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점심 무렵, 회사 주변 카페의 공기는 갓 내린 샷의 향과
사람들의 일정으로 바쁘게 진동했다.
앞치마를 묶고 카운터에 서자 손동작이 금세 일의 리듬을 찾아갔다.
설탕 두 스푼은 줄이고, 거품은 어제보다 살짝 더 가볍게.
문이 열릴 때마다 종이 울렸고, 열 번째 종 뒤에 도윤이 들어왔다.
단골의 동선으로 카운터에 섰고, 무심하게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오늘은 조금 달게 가보실래요?”
그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봤다.
“아침에 단단히 달리셨잖아요. 몸이 당을 찾고 있어요.”
웃음이 한쪽 입가에 살짝 걸렸다.
“정확하네요.”
“오늘만 예외.”
나는 더티초코를 내밀며 재빨리 별 모양 시나몬을 그렸다.
“내일부터 다시 고지식하게 쓰게 가셔도 되니까요.”
첫 모금 뒤 그의 어깨가 아주 조금 풀렸다.
사람은 스스로 선택했다고 느끼는 변화에 호의를 갖는다.
축하 인사를 건네며 자연스레 결혼 얘기를 꺼내자,
그의 눈빛에서 안도와 불안이 동시에 반짝였다 사라졌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장면은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해가 기울 무렵, 민하의 집은 서랍 하나만 열려 있어도
마음의 지도를 보여주었다. 카드가 한쪽으로 밀려 있고,
계약서 모서리에 손톱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물컵이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결혼식 말고, 당신이 진짜 원하는 건 뭐예요?”
민하는 오래 침묵했다. 답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바른 자리를 찾고 있는 사람의 침묵.
“빚이 없는 내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내일은 누군가가 대신 떠받치는 미래가 아니어야 해요.
당신 스스로 서는 내일. 오늘 우린 그걸 배우는 첫날이에요.”
“이별은… 누가 대신 말해줄 수 있나요?”
“말은 대신할 수 있어요.”
나는 단호했지만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그 말 이후의 생활은 누구도 대신 못 해요.
연락 끊는 법, 공동 지인 대응, 가족 설득,
재무 동선 정리, 주거 계획. 설계도를 함께 만들죠.”
화이트보드에 항목이 늘어났다.
공동계좌 정리, 기한과 절차. 반환해야 할 선물
감정선의 매무새. 양가 대응. 질문 예상 리스트와 모범 답안.
SNS - 댓글 원칙과 비공개 전환 타이밍.
재정 - 새 통장, 자동이체 분리, 소득 대비 고정비 비율 재설정.
민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왔다.
내 말이 크고 어렵지 않도록 최대한 ‘생활 언어’로 풀어냈다.
마지막으로 작은 종이에 한 문장을 적어 건넸다.
오늘 밤, 방의 불을 끄고 휴대폰은 거실에.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숨을 다섯 번 센 뒤,
‘내가 진짜 원하는 건…’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적으세요.
그녀는 종이를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었다.
접힌 자국이 결심의 주름처럼 또렷했다.
제하가 현관에서 신발끈을 고쳐 묶으며 말했다.
“내일은 회사 카페에서 우연한 스침 한 번 더. 그다음 날 한강변에서 마지막 리허설.”
나는 끄덕였다.
“장면은 말보다 오래가니까.”
제하가 내 말을 먼저 덧붙이며 웃었다.
“이제 그 말, 네 트레이드마크 된 거 알아?”
“유행어처럼 들리면 안 되는데.”
“듣는 사람은 매번 처음 듣는 표정이야. 그게 너라서 가능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숨을 고르는 사람처럼 잔잔했다.
불 꺼진 창문들 사이로 어느 집의 거실등만 유난히 밝았고,
그 안에 누군가는 싸우고, 누군가는 화해하고, 누군가는 혼자 밥을 데웠을 것이다.
나는 내 방의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아 다시 계획표를 확인했다.
손끝이 조금 차가워,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때, 또다시 진동. 이번에도 이름 없는 번호. 보고 싶다.
다섯 글자도 안 되는 두 단어가 방 안의 공기를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숨을 한 번 길게 들이켰다 내쉬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늘은 다른 사람의 내일을 데려다주자. 내 과거는 내일 다시 다루자.
그렇게 마음을 매만지고 있는데, 팀 채팅창에 제하가 새로운 파일을 올렸다.
