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강현 씨.”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랑 결혼한 거, 후회해요?” ㅡ “나중에 연락할게.” 전화가 끊긴 뒤에도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지 못했다. *** 나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출력물을 가지런히 맞췄다. 두꺼운 서류철을 가방에 넣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됐다. 투자 제안서를 다시 펼친 건 새벽 두 시가 넘어서였다. 우림리테일의 검토 의견은 예상했던 것보다 까다로웠다. 시장성 검증이 부족하고, 초기 투자 규모에 비해 회수 가능성을 확신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사위라는 이유만으로 회사의 돈을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고, 나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꼼꼼하게 들여다봤다. 결혼 전, 나는 우림리테일 신사업전략팀에서 일했다. 대표이사의 딸이라는 이유로 평가받고 싶지 않았다. 강현을 만난 뒤에도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어려움을 겪을 때면 내가 가진 능력을 가장 먼저 그에게 내주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사업계획서의 허점을 짚어 주는 정도였다. 그러다 투자자를 소개했고, 우림리테일과 협업할 기회를 마련했다. 강현은 내 의견을 귀담아들었고, 내가 수정한 자료를 보고 감탄하기도 했다. 그때의 강현은 내게 자주 말했다. ㅡ ‘우연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더 잘하고 싶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새벽까지 수정한 제안서를 출력하고, 예상 질문과 답변을 별도 파일로 정리했다. 아버지가 우려할 만한 위험 요소를 숨기지 않되, 그 위험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근거를 붙였다. 시계를 보니 아침이 가까워져 있었다. 이번에는 강현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를 무작정 설득하는 대신, 사업 자체가 충분히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보여 주면 됐다. 그가 내게 바랐던 것도 결국 그 일이었을 테니까. 그날 오후, 나는 강현의 회사로 향했다. 미리 연락하지는 않았다. 투자 건으로 정신이 없을 테니 오래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 자료만 전달하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좋았다.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사모님, 대표님께서 지금 손님과 미팅 중이세요.” 비서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아, 괜찮아요. 급한 건 아니에요. 자료만 전달해 드리고 가려고요.” “그럼 제가 받아서 전달해 드릴까요?” “제가 직접 드릴게요. 금방 끝날 거예요.” 나는 서류철을 고쳐 들었다. 복도를 따라 대표실로 향하던 중, 문틈으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요즘의 그는 집에서도 거의 웃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를 이야기하면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거나 휴대전화부터 확인했다. “그건 내가 미처 생각 못 했네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시네.” 나도 모르게 문 쪽을 바라봤다.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다행이네요. 제가 괜히 고집을 부린 건가 싶었거든요.” 여자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아닙니다. 충분히 타당한 의견이었어요.” 강현이 웃었다. “그런 부분은 제가 더 배워야죠.” 낯선 대화였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알던 강현에게서는 듣지 못했던 말들이었다. 나는 손에 든 서류철을 내려다봤다. 어젯밤 잠을 줄여 가며 준비한 자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때 안쪽에서 여자가 말했다. “사모님도 사업 쪽에 밝으시다고 들었어요.” 심장이 작게 뛰었다. “우연이가 원래 그런 쪽으로는 능력이 있죠.” 익숙한 내 이름이었다. 괜스레 마음이 놓여 노크하려던 순간이었다. 이어지는 말에 손끝이 굳었다. “덕분에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처음 듣는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낯설게 들리는 걸까. “두 분은 정말 잘 만나신 것 같아요. 대표님이 사업에 집중하실 수 있었던 것도 사모님 덕분이잖아요.” “그렇죠.” 강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우림 쪽 연결이 없었으면 지금처럼 빠르게 성장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그 가능성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무슨 뜻인지 곧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서류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자가 물었다. “가능성이라뇨? 설마…….” “우연이요.” 강현은 당연한 사실을 설명하듯 말했다. “투자든 협업이든, 내가 혼자 부딪혔다면 훨씬 오래 걸렸겠죠.” 내게는 더는 들려주지 않던 다정한 목소리로, 그는 내가 평생 지키고 싶었던 사랑을 아무렇지 않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사모님을…….” 여자가 말을 흐렸다. 강현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결혼이 꼭 사랑만으로 하는 건 아니잖아요.”그 순간, 안쪽에서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찰칵. 문이 안으로 열렸다. “…….” 휠체어에 앉은 내 시선에서는 손등을 가로지르는 굵은 핏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이 길고 마디가 도드라진 손.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이 실릴 때마다 손등의 힘줄이 희미하게 도드라졌다. 