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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은 황후 자리, 뒤늦게 미쳐버린 황제

내려놓은 황후 자리, 뒤늦게 미쳐버린 황제

By:  소목풍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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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을 맡아 다스린 지 3년째 되던 해, 황제의 소꿉친구이자 아버지를 따라 변방으로 유배를 떠났던 류여진이 돌아왔다. 그녀는 문무백관이 보는 앞에서 금란전(金鑾殿)에 들이닥쳐 풀로 만든 반지 하나를 소인혁에게 건넸다. “이건 제가 초원에서 엮은 것입니다. 폐하, 그때 하셨던 약조를 아직 기억하십니까?” 용상에 꼿꼿이 앉아 있던 소인혁은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고, 눈에는 그녀를 향한 애틋한 미련이 가득했다. 류여진은 오만하게 내 앞으로 걸어와 내 봉황 무늬 비녀를 뽑아 자신의 머리에 꽂았다. “이 황후 자리는 원래 제 것이었습니다. 이제 주인이 돌아왔으니, 언니는 떠나셔도 됩니다.” 3년 전 소인혁은 류씨 가문을 위해 선처를 구하고자 태묘 앞에서 사흘 밤낮을 무릎 꿇고 빌었다. 나 역시 궁금했다. 지금의 냉정한 황제 소인혁이 과연 류여진의 요구대로 나를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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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은 채, 아무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류여진은 새하얀 옷을 입고, 손에는 삐뚤빼뚤하게 엮은 풀반지 하나를 들고 있었다.

“오라버니, 어릴 적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제가 이걸 약조의 증표로 가지고 있으면, 제가 무엇을 원하든 다 들어주겠다고요.”

그녀는 애교 섞인 어조로 말했다.

“이제 제가 돌아왔으니 약조를 지켜주십시오.”

나는 비녀가 뽑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소인혁을 바라보았다. 평소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던 소인혁은 지금 용상 손잡이를 꽉 쥔 손등에 핏대가 불거져 있었다.

그는 떨고 있었다.

소인혁은 한 걸음씩 아래로 내려와, 그 볼품없는 풀반지를 소중하게 받아 들고 왼손 엄지에 끼웠다.

“기억하고 있다.”

그의 낮고 무거운 한마디에 내 마음은 싸늘하게 식었다.

류여진은 울음을 그치고 활짝 웃더니, 의기양양하게 소인혁의 어깨너머로 나를 바라보았고, 눈빛에는 도발과 경멸이 가득했다.

그 눈빛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보십시오, 언니께서 3년 동안 지킨들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지경이었고, 그 통증 덕분에 나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3년 전, 소인혁이 황위를 두고 가장 치열하게 다투던 그날 밤,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심씨 가문의 군대를 이끌고 목숨을 걸고 길을 뚫어 그를 궁으로 호위했다.

그날 밤 반란군이 쏜 독화살이 그의 등을 향해 날아왔고, 내가 몸을 던져 대신 화살을 맞았다.

독이 골수까지 스며들어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하는 치료를 받는 고통에 사흘 밤낮을 의식 없이 누워 있었고, 지금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어깨가 쑤셔 붓을 쥔 손이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 류여진은 아버지가 군량과 군비를 횡령해 변방으로 유배되는 마차 안에 숨어 있었다.

소인혁이 비밀리에 호위무사를 파견해 류여진을 지키게 하고, 그녀가 다칠까 봐 전전긍긍한 탓에 그녀는 험한 꼴 한번 겪지 않았다고 들었다.

“폐하.”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류 낭자는 법도에 따라 대리시(大理寺)에서 죄인의 가족인지 신분을 확인한 뒤 따로 처소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만하거라!”

소인혁이 홱 돌아보았고, 다정했던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류여진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의 품에 기대며 말했다.

“오라버니, 괜찮습니다. 변방의 혹독한 추위도 견뎌냈는데, 고작 대리시가 뭐가 무섭겠습니까?”

소인혁은 안쓰러운 듯 그녀의 두 손을 끌어당겨 살피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내게 명을 내렸다.

“황후, 후궁은 나랏일에 관여하지 말거라.”

“봉란궁(鳳鸞宮)은 볕이 잘 들고 난방도 가장 잘 되니, 봉란궁을 비워 여진이에게 내어주도록 하거라.”

대전 안에서 순간 여기저기서 놀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봉란궁은 황후가 머무는 처소인데 이름도 지위도 없는 죄인의 딸에게 내주라니?’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봉란궁은 선대부터 정해진 법도에 따라 황후가 아니면 머물 수 없는 곳입니다.”