-예비신랑 루틴 요약:
기상 6:10 / 러닝 6:40–7:15 / 출근 8:50 / 점심 카페 B,
주 4회 / 퇴근 후 수요일·금요일 카페 C 20:10 / 주말 오전 한강.
그 아래에 ‘주의’ 항목이 덧붙었다.
성실형은 죄책감을 자원으로 쓰는 경향 있음.
‘내가 떠나야 그녀가 산다’로 착각하지 않게,
‘우리가 멈춰야 둘 다 산다’ 프레임 유지.
나는 엄지로 ‘확인’을 눌렀다.
창문 너머로 바람이 커튼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내렸다.
예전 생각이 아주 짧은 그림자처럼 스쳐갔다.
결혼식장 리허설장, 하얀 조명의 냄새,
하객 석에 앉아 마음의 위치를 어쩌지 못했던 그 오후.
그리고 이틀 뒤, 한 문장으로 무너진 시간표.
사라진 남자. 병원 기록을 통해 전해 들었던 늦은 사실.
간암. 말기. 그가 건넨 잔혹한 말들이 사실은 둔탁한 방패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미 관계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잔해 위에 이 일을 세웠다.
누군가의 마지막 장면을 안전하게, 품위 있게, 다음 장으로 이어지게 돕는 일.
가끔은 그 과정이 나를 거꾸로 끌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의 의뢰인은 나였다가 민하였다가, 그리고 다시 나리 자신이었다.
누구의 이름으로 부르든, 우리는 모두 미안하지 않은 내일을 원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내일 있을 우연을 머릿속으로 리허설했다.
카페 유리창 위로 떨어지는 오후빛의 각도, 의자의 위치,
음악의 볼륨, 얼음이 녹아 내리는 속도, 대화의 리듬. 장면은 디테일 위에서 완성된다.
그 디테일을 쌓아 올리다 보면, 사람은 이상하게도 스스로 정답을 향해 걸어간다.
눈을 감기 직전 마지막으로 떠오른 얼굴은 온유의 것이 아니었다.
창가에 앉아 컵을 두 손으로 감싸던 민하의 얼굴이었다.
도망치려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하려는 사람의 표정. 그 표정이 오래 남았다.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밤, 나는 아주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신나리. 놓게 만들자. 그런데 누구도 부서지지 않게.”
방 안의 공기가 한층 얇아지는 느낌 속에서, 잠이 모래처럼 천천히 내려앉았다.
다음 날의 장면은 이미 어딘가에서 빛을 받아 반짝이는 중일 것이다.
내가 할 일은 그 빛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비치도록 컵받침을 돌려놓는 것.
그렇게 끝을 데려다주면, 어떤 사람의 시작이 비로소 도착하리라.
강당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스탭들이 의자를 정렬하고, 조명이 점검되는 동안 무대 한가운데엔 커다란 흰 배너가 걸려 있었다.“RE: 관계의 온도 - 서로를 이해하는 연습”그 문구를 바라보며 나리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손에는 대본 대신 노트 한 권이 들려 있었다.그 안에는 수많은 메모와 문장이 빼곡히 적혀 있었지만,오늘은 그 어떤 문장도 그대로 읽을 생각이 없었다.“오늘은 그냥, 내 이야기로 가야겠다.”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선배!”뒤에서 수경이 다가왔다.화이트 셔츠에 단정한 재킷, 하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오늘 진짜 시작이에요.”“그래. 이제 우리가 이 일을 세상에 보여줘야지.”“솔직히… 좀 무서워요.”“무서운 게 맞아.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한다는 건 늘 조심스러운 일이니까.”“그래도, 선배가 있어서 다행이에요.”“이젠 네가 나보다 더 단단해.”“그건 아니에요.”“오늘 끝나고 나면 그 말, 다시 생각하게 될 거야.”수경은 작게 웃었다.그 미소 뒤로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고 있었다.그녀는 손목에 차고 있던 작은 팔찌를 매만졌다.그건 나리가 선물해준 ‘은 팔찌’였다.“이거 차고 있으면 이상하게 덜 불안해요.”“그건 너한테 잘 어울려.”“그럼 오늘은, 이 팔찌 덕분에 괜찮을 거예요.”무대 뒤편, 제하는 카메라를 정비하고 있었다.렌즈를 조정하고, 조도를 확인하고, 한 번씩 셔터를 눌러 테스트했다.그의 눈빛은 집중되어 있었지만, 어딘가 따뜻했다.“이 장면, 나중에 다큐로 만들면 좋겠다.”그가 혼잣말을 했다.“이별을 다루던 사람들이, 이제 관계를 회복시키는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라니.”그는 카메라를 들고 무대 뒤에서 나리와 수경을 번갈아 바라봤다.둘 다 자신만의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얼굴이었다.긴장과 결심,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섞인 얼굴.그건 제하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조명이 천천히 어두워지고, 무대 중앙에 빛이 켜졌다.