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hor: 일비당
유경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싫어요? 먹을 게 있는 것을 감지덕지해야죠! 잊지 마세요, 당신은 지금 내 수하입니다. 수하가 먹다가 남긴 걸 먹으라는 겁니까?”

그녀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덧붙였다.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면, 다시 상 차려오라고 할 생각일랑 마세요!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지금 밖에는 장군부 사람들뿐만 아니라 당신을 죽이려는 자들도 깔려 있어요. 장군부 큰 아가씨인 내가 없었다면 그들은 진작 쳐들어왔을 겁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쌀죽이 담긴 그릇과 반쪽짜리 채소 만두를 그의 손에 쥐여 주고는, 차가운 얼굴로 몸을 돌려 병풍을 나갔다.

연기준은 손에 들린 것을 내려다보며 가슴을 들썩였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채소 만두를 입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점심때가 채 되기도 전에 문밖에서 몸종의 발소리가 들렸고,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큰 아가씨, 태자 전하께서 뵙고자 오셨습니다.”

탁자에서 불경을 베끼던 그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태자 전하? 그분께서 여긴 왜 오셨지?’

그녀는 태자의 청혼에 마음이 조금도 동하지 않았다.

유정우가 혼인을 반대해서 오히려 기뻤고, 그래서 이곳에 연금되었음에도 그녀는 아주 협조적이었다.

낮에는 얌전한 아가씨 노릇을 하고 밤에는 자기 일을 보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태자의 방문은 마냥 좋은 일 같지 않았다.

감정을 추스른 그녀는 문밖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태자 전하께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전해라. 옷을 갈아입고 뵈러 가겠다.”

그녀는 침상 밑의 상자를 다시 꺼내 손수 만든 화장품을 손바닥에 조금 덜어내어 얼굴에 골고루 펴 발랐다.

화사했던 뺨은 금세 어두운 회색빛으로 변했고, 붉은 입술은 핏기를 잃어, 병에 걸린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그녀는 상자를 다시 침상 밑에 넣은 뒤, 병풍을 벽 쪽으로 밀었다.

연기준은 병색이 완연한 그녀의 화장을 보고 의아해했다.

유경서는 턱으로 문 뒤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요!”

연기준은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허벅지를 가리켰다.

“못 걷겠소.”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일각 후, 그녀는 승방을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은 귀족 저택처럼 화려하고 웅장하지 않았지만, 고요했다.

정자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태자, 연용화에게 인사를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서 말하라.”

“감사합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힘겨운 듯 몸을 살짝 휘청거렸다.

가냘픈 몸에 병색이 완연한 얼굴, 무릎 꿇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연용화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말투도 더 차가워졌다.

“병이 위중하다 들었는데, 무슨 병이냐?”

유경서는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소녀의 병은 태중에서부터 가지고 나온 것으로, 고칠 약이 없습니다.”

“내가 청혼한 것을 알고 있는가?”

“아.”

유경서는 멍한 척하다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태자 전하, 안 됩니다. 저는 병이 위중하여 언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태자 전하와 혼인하겠습니까?”

태자는 확실히 최상급 미남에 속했다.

달처럼 밝은 용모, 온화하면서도 고귀함을 잃지 않는 우아한 기품은 주위의 모든 것을 빛바래게 했으며, 속세에 내려온 신선처럼 홀로 고고하여 어디에 서 있든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무리 빼어난 인물이라 해도 그녀의 마음에 든다는 보장은 없다.

21세기 현대인이었던 그녀는 옥연국에 온 지 반년 만에 만 냥이 넘는 은자를 벌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건 둘째 치고, 못 돌아간다 해도 자기 능력으로 충분히 호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시집? 허!’

병약한 모습이 그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여겼지만, 연용화는 의외로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려는 생각을 접지 않았다.

“상관없다. 설령 혼삿날 병사한다 해도, 나는 그대의 위패와 혼례를 치를 것이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위패와 혼례를? 그야말로 지고지순한 사랑, 죽음도 갈라놓지 못할 사랑이구나!’

시집갈 생각도 없었지만, 설령 죽어서 영혼 혼례식을 올리더라도 그와 할 생각은 없었다!

