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지만 온채아가 겁먹을까 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피를 닦아내고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었다. “바보처럼 왜 서 있어. 오빠랑 같이 집에 가려고 기다린 거야?”추억이 떠올랐다. 지금 온채아의 어깨에 닿아 있는 그 손바닥의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온채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성유준을 올려다보았다.온채아는 줄곧 성유준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온채아에게 건넨 말이었지만 그 경고는 하예원뿐만 아니라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을 향한 것이었다. 온채아가 그의 사람임을 대놓고 밝힌 셈이었다. 성유준이 공개적으로 누군가를 감싼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구경하던 이들은 충격을 받았다. 결국 경성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자와 굳이 맞서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씨 가문조차 그와 쉽사리 대립하려 하지 않았다.하선호는 원래 노발대발하려 했으나 성유준이 온채아를 지극히 아끼는 모습을 보자 마음속 노여움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마도 과거 자신과 강미진의 시절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하예원은 이런 수모를 당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짝사랑하는 남자 앞이라 해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우리 하씨 가문을 이렇게까지 무시하시겠다는 거예요?”온채아에게 대놓고 그녀의 뺨을 때리라고 부추기다니. 여기는 해성이다! 성유준이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경성이 아니란 말이다!성유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웃었다.“예원 씨가 감히 하씨 가문을 대표할 수 있다고 확신하나요?”“내가... 대표하지 못할지도 모르죠!”하예원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제 다른 카드가 있었다. 그녀는 심서정을 확 낚아채 앞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막내는 할 수 있어요. 우리 하씨 가문의 진짜 막내딸이니까요!”멀리서 구경하던 하지훈과 하희민은 순식간에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심서정이 막내라고? 하지훈과 하희민의 눈에는 막내를 찾았다는 기쁨이나 설렘 대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득함이 스쳐 지나
이미 연회장 대기실 쪽 소란에 수많은 손님들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성유준의 목소리가 구경하던 이들의 귀에 꽂혔다.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폭로였다.평소 막무가내로 행동하던 하예원이 사실은 하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었다니!멀찍이서 구경하던 하지훈은 사실 여부를 묻는 손님들의 질문에 마지못해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죄송합니다. 어디서 입양했는지는 아버지가 말씀하지 말라고 하셔서요.”돌려서 말했지만 실상은 성유준의 말에 쐐기를 박은 셈이었다.하예원과 하선호가 대처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하지훈은 진작부터 멍청하고 교양 없는 누나를 두고 싶지 않았다. 성유준의 이번 폭로는 그에게 있어 통쾌한 일이었다.옆에 있던 하희민이 무심하게 한마디 거들었다. “아버지한테 혼나도 난 모른다.”“혼날 게 뭐 있어.”하지훈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성유준 쪽으로 턱짓을 했다. “예원의 밑천을 드러낸 건 유준이니까 아버지더러 유준이한테 따지라고 해.”자신과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남의 입을 빌려 나온 말까지 그가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직접 사람들에게 인정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하예원은 성유준이 갑자기 나타날 줄도, 온채아를 이토록 감싸고 돌 줄도 몰랐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온채아를 위해 거리낌 없이 그녀의 뺨을 때린 것이나 다름없었다!하선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부인했다. “유준아, 어디서 헛소문을 들었나 본데 예원이는 나와 미진의 친딸이다.”하선호는 하예원을 잘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입양한 딸과 친딸은 외부인이 보기에 천지 차이였다.“그렇습니까?”하지만 성유준은 제대로 화가 난 모양인지 적당히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예원 씨의 품행이 도연 누나나 희민 형, 지훈이랑 너무 차이가 나는군요. 유전자 돌연변이라도 일어난 겁니까?”하예원이 온채아의 가정 교육을 운운하자 성유준은 곧바로 그녀의 품행을 걸고넘어졌다.연회장의 손님들 중 하예원을 겪어본 이들은 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하예원의 오만방
