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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당신이 죽인 사랑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4 03:46:54

“그러니까 처음부터 사모님을…….”

여자가 말을 흐렸다.

강현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결혼이 꼭 사랑만으로 하는 건 아니잖아요.”

결혼이 꼭 사랑만으로 하는 건 아니잖아요.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

“서로에게 이득이 있으면 되는 거죠.”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는 데에는.

“대표님은 그렇다 쳐도, 사모님은요? 대표님과는 왜 결혼하신 거래요? 실례인 줄은 알지만…… 솔직히 좀 의아해서요.”

여자가 물었다.

“제가 확실한 장치를 하나 마련해 뒀거든요.”

그가 말을 이었다.

“뭐, 지금은 그 장치 때문에 골치가 좀 아프지만요.”

손에 들린 서류철이 미끄러질 뻔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끌어안았다.

밤새워 정리한 자료였다. 강현의 회사가 더 나은 조건으로 투자를 받을 수 있도록, 그가 놓친 위험을 보완하고 부족한 근거를 채워 넣은 결과물.

“그래도 결혼까지 하셨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사랑이 조금은 있으셨던 거 아니에요?”

여자의 질문에 강현이 낮게 웃었다.

“사랑이야…… 우연이가 충분히 느끼게 해 줬죠.”

마치 오래전에 끝낸 일을 회상하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 애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처음부터 알았으니까.”

그가 덧붙였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 순간,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내가 믿었던 것들은 더는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변치 않자더니…….

지금,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가 결혼의 이유를 말했다.

“사모님이 사실을 알게 되면 곤란해지지 않으시겠어요?”

잠깐의 침묵 끝에 강현이 대답했다.

“알게 될 일 없어요.”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구두 굽이 바닥에 닿으며 작은 소리를 냈다.

내가 들었다는 걸 알게 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를 사랑한 적은 있어요?

아이를 가진 것도, 나와 결혼한 것도 전부 당신이 원한 일이었잖아요.

질문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 사실만큼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의 다정함이 처음부터 계산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모두 내가 믿고 싶었던 것에 불과했다면.

나는 대체 무엇을 사랑한 걸까.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손에 든 서류철이 무겁게 느껴졌다.

ㅡ ‘제가 확실한 장치를 하나 마련해 뒀거든요.’

ㅡ ‘뭐, 지금은 그 장치 때문에 골치가 좀 아프지만요.’

차강현.

네가 아무렇지 않게, 우스갯소리처럼 입에 올리는 그 장치가, 빛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떠나간 우리 아이. 네가 결혼을 앞당기기 위해 이용했고, 이제는 골칫거리쯤으로 치부하는 그 작고 여린 생명을 말하는 거잖아.

우산을 가져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울렸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빗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뺨으로 흘렀고, 손에 쥔 휴대전화는 차갑게 식어 갔다.

돌아갈 곳이 없었다.

내가 돌아가고 싶었던 시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돌아갈 곳이 없어, 나는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그때였다. 날카로운 경적이 빗소리를 찢었다.

고개를 돌릴 틈도 없었다. 눈앞으로 검은 차체가 밀려들었고, 둔탁한 충격과 함께 몸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퍽!

젖은 아스팔트가 뺨에 닿았다. 손바닥이 쓰라렸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시야가 흔들렸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번지더니 이내 여러 개로 갈라졌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차라리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였다.

차강현.

내가 사랑했던 남자.

그때, 사고 차량의 뒷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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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와서 나를 사랑한다고?   9. 업보 청산

    “…….” 검색 결과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백도겸 대표, 투자회사 대표, 국내외 부동산 투자, 호텔 및 물류 사업. 기사마다 조금씩 표현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분명했다. 그가 손을 댄 사업은 규모가 컸고, 그가 투자한 회사는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나는 첫 번째 기사를 눌렀다. 〈Verdant 백도겸 대표, 대규모 투자 유치로 업계 주목〉 두 번째 기사에는 그가 인수한 호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세 번째 기사에는 해외 물류 기업과의 협력 소식이 담겨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을 검색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쏟아졌다. “…….” 나는 사진 속 남자를 확대했다. 병실에서 마주쳤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ㅡ ‘이런 건 녹음을 해야지.‘ ㅡ ’당하고만 있을 반푼이로는 안 보이는데.‘ 처음에는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사고를 당해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사람에게 할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꽤 정확하게 짚어 냈다. 남편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내. 그 사실을 들켰다는 걸 남편은 아직 모른다. “……백도겸.” 소리 내어 이름을 읽어 봤다. 그래서 차강현이 그토록 빌빌 기었구나 싶었다. 나는 다시 검색창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단어를 덧붙였다. [흥신소]. 검색 결과가 주르륵 나타났다. 사람 찾기, 외도 증거 수집, 개인 신원 조사, 기업 관련 조사. 지금 와서 생각하면 확인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건 따로 있었다. 차강현의 뒤를 조사해 달라고 의뢰하면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을까. 결혼 전부터 나를 이용할 생각이었는던 것, 투자 유치를 위해 내 이름을 어디까지 들먹였는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인 일들까지 모조리 다 파헤칠 수 있을까. 다만 흥신소를 통해 얻어 낸 증거가 법정에서 어디까지 효력이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나는 검색창에 다시 시선을 고정했

  • 이제 와서 나를 사랑한다고?   8.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

    “우연아!”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엄마가 침대 곁으로 달려왔다. 뒤따라 들어온 아버지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나를 살폈다. “세상에, 우연아……!”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였다. “어디 봐. 의식은 제대로 있는 거야?”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엄마는 내 이마와 뺨을 번갈아 어루만지다가, 뒤통수에 감긴 붕대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머리가 왜 이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무심코 손을 들어 뒤통수를 가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엄마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 “뭘 하고 있었는가.” 낮은 목소리가 불호령처럼 떨어졌다. 우림리테일의 대표이사, 연우림. 창업주인 할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의 이름을 따 회사명을 지었다. 그렇게 탄생한 우림리테일은 오랜 세월 유통업계에서 입지를 다져 온 굴지의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가 침대에 누운 나를 돌아봤다. 뒤통수에 감긴 붕대를 확인하는 순간, 굳게 다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내 딸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했느냐는 말이야.”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제가 더 세심하게 챙겼어야 했는데…….” “세심하게?” 아버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 “우연이를 자네랑 결혼시키지 말았어야 했어.” “아빠.” 끼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요. 이제 그만 나가줘요.” 아버지는 내가 아프다는 말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인어른, 제가 잘못했습니다.” 차강현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우연이에게 더 잘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자네가 해야 할 책임을 다해. 헛물 켤 시간에 자네가 할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란 말이야.” 아버지는 차강현의 사업을 말 그대로 ’헛물‘이라 지칭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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