연용화가 갑자기 정자에서 나와, 그녀가 머무는 승방 쪽으로 걸어갔다.

유경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뒤따라갔다.

“여긴 한적하여 요양하기에는 좋으나, 장군부 적녀가 머물기에는 너무 누추하구나.”

“걱정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아버님께서 원래 사람을 더 보내주시려 했으나, 제가 몸이 허약하여 시끄러운 것을 견디지 못하기에, 아버님께서 요양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몸종 홍이만 이곳에 보내 시중들게 하셨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오시는 줄 몰라, 미처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그녀의 방문 앞에 다다랐다.

연용화의 시선이 굳게 닫힌 방문에 멈췄다.

유경서는 대담하게 방문을 사람 하나 들어갈 만큼만 열어두고, 몸으로 은근슬쩍 문턱을 막아서며 죄송스럽게 말했다.

“태자 전하, 약 냄새가 진동합니다. 부디 소녀의 체면을 지켜주십시오.”

연용화는 무심하게 방 안을 훑어보고는 다시 그녀의 병색 짙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내 이미 장군부에 예물을 보냈다. 그대가 청혼을 받아들이면, 즉시 부황께 청하여 날을 잡고 혼례를 올릴 것이다.”

유경서는 위패를 안고 혼례를 올리겠다는 말에 속이 메스꺼웠다.

‘빌어먹을 영혼 혼례식!’

그녀는 박명한 미인인 척 가련하게 굴며 힘없이 말했다.

“태자 전하의 깊은 뜻은 알지만, 감히 그 영광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유 가문에는 소녀 말고도 여식 더 있습니다. 그 아이는 아버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컸습니다. 만일….”

“사생아 따위가 태자비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

연용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지며 목소리도 싸늘해졌다.

“다른 뜻이 아니라….”

“유경서, 내 너에게 한 달의 시간을 주겠다. 잘 준비하거라! 한 달 후에도 무사하다면 그대와 혼인할 것이고, 죽는다면 그대의 위패를 가마에 태워 태자부에 들이겠다!”

고고하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의 귓가에 독단적인 말이 맴돌았다.

유경서의 어두운 얼굴에 그늘이 더 짙게 드리워졌다.

‘산 자에게는 협박을, 죽은 자에게는 영혼 혼례식을 올리겠다니, 기어이 나를 사람도, 귀신도 아닌 괴물로 만들 셈인가?’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엿보는 그의 눈을 마주했다.

“태자의 청혼을 왜 거부하는 거요?”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가 이런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못 들은 척, 방 안의 넓고 낮은 탁자로 걸어갔다.

자신의 속마음이 알려지면 세상 모든 사람이 분수도 모른다고 비웃을 것이다.

상대는 태자였지만,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봉양경만 찾으면 이 세상을 떠나 자신이 사랑하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시집이야말로 진짜 우스운 일이었다.

몸종 홍이가 점심을 가져올 때까지, 탁자에 엎드려 불경을 베꼈다.

남자도 더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외상은 치료받았으니, 지금은 내력을 회복하기 위해 기력을 양생하는 중이었다.

유경서는 홍이가 건넨 밥을 건네받고, 홍이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방문을 닫고, 남자의 다리 곁에 놓았다.

아침에 남은 밥을 먹었던 연기준은, 건드리지 않은 밥을 그에게 먼저 건네는 것을 보고 살짝 놀랐다.

“내가 남긴 것을 먹으려는 거요?”

유경서는 가차 없이 그에게 눈을 흘기더니, 몸을 일으켜 침상에 가서 누워버렸다.

“잘 거니까, 음식 남기지 마세요.”

연기준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을 땐, 그녀가 이미 눈을 감은 뒤였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잠드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남녀가 한방에 있는데, 나를 믿는 건가?”

유경서는 몸을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그 꼴로 기회를 줘도 그럴 능력이 없을 듯합니다. 충고 한마디 하자면, 비현실적인 생각일랑 말고, 본인 몸이나 걱정하시오, 안 그랬다간 뼈도 못 추릴 겁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연기준의 얼굴이 새카매졌다.

‘거기를 말하는 건가?’

