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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Author: 일비당

제1화

Author: 일비당
성 밖, 순화사.

이른 아침, 새벽종이 울림과 동시에, 막 밖에서 돌아온 유경서는 승방 안에서 황급히 야행복을 소복으로 갈아입은 후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하품을 하며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열두 살 정도 보이는 어린 몸종이 서 있었는데, 문이 열리자 그녀에게 문안을 올리고 세면도구와 아침 식사를 방 안으로 들여놓았다.

유경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몸종이 물러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밤새 바삐 움직였던 그녀는 세수를 하자, 정신이 한결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그녀는 오늘의 일과인 불경 필사를 시작했다.

그녀의 본명은 유솔, 21세기에서 갑자기 옥연국으로 차원 이동을 했다. 지금은 진국장군부의 적녀인 유경서로 살고 있다.

그녀가 순화사에 머물게 된 사연은 참으로 우스웠다.

태자에게 청혼을 받았지만, 대장군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극구 반대하며, 중병에 걸려 요양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그녀를 이곳에 보내버렸다.

가문에게 큰 도움이 될 혼사를 대장군이 탐탁지 않게 여긴 속사정을 이야기하자면 길어진다.

본처였던 유경서의 어머니가 세상을 뜬 지 반년 만에, 대장군은 사생아를 데려왔다. 이복동생이 어릴 때부터 밖에서 고생을 했으니, 언니로서 동생부터 보살피는 것이 마땅하기에 태자와의 혼사를 양보하라는 것이야말로 도리라고 했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문밖에서 몸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 아가씨, 둘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유경서는 고개를 들어 창밖의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는, 책상 위에 필사해 둔 불경을 정리했다.

“안으로 들이거라.”

방문이 열렸고, 화려하고 귀티 나게 차려입은 소녀가 들어왔다.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소녀는 막 피어나는 꽃 같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자태와 달리,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을 얕보는 시선으로 오만하게 들어왔다.

“어머, 언니, 불경은 다 베끼셨어요?”

소녀는 비꼬듯이 물었다.

유경서는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할 말이나 해. 입으로 똥을 쌀 거면 그만 나가.”

이 소녀는 유은진, 바로 유경서의 이복동생이었다.

유솔이 차원 이동을 하게 된 것도, 눈앞의 이복동생 때문이었다.

유은진은 유 가문의 유일한 자식이 되기 위해, 서슴지 않고 이 몸의 원주인이었던 유경서를 독살했다.

“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고 있을 텐데요.”

밖으로 내쫓긴 신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고한 유경서의 모습을 유은진은 혐오스럽게 쳐다보았다.

“여기서 머리를 밀고 비구니가 되든가, 태자 전하의 청혼을 거절하세요. 안 그러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유경서는 광대놀음을 구경하듯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그리 대단하면, 직접 태자 전하께 널 태자비로 맞아달라고 말하는 것이 어때?”

유경서는 짐작이 간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태자비는 존귀한 자리구나. 장차 국모가 되실 몸인데, 사생아 따위가 그 자리를 꿰찬다면 태자부의 다른 측비들이 가만있지 않겠구나. 소문으론, 측비께선 명문가의 적녀라지? 그런데 네가 그분 머리 위에 앉으면, 그분 체면은 고사하고, 그 댁의 체면도 말이 아니겠구나.”

“어디서 그런 모욕적인 말을!”

유은진은 날카로운 검에 찔린 것처럼, 얼굴이 분노로 잔뜩 일그러졌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어 찢어발길 기세였다.

“모욕이라니? 내가 틀린 말 했니?”

유경서는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씨받이가 되기 위해 시집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이복동생은 그 꼴을 당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오늘 경고하러 온 거예요. 사흘 안에 혼사를 거절했다는 소식이 들려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 집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유은진은 이를 갈며 모진 말을 내뱉더니, 분을 못 이겨 몸을 홱 돌려 나갔다.

“허!”

유경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설령 그녀가 태자비가 되지 않는다 해도, 태자비 자리가 유은진에게 돌아갈 리는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 유정우는 병권을 쥐고 있고 공훈이 수없이 많아 조정과 민간에 명성이 자자하며, 옥연국에서 절대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으니, 태자가 그를 포섭하려는 것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태자가 적녀인 그녀를 포기하고 사생아인 유은진을 부인으로 맞이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설사 태자가 동의한다 해도 황제와 황후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점심 식사 후, 유경서는 낮잠에 들었다.

