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남들 눈에는 하지훈의 집안과 지위만으로도 애초에 이 관계가 절대 대등하지 않다는 게 정해져 있었다.더욱이 어떤 결말도 기대하기 어려웠다.그래서 하씨 가문에서 처음으로 정다슬을 찾아와 고액 수표를 건넸을 때 그녀 역시 어느 정도 회의감이 들었다.하지만 그것도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급을 나눠 사람을 판단한다는 걸 잘 알았지만 집안이 형편없다고 해서 자신의 감정과 시간도 값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정다슬의 말에 하지훈의 눈가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곧이어 그는 비웃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그는 정다슬의 말 속에 담긴 숨은 뜻을 당연히 알아챘다.본인 마음을 가지고 놀 생각은 말라는 뜻이었다.정다슬은 하지훈의 태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냉담하게 되물었다. “아니면요?”답을 찾을 수 없는 관계인데도 자꾸만 그녀를 찾는 이유가 또 뭐가 있겠나.당당하게 마주하는 여자의 시선 앞에서 하지훈은 주먹으로 솜을 때리는 듯한 허탈함을 느꼈다.“그래.”하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얼음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장현진과 결혼할 날짜 정해지면 꼭 알려줘. 성유준한테 축의금 두둑하게 챙겨주라고 할 테니까.”말끝마다 장현진을 언급하니 정다슬도 해명할 의욕이 사라져 흔쾌히 대꾸했다.“그쪽 축의금 두둑하게 받으면 부자 되겠네요.”그러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쾅 문을 닫아버렸다.문밖에서 하지훈은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뒤돌아 성큼성큼 집으로 들어간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퇴직 증명서를 보고 별안간 다리를 들어 테이블 모서리를 걷어찼다.‘퇴사는 개뿔.’한가득 쌓인 짜증이 풀리기도 전에 소파에 던져둔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형.”전화받자마자 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하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이런 망나니 같은 성격에 익숙해져 있었다.하희민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퇴사가 잘 안됐어?”“그런 셈이지.”퇴사 절차는 순조로웠다.퇴사 후 벌어진 일이 순조롭지
주객전도, 법정에 설 때마다 의도적으로 연습해 온 직업병이었다.하지만 하지훈도 이제야 깨달은 건 아니었다.예전에 두 사람이 연애할 때부터 이미 그 조짐이 보였다.정다슬은 주도권을 쥐는 데 능숙했고 관계에 있어서 앞으로 나아갈지 물러설지는 오로지 그녀가 결정했다.그들의 만남에서도 정다슬이 먼저 하지훈을 유혹하고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바로 연락을 끊어버린 것처럼.지금 하지훈은 통화를 엿들었어도 전혀 민망한 기색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 집 앞인데 뭘 엿들었다는 거야? 네가 날 못 본 거지.”정다슬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한 마디에서 약간의 서러움이 묻어나는 것처럼 들렸다.‘분명 착각일 거야.’태생이 금수저인 하지훈 같은 도련님은 남을 서럽게 하면 했지 본인이 당하진 않았다.정다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일리가 있네요.”그러고는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는 듯 뒤돌아 문을 열려 했다.문을 닫으려는 순간, 문밖의 남자가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와 한 손으로 문짝을 막으며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했다.정다슬은 깜짝 놀라 반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더 할 말 있어요?”“나랑은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서, 그럼 장현진은?”느닷없는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정다슬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채 눈가의 당황함을 감추고 문을 닫으려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현관 신발장에 살며시 몸을 기울이며 붉은 입술을 살짝 올린 채 직설적으로 말했다.“나랑 다시 만나고 싶어요?”“그래.”한쪽은 직설적으로 묻고 다른 한쪽은 숨김없이 답했다.고개를 든 정다슬의 눈에 확신에 차 번뜩이는 하지훈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난 싫어요.”간결한 네 글자로 대화가 끝날 뻔했다.하지만 하지훈은 절대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었다. 검은 눈동자로 정다슬을 똑바로 바라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강조했다.“말했잖아, 내가 원한다고. 예전에는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네가 결정했어. 이번엔 내 차례지.”