그녀는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청력이 뛰어났기에, 그가 이를 가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녀는 평소처럼 해가 질 때까지 자다가, 침상에서 내려와 등불을 켰다.

문 옆의 남자가 정신을 집중해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침상 밑에서 상자를 꺼내 그 옆으로 가져갔다.

“약 바를 시간이에요.”

천천히 눈을 뜬 그의 시선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작은 상자로 옮겨갔다.

그녀는 상자에서 약병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입구가 넓고 하나는 좁았다.

먼저 좁은 병에서 검은 알약 몇 개를 꺼내 그에게 건넸고, 그는 망설임 없이 받아 삼켰다.

유경서는 다시 입구가 넓은 병을 열었다. 안에는 끈적끈적한 회백색 물질이 들어 있었고, 진한 약 냄새를 풍겼다.

“이건 사람 시켜 특별히 만든 금창약인대, 외상 치료에 특효고 흉터도 없애준답니다. 알아서 쓰세요.”

“안 발라주오?”

그녀가 약병을 자신에게 떠넘기자 연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불만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발라줄 순 있는데, 기절시키고 나서 발라줄게요.”

유경서는 그를 곁눈질했다.

어젯밤 그의 옷을 다 벗긴 건, 상황이 급박했기 때문이다.

멀쩡히 깨어있는 남자의 옷을 벗기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일부러 희롱당하고 싶어서 환장했나?’

입술을 꽉 깨문 그는 마치 그녀가 희롱해주지 않아 불만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 얼굴을 굳혔다.

“설마 뇌도 다친 겁니까? 어젯밤에 확인 못 했는데?”

예상외로 그는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되물었다.

“그럼 다시 확인해 주겠소?”

“이봐요!”

하마터면 주먹을 날릴 뻔했다.

‘태자 못지않게 잘생겼는데, 머리는 이상하구나!’

마침, 홍이의 발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저녁 식사를 받고 문을 닫은 후, 홍이가 멀어지길 기다렸다가 문 뒤의 남자에게 밥을 건넸다.

“안 먹소?”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아침에 죽 반 그릇과 채소 만두 반 개 먹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오늘 밤에 나가는데, 밖에서 먹고 올 겁니다.”

“어디 가오?”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행적을 알리는 건 고용 계약 때문이었지만, 남자는 그녀를 심문하는 것처럼 딱딱했다.

그녀는 눈을 한번 흘겨주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침상 밑 보따리에서 야행복을 꺼내고, 벽에 기대어 있던 병풍을 펼쳐 그 안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한 그녀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쪽은 지금 내게 고용된 사람이니, 꼬치꼬치 캐묻지 마세요. 상처가 아물면 나중에 내가 뭘 하는지 자연히 알게 될 겁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재빨리 방을 나섰다.

연기준은 긴 손가락으로 턱을 문지르며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진국장군부의 적녀라, 참 재미있군!’

깊은 밤, 승방 밖 정원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람이 나무를 스치는 소리 같았다.

이어 짧은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방석 위에서 명상 중이던 연기준은 갑자기 눈을 뜨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후 그는 숨을 내쉬며 미간을 폈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들어와라!”

방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 두 개가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문 뒤의 연기준을 발견한 그들은 즉시 얼굴을 가렸던 검은 천을 내리고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저희가 늦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다행히 명줄이 길어 아직 살아있구나.”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주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갑자기 왼쪽에 있던 수하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다치셨습니까?”

오른쪽 수하도 긴장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디를 다치셨습니까? 위중하십니까?”

그들은 연기준의 호위무사로 왼쪽은 장주, 오른쪽은 우휘였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연기준을 따라다니며 함께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기준은 습격을 당하고 구조된 경위를 이야기했다.

장주는 이야기를 다 듣고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연기준은 손목을 내밀었고, 장주가 맥을 짚었다.

“아가씨께서 건넨 약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연기준은 유경서가 준 약병 두 개를 건넸다.

장주는 좁은 병과 넓은 병을 열어 냄새를 맡은 뒤 다시 봉했다.

“약은 아무 문제 없으며, 사용된 약재도 모두 최상품입니다. 나중에 약재 몇 가지를 구해올 테니, 아가씨의 약과 함께 쓰시면 보름 안에 완쾌하실 겁니다.”

