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백유겸은 아직 체크인 수속까지 시간이 남았다. 여유롭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국항공 카운터를 향해 걸었다.
백유겸 곁에 다가온 동양인 여자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옆에 앉았다.“넌, 아직도 유치하게 우유냐?”“유온, 달달한게 최고지.” 유겸은 손에 든 밀크쉐이크를 마시면서 가볍게 말했다. “여기서 술을 찾을 수는 없잖아.”유온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아까 공항입구에서 난리였다면서?”“어. 연화가 인질이 되었지.”“갑자기 인질범이 불쌍해지네.”유겸은 그녀의 손에 든 갈색 커피를 힐끗 보고는 농담을 던졌다. “야, 나보고 우유 먹는다고 하더니 넌 우유 탄 커피 마시냐?”“커피는 인생의 동반자지. 넌 아직 인생의 쓴맛을 몰라.”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유온을 보며 백유겸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쓴맛을 알기에 단맛을 찾는 거지.”“너라는 사람도 쓴맛을 봐?”“…우와. 나를 모르네. 있어. 그런 거. 오래전부터 쓴맛인 줄 알았지만, 이번엔 확실하더라.”유겸은 손에 든 밀크쉐이크를 내려다봤다. 그의 눈빛에는 문득 쓸쓸함이 스치자, 유온은 무언가를 물으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여자 문제인가 보네. 이번엔 누구길래 그동안 참아온 쉐이크까지 마실까?’유겸이 다시 쉐이크를 한 모금 마시고는 옆에 앉은 유온에게 눈길을 돌렸다.흘러내린 짙은 남색 단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옅은 파란색 티셔츠에 검은 청바지, 운동화까지 평소와 다른 가벼운 차림이었다.“넌? 왜 여기에 있어?”“너 따라온 거 아니다. 미쳤다고 보기 싫은 널 따라가냐. 학회참석 때문에 한국 가는 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유온의 말에 유겸은 어딘가 어색함을 느꼈다.“학회?”“어. 대한 의학 분자 생화학회. 이번에 가서 포스터나 발표하려고.”유겸은 고개를 끄덕였다.‘아, 주작가 와 현무가가 경쟁하고 있다던 거기?’그러다가 문득 유온의 전공이 떠올랐다.“너, AI 한다고 하지 않았어?”“어. 적용 분야를 질병으로 먼저 잡으려고. 희귀질환은 사례가 적긴 한데, 유전 양상이 뚜렷한
짧은 인사를 마치고 돌아선 아드리안은 어느새 군중 속으로 스며들었다.그 뒷모습을 보며 연화가 중얼거렸다.“분명 멈칫했는데… 그리고 인질이 되었는데도 떨리는 기색이며 식은땀도 없고.”“그래서?”유겸도 아드리안이 사라진 방향으로 눈을 떼지 못했다.“손이 묘했는데. 총기류를 다뤄 본 것 같긴 한데, 미국인이라면 다들 그 정도 하니까. 그런데 미묘해.”“미묘해?”“다른 것으로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꼭 뱀 같다고 해야 하나.”연화의 마지막에 유겸은 질색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야, 네 머리엔 현시우 뿐이냐? 거기서 뱀이 왜 나와?”눈썹을 찡그린 연화는 유겸을 째려봤다.“아니, 거기서 시우오빠가 왜 나와!”짜증을 내던 연화는 유겸을 비웃었다.“ 아…. 맞다 이 새끼의 첫사랑이 시우오빠였지.”순간 유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연화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악! 야!”“말 바로 해. 그리고 너 시우에게 쓸데없는 관심 가지지 말고. ”“왜!”인상을 찌푸린 연화를 보자 유겸은 만족스럽다는 듯 목을 좌우로 움직였다. “여친 있거든.”“뭐?! 왜 여친이 생겨? ”연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 시우 오빠가?