청중석에는 약 백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봄이 완전히 돌아왔다.거리는 벚꽃이 지고, 연초록의 잎이 자라기 시작했다.나리는 창문을 열고 공기를 들이마셨다.묘하게 단내가 섞인 바람이었다.‘이 냄새, 익숙하다.’그녀는 무심코 중얼거렸다.이별 직후에도, 위로의 자리에서도, 늘 이런 냄새가 있었다.새로운 시작과 끝의 경계.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곳이 딱 그 지점이었다.책상 위에는 몇 장의 상담 기록이 정리되어 있었다.그 중 하나에는 수경이 쓴 메모가 눈에 띄었다.‘사람은 상처를 잊는 게 아니라, 그 위로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거예요.’그 문장을 읽으며 나리는 미소를 지었다.‘이젠 완전히 자기 목소리를 찾았네.’그녀는 그 문장을 천천히 손끝으로 짚었다.종이의 질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그때, 문이 열렸다.“선배, 어제 상담했던 분이 오늘도 다녀가셨어요.”수경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약 없이?”“네. 그냥 커피 한 잔 두고 갔어요. ‘오늘은 말보다 커피가 위로가 될 것 같아서요.’ 라고 하시더라고요.”나리는 웃음을 지었다.“그분, 잘 회복 중이네.”“네. 근데 그 말이 참 좋았어요. 오늘은 말보다 커피가 위로가 된다.”“맞아. 사람이 꼭 말을 해야 위로받는 건 아니니까.”“선배는 그런 순간 많았어요?”“많았지. 이 일은, 말보다 ‘눈빛’으로 하는 일이야.”그녀의 말에 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선배는, 제 눈빛에서도 그런 게 보여요?”“응.”“어떤 거요?”“예전엔 두려움이었는데, 이젠 책임감이 보여.”그 말에 수경은 살짝 웃었다.“책임감이라…”“사람의 마음을 다룬다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야.그걸 알게 된다는 건, 이제 진짜로 사람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는 뜻이지.”수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녀의 눈에 선배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이제는 ‘이별 전문가’가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 한 구석을 비추는 등불 같았다.“선배.”“응.”“저… 이제는 누군가의 상처를 보면서 울지 않아요.”“그래?”“네. 이젠 그 사람의 회복을 기다리는 마음이 생겼어요
‘선배는 위로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같이 걸어가는 사람이었구나.’그 시각, 나리는 카페 한쪽에 앉아 있었다.손에는 종이컵 커피가 들려 있었다.따뜻해야 할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창문 밖으론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그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이렇게 평범한 소리가 이렇게 낯설다니.’이별을 위로하던 사람이 이제는 일상의 온기를 배우고 있었다.“혼자예요?”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제하였다.“어떻게 알고 왔어.”“네가 이럴 때 혼자 있을 리가 없잖아.”“그럼 왜 왔는데.”“그냥.”“그냥은 무슨.”“그냥 보고 싶었어.”그 말이 공기 속에 가라앉았다.그녀는 시선을 내렸다.“나, 오늘 상담 못 했어.”“그래야지.”“근데 이상하게 불안해.”“불안해도 괜찮아.”“나, 누군가의 감정이 아니라 내 감정을 다뤄야 하니까.”“그게 네가 회복 중이라는 증거야.”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제하야.”“응.”“사람은 왜 이렇게 늦게 배우는 걸까.”“늦게 배워야 오래 남는 거니까.”“그 말, 예전 같았으면 웃겼을 텐데.”“지금은?”“지금은 좋다.”그녀는 작게 웃었다.그 웃음이 오랜만에 진짜 같았다.해 질 무렵, 수경은 상담을 마치고 문을 닫았다.창밖으로 노을빛이 번졌다.그녀는 책상에 앉아 조용히 일지를 썼다.오늘은 처음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대신’ 듣지 않았다.내가 내 목소리로 말했으니까.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손가락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그 작은 흔적이 이상하게 뿌듯했다.그때 제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나리랑 같이 있어. 오늘 그냥 쉬기로 했어.'그녀는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그래, 선배도 사람인데.’그녀는 조용히 불을 끄고, 창가에 서서 노을을 바라봤다.빛이 천천히 사라지는 대신, 공간 안엔 따뜻한 그림자가 남았다.밤. 나리와 제하는 카페를 나섰다.가로등 불빛이 젖은 길 위로 번졌다.그녀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이제 좀 살겠네.”