“폐하께서 이러시면 황실의 위엄과 신첩의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법도라고?”

소인혁이 비웃으며 오만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짐이 곧 법도다! 이 나라는 짐이 직접 세운 것이니, 네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다.”

류여진이 때마침 소인혁의 품에 기대며 가냘프게 기침을 했다.

“오라버니, 저 때문에 언니와 다투지 마십시오.”

“저는 추위 따위 두렵지 않으니 장작 창고라도 내어주시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그저 오라버니 곁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소인혁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가슴 아파하며, 나를 혐오감이 가득한 눈길로 쏘아보았다.

“여진이는 변방에서 3년 동안 모래바람을 맞으며 고생했다. 이는 짐이 빚진 것이다.”

“한마디라도 더 거역한다면, 황명을 어긴 죄로 다스릴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지난 3년 동안 흘린 피와 눈물이 그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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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은 채, 아무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류여진은 새하얀 옷을 입고, 손에는 삐뚤빼뚤하게 엮은 풀반지 하나를 들고 있었다.“오라버니, 어릴 적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제가 이걸 약조의 증표로 가지고 있으면, 제가 무엇을 원하든 다 들어주겠다고요.”그녀는 애교 섞인 어조로 말했다.“이제 제가 돌아왔으니 약조를 지켜주십시오.”나는 비녀가 뽑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소인혁을 바라보았다. 평소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던 소인혁은 지금 용상 손잡이를 꽉 쥔 손등에 핏대가 불거져 있었다.그는 떨고 있었다.소인혁은 한 걸음씩 아래로 내려와, 그 볼품없는 풀반지를 소중하게 받아 들고 왼손 엄지에 끼웠다.“기억하고 있다.”그의 낮고 무거운 한마디에 내 마음은 싸늘하게 식었다.류여진은 울음을 그치고 활짝 웃더니, 의기양양하게 소인혁의 어깨너머로 나를 바라보았고, 눈빛에는 도발과 경멸이 가득했다.그 눈빛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보십시오, 언니께서 3년 동안 지킨들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지경이었고, 그 통증 덕분에 나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3년 전, 소인혁이 황위를 두고 가장 치열하게 다투던 그날 밤,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심씨 가문의 군대를 이끌고 목숨을 걸고 길을 뚫어 그를 궁으로 호위했다.그날 밤 반란군이 쏜 독화살이 그의 등을 향해 날아왔고, 내가 몸을 던져 대신 화살을 맞았다.독이 골수까지 스며들어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하는 치료를 받는 고통에 사흘 밤낮을 의식 없이 누워 있었고, 지금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어깨가 쑤셔 붓을 쥔 손이 떨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때 류여진은 아버지가 군량과 군비를 횡령해 변방으로 유배되는 마차 안에 숨어 있었다.소인혁이 비밀리에 호위무사를 파견해 류여진을 지키게 하고, 그녀가 다칠까 봐 전전긍긍한 탓에 그녀는 험한 꼴 한번 겪지 않았다고 들었다.“폐하.”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류 낭자는 법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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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나는 인적이 드물고 음침한 청우헌(聽雨軒)으로 처소를 옮겼다.이곳은 냉궁 바로 옆이라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낡을 대로 낡았고, 창호지는 절반이나 찢어져 매서운 바람이 쌩쌩 불어 들어왔다.측근 시녀 설아가 눈물을 훔치며 짐을 정리했다.“마마, 폐하께서 어찌 마마께 이러실 수 있습니까?”“마마께서는 심 대장군님의 따님이시자, 폐하와 함께 나라를 세운 조강지처이시잖습니까!”나는 딱딱한 나무 침상에 앉아 창밖의 잿빛 하늘을 바라보았고,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설아야, 그만하거라.”그날 밤, 소인혁은 나를 달래러 오지 않았고, 심지어 전갈 한마디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는 봉란궁에 머물렀다.듣자 하니 류여진이 봉란궁에서 쓰던 배나무 향이 너무 진하다며, 냄새를 맡으니 어지럽다고 했다고 한다.그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향이자, 소인혁이 직접 나를 위해 조합해 준 향이기도 했다. 그는 이 향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 내가 옛 상처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게 해 줄 거라고 말했다.하지만 이제 소인혁은 사람을 시켜 그날 밤 내내 내무부 창고에 있던 귀한 향료를 모조리 내다 버리고, 오직 류여진이 좋아하는 꽃 향만 피우게 했다.더욱 황당한 것은 류여진이 한밤중에 별을 보고 싶다며 어리광을 부리면서 지붕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그러자 소인혁은 정말로 사람을 시켜 봉란궁 지붕 한쪽을 뜯어내 버렸다.