“아가씨께서 꽤 재주가 있나 봅니다.”

우휘는 장주의 말에 그녀를 칭찬했다.

“그분께서는 어디 가셨습니까?”

방 안에 그들 외에 아무도 없었다. 정원에서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나갔다.”

연기준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상처를 치료해 주신 겁니까?”

우휘는 연기준이 다친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께서 전하의 몸을 다 본 겁니까?”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30화

    그가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유경서는 그가 이렇게 웃자, 자기도 모르게 매료되어 넋을 잃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었고,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허리에 있는 그의 손을 떼어냈다.“왜요? 하룻밤의 풍류로 하마터면 반쪽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남은 반쪽 목숨마저 마저 잃으려고요?” ‘감히 내 앞에서 미남계를 쓰려고 하다니!’연기준의 올라갔던 입꼬리가 살짝 굳어졌고, 빛나던 눈은 다시 침울해졌다.‘이 여자는 정말이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리는구나!’…오두막으로 돌아왔을 때, 밤은 이미 어두워진 뒤였다.방 안의 작은 침상을 보며, 유경서는 문턱 옆에 서서 난감해했다.‘학교 기숙사 침대와 크기가 비슷해 혼자 자는 건 괜찮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자기에는 너무 좁다고!’“이리 오지!” 연기준이 먼저 자리를 잡았고, 그녀가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먼저 자요, 밖에서 망을 볼게요. 만약 누가 쫓아온다면….” 그녀는 고민 끝에 그와 따로 자는 것이 낫다고 결정했다. 밤에는 그가 자고, 낮에는 그녀가 자는 것이다. 어차피 그녀는 밤낮이 바뀌었고, 그런 생활에 익숙했다.“지금 이 상태로, 내가 그대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가?” 연기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유경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잠시 망설인 후, 문을 닫고 다가갔다.신발을 벗고 침대 안쪽으로 기어 들어가 벽을 향해 누운 후, 그에게 3분의 2의 공간을 남겨 두었다.연기준은 입꼬리를 올리고, 이내 그녀의 옆에 누웠다.유경서는 바짝 긴장한 채, 움직이지 못했다. 혹시라도 실수로 그의 짐승 같은 본능을 건드릴까 봐 두려웠다. 비록 그와 가릴 것 없는 사이가 되었으나, 그들은 감정을 나누는 연인이 아니었다. 그와 같이 자는 것에 여전히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그녀는 줄곧 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렇게 고도로 집중된 적이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이 피로했는지, 등 뒤로 들리는 남자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29화

    유경서는 서둘러 연기준을 데리고 몸을 날려 내려갔다.검은 그림자가 서 있던 자리에는 깊은 구덩이만 남아 있었고,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겼다. 그녀는 코를 막으면서 두 눈을 크게 떴다.‘시신 도둑?’“그만 돌아가지, 돌아가야 할 시간이군.” 연기준이 그녀의 허리를 안은 팔을 더 조였다.“쫓아가서 보지 않을 거예요?” 두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은 21세기에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땅속에 묻힌 시신을 훔쳐가다니. 다 죽은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보통 사람들은 듣기만 해도 불길하고, 음산하고, 공포스럽다고 생각하는데, 왜 굳이 시신을 훔쳐 가는 것일까?’“여기에 막 도착했으니, 신중을 가하는 것이 최우선이다.”연기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그녀는 결국 호기심을 접었다.경성을 떠난 것은, 그의 원수들을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정우가 보낸 사람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함도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입으로 진왕과 혼인하겠다고 했다. 진왕이 그녀가 도망쳤다는 것을 알면 분명 유 가문을 곤란하게 할 것이고, 유정우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그의 말대로, 신중을 가하는 것이 최우선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여전히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충분히 안았어요?”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시신 도둑에게 발각될까 봐서였다. ‘아직도 내게 치근덕거리다니!’하지만 연기준은 손을 놓기는커녕, 오히려 몸의 반쯤을 그녀에게 기대었고, 약간의 허약함이 담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오늘 상처에 약을 바르지 못해서 아프구나.”유경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남자답게 생겨서는 어디서 연약한 척을 해? 그날 나를 네다섯 번이나 괴롭힌 사람이? 상처에서 피가 터졌는데도 신음 한 번 내지 않던 사람이 오늘 고작 몇 걸음 걸었다고 벌써 지쳐?’“부인, 목욕을 다 했으면 이제 지아비를 씻겨줄 차례 같은데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28화