그 손의 주인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말끔하게 차려입은 백도겸이 서 있었다. “들어오시죠.” 백도겸은 내 휠체어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몸을 비켜 문을 넓게 열었다. “…….” 나는 그가 비켜 선 틈으로 안쪽을 살폈다. 상담실이라고 들었는데, 일반적인 병원 면담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창가에는 낮은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 있었고, 한쪽 벽에는 서류를 펼쳐 놓기에도 넉넉해 보이는 커다란 책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복도를 지나오는 내내 개미새끼 한마리 구경하지 못했다. 내가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백도겸이 문을 닫았다. 철컥.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문은 왜 잠그시는거죠?” “방해받기 싫어서요.”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고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휠체어에 앉은 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든 말든,
억지로 먹기 시작한 멜론은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제일 좋은 걸로 골라 왔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과육은 부드럽게 씹혔고, 입안에 퍼지는 단맛도 기분 좋을 만큼 진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꽤나 맛있게 먹고 있었다. 마지막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과즙을 삼키고 포크를 내려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우연아.” 차강현이 나를 불렀다. “몸은 좀 어때? 조금 나아졌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나 공을 들이는 걸까. 포크를 마저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응. 점점 괜찮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 강현은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더니, 협탁 위에 놓인 빈 용기를 제 쪽으로 가져갔다. “다행이다. 당신 아픈 거 보니까 내가 마음이 안 좋더라고.” 속으로 어이가 없어 웃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차강현은 그런 내 속도 모르고 퍽 다정한 얼굴을 연기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연아. 나 당신한테 할 말이 하나 있는데.” 아. 드디어 본론인가. 나는 무릎 위에 손을 얌전히 포개고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인데요?” “음, 별건 아니고.” 차강현의 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지만, 말을 고르는 듯한 시선이 잠깐 내 얼굴을 훑었다. 어른들 앞에 데려가면 누구라도 흡족해할 법한 단정한 인상에, 웃을 때면 눈매가 순하게 휘어지는 얼굴이 좋았었다. 반듯한 생김새만큼이나 마음도 올곧은 사람일 거라고 믿었는데. “당신도 이제 몸 좀 추스르고 나면…….” 그의 말끝이 느리게 늘어졌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꽃다발에 멜론까지. 삼 년 전 연애하던 시절의 다정함을 굳이 되살려 놓은 데에는 역시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회사에 일이 좀 생겼어.” 역시나. “무슨 일인데?” “큰일은 아니야. 당신이 신경 쓸 정도는 아니고.” 큰일이 아니라면서 저렇게 운을 띄우는 건 무슨 심보일까. “자금 들어오는 일정이 밀리면서 전체 계획이 틀어지게 생겼어. 계약은 이미 진행됐고,
백도겸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했다. ㅡ “VIP 병동 18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오른쪽 끝에 보안 데스크가 있을 겁니다. 거기서 제 이름을 대세요. 안쪽 전용 복도로 안내해 줄 겁니다.” ㅡ “복도 끝에 별도 상담실이 있습니다. 문에 적힌 번호는 1807호. 거기서 뵙죠.” 그때였다. 징징징. 손에 쥔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 깜짝 놀라 화면을 내려다봤다. 부재중 전화 알림과 함께 문자가 연달아 떠 있었다. [매너콜] 고객님께서 통화 중이신 동안 강현 씨(010-XXXX-XXXX) 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2건)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지금. 나는 서둘러 통화 기록을 열었다. 화면에는 차강현의 부재중 전화 두 건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나는 곧장 차강현의 이름을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 울리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엉켜 들었다. ㅡ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심장이 한 번 더 내려앉았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강현 씨. 전화했었어요?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ㅡ “어, 우연아.” ㅡ “너 좋아하는 멜론 사러 왔는데, 유바리 멜론이 다 팔렸다네.” 너무 예상치 못한 부분이라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아. 그래요? 아쉽네.” ㅡ “백화점도 다 문을 닫은 시간이라, 다른 멜론이라도 괜찮아?” 나는 최대한 평소처럼 대답했다. “……응. 다른 것도 괜찮아요.” ㅡ “그럼 적당한 걸로 사 갈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알았어요. 고마워요.” 전화를 끊자마자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유바리 멜론이라.” 참 다정하기도 하지. 아내가 좋아하는 과일 하나를 사려고 문 닫을 시간까지 발품을 파는 남편이라니. 누가 봤다면 감동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몇 달 전이었다면 그랬을 테고. 하지만 이제는 안다.