한숨 푹 자고 나니, 날이 어두워진 뒤였고,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저녁을 먹은 그녀는 침상 밑에서 야행복을 꺼내 갈아입었다.

오늘과 내일 밤만 잘 처리하면, 반년 동안 번 돈을 챙겨 사흘 안으로 경성(京城)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막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던 그때, 검은 그림자가 예고도 없이 공중에서 떨어졌다.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는 그녀를 덮쳐버렸다.

쿵!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나뒹굴고 나서야, 자신을 덮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사내였다!

“살려주면… 그대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

사원 밖.

그림자 몇 개가 숲속을 빠르게 누비며 지나갔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살기가 있었다.

누군가 분통을 터뜨렸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분명 이리로 숨어드는 걸 봤는데, 어찌 감쪽같이 사라졌답니까!”

다른 한 명이 초조하게 말했다.

“그분께서 진왕이 경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번에 놓치면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누군가 산꼭대기의 절을 가리켰다.

“저기로 숨은 거 아닐까요? 가서 확인해 봅시다!”

그가 발을 떼려는 순간 동료가 막아섰다.

“저 위에는 장군부 사람들이 있어, 경거망동하다간 들킬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일단 돌아가서 그분께 보고하고,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제안이 타당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논의 끝에, 한 명은 숲을 빠져나가 산 아래로 향했고, 나머지 동료들은 흩어져 절로 통하는 길목들을 은밀히 감시하기로 했다.

승방 안.

유경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인사불성이 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사람을 밖으로 내던지면 분명 자객으로 오인당할 테고, 그리되면 이 순화사의 평화는 깨질 것이다.

귀찮음을 감수하는 것은 두렵지 않았으나, 장군인 아버지가 이 일로 그녀를 다른 곳에 연금할까 봐, 걱정이었다.

장군부를 벗어날 기회가 눈앞에 다다랐는데, 이 일로 거처를 옮기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게 뻔했다.

하지만 이 덩치 큰 사내를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몸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 침상 쪽으로 가 밑에 숨겨둔 물건들을 꺼냈다.

‘이번 한 번만 선행을 베풀어 보자.’

촛불도 켜지 않은 채, 그녀는 남자를 창가로 옮겨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맥을 짚어보니 내력 손상이 극심했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얼마간 요양하면 회복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수상태의 원인은 외상으로 인한 과다 출혈이었다.

유경서는 생전에 장군 집안에서 칼부림을 자주 접했기에 간한 치료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유솔은 유경서의 생전의 습관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비상시에 대비해 치료 도구와 약재를 챙겨두었다. 하여 사람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는 옆구리와 허벅지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상처 난 곳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은 뒤,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드디어 남자를 찬찬히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아까는 치료하느라 정신이 없어 그가 남자인 것도 잊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꽤 잘생겼다.

창백한 안색을 제외하면, 조각 같은 얼굴, 날카롭고 차가운 짙은 눈썹, 우뚝 솟은 콧날, 말라붙은 얇은 입술조차 관능적이고 아름다웠다. 어디 하나 빠지는 곳 없이 정교하여 그림 속 인물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남자의 체격은 황홀할 정도로 훌륭했다. 눈대중으로 봐도 키는 180이 넘을 것 같고, 넓은 어깨, 탄탄한 근육은 늠름했고, 다리의 털조차 남자의 양기를 뿜어냈다.

특히 그….

흠흠!

그녀는 색을 탐하지 않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황급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물 같으니라고!’

다음 날 아침.

새벽종이 울리고, 몸종이 어김없이 문밖에 나타났다.

유경서는 문을 열고 몸종이 가져온 물과 음식을 받은 뒤 차갑게 말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잠만 잘 것이니, 별일 없으면 깨우지 마라.”

“네, 큰 아가씨.”

몸종은 순순히 물러갔다.

몸종이 물러간 것을 확인한 후, 유경서는 문을 닫고, 음식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곧장 방구석의 병풍 뒤로 향했다.

남자는 병풍 뒤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그녀가 병풍 뒤로 들어서자마자 차가운 눈빛과 시선이 마주쳤다.

부인할 수 없었다. 그 가늘고 긴 눈매는 지극히 아름다웠으나, 지금은 날카로워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정신이 들어요?”