“누가 달라붙는 거 극히 혐오하잖아. 예전에 라희가 달라붙어서 거의 노이로제 걸려서 4대 가문 모임도 안 오잖아.”“그런 게 있어.”유겸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먼저 걸어갔다.“말조심 안 하면 두 번 다시 얼굴 못 볼 수도 있어. 그 녀석 진짜 화나면, 미친 돌아이 쉽게 되거든. ”연화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야! 백유겸 더 말해봐!!”***백연화에게서 돌아선 아드리안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손수건을 꺼냈다.연화와 맞잡았던 손을 꼼꼼히 닦고는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몇 걸음 더 걸음을 옮길 때, 뒤에서 두 사람이 다가왔다.“괜찮으십니까? 저희가 해도.”“…확실한 게 나아. 그런데 하필 고양이 냄새라니.”아드리안이 손끝을 내려다보
“저는 운동도 하지 않았고, 게다가 가까운 출구에 자도 세워 뒀어요. 키도 드릴게요.”갈색 머리의 남자가 바지의 앞주머니로 손을 가져가자, 인질범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어디에 손을 대는 거야!”“여기 봐요. 차 키!” 남자가 주머니에서 꺼내 차 키를 흔들어 보였다. 키에는 선명한 테슨라 마크가 선명했다.“바로, 앞 출구 14B에 주차되어 있어요. 나가면 바로 보이는 흰색 차입니다.”인질범의 눈빛이 흔들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마음을 정한 듯 소리쳤다.“좋아. 당장 이리 와.”갈색 머리 남자가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다. 인질범은 연화를 거칠게 밀쳐 내고 그의 목덜미에 칼끝을 겨눴다.서늘한 긴장감이 흘렀다.기꺼이 인질이 된 남자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무언가 중얼거렸다. 소란에 묻혀 들리지 않았지만, 유겸은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잠시 뒤, 인질범의 손이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유겸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두 사람을 지켜봤다.“차가 어디 있다고?”“저기. 14B.”인질범이 남자를 데리고 출구로 향하자, 공항 경찰은 그를 뒤따라갔다. 곧이어 자동문이 열렸다. 무더운 한여름의 공기가 밀려들었지만, 여전히 공기는 긴장으로 얼어붙었다.밖에는 이미 경찰과 SWAT팀이 대기하고 있었다.밖으로 나간 인질범의 시선에 사방에 깔린 그들을 보자, 표정이 돌변했다. 그는 칼을 세워 보이며 고함쳤다. “으아아악!!”그러더니 인질로 잡은 남자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가까운 벽 쪽으로 전력 질주했다. “스톱!!”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총성이 울렸다. 총구에서 튀어나온 총알들이 그의 온몸에 박히자, 움직임이 멈췄다.경찰 관계자 한 명이 인질이었던 남자에게 다가갔다.“괜찮으십니까? 브라이튼씨”“네. 제이미 팀장님.” 제이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아무리 일반인을 위해서 직접 인질이 되시다니요. 무모하셨습니다.”“다른 사람이 희생되는 것보다는 제가 낫죠. 조
백유겸은 아직 체크인 수속까지 시간이 남았다. 여유롭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국항공 카운터를 향해 걸었다.그때,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동시에 사람들이 다급하게 달리자 그의 머릿속에 맴돌던 에밀리의 마지막과 겹치자 몸이 긴장했다.