“…….” 검색 결과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백도겸 대표, 투자회사 대표, 국내외 부동산 투자, 호텔 및 물류 사업. 기사마다 조금씩 표현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분명했다. 그가 손을 댄 사업은 규모가 컸고, 그가 투자한 회사는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나는 첫 번째 기사를 눌렀다. 〈Verdant 백도겸 대표, 대규모 투자 유치로 업계 주목〉 두 번째 기사에는 그가 인수한 호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세 번째 기사에는 해외 물류 기업과의 협력 소식이 담겨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을 검색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쏟아졌다. “…….” 나는 사진 속 남자를 확대했다. 병실에서 마주쳤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ㅡ ‘이런 건 녹음을 해야지.‘ ㅡ ’당하고만 있을 반푼이로는 안 보이는데.‘ 처음에는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사고를 당해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사람에게 할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꽤 정확하게 짚어 냈다. 남편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내. 그 사실을 들켰다는 걸 남편은 아직 모른다. “……백도겸.” 소리 내어 이름을 읽어 봤다. 그래서 차강현이 그토록 빌빌 기었구나 싶었다. 나는 다시 검색창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단어를 덧붙였다. [흥신소]. 검색 결과가 주르륵 나타났다. 사람 찾기, 외도 증거 수집, 개인 신원 조사, 기업 관련 조사. 지금 와서 생각하면 확인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건 따로 있었다. 차강현의 뒤를 조사해 달라고 의뢰하면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을까. 결혼 전부터 나를 이용할 생각이었는던 것, 투자 유치를 위해 내 이름을 어디까지 들먹였는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인 일들까지 모조리 다 파헤칠 수 있을까. 다만 흥신소를 통해 얻어 낸 증거가 법정에서 어디까지 효력이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나는 검색창에 다시 시선을 고정했
“우연아!”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엄마가 침대 곁으로 달려왔다. 뒤따라 들어온 아버지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나를 살폈다. “세상에, 우연아……!”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였다. “어디 봐. 의식은 제대로 있는 거야?”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엄마는 내 이마와 뺨을 번갈아 어루만지다가, 뒤통수에 감긴 붕대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머리가 왜 이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무심코 손을 들어 뒤통수를 가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엄마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 “뭘 하고 있었는가.” 낮은 목소리가 불호령처럼 떨어졌다. 우림리테일의 대표이사, 연우림. 창업주인 할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의 이름을 따 회사명을 지었다. 그렇게 탄생한 우림리테일은 오랜 세월 유통업계에서 입지를 다져 온 굴지의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가 침대에 누운 나를 돌아봤다. 뒤통수에 감긴 붕대를 확인하는 순간, 굳게 다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내 딸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했느냐는 말이야.”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제가 더 세심하게 챙겼어야 했는데…….” “세심하게?” 아버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 “우연이를 자네랑 결혼시키지 말았어야 했어.” “아빠.” 끼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요. 이제 그만 나가줘요.” 아버지는 내가 아프다는 말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인어른, 제가 잘못했습니다.” 차강현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우연이에게 더 잘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자네가 해야 할 책임을 다해. 헛물 켤 시간에 자네가 할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란 말이야.” 아버지는 차강현의 사업을 말 그대로 ’헛물‘이라 지칭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투자
“보기 좋네요.” 백도겸이었다. “난데없이 도로에 뛰어들길래 반푼이 아닌가 했더니.”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물론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놀란 기색이라도 보이면, 남자가 내 속내를 알아챘다는 사실을 차강현에게 들킬지도 몰랐다. “혼잣말입니다.” 그가 재킷 소매를 매만지며 내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 벌써 가시려고요?” 차강현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드렸는데……. 대표님께서 직접 병원까지 동행 해주셨는데 제가 이대로 보내 드릴 수는 없죠. 따로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차강현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 앞에서는 언제든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아니라, 그 모습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였으니까. “식사라.” “…….” “내 차가 당신의 아내를 친 게 뭐가 그리 감사할 일이라고.” 차강현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멈췄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실언했습니다.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는 잘 익은 벼처럼 연신 고개를 숙여 댔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내가 알던 차강현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대체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사업이 잘 풀린 뒤로 차강현은 늘 자신만만했다. 그 오만함마저 성공을 향한 확신처럼 보여 그를 사랑했었지. 그런 차강현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추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백도겸은 문 앞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문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만 느릿하게 돌렸다. “연우연 씨.”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다음엔 신호부터 확인하고 뛰어드세요.” “…….” “달려오는 차도 못 피하면서, 준비는 제대로 해둬야 하지 않겠어요?” 무심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걱정인지 핀잔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준비라니. 나는 그 말에서 다른 의미를 읽었다. 당장 차강현에게 달려가 따져 묻는 대신, 그가 모르는 사이에 증거를 모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