창문 틈새로 바람이 스며들었다.하늘은 아직 흐릿했고, 공기 속엔 비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나리는 커피를 내리며 손목을 가볍게 풀었다.오늘은 유난히 손끝이 차가웠다.‘몸이 아니라 마음이 긴장하고 있는 거겠지.’그녀는 스스로를 달래듯 속삭였다.문이 열렸다.“선배, 박채린 씨 도착했어요.”수경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응. 들어오시게 해.”“선배, 혹시 오늘은 제가 먼저 얘기 시작해도 될까요?”“좋아. 네가 오늘 진행 맡아.”“진짜요?”“응. 네 감정으로 부딪혀봐.”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네가 성장하는 방법이야.”박채린은 지난번보다 훨씬 차분한 얼굴이었다.검은 셔츠에 짧은 머리, 눈가에는 여전히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그 속에 조금의 평화가 비쳤다.“안녕하세요.”“어서 오세요.”수경이 먼저 손짓했다.“오늘은 어떤 이야기부터 해볼까요?”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그날… 마지막 통화요.”“남편분과요?”“네. 그날 다퉜어요. 아주 사소한 말이었는데,그게 마지막이 될 줄 몰랐죠.”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그때 제가 말했어요. 당신이 없어도 난 괜찮아.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서 떠나질 않아요.”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나리의 숨이 멈췄다.그 문장. 그 익숙한 말투.그건 그녀 자신이 과거에 온유에게 했던 말과 똑같았다.“나, 너 없이도 괜찮을 것 같아.”그녀의 머릿속에 그날의 장면이 번개처럼 스쳤다.온유의 표정, 그 짧은 정적, 그리고 그 후의 침묵. 그녀는 손끝을 꼭 쥐었다.수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 말을… 후회하세요?”“후회보다, 그때 그 말을 왜 했는지조차 모르겠어요.”“아마, 그 말로 자신을 지키고 싶었던 걸 거예요.”“지키려고 한 게, 결국은 무너뜨렸어요.”박채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사람이 죽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라 매일 다시 시작이더라고요.그 사람이 없다는 걸 매일 새로 확인하는 게.”그 말에 수경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그 감정, 알
아침 공기가 묘하게 무거웠다.전날 내린 비가 그치고, 도로 위엔 물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햇살이 그 물 위에 반사되며 번들거렸다.그 빛이 창문을 타고 센터 안으로 스며들었다.나리는 일찍 출근해 상담실을 정리하고 있었다.책상 위의 서류를 가지런히 쌓고, 의자를 돌려 맞추었다.마지막으로 향초에 불을 붙이자, 은은한 라벤더 향이 공간을 채웠다.그 향 속에서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오늘은 새로운 사람이 온다.’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박채린.”짧은 이름 속에 담긴 긴 사연이 느껴졌다.그녀는 이미 수많은 ‘이별의 이름들’을 들어봤다.그중에는 울음으로 끝난 이름도 있었고, 침묵으로 남은 이름도 있었다.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긴장됐다.그건 아마, 이 일이 ‘일’이 아닌 ‘삶’으로 다시 다가오는 예감 때문이었다.문이 열렸다.“선배, 도착했어요.”수경의 목소리가 밝았다.“좋은 아침.”“오늘 좀 예쁘네요.”“향초 때문일걸.”“향초 냄새 진짜 좋다.”“마음이 조금 안정되지?”“네. 근데 이상하게, 오늘은 좀 떨려요.”“왜?”“오늘 의뢰인… 사연 읽었는데, 저랑 비슷한 부분이 많아요.”“비슷한 부분?”“이별 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느꼈다는 말.그 문장이 꼭 제 얘기 같았어요.”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나리는 그걸 알아챘지만, 괜히 그 마음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그럼 더 잘 해줄 수 있을 거야.”“그럴까요?”“네가 그 감정을 알아봤다는 건, 이미 그 사람 마음에 닿을 준비가 됐다는 뜻이야.”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박채린 씨 맞으시죠?”나리가 조용히 물었다.문이 천천히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그녀는 마른 체형에, 눈가가 자주 깜빡였다.긴 머리를 뒤로 묶었지만, 몇 가닥이 뺨에 걸려 있었다.“안녕하세요.”“어서 오세요.”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무언가를 잃은 사람의 톤이었다.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손가락으로 팔찌를 만지작거렸다.나리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편하게