    초여름 밤은 그리 덥지 않았고, 강물은 약간 차가웠다. 하지만 유경서는 무공을 닦은 몸이라, 한겨울 찬물에 몸을 씻어도 피부만 얼얼할 뿐, 뼛속까지는 시리지 않았다.시원한 물속에 몸을 맡기고 여정의 피로를 씻어내며,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걸린 별빛을 바라보았다.강가에 그 남자만 없었다면, 이 고요한 밤 풍경은 유경서에게 더없이 완벽한 휴식이 되었을 것이다.한참 동안 물속에서 몸을 씻어낸 뒤, 강가의 남자가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없자, 그녀는 괜히 심술이 올라 고개를 돌려 그쪽을 흘끗 쳐다보았다.“망을 보러 온 거예요, 아니면 내가 목욕하는 것을 보러 온 거예요?”연기준은 강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광활한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밤의 강 풍경을 감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불만 섞인 목소리를 듣고,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는 듯 입을 열었다.“그 몸에서 내가 못 본 곳이 있긴 한가?”유경서는 할 말을 잃었다. ‘나를 무시하는 말까지 해놓고서, 어떻게 태연하게 내가 목욕하는 걸 보고 있을 수 있지?’그녀를 가장 화나게 만든 것은, 그녀가 강가에 벗어놓은 옷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물가로 올라가면, 알몸 그대로 그의 품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바로 이때, 갑자기 멀리 떨어진 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뿐만 아니라, 강가에 있던 연기준도 들었다.순간,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빨리 올라와!”망설일 것도 없었다. 목숨에 비하면, 이 정도 수치심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녀는 재빨리 강가로 헤엄쳐, 수면 위로 뛰어올라 그에게 날아갔다.강가의 남자는 팔을 벌려, 순식간에 그녀를 품에 감싸안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를 커다란 나무 뒤로 데려가 숨겼다.유경서는 쑥스러움도 잊고, 그의 팔 안에서 자신의 옷을 잡아 빠르게 몸에 걸쳤다.그녀 앞의 연기준도 가만있지 않았다. 길고 늘씬한 몸이 단단히 굳어 있었고, 차가운 눈빛은 주변을 재빠르게 훑었으며, 온몸이 한순간에 극도의 경계로 치달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27화

    그가 대위에 오르기 전에, 연기준에게 주어진 것은 두 선택뿐이다. 죽거나, 황조부께서 남긴 보물을 내놓거나! 한편, 유경서는 외딴 작은 촌락에 도착했다. 유경서는 앉아 있는 방 안을 둘러보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물었다. “돈을 내고 집까지 빌린 건데, 왜 좀 더 넓은 곳으로 빌리지 않은 거예요?”이곳이 나빠서 불평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방 하나짜리 집은 한없이 작았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그가 은자 한 덩이를 주자, 기뻐하며 아들 내외의 집으로 옮겨갔다. 주인의 며느리 삼이는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가져다 주었고, 방 안의 베개와 이불도 새것으로 갈아두었다.그들이 여기에 머물게 된 것은, 경성을 나서자마자 누군가에게 추적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쫓는 사람들을 따돌리기 위해, 몰래 마차에서 내려 북쪽으로 도망쳤고, 장주와 우휘는 마차를 계속 몰아 남쪽으로 향했다.연기준을 상처를 입었던 탓에, 그녀는 임시방편으로 이 마을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이곳에서 요양하면서, 장주와 우휘를 기다리기로 했다. 은자 한 덩이를 지불하고도 이토록 협소한 집을 얻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바깥에 붙은 측간까지 더해 보아도 겨우 십여 평방 남짓할뿐, 바닥에 이불 한 채 펼 자리조차 없었다!연기준은 무심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작을수록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쉽지 않지.” “여기서 자지 말고, 아무 데나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서 자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요?”연기준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그녀의 밥그릇에 놓았다.“백 년 뒤면 결국 한 구덩이 무덤에서 함께 누울 터인데, 무엇이 그리 급하단 말인가?”“당신.” 유경서는 하마터면 그의 얼굴에 피를 토할 뻔했다.“많이 먹어두게.” 연기준은 그녀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지 못한 듯, 턱으로 그녀 앞의 밥그릇을 가리키며 그녀의 몸을 훑었다. “몸에 살집이 없더군.”유경서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슴을 내밀고 허리에 손을 얹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26화