그곳은 대대로 황후가 머물던 곳으로, 벽돌 하나, 기와 한 장에도 대주(大周)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그는 그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직 류여진의 웃음 한 번을 얻기 위해서였다.다음 날 아침, 후궁들이 내게 문안을 올리러 청우헌으로 찾아왔다.봉란궁에서 쫓겨났다 한들 나는 여전히 황후였고, 이는 대대로 내려온 법도였다.그러나 류여진은 해가 중천에 뜰 때가 되어서야 뒤늦게 나타났다.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수군거리던 후궁들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류여진은 붉은색 궁중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감은 오직 황후만이 사용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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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대전 안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류여진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굳어졌다.내가 이런 상황에서도 감히 황후로서의 위엄을 내세울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류여진은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히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폐하께서 이런 궁중 예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초원에 있을 때는…”“이곳은 대주의 황궁이지 초원이 아니다.”나는 찻잔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여봐라! 류 낭자에게 예법을 가르쳐 주거라!”두 명의 늙은 몸종이 즉시 다가와 류여진의 어깨를 짓누르려 했다.그때 문밖에서 우렁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멈추거라!”소인혁이 눈부신 황금빛 용포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는데, 온몸에서 서슬 퍼런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그는 늙은 몸종들을 거칠게 밀쳐 내고 휘청거리는 류여진을 부축하더니, 실망과 혐오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심소희, 어쩌다 이리도 매정해진 것이냐? 여진이는 그저 순진하고 꾸밈이 없어서 궁중의 복잡한 속사정을 모를 뿐인데, 기어코 여진이를 죽여야만 속이 시원하겠느냐?”류여진을 감싸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은 차갑게 식어내렸다.그가 예전에 부패한 관리의 일가를 몰살하며 관료들을 바로잡으려 했을 때, 밤새 잠도 이루지 못한 채 그의 곁을 지키며 그를 대신해 온갖 욕을 먹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그때는 나더러 큰 뜻을 안다며 치켜세우더니, 이제는 궁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 매정한 짓이 되었단 말인가?소인혁은 류여진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그 자리에서 명을 내렸다.나를 한 달 동안 청우헌에 근신시키고, 황후의 인장인 봉인마저 거두어 류여진에게 임시로 맡겨 관리하게 했다.아무런 지위도 없는 여인이 황후의 인장을 맡다니,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을 터였다.조정의 어사들이 올린 탄핵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왔지만, 소인혁은 모두 무시했다.그는 조정에서 심씨 가문이 거느린 군대의 공이 너무 커 황제를 위협할 정도라고 질책하며, 어사들이 내 아버지의 사주를 받아 황제를 핍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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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뜨거운 죽이 소인혁의 용포 자락과 신발 위로 쏟아졌다.“무례하구나!”소인혁은 뜨거운 죽에 데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류여진은 순간 놀라 얼어붙었지만, 손목이 저릿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정신을 차리더니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명을 질렀다.“언니! 어찌 이리도 모질 수 있으십니까? 저는 그저 죽을 올리려 했을 뿐인데, 왜 저를 밀쳐 폐하께 부딪히게 하신 겁니까? 설마 폐하를 시해하려 하신 겁니까?”‘적반하장도 유분수지.’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소인혁이 고개를 들어 나를 쏘아보았고, 그의 눈에 서린 분노는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듯했다.“심소희!”소인혁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손을 휘둘러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짝!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가며 틀어 올린 머리가 흐트러졌고,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돌았다.귀가 윙윙 울리는 가운데, 나는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 쥔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인혁을 바라보았다.3년 전, 그는 내 얼굴을 감싸며 이렇게 말했었다.“소희야, 앞으로는 절대 네가 억울한 일을 겪지 않게 하마.”