남자는 깨끗한 야행복으로 갈아입었으나, 치수가 작아, 그의 건장한 체격을 감당하지 못해 앞섶이 닫히지 않아 매끈한 가슴 근육이 훤히 드러났고, 양쪽 어깨와 팔 부분은 당장 터질 듯 위태로웠다. 다행히 바지는 끈으로 묶는 방식이라 짧긴 해도 중요한 부위는 가릴 수 있었다.

“그대가 날 구한 건가?”

남자는 대답 대신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고, 그 안에는 약간의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유경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찬가지로 대답 대신 물었다.

“혹 약속을 잊은 겁니까?”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눈동자를 굴려 기억을 더듬었다.

유경서는 차가운 얼굴로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모든 걸 주겠다고 했던 말은 잠시 접어두고, 일단 이 청구서부터 보시지요.”

남자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가 내민 종이로 옮겨졌다.

남자는 손을 들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훑어본 순간, 잘생겼던 얼굴은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온몸에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건 약탈이 아니오?”

“약탈이라니요?”

유경서는 입꼬리를 쓱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은자가 아니었다면 제가 그쪽을 구해줄 이유는 없어요. 당신 목숨값이 8만 냥이나 될까 싶겠지만, 제가 들인 인력, 물자, 그리고 낭비된 시간 손해는 8만 냥으로도 살 수 없는걸요.”

그녀의 미소는 태양처럼 찬란하여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으나, 연기준의 눈에는 그 환한 미소 뒤에 검은 속셈이 가득해 보였다.

“만일… 내게 이 정도의 돈이 없다면?”

“그럼 내 밑에서 일해서 갚으세요.”

그가 오리발 내밀 것을 예상했다는 듯, 유경서는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일해서 갚으라니?”

연기준은 종이를 확 낚아챘다.

앞서 본 종이에는 온갖 명목의 비용이 적혀 있었다. 진료비, 약값, 청소비, 인력 손실비, 업무 지연 손상비, 심신 피해보상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는 23년간 이렇게 교묘한 명목으로 빚을 지게 하는 수법은 듣도 보도 못했다.

황당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녀가 새로 건넨 종이는 청구서가 아니라 계약서였다.

‘본인 ( )은/는 금일 유경서에게 8만 냥을 빚졌으며, 상환할 능력이 없으므로 유경서 곁에 머물며 모든 명령에 복종하고, 유경서를 도와 8만 냥을 벌 때까지 자유를 유보한다. 유경서를 위해 일하는 동안 다음 사항을 준수한다. 1. 아무에게도 유경서의 신분을 누설할 수 없다. 2. 유경서가 하는 모든 일을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는다. (본 계약의 최종 해석 권한은 유경서에게 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한 그의 눈빛이 복잡했다.

“그대는, 진국장군 유정우의 여식인가?”

유경서는 팔짱을 끼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렇습니다.”

낯선 이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게 놀랍지 않았다.

유정우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유명했고, 옥연국은 물론이고 주변국들의 거물들 사이에서도 유정우는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유 가문의 적녀인 그녀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남자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한 그녀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에 불만인 줄 알고 계약서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건 단순한 고용 계약서일 뿐 노비 문서가 아니니 안심하세요. 아버지인 진국장군의 이름을 걸고, 절대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요.”

연기준은 여인의 경국지색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진국장군의 여식이 어찌 이리 궁색하게 사는 것인가?”

궁색하다는 말은 점잖은 표현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 아니었다면, 당장 죄를 물어 목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유경서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짜증이 났다.

“진국장군의 여식이라서 아무나 구하지 않는 것이니, 몸값이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지요!”

연기준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남의 돈을 갈취하는 그녀의 행태가 못마땅했지만, 지금 은혜를 입고 남의 집에 얹혀있는 처지라 8만 냥 빚을 갚을 수밖에 없었다.

연기준은 몸에 걸친 옷을 내려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쪽 옷인가?”

“네.”

“내 몸을 봤겠군?”

유경서는 눈을 흘기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심신 피해보상이 나온 겁니다. 여인의 몸으로 눈병 날 위험을 무릅쓰고 피를 닦고 상처를 치료한 제 기분은 생각해 봤습니까?”

연기준은 다시 얇은 입술을 꽉 다물었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말속에서 억울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혐오감 또한 느껴졌다.

결국 연기준은 손가락 끝을 깨물어 먹 대신 피로 종이에 서명하고 지장을 찍은 뒤, 종이를 그녀에게 던졌다.