    유경서는 생각지도 못한 도움에 크게 감동했다. “장주, 고마워.”장주는 연기준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가씨, 모두 주인님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감사할 거면 주인님께 하셔야죠.”유경서는 맞은편 남자를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쪽이 이렇게까지 세심히 배려해 주실 줄은 몰랐네요.”연기준은 싸늘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우리는 이미 부부의 정을 나눴고, 그대 일은 곧 나의 일이다.”유경서는 너무 어색한 나머지 쥐구멍으로라도 숨고 싶었다.가능하다면, 정말 그와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고 싶었다. 서로 맞지 않다고.그녀의 출신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히 두 사람의 성격만 봐도 맞지 않았다. 하물며 습관, 가치관, 인생 목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혼인을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시집갈 생각은 없었다. 종일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그녀가 전생에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보였다. 저런 사람과 같이 지내면 얼마나 답답할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소위 말하는 달콤하고, 웃음 넘치고, 행복한 생활은 그녀와 인연이 없는 것 같았다. 동궁.첩자가 가져온 소식에 연용화는 매우 놀랐다. “경성을 나섰다고? 혼자 나가더냐?”첩자는 말했다. “분명 혼자 경성을 나섰습니다.”연용화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이것은 분명 유인하려는 계책이다! 그렇지 않다면, 필시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이다!”늘 행방이 묘연하던 진왕이 대놓고 경성을 나서는 것은, 그의 행동 방식에 어긋났다.게다가 그는 이미 진왕과 유경서가 한 객잔에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다. 두 사람은 분명 마음을 나눴을 것이다.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진왕은 혼사 준비에 힘써야 마땅했다. ‘이런 시기에 유경서를 내버려두고 경성을 떠나다니? 무슨 속셈이지?’무언가 생각난 듯, 연용화는 첩자에게 물었다. “유 가문은 무슨 움직임이 있느냐? 유정우가 유경서를 잡아들였느냐?”첩자가 답했다. “여전히 거리에서 아가씨를 찾고

  • 음흉한 진왕의 덫에 걸리다   제25화

    혜씨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은 채 조용히 탁자 위 그릇들을 거두었다.결국 유경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뒷문에 이르자, 정말로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칠게 수염을 기른 마부 둘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변장하고 뭐 하려는 거야?”장주는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일단 마차에 타시죠. 가면서 이야기하겠습니다.”유경서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날려 마차에 올라탔다.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싸늘한 눈빛을 지닌 그와 시선이 맞부딪혔다. 깊고 어두운 그 눈은 마치 어떤 것도 통과시키지 않을 심연 같았다.그녀는 좀처럼 담담하지 못했다. 그와 피부를 맞댄 후에는, 겉으로는 아무리 태연한 척해도, 마음속은 혼란스러웠다.“그, 상처는 좀 어때요?” 그녀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걱정하는 척 물었지만, 속으로는 그가 자초한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면모와 절제력이 있었더라면, 상처가 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괜찮다.” 연기준은 차갑게 답했다.유경서는 갑자기 그의 차가운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입술은 왜 그래요? 입이 헌 거예요?”그녀가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연기준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개한테 물렸다!”유경서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어쩌다가 개한테 물린 거예요?”누가 들어도 그녀의 웃음은 장난스러운 놀림이 분명했다.하지만 그 방자한 웃음소리가 연기준의 귀에 꽂히는 순간,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수치와 분노가 뒤섞여 치밀어 올랐다.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험한 기운을 느낀 유경서는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왜 그래요? 내가 문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왜 나한테 그래요!”연기준은 주먹을 꽉 쥐었고, 손가락 마디에서 소리가 났다.그는 화가 난 듯 고개를 홱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