그러나 지금, 나를 이토록 억울하게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다.류여진은 소인혁의 뒤에 숨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승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거짓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오라버니, 언니를 탓하지 마십시오. 제가 중심을 잃은 탓입니다… 언니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겁니다…”“소희를 감싸지 말거라!”소인혁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정말 악독한 계집이구나! 짐이 너를 너무 오냐오냐해서 감히 짐까지 해치려 들 만큼 안하무인이 된 것이냐!”대전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모두 바닥에 엎드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오직 나만 꼿꼿이 서 있었다.뺨은 화끈거리도록 아팠지만, 마음은 얼어붙은 듯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폐하께서 신첩이 밀쳤다 단정하신다면, 그런 것으로 하겠습니다.”나는 뺨을 감싸던 손을 내리고 등을 곧게 폈다.소인혁은 내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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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소인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더니,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뭐라 하였느냐?”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심소희, 헛소리하지 말거라! 짐을 협박하는 것이냐?”“협박이 아니라 통보입니다.”나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선황께서 말씀하셨지요. 심씨 가문의 여식 심소희는 기개가 곧아 아버지를 닮았다고.”“훗날 황실에 시집와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든 스스로 궁을 나가도 좋으며, 혼인도 자유롭게 하되 황실 자손은 이를 막아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너…!”소인혁은 떨리는 손으로 나를 가리켰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나는 고개를 돌려 류여진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련한 척할 겨를도 없이 바닥에 놓인 봉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그 눈빛에는 탐욕이 가득했다.“류여진, 이 황후 자리가 그리 대단한 것 같으냐?”내가 차갑게 웃었다.“이 깊은 궁궐은 자유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마저 가두는 곳이니, 원한다면 가져가거라.”“계략과 무정함으로 얼룩진 저 남자 또한 네게 넘겨주마.”“심소희! 무례하다!”소인혁이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분노에 차 소리쳤다.“감히 짐을 물건 취급하며 남에게 넘기겠다는 것이냐? 짐을 떠나고 이 황궁을 나가면 네가 여전히 고귀한 황후일 것 같으냐? 너는 버림받은 여인일 뿐이다!”“버림받은 여인이면 뭐 어떻습니까?”나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굴러떨어진 진주를 주워 손끝으로 으깨 가루로 만들었다.“저 심소희는 전장에 나서면 승패를 가르고, 조정에 서면 백성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폐하가 없어도 저는 여전히 심소희입니다. 허나 폐하께서는 심씨 가문과 저를 떠나서도 지금의 황제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으실 것 같으십니까?”말을 마친 나는 뒤돌아 대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심소희! 멈추거라! 네가 감히 이 대전을 한 걸음이라도 벗어난다면, 짐이 네 구족을 멸할 것이다!”소인혁이 뒤에서 고함을 질렀지만, 그 목소리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나는 발걸음을 멈추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폐하, 잊으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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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궁에서 웃음거리가 생겼다.류여진은 내무부의 장부를 읽을 줄 몰랐고, 빼곡하게 적힌 숫자만 보면 머리가 지끈거렸기에, 내시의 말에 속아 아무 생각 없이 '윤허'라고 써넣었다.그런데 그건 겨울옷을 마련하는 데 쓰이는 돈이었다. 내무부 총관 내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은전의 절반 이상을 빼돌린 뒤, 원래 쓰기로 한 비단 솜을 질이 나쁜 버드나무 솜털과 갈대꽃으로 바꿔버렸다.때마침 늦가을이라 날씨가 급격히 쌀쌀해졌다.태후궁의 늙은 몸종들이 새로 지급된 겨울옷을 입고도 추위에 떨었고, 조사해 보니 옷 안에는 온통 질이 나쁜 솜이 들어 있었다.태후는 화가 치밀어 두통이 도졌고, 그 겨울옷을 소인혁 앞에 내던진 뒤,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매섭게 꾸짖었다.“여자에게 홀려 정신을 못 차리더니, 집안까지 엉망으로 만드는구나!”소인혁은 류여진을 감싸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무부가 황제를 속이고 일을 꾸몄다고 둘러대며, 내시 두 명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했다.