유경서는 손을 뻗어 종이를 받아 들고는 확인했다.

“이름이 기준입니까?”

연기준은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경서는 입을 삐죽거리며 계약서를 잘 접어 품속에 넣고는 몸을 돌려 병풍 밖으로 나가 탁자에서 세수하고 아침을 먹었다.

아침 식사는 매우 소박하게 나왔다. 아침마다 쌀죽 한 그릇과 채소 만두 하나가 나왔다.

그녀는 병풍을 한 번 쳐다보면서 쌀죽 반 그릇을 마시고 채소 만두 반 개를 먹은 뒤, 다시 병풍 안으로 들어가 남은 쌀죽 반 그릇과 만두를 그에게 건넸다.

그녀가 건넨 음식을 확인한 남자의 얼굴이 검게 변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먹다가 남은 걸 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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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여름 밤은 그리 덥지 않았고, 강물은 약간 차가웠다. 하지만 유경서는 무공을 닦은 몸이라, 한겨울 찬물에 몸을 씻어도 피부만 얼얼할 뿐, 뼛속까지는 시리지 않았다.시원한 물속에 몸을 맡기고 여정의 피로를 씻어내며,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걸린 별빛을 바라보았다.강가에 그 남자만 없었다면, 이 고요한 밤 풍경은 유경서에게 더없이 완벽한 휴식이 되었을 것이다.한참 동안 물속에서 몸을 씻어낸 뒤, 강가의 남자가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없자, 그녀는 괜히 심술이 올라 고개를 돌려 그쪽을 흘끗 쳐다보았다.“망을 보러 온 거예요, 아니면 내가 목욕하는 것을 보러 온 거예요?”연기준은 강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광활한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밤의 강 풍경을 감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불만 섞인 목소리를 듣고,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는 듯 입을 열었다.“그 몸에서 내가 못 본 곳이 있긴 한가?”유경서는 할 말을 잃었다. ‘나를 무시하는 말까지 해놓고서, 어떻게 태연하게 내가 목욕하는 걸 보고 있을 수 있지?’그녀를 가장 화나게 만든 것은, 그녀가 강가에 벗어놓은 옷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물가로 올라가면, 알몸 그대로 그의 품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바로 이때, 갑자기 멀리 떨어진 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뿐만 아니라, 강가에 있던 연기준도 들었다.순간,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빨리 올라와!”망설일 것도 없었다. 목숨에 비하면, 이 정도 수치심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녀는 재빨리 강가로 헤엄쳐, 수면 위로 뛰어올라 그에게 날아갔다.강가의 남자는 팔을 벌려, 순식간에 그녀를 품에 감싸안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를 커다란 나무 뒤로 데려가 숨겼다.유경서는 쑥스러움도 잊고, 그의 팔 안에서 자신의 옷을 잡아 빠르게 몸에 걸쳤다.그녀 앞의 연기준도 가만있지 않았다. 길고 늘씬한 몸이 단단히 굳어 있었고, 차가운 눈빛은 주변을 재빠르게 훑었으며, 온몸이 한순간에 극도의 경계로 치달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27화

    그가 대위에 오르기 전에, 연기준에게 주어진 것은 두 선택뿐이다. 죽거나, 황조부께서 남긴 보물을 내놓거나! 한편, 유경서는 외딴 작은 촌락에 도착했다. 유경서는 앉아 있는 방 안을 둘러보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물었다. “돈을 내고 집까지 빌린 건데, 왜 좀 더 넓은 곳으로 빌리지 않은 거예요?”이곳이 나빠서 불평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방 하나짜리 집은 한없이 작았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그가 은자 한 덩이를 주자, 기뻐하며 아들 내외의 집으로 옮겨갔다. 주인의 며느리 삼이는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가져다 주었고, 방 안의 베개와 이불도 새것으로 갈아두었다.그들이 여기에 머물게 된 것은, 경성을 나서자마자 누군가에게 추적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쫓는 사람들을 따돌리기 위해, 몰래 마차에서 내려 북쪽으로 도망쳤고, 장주와 우휘는 마차를 계속 몰아 남쪽으로 향했다.연기준을 상처를 입었던 탓에, 그녀는 임시방편으로 이 마을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이곳에서 요양하면서, 장주와 우휘를 기다리기로 했다. 은자 한 덩이를 지불하고도 이토록 협소한 집을 얻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바깥에 붙은 측간까지 더해 보아도 겨우 십여 평방 남짓할뿐, 바닥에 이불 한 채 펼 자리조차 없었다!연기준은 무심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작을수록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쉽지 않지.” “여기서 자지 말고, 아무 데나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서 자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요?”연기준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그녀의 밥그릇에 놓았다.“백 년 뒤면 결국 한 구덩이 무덤에서 함께 누울 터인데, 무엇이 그리 급하단 말인가?”“당신.” 유경서는 하마터면 그의 얼굴에 피를 토할 뻔했다.“많이 먹어두게.” 연기준은 그녀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지 못한 듯, 턱으로 그녀 앞의 밥그릇을 가리키며 그녀의 몸을 훑었다. “몸에 살집이 없더군.”유경서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슴을 내밀고 허리에 손을 얹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26화

