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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5 09:08:26

대표실 안은 건물 외관보다 더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거대한 통창 너머로 서울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지만, 내부는 온통 흰색과 회색,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무채색의 공간이었다. 그 공간의 중심, 거대한 책상 뒤편에 서유진이 앉아 있었다.

사진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미모. 빚어놓은 듯 완벽한 얼굴에 감정이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 그녀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지만, 마치 투명한 유리판을 통과하듯 초점이 없었다. 그녀는 나를 인간으로 인식하는 것 같지 않았다. 분석해야 할 데이터, 혹은 평가해야 할 사물로 여기는 듯했다.

[대상 ‘서유진’은(는) 강력한 정신 방어력과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성의 이끌림(Lv.1)’의 효과가 대상에게 90% 감소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경고처럼 떠올랐다. 역시나, 이 여자에게는 평범한 매력 어필이 통하지 않는다.

그녀는 내게 앉으라는 말도, 목례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디지털 타이머를 눌렀다. 붉은색 숫자가 ‘10:00’에서 ‘09:59’로 바뀌었다.

“시작하지.”

그게 그녀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나는 준비해 온 제안서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곧장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3년 전, 한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장품은 여성들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갑옷이 되길 바란다’고.”

내 첫마디에, 그녀의 눈썹이 찰나의 순간, 1밀리미터쯤 꿈틀거렸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미세한 변화였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철벽에 첫 번째 균열이 생겼다.

“지난 3년간 알테아는 완벽한 기술력으로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갑옷’을 완성하지는 못했습니다. 기술력만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진정한 갑옷은 기술이라는 강철 위에, ‘공감’이라는 온기가 더해져야 완성됩니다.”

나는 숨을 한번 고르고, 핵심을 찔렀다.

“저희 이노 마케팅의 신규 브랜드는 바로 그 ‘공감’을 책임질 수 있습니다. 10대들의 피부 트러블 고민부터, 20대 사회초년생의 불안감, 30대 워킹맘의 고단함까지. 저희는 각 세대의 여성들이 겪는 현실적인 고민을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고, 알테아의 기술력은 그 고민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제품 콜라보가 아닙니다. 대표님의 창업 이념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퍼즐 조각입니다.”

나는 밤새 준비했던 데이터와 시장 분석 자료를 막힘없이 쏟아냈다. 감정에 호소하지 않았다. 김민지 비서의 조언대로, 오직 팩트와 논리, 그리고 비전으로 이야기했다. 내 말이 이어지는 동안 서유진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얼음 같은 눈으로 나를 관찰할 뿐이었다. 그녀가 내 제안에 흥미를 느끼는지, 혹은 지루해하는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타이머의 숫자가 붉은색으로 깜빡이며 마지막 10초를 알렸다.

“…이것이 제가 제안하는, 두 회사가 함께 만들어갈 ‘자존감의 갑옷’ 프로젝트의 청사진입니다.”

내 마지막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삐- 삐- 삐-

타이머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10분이 끝났음을 알렸다.

나는 침묵 속에서 그녀의 판결을 기다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

서유진은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 타이머를 끄고 입을 열었다.

“자네의 10분은 끝났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실패. 머릿속에 두 글자가 떠올랐다. 역시 무리였나. 나는 애써 쓴웃음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로 돌아가 서류 가방을 챙겨 나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제안서.”

그녀의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 제안서, 책상 위에 두고 가.”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내가 아닌, 내 손에 들린 제안서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Yes’가 아니었다. 하지만 ‘No’도 아니었다. 나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얼음 성벽에, 작지만 의미 있는 균열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말없이 책상 위에 제안서를 올려놓고 대표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10분이라는 시간이 마치 1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박 부장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근처 카페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최선을 다했다. 후회는 없었다. 이걸로 안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을까.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로 온 메시지 한 통.

[서유진입니다. 방금 보내준 제안서, 검토했습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너무 빠른 피드백이었다. 거절 통보인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몇 가지 추가로 논의하고 싶은 부분이 있군요. 오늘 저녁 8시, 그랜드 엘리시안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보죠. 혼자 오시길.]

“……!”

나는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알테아 코스메틱의 대표, 얼음 마녀 서유진이 내게 개인적인 만남을 요청한 것이다. 그것도 회사가 아닌,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이건 단순한 추가 미팅이 아니다. 그녀의 숨겨진 의도는 무엇일까. 나를 시험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제안서 내용 외에 다른 무언가에 흥미를 느낀 것인가.

확실한 것은 단 하나.

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판의 중심에, 바로 내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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