 영혼이 명한다 해체!이것도 아닌가?왜 인술이 안 풀리냐고, 왜!”어릴 적 화면으로 보며 밤새 따라 하던 고전 닌자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마디마디 관절이 뚝뚝 꺾이도록 야무지게 인(印)을 맺어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슬그머니 이불을 걷어냈을 때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화려함 극치를 달리는 대륙풍 자단나무 침상과 조선의 선비 방처럼 정갈하게 짜인 문창살이었다. 환술 브레이크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가민은 제 처지가 너무 기가 막히고 황당해서 이불 속에서 허탈하게 헛웃음을 연신 터뜨렸다. 대한민국에서 스물 아홉해를 버티며 진상들과 싸워온 차가운 이성은 이제 잔인한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건 꿈도 아니고 연출도 아니며 백 퍼센트 순도의 현실이었다.“아씨! 또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신묘한 수신호를 하시며 흐느끼시면 어찌합니까!지은 의원님이 낙상으로 인해 뇌수가 세차게 흔들려 그러는 것이니, 무조건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사옵니다!”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이불을 홱 걷어낸 전담 시녀 채담은 얼이 빠져 있는 가민—아니, 이제는 연월린이 된 그녀를 향해 속사포 같은 잔소리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채담은 주인의 머리가 아주 깨끗하게 포맷되었다고 굳게 믿는지, 빗질을 해주는 내내 가문의 계보와 청연국의 정세를 쉴 새 없이 귀에 주입했다
Last Updated : 2026-08-07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