그러나 류여진의 평판은 궁 안에서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궁녀와 내시들은 그녀의 앞에서는 모두 마마라 불렀으나, 뒤에서는 내가 궁을 다스리던 시절을 그리워했다.내가 비록 엄격하긴 했지만 상 줄 이는 상 주고 벌할 이는 벌했으며, 아랫사람의 몫을 가로채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소인혁을 더욱 골치 아프게 한 것은 조정의 일이었다.심씨 가문이 거느린 군대의 위압감이 사라지자 변방에서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북적(北狄)에서 보낸 사람은 조정에서 대놓고 도발하며 해마다 바쳐야 할 돈과 물건을 더 내놓고 땅까지 내놓으라 요구했고, 응하지 않으면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쳐들어가겠다며 노골적으로 엄포를 놓았다.소인혁은 군사를 보내 진압하려 했지만, 조정을 둘러보니 평소 나를 탄핵하는 일밖에 모르던 문관들은 하나같이 목을 움츠리고 있었고, 장수들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누구 하나 군권을 맡겠다고 나서지 않았다.심씨 가문의 군대는 오직 심씨 가문의 병력을 움직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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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서준우는 얼굴에 묻은 술을 닦아내더니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창을 다루는 기술이 참으로 훌륭하구나! 네가 바로 소문으로 듣던 그 여장부로구나!"그는 무력을 숭상하는 오랑캐라, 가녀리고 연약한 류여진 같은 나약한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보여준 이 한 수의 창술만큼은 그를 진심으로 감탄하게 했다.“대주 황제, 이런 여인을 두고 어찌 숨기고 있었소? 앞서 맺은 조약은 무효로 하겠소. 본왕은 대주와 다시 우호를 맺고 서로 침범하지 않기를 바라오. 다만…”서준우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이 심 낭자가 흔쾌히 응하여 본왕과 술 한잔 같이 해준다면 말이오."그렇게 한바탕의 외교 위기가 내 창 한 자루로 해결되었다.연회가 끝난 뒤, 소인혁은 나를 배웅하겠다는 핑계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어화원의 가을 국화가 한창 아름답게 피어 있었지만, 소인혁의 눈에 서린 피로까지 감추지는 못했다.“소희야.”그는 쉰 목소리로 말하며 내 손을 잡으려 했다.“네 마음속에 아직 짐과 대주가 남아있음을 안다. 오늘 와주어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으니, 짐은 참으로 기쁘구나."나는 몸을 옆으로 틀어 그의 손길을 피하며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폐하께서 오해하셨습니다.”나는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오늘 온 것은 폐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심씨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이고, 대주의 백성들이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모욕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이 천하는 소씨 가문의 것이지만, 백성들을 지키는 것은 우리 심씨 가문의 몫입니다.”소인혁의 손은 허공에서 굳었고, 얼굴에는 당혹감과 분노가 스쳤다.“그만 소란 피우고 짐과 함께 궁으로 돌아가자꾸나. 여진이는… 확실히 철이 없어 이런 큰 자리는 감당하지 못하는구나."“여진에게는 다른 처소를 내어줄 것이다. 봉란궁은 여전히 네 것이고, 봉인도 당장 사람을 시켜 돌려주겠다.”나는 피식 웃었고, 눈빛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폐하께서는 제 존엄과 심씨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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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류여진은 총애를 잃을까 조급한 나머지, 점술가가 건넨 약을 몰래 먹으며 기어이 아들을 낳으려 애썼다.하지만 약효가 너무 독해 태아가 불안정해졌고, 아이를 잃었을 뿐 아니라 몸까지 망가져 태의는 류여진이 다시는 아이를 가지지 못할 것이라 진단했다.소인혁은 이로 인해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쳤고, 나랏일까지 겹치자 조회 중에도 자주 딴생각을 했으며 성격도 점점 더 거칠어졌다.류여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봉란궁을 대대적으로 새로 단장하고자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던 중, 소인혁은 한 가지 비밀을 발견했다.그는 낡은 비단 상자 안에서 옥패 반쪽을 발견했다.그것은 내가 예전에 혼수와 함께 궁에 들여온 것으로, 상자 밑바닥에 넣어두고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것이었다.그 옥패를 집어 든 소인혁은 손을 떨기 시작했다.옥패의 재질과 무늬가 그가 늘 몸에 지니며 간직해 온 나머지 반쪽과 똑같았기 때문이다!과거 소인혁은 유배길에서 고열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맸는데, 한 어린 소녀가 자신의 피를 약에 섞어 만든 약으로 그를 살려냈다. 그는 정신을 잃기 직전, 자신이 지니고 있던 옥패의 반쪽을 그 소녀에게 건네며 훗날 서로를 알아볼 증표로 삼았다.훗날 류여진이 그 옥패의 반쪽을 들고 찾아와, 자신이 그를 구한 사람이라 했었다.그런데 지금 두 옥패를 맞춰보니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딱 들어맞았다.소인혁은 기억을 더듬어 옥패의 숨겨진 장치를 살며시 눌렀다.속이 빈 옥패 안쪽에서 작은 글자가 드러났다. 바로 ‘심’ 자였다.