센터의 전화가 멈추지 않았다.“감정 회복 컨설팅 RE: 관계의 온도입니다.”수경의 목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통화가 끝나면 곧바로 새로운 전화가 걸려왔다.메일함에는 ‘라디오에서 목소리 들었습니다’라는 제목이 줄줄이 쌓였다.“선배, 이거 진짜 대단해요.”수경이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말했다.“라디오 클립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왔어요. 조회 수가 하루 만에 삼십만이 넘었어요.”나리는 조용히 머그잔을 내려놓았다.“그냥, 우연일 거야.”“아니에요. 댓글 좀 봐요.‘그 목소리에 살고 싶다는 용기가 생겼다’,‘그 말 한마디에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이런 글들.”그녀는 잠시 멈췄다.말없이 스크린을 바라봤다.글자들이 하나하나 눈에 박혔다.‘위로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선배, 인터뷰 요청도 계속 들어와요. 언론 쪽에서도 연락 왔어요.”“그건 다 거절해.”“왜요? 좋은 일인데.”“그건… 온유의 마지막 목소리였잖아.”“그건 선배의 목소리이기도 했어요.”그 말에 나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그래도, 아직은 그럴 마음이 안 생겨.”그녀는 창가로 걸어갔다.창문 너머로 봄 햇살이 가늘게 스며들었다.거리엔 사람들이 오가고, 그들 중 몇몇은 웃고 있었고, 몇몇은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모두가 다 자신만의 상처를 가지고 있겠지.’그녀는 생각했다.‘그 상처 위에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 얹히면, 그게 위로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게일까.’오후, 제하가 들어왔다.그는 서류 뭉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오늘 라디오 국에서 연락 왔어.”“또 인터뷰?”“응. 그쪽 프로듀서가 직접 부탁했대.‘그 목소리를 들려준 사람에게 고맙다’고.”“그래도 거절할 거야.”“왜 그렇게 피하려 해.”“위로는 조용할수록 오래 남아.”그녀는 천천히 말했다.“그게 내 방식이야.”제하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빛이 그녀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그녀는 창가에 서 있었고, 그 모습이 유리창에 비쳤다.그 반투명한 실루
창문 너머로 어스름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지만, 병실 안은 한층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기계음은 여전히 규칙을 잃은 채 불규칙하게 울려 퍼졌고, 침대 위의 온유는 힘겹게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눈은 반쯤 감긴 채로 떨리고 있었고, 손끝은 더 이상 온기를 품지 못한 듯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나는 그의 곁에 앉아 손을 꼭 잡았다. 떨림이 멎은 손을 붙잡고 있자니, 마치 이미 이별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속삭였다.“온유야, 듣고 있지? 네가 숨 쉬고 있는 한, 난 여기 있어. 눈을 감아도,
휴대폰을 쥔 손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간호사의 급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환자분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보호자분 빨리 오셔야 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가방을 집어 들고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심장은 비명을 지르듯 요동쳤고, 발걸음은 도로를 내달리면서도 제자리만 맴도는 것처럼 무거웠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복도는 긴박한 공기에 휩싸여 있었다. 의료진들이 바쁘게 오가고, 환자 가족들의 울음소리와 신음이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온유의 병실로 향했다.문이 열
저녁 공기가 유난히 무거웠다. 하루 종일 카페에 앉아 서류를 정리했지만, 글자들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뢰인의 사연을 읽다가도 눈앞에 병실의 온유가 겹쳐지고, 커피 향 사이로 스며드는 수경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책상 위에 놓인 펜을 몇 번이나 굴리다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낯익은 여자가 들어왔다. 지난주 상담을 의뢰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다급한 얼굴로 내 앞에 앉았다.“저, 언니랑 상담했던 거 있잖아요. 그거… 남편이 알게 됐어요.”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낮에는 이별을 돕는 상담으로 하루를 시작했지만, 머릿속은 조금도 집중되지 않았다. 병원 침대 위의 온유, 그리고 점점 깊어지는 수경의 시선이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의뢰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남편은 제가 아직도 예쁘다고 말해요. 근데 그 말이 더 아프더라고요. 저는 이미 그 사람 눈빛에서 식어가는 걸 알아요. 그래서… 먼저 끝내고 싶어요.”의뢰인은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가 했던 말들이 겹쳐졌다. 사랑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