    유경서는 생각지도 못한 도움에 크게 감동했다. “장주, 고마워.”장주는 연기준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가씨, 모두 주인님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감사할 거면 주인님께 하셔야죠.”유경서는 맞은편 남자를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쪽이 이렇게까지 세심히 배려해 주실 줄은 몰랐네요.”연기준은 싸늘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우리는 이미 부부의 정을 나눴고, 그대 일은 곧 나의 일이다.”유경서는 너무 어색한 나머지 쥐구멍으로라도 숨고 싶었다.가능하다면, 정말 그와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고 싶었다. 서로 맞지 않다고.그녀의 출신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히 두 사람의 성격만 봐도 맞지 않았다. 하물며 습관, 가치관, 인생 목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혼인을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시집갈 생각은 없었다. 종일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그녀가 전생에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보였다. 저런 사람과 같이 지내면 얼마나 답답할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소위 말하는 달콤하고, 웃음 넘치고, 행복한 생활은 그녀와 인연이 없는 것 같았다. 동궁.첩자가 가져온 소식에 연용화는 매우 놀랐다. “경성을 나섰다고? 혼자 나가더냐?”첩자는 말했다. “분명 혼자 경성을 나섰습니다.”연용화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이것은 분명 유인하려는 계책이다! 그렇지 않다면, 필시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이다!”늘 행방이 묘연하던 진왕이 대놓고 경성을 나서는 것은, 그의 행동 방식에 어긋났다.게다가 그는 이미 진왕과 유경서가 한 객잔에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다. 두 사람은 분명 마음을 나눴을 것이다.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진왕은 혼사 준비에 힘써야 마땅했다. ‘이런 시기에 유경서를 내버려두고 경성을 떠나다니? 무슨 속셈이지?’무언가 생각난 듯, 연용화는 첩자에게 물었다. “유 가문은 무슨 움직임이 있느냐? 유정우가 유경서를 잡아들였느냐?”첩자가 답했다. “여전히 거리에서 아가씨를 찾고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25화

    혜씨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은 채 조용히 탁자 위 그릇들을 거두었다.결국 유경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뒷문에 이르자, 정말로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칠게 수염을 기른 마부 둘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변장하고 뭐 하려는 거야?”장주는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일단 마차에 타시죠. 가면서 이야기하겠습니다.”유경서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날려 마차에 올라탔다.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싸늘한 눈빛을 지닌 그와 시선이 맞부딪혔다. 깊고 어두운 그 눈은 마치 어떤 것도 통과시키지 않을 심연 같았다.그녀는 좀처럼 담담하지 못했다. 그와 피부를 맞댄 후에는, 겉으로는 아무리 태연한 척해도, 마음속은 혼란스러웠다.“그, 상처는 좀 어때요?” 그녀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걱정하는 척 물었지만, 속으로는 그가 자초한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면모와 절제력이 있었더라면, 상처가 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괜찮다.” 연기준은 차갑게 답했다.유경서는 갑자기 그의 차가운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입술은 왜 그래요? 입이 헌 거예요?”그녀가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연기준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개한테 물렸다!”유경서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어쩌다가 개한테 물린 거예요?”누가 들어도 그녀의 웃음은 장난스러운 놀림이 분명했다.하지만 그 방자한 웃음소리가 연기준의 귀에 꽂히는 순간,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수치와 분노가 뒤섞여 치밀어 올랐다.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험한 기운을 느낀 유경서는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왜 그래요? 내가 문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왜 나한테 그래요!”연기준은 주먹을 꽉 쥐었고, 손가락 마디에서 소리가 났다.그는 화가 난 듯 고개를 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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