그것은 심씨 가문의 문양이었다!"어떻게… 어떻게 이게 심소희일 수 있단 말인가?"소인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그해 나는 아버지를 따라 변방에 계신 친척을 만나러 갔다가 유배 행렬과 마주쳤다. 그곳에서 병이 위중한 소년을 보고 몰래 내 피를 약으로 써서 그를 구했다.이후 실수로 옥패를 잃어버렸는데, 같은 행렬에 있던 류여진이 그것을 주웠던 것이다.류여진은 그 은혜를 가로채 그를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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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육도현이 갓 구운 양다리를 들고 들어왔다.그는 아버지가 내게 붙여준 부장군이자, 전장에서 내가 가장 믿는 전우였다.나는 양다리를 받아 크게 베어 물었고, 입안 가득 기름이 배어 나와 체면이고 뭐고 없는 모습이었다.“그저 쓰레기일 뿐이다. 태워버리니 속이 다 시원하구나.”나는 화로를 가리키며 고개를 들어 육도현을 바라보았다.“오늘 밤 승리를 축하하는 술자리는 준비되었느냐? 이번에 북적 선봉대를 크게 무찔렀으니 다들 술 한잔 하려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육도현은 내 입가에 묻은 기름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자연스럽게 내게 건넸다.“준비는 끝났습니다만, 장군님은 부상이 있으시니 군의관의 말대로 석 잔 이상은 안 됩니다.”“석 잔? 간에 기별도 안 간다!”나는 눈을 부릅떴다.“그럼 두 잔만 드시지요.”육도현이 정색하며 잔 수를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알겠다. 석 잔만 마시마!”나는 마지못해 타협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따스한 기운이 피어올랐다.이것이야말로 살아 숨 쉬는 삶이었다.누군가는 내 안위를 걱정해 주고, 누군가는 내 상처와 아픔을 마음에 두었다. 궁에 있을 때처럼 숨 쉬는 것조차 조심하며 조금이라도 잘못할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었다.“도현아.”내가 문득 입을 열었다.“만약 어느 날 누군가 천하의 부귀영화를 모두 주는 대신 네 진심을 달라고 한다면, 바꾸겠느냐?”육도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진심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바꾼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심이 아니니까요.”나를 바라보는 그의 반짝이는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연모의 마음이 가득했다.“저는 오직 장군님을 따를 뿐이며, 전장에서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크게 웃으며 손에 든 술병을 들어 올렸다.“옳은 말이다! 오늘 밤은 취하도록 마셔보자꾸나!”이것이야말로 심소희에게 어울리는 삶이었다.반년 뒤, 북적이 조약을 깨고 대대적으로 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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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성벽 위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내가 장창을 거세게 휘두를 때 스치는 곳마다 적들이 나가떨어지고 말들이 나뒹굴었다.육도현은 내 곁을 지켰고, 우리는 완벽한 호흡으로 적군의 포위망을 힘으로 뚫어 길을 만들어냈다.서준우는 바람에 펄럭이는 ‘심’자 깃발을 보고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또 그 계집이냐! 퇴각하라! 어서 퇴각해라!”하지만 그가 물러나기에는 이미 늦었다.나는 이미 그의 위치를 포착했고, 수많은 적군 사이를 뚫고 서준우의 목을 베기 위해 말을 타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창을 휘두르자 서준우의 투구가 날아갔고, 그는 비틀거리며 말에서 떨어져 육도현에게 생포되었다.지휘관을 잃은 북적군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이 전투에서 심씨 가문의 군대는 3천 명으로 5만 대군을 상대해 대승을 거두었다.전장의 연기가 걷히고, 핏빛 노을이 하늘을 물들였다.소인혁이 비틀거리며 성문 밖으로 뛰어나왔다.머리는 헝클어지고 수염은 덥수룩하여 영락없는 거지 꼴이었으며, 황제의 위엄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러나 나를 발견한 순간, 어둡던 그의 눈에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소희야! 소희야!”그는 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역시 올 줄 알았다! 역시 네 마음속엔 아직 짐이 있었던 것이지! 짐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더냐?"그는 피투성이가 된 손을 뻗어 내 말고삐를 잡고 나를 끌어안으려 했다.“이랴!”나는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흙먼지를 일으켰고, 소인혁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췄다.이어 나는 장창을 옆으로 눕혀 그의 목울대에 겨눴다.“폐하, 자중하십시오.”차갑고 냉정한 목소리에는 한 치의 온기도 없었다.소인혁은 얼어붙은 채 믿기지 않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소희야, 너는 짐의 부인이거늘 어찌 짐에게 창을 겨눌 수 있단 말이냐?”"폐하, 잊으셨습니까."나는 말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우린 이미 화리했습니다. 저는 대주의 보국대장군으로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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