정다슬이 떠날 때 장현진은 그녀를 아래층까지 배웅했다.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다슬이 먼저 자신의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얼른 올라가 봐.”“잠깐만.”장현진이 정다슬을 불러 세우더니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 엄마가 아까 하신 말씀은...”“우린 친구야.”정다슬이 붉은 입술을 살짝 올리며 무심한 듯 웃었다.“어른들이 하는 말은 그냥 농담이니까 난 신경 안 써. 이런 걸로 우리 오랜 우정을 망칠 생각도 없어.”빈틈없이 완벽한 말이었다.장현진에겐 아무런 기회가 없었다.그 말인즉 어른이 하신 말씀은 농담으로 넘기며 앞으로 계속 친구로 지내겠지만 그가 꺼낸다면 친구로도 지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듣고 있던 장현진의 입꼬리가 점점 직선으로 굳어졌다. 잠시 후 그는 떠보듯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다.“우리 정 변호사님이 한 사람에게만 매달리는 분인가?”그게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아도 그와 정다슬은 잘 알고 있었다.정다슬도 모르는 척하는 대신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누구, 하지훈? 나와 그 남자는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야.”밤이 깊어지자 찬바람이 휘몰아쳤다.뒤편 모퉁이에서 싸움에서 진 듯한 길고양이가 사나운 기세로 멀리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정다슬이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말했다.“하지만 나는 서로 사랑하고 비슷한 수준의 상대라는 전제하에 연애할 수 있어.”아주 간단하게 하지훈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동시에 장현진도 거절했다.전자는 수준이 맞지 않았고 후자는 사랑이 없었으며 순수하기 그지없는 우정뿐이었다.그 말에 장현진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어.”단지 하지훈 때문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정다슬이 하지훈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어릴 때부터 득실을 따지는 데 능숙했던 정다슬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그래서 장현진은 알고 있었다. 하지훈이 정다슬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
하지훈의 눈매가 눈에 띄지 않게 살짝 올라갔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서류를 받아 펜을 들려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선명하고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슬아, 미안해. 엄마 검사받는 데 동행하느라 또 네 시간만 낭비했네.”하지훈은 소리가 난 쪽을 보지 않아도 장현진임을 알 수 있었다.갑자기 이유 없이 사인펜이 미끄러지며 서명란에 긴 흔적을 남겼다.인턴은 왠지 모르게 하지훈이 평소처럼 유쾌하게 웃고 떠들던 모습과 달리 싸늘한 분위기를 내뿜는 것 같았다.“하 선생님, 서류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미안합니다. 그런 건 아닙니다.”하지훈은 표정 변화 없이 펜촉이 종이 위를 스치며 서명을 마쳤다. 서류를 인턴에게 돌려준 그는 돌아서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연구실로 향했다.인턴은 서류를 받아 인사과로 돌아가려 했다.두 걸음도 채 걷지 않았을 때 뒤에서 서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돌아보니 조금 전까지 여유로워 보이던 하지훈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정다슬은 장현진의 어머니, 현명희를 부축하며 장현진과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너도 참.”현명희가 장현진을 탓하듯 흘겨보며 말했다.“내가 혼자 와도 되는데 굳이 다슬이를 불러서 병원까지 오게 하네.”지난번 수술 후 현명희는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는 않은 상태였다.이번이 마지막 검진이라 이후로는 병원에 올 필요가 없었다.장현진이 무심코 정다슬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넋이 나간 그녀가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힐 뻔하자 그는 재빨리 손을 뻗어 상대를 끌어당겼다.“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정다슬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당황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잠깐 딴생각했어.”장현진이 무기력한 어투로 말했다.“엄마가 나한테 뭐라고 해. 또 너 귀찮게 불렀다고.”“이 정도쯤이야.”정다슬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현명희를 바라보았다.“아주머니, 저도 마침 가는 길이었어요. 예약도 미리 온라인으로 다