주하는 남아 있는 세포들이 담긴 플라스틱 튜브를 모두 꺼내 냉동고 앞 바닥에 둔 바구니 속 뜨거운 물이 담긴 비커에 떨어뜨렸다.삐이-삐이-삐이-냉동고의 온도가 올라갔다는 알람음이 울었다.“어. 알았어. 금방 할게.”주하가 -70℃ 냉동고의 육중한 문을 닫았다. 시선이 바닥의 비커로 향했다. 뜨거운 물 위에 떠 있는 검지 두 마디 크기의 투명한 플라스틱 튜브 속에는 몇천개의 세포들이 있었다.‘저 튜브 하나로도 2~3명에게는 주입할 수 있는 시키 바이러스가 있어.’약한 바이러스긴 하지만.얼어있던 세포들이 녹으면서 핏빛처럼 붉어졌다.주하는 냉동고의 온도 표시가 다시 내려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 뒤 비커를 들고 세포 배양실로 향했다. 6개월의 시간을 거쳐 겨우 어렵사리 만든 세포주였다. 하지만 더는 악용될 가능성을 지워야 했다. ‘주라헬은 이걸로 시우를 협박하는 데 쓰겠지.’클린벤치의 투명한 유리창을 부드럽게 밀어 올린 뒤, 석션기를 작동시켜 비커 안의 흐물거리게 녹아내린 세포들을 빨아들여 흔적도 없이 지워 버렸다.사용했던 플라스틱 튜브와 뚜껑은 흰 폐기물 상자 안의 주황색 비닐에 넣고, 그 위로 다른 폐기물을 올렸다.박스를 밀봉하고 폐기 날짜를 오늘도 적었다.***실험을 정리하고, 오피스로 돌아와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안녕. 진아찌.”“어. 월요일에 봐.”연구동 밖으로 나오자, 유진욱이 차를 몰고 와 앞에 세웠다.“어? 아빠가 해?”“그동안 네 엄마가 고생했잖아.”“음… 불안한데.”주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아빠가 과연 지리를 알까? 하도 외국물만 드셔서요.”주하는 농담을 던지며 뒷자리에 올라탔다.“아이코. 그래도 우리 딸 하나 집에 못 데려다줄까요.”“아빠! 진아가 고맙대. 과자 줬는데, 먹어볼래?”“아니, 몇 개 안 되는 걸 왜 나눠 줘.”“우리 진아는 그런 아이거든요. 네 개나. 엄마 아빠도 맛을 보시지요.”주하는 조수석의 세나에게 과자 두 개를 건넸다. 과자
“그거 나에게 몇 개만 넘겨라. 그 값으로 주연을 보내게.”“안돼!! 윤진아!!”주하의 절규를 뒤로 하고, 연화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외투에 숨겨 온 손바닥만 한 소형 TNT 장치 몇 개를 꺼내 안전장치를 풀고, 진아의 손에 넘겼다. 겨우 움직이는 손가락 하나로도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마치 처음부터 진아를 위해 가져온 것처럼.“어차피 나가지도 못해…. 그러니까 내 소원 성취하게…눈 감아 줘. 다음에 만나면, 다음이라는 기회가 있다면, 그땐 진짜 친구 되자. 바보 주하.”연화는 주저앉으려는 주하를 이끌고 나왔다. 복도에서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맞은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연화가 주하를 끌어 등 뒤에 있던 방으로 몸을 숨겼다.또각또각.마더와는 다른 구두 소리였다.“호랑이가 없으니, 개나 여우나 다 왕 노릇이네.”진아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진짜 어이없어.” 주하와 연화가 가까이 있다는 걸 들키지 않게 하려는 듯, 진아는 일부러 주연을 자극했다. “그런다고 네가 가주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구두 굽이 진아쪽으로 거칠게 달려갔다. “저년이!!! 너 오늘 죽었어.”주연은 두 사람이 근처에 숨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자백제도 소용없으니 진짜 죽었어!!”얼마 후,쾅!!폭발음 소리가 들렸다. 폭발과 함께 건물이 흔들렸다. 연화와 주하는 서둘러 자신들이 들어온 길로 빠져나왔다.“얼마나, 얼마나!!! 더 그렇게…!”울분이 터져 나오자 주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을 도구로 써야 끝나는데!!! ”백연화가 입술을 깨문 채 묵묵히 그녀를 안아 줬다. “그렇게도 살려고 했는데. 왜 ….”***주하에게는 생생하게 겪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진아에게는 아직 모르는 미래였다. 어쩌면 겪지 않아도 될 미래.목숨을 버리기로 했던 진아의 모습을 주하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때 놓쳐버린 온기가 너무 아쉬웠는지, 지금 품 안의 따뜻한 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