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후궁을 맡아 다스린 지 3년째 되던 해, 황제의 소꿉친구이자 아버지를 따라 변방으로 유배를 떠났던 류여진이 돌아왔다. 그녀는 문무백관이 보는 앞에서 금란전(金鑾殿)에 들이닥쳐 풀로 만든 반지 하나를 소인혁에게 건넸다. “이건 제가 초원에서 엮은 것입니다. 폐하, 그때 하셨던 약조를 아직 기억하십니까?” 용상에 꼿꼿이 앉아 있던 소인혁은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고, 눈에는 그녀를 향한 애틋한 미련이 가득했다. 류여진은 오만하게 내 앞으로 걸어와 내 봉황 무늬 비녀를 뽑아 자신의 머리에 꽂았다. “이 황후 자리는 원래 제 것이었습니다. 이제 주인이 돌아왔으니, 언니는 떠나셔도 됩니다.” 3년 전 소인혁은 류씨 가문을 위해 선처를 구하고자 태묘 앞에서 사흘 밤낮을 무릎 꿇고 빌었다. 나 역시 궁금했다. 지금의 냉정한 황제 소인혁이 과연 류여진의 요구대로 나를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할 것인지.
View More그 전투 이후, 나는 군대를 따라 경성으로 가 포상을 받지 않았다.전투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가는 길에 호부를 아버지께 넘기고, 직접 상소를 올려 가장 외진 서북쪽 변방을 지키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평생 경성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소인혁은 경성으로 돌아온 뒤, 가장 먼저 나를 다시 황후로 세우겠다는 교지를 내렸고, 심지어 직접 서북까지 와서 나를 데려가려 했다.그러나 신하들이 필사적으로 그를 막아섰다.내가 그에게 남긴 마지막 서신에 이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폐하께서 서북에 발을 들이신다면 저는 갑옷을 벗고 자취를 감출 것이니, 그때는 어디서도 다시는 뵙지 못할 것입니다."소인혁은 겁을 먹었다.나에 대한 소식조차 더는 듣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 그 조서를 손에 쥔 채 봉란궁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고 날이 밝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듣자 하니 그는 30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온 힘을 쏟았고, 북적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하나하나 되찾았다고 한다.그러나 그는 평생 다시 황후를 세우지 않았고, 후궁은 있으나 마나 한 곳이 되었다.그는 종종 반쪽짜리 옥패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고, 태의는 마음의 병이라며 약으로는 고칠 수 없다고 했다.추석이 올 때마다 그는 봉란궁에 내가 좋아하던 돼지고기 조림 한 그릇을 차려두고 달을 보며 홀로 술을 마셨는데, 그 뒷모습이 한없이 쓸쓸했다고 한다.그리고 나는…서북의 모래바람은 거세지만 이곳의 술은 가장 독했고, 이곳의 사람들은 가장 진솔했다.끝없이 펼쳐진 사막에 외로운 연기가 피어오르고, 긴 강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나는 붉은 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초원을 마음껏 내달렸다.뒤에서는 육도현이 말을 타고 따라오고 있었고, 손에는 술 두 병을 들고 있었다.“장군님! 길이 험하니 천천히 가십시오!”나는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호탕하게 웃었다.“육도현, 나를 쫓아다닌 지 3년인데, 지치지도 않느냐?"얼굴이 붉어진 육도현
성벽 위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내가 장창을 거세게 휘두를 때 스치는 곳마다 적들이 나가떨어지고 말들이 나뒹굴었다.육도현은 내 곁을 지켰고, 우리는 완벽한 호흡으로 적군의 포위망을 힘으로 뚫어 길을 만들어냈다.서준우는 바람에 펄럭이는 ‘심’자 깃발을 보고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또 그 계집이냐! 퇴각하라! 어서 퇴각해라!”하지만 그가 물러나기에는 이미 늦었다.나는 이미 그의 위치를 포착했고, 수많은 적군 사이를 뚫고 서준우의 목을 베기 위해 말을 타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창을 휘두르자 서준우의 투구가 날아갔고, 그는 비틀거리며 말에서 떨어져 육도현에게 생포되었다.지휘관을 잃은 북적군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이 전투에서 심씨 가문의 군대는 3천 명으로 5만 대군을 상대해 대승을 거두었다.전장의 연기가 걷히고, 핏빛 노을이 하늘을 물들였다.소인혁이 비틀거리며 성문 밖으로 뛰어나왔다.머리는 헝클어지고 수염은 덥수룩하여 영락없는 거지 꼴이었으며, 황제의 위엄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러나 나를 발견한 순간, 어둡던 그의 눈에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소희야! 소희야!”그는 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역시 올 줄 알았다! 역시 네 마음속엔 아직 짐이 있었던 것이지! 짐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더냐?"그는 피투성이가 된 손을 뻗어 내 말고삐를 잡고 나를 끌어안으려 했다.“이랴!”나는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흙먼지를 일으켰고, 소인혁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췄다.이어 나는 장창을 옆으로 눕혀 그의 목울대에 겨눴다.“폐하, 자중하십시오.”차갑고 냉정한 목소리에는 한 치의 온기도 없었다.소인혁은 얼어붙은 채 믿기지 않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소희야, 너는 짐의 부인이거늘 어찌 짐에게 창을 겨눌 수 있단 말이냐?”"폐하, 잊으셨습니까."나는 말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우린 이미 화리했습니다. 저는 대주의 보국대장군으로서 오