전화를 끊은 뒤 성유준은 뒤돌아 서재로 향했다. 발코니 유리문을 닫으려던 순간 시선을 들자 어느새 들어와 있는 온채아를 발견했다.하지만 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온 가족이 보물처럼 떠받드는 탓에 온채아는 간신히 성일에게서 커피 나르는 일을 빼앗아 커피잔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의아한 어투로 물었다.“무슨 일 있어? 뭘 당당하게 마주해?”막 들어와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하지만 성유준의 말투가 살갑지 않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심지어 은근히 화가 난 기색까지 감돌고 있었다.성유준은 온채아를 보고 치밀어오른 짜증이 잠시 사라졌지만 대신 안쓰러운 마음이 커졌다.그는 몇 걸음 다가가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무슨 일이 있기는, 아무 일도 없어.”온채아에게 더 이상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할 것이다.하씨 가문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온채아에게 미안한 행동만 하지 않으면 진심으로 그녀를 아껴주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에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온채아가 그들을 가족으로 인정하든 안 하든 성유준은 한 마디도 섞지 않을 것이다.어떤 결과가 나오든 자신이 항상 온채아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거니까.그런데 온채아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자신을 달래는 듯한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상대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정말 아무 일도 없어?”왠지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게다가 자신과 관련이 있는 눈치였다.성유준은 온채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잠시 망설이다 되물었다.“너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 뭐야?”그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몰라 온채아는 당황했다.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양부모님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그들의 복수를 하는 게 제일 중요했다. 나중에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아내고 친부모를 찾는 일도 생겼다.하지만 어젯밤 배가 무척 아팠을 때 단 하나의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아이가 무사히 이 세상에 태어나길.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가정을 꾸리고 성유준
성유준 쪽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소식을 알려주면 자연히 경계를 늦추지 않을 것이다.하도연도 강미진과 같은 생각이 들어 성유준에게 전화하려 휴대폰을 들자마자 그녀의 휴대폰이 먼저 울렸다.발신자에는 성유준 이름이 떴다.하도연이 멈칫하다가 전화받자마자 말을 꺼내기 전에 상대편에서 성유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누나, 하예원을 보석으로 풀어준 게 하씨 가문이야?”“...”하도연은 깜빡 잊고 있었다. 여기는 경성, 즉 성씨 가문의 세력권이라는 사실을. 성유준이 소식을 접하는 속도가 그들보다 느릴 리 없었고 오히려 더 빠를 수도 있었다.다만 앞뒤 사정을 파악한 후 연락한 것이었다.하도연은 아버지 쪽을 흘깃 쳐다보며 변명하지 않고 곧바로 말했다.“미안해, 아버지가 그렇게 하셨어. 우리도 방금 알았어.”전화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흐른 뒤 성유준의 차갑고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경찰서에 미리 연락할 걸 그랬네. 그런데 회장님께서 친딸 목숨도 나 몰라라 할 줄은 몰랐지.”하도연은 휴대폰 볼륨을 조절하지 않았고 성유준도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으며 오히려 평소보다 크게 말한 듯했다.그래서 그의 말은 한마디도 빠짐없이 하씨 가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예비 사위에게 이렇게 조롱당하자 하선호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지만 고개를 들어 하용건의 책망하는 시선을 마주한 순간 다시 입을 다물었다.이 일은 그가 하예원에게 빈틈을 준 게 맞으니까.하도연이 난감해하는 하선호의 모습을 지켜보며 성유준에게 말했다.“이번 일에 대해 우리도 제대로 설명할게. 하지만 지금은 채아의 안전을 확보하는 게 제일 중요해.”하예원은 하씨 가문에서 지낸 세월 동안 하씨 가문의 힘을 이용해 각계각층의 인맥을 쌓아왔다.비록 이미 공개적으로 정체를 드러냈지만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하예원이 경찰의 눈앞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절대 그녀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그건 내가 알아서 해.”성유준이 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