육도현이 갓 구운 양다리를 들고 들어왔다.그는 아버지가 내게 붙여준 부장군이자, 전장에서 내가 가장 믿는 전우였다.나는 양다리를 받아 크게 베어 물었고, 입안 가득 기름이 배어 나와 체면이고 뭐고 없는 모습이었다.“그저 쓰레기일 뿐이다. 태워버리니 속이 다 시원하구나.”나는 화로를 가리키며 고개를 들어 육도현을 바라보았다.“오늘 밤 승리를 축하하는 술자리는 준비되었느냐? 이번에 북적 선봉대를 크게 무찔렀으니 다들 술 한잔 하려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육도현은 내 입가에 묻은 기름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자연스럽게 내게 건넸다.“준비는 끝났습니다만, 장군님은 부상이 있으시니 군의관의 말대로 석 잔 이상은 안 됩니다.”“석 잔? 간에 기별도 안 간다!”나는 눈을 부릅떴다.“그럼 두 잔만 드시지요.”육도현이 정색하며 잔 수를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알겠다. 석 잔만 마시마!”나는 마지못해 타협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따스한 기운이 피어올랐다.이것이야말로 살아 숨 쉬는 삶이었다.누군가는 내 안위를 걱정해 주고, 누군가는 내 상처와 아픔을 마음에 두었다. 궁에 있을 때처럼 숨 쉬는 것조차 조심하며 조금이라도 잘못할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었다.“도현아.”내가 문득 입을 열었다.“만약 어느 날 누군가 천하의 부귀영화를 모두 주는 대신 네 진심을 달라고 한다면, 바꾸겠느냐?”육도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진심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바꾼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심이 아니니까요.”나를 바라보는 그의 반짝이는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연모의 마음이 가득했다.“저는 오직 장군님을 따를 뿐이며, 전장에서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크게 웃으며 손에 든 술병을 들어 올렸다.“옳은 말이다! 오늘 밤은 취하도록 마셔보자꾸나!”이것이야말로 심소희에게 어울리는 삶이었다.반년 뒤, 북적이 조약을 깨고 대대적으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류여진은 총애를 잃을까 조급한 나머지, 점술가가 건넨 약을 몰래 먹으며 기어이 아들을 낳으려 애썼다.하지만 약효가 너무 독해 태아가 불안정해졌고, 아이를 잃었을 뿐 아니라 몸까지 망가져 태의는 류여진이 다시는 아이를 가지지 못할 것이라 진단했다.소인혁은 이로 인해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쳤고, 나랏일까지 겹치자 조회 중에도 자주 딴생각을 했으며 성격도 점점 더 거칠어졌다.류여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봉란궁을 대대적으로 새로 단장하고자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던 중, 소인혁은 한 가지 비밀을 발견했다.그는 낡은 비단 상자 안에서 옥패 반쪽을 발견했다.그것은 내가 예전에 혼수와 함께 궁에 들여온 것으로, 상자 밑바닥에 넣어두고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것이었다.그 옥패를 집어 든 소인혁은 손을 떨기 시작했다.옥패의 재질과 무늬가 그가 늘 몸에 지니며 간직해 온 나머지 반쪽과 똑같았기 때문이다!과거 소인혁은 유배길에서 고열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맸는데, 한 어린 소녀가 자신의 피를 약에 섞어 만든 약으로 그를 살려냈다. 그는 정신을 잃기 직전, 자신이 지니고 있던 옥패의 반쪽을 그 소녀에게 건네며 훗날 서로를 알아볼 증표로 삼았다.훗날 류여진이 그 옥패의 반쪽을 들고 찾아와, 자신이 그를 구한 사람이라 했었다.그런데 지금 두 옥패를 맞춰보니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딱 들어맞았다.소인혁은 기억을 더듬어 옥패의 숨겨진 장치를 살며시 눌렀다.속이 빈 옥패 안쪽에서 작은 글자가 드러났다. 바로 ‘심’ 자였다.그것은 심씨 가문의 문양이었다!"어떻게… 어떻게 이게 심소희일 수 있단 말인가?"소인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그해 나는 아버지를 따라 변방에 계신 친척을 만나러 갔다가 유배 행렬과 마주쳤다. 그곳에서 병이 위중한 소년을 보고 몰래 내 피를 약으로 써서 그를 구했다.이후 실수로 옥패를 잃어버렸는데, 같은 행렬에 있던 류여진이 그것을 주웠던 것이다.류여진은 그 은혜를 가로채 그를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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