하선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집사람 감정이 격해진 상태라 만나기 좀 어렵겠네요.”“채아 씨, 정말 미안해요. 내가 잠시 귀신이 씌었었나 봐요.”심서정은 눈시울을 붉히며 잘못을 뉘우치는 척 온채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표정을 싹 바꾸더니 남들이 듣지 못하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난 채아 씨를 죽여버리고 싶은데 어쩔 거예요?”“사모님의 담당 의사라고 해서 하씨 가문이 채아 씨 뒤를 봐줄 줄 알았어요? 꿈 깨요. 평생 가도 안 돼요.”“이제 하씨 가문은 내 뒤를 봐줄 거예요. 내가 채아 씨를 차로 받아 죽여도 그냥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해요!”“찰싹!”온채아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온 힘을 다해 심서정의 오른쪽 뺨을 세게 내리쳤다. 심서정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해진 틈을 타 온채아는 손등으로 그녀의 왼쪽 뺨까지 마저 후려쳤다.“그래요? 그럼 가서 하씨 가문한테 뒤 좀 봐달라고 해요!”도대체 무엇이 하씨 가문에 이토록 큰 영향을 끼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 화풀이만큼은 스스로 못 할 것도 없었다!심서정은 화가 나 눈을 부릅떴지만 하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본색을 드러낼 순 없었다. 그녀는 뺨을 움켜쥔 채 울먹이며 하선호를 돌아보았다. “전 그냥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을 뿐인데...”하선호와 하예원 모두 깜짝 놀랐다. 평소 온채아는 성격이 순한 편이었고 하씨 가문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선호는 이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막상 온채아의 차가운 얼굴과 마주하자 꾸짖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온채아의 불우한 신세에 대해서는 하희민과 강미진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참 가여운 아이였다. 게다가 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왠지 온채아를 나무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입가까지 맴돌던 말들을 다시 삼켜버렸다.옆에서 지켜보던 하예원은 기가 막힌다는 듯 멍하니 있다가 소리쳤다. “아빠! 그냥 보고만 계실 거예요?”하선호는 평소 아내에게만은 끔찍한
하용건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하선호도 더는 대꾸할 수 없었다. 하용건의 말대로 조금은 매정하게 느껴질지언정 그것이 하씨 가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방식임은 분명했다.심서정은 사색이 되었다. 하씨 가문 사람들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속이기 힘들었고 가족 모두가 지나치게 예리했다. 옥 펜던트와 태점이 다 있는데도 기어코 친자 확인을 하겠다니.‘절대 하면 안 돼...’검사를 하는 순간 모든 게 끝장이다.하도연이 그녀를 곁눈질했다. “심서정 씨는 불만 없겠죠?”“저야 당연히 없죠.”그녀는 친자 확인을 합리적으로 거절할 수 있는 핑계를 찾으려 머리를 미친 듯이 굴렸다. 하지만 그녀가 채 생각하기도 전에 하예원이 먼저 입을 뗐다.“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확실히 검사를 하는 게 맞아요. 지금 바로 전화해서 피 뽑으러 오라고 할게요.”“그럴 필요 없어.”하도연이 말을 막아서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마침 구정훈이 근처에 있으니 사람 데리고 오라고 하면 돼.”하예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언니, 이혼까지 한 사이인데 우리 집안일로 번거롭게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구씨 가문은 해성 의료 자원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해성의 연구소와 개인 병원 대부분이 구씨 가문의 소유였기에 그들이 친자 확인을 맡게 된다면 조작할 여지는 거의 사라진다.차경희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뭐가 어때서. 두 가문은 오랜 세월 동안 교류해 온 사이인데 이혼했다고 남남처럼 등 돌리고 살 건 아니지 않니.”두 사람은 합의 이혼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이혼 서류 접수조차 계속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하도연이 회의를 가면 구정훈이 출장을 가는 식이었다.하예원은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고 그저 이해심 깊은 척 말을 돌렸다. “알겠어. 난 언니가 걱정돼서 그랬지.”하도연은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옆으로 가서 구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예원은 하선호의 곁으로 다가갔다.“아빠, 친자 확인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문 앞에 있는 경찰분들은 먼
“말해 줘요! 우리 막내가 어디 있는지 말해 달란 말이에요. 제발!”수년 만에 강미진이 하아린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이었다. 이전의 소식들은 늘 안개처럼 실체가 없고 허무했으나 이번은 달랐다. 만약 두 다리를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그녀는 이미 심서정 앞에 무릎이라도 꿇었을 것이다. 하아린을 찾을 수 있다면 무릎을 꿇는 것뿐만 아니라 목숨과 바꾼다 해도 기꺼이 응했을 터였다.강미진은 그저 하아린이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하아린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회의실은 방음이 잘 되어 있어 원래대로라면 온채아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어야 했다. 하지만 강미진의 절규 섞인 목소리가 희미하게 밖으로 새어 나왔다. 온채아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온채아의 심장이 아려왔다. 온채아는 몸을 굽히고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통증을 달래려 애썼다.회의실 안, 심서정은 겁에 질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강미진이 한참을 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심서정은 문득 머릿속으로 생각이 스쳤다.‘분명 온채아 짓이야!’지난번 옥 펜던트를 가져갔을 때 똑같이 복제해 둔 게 분명했다. 심서정이 지금 가진 이 펜던트는 진작에 온채아가 바꿔치기한 것이 틀림없었다.심서정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강미진의 무릎에 매달려 눈물을 쏟아냈다. “몰라요. 정말 저는 몰라요...”그녀는 울먹이면서도 지극히 진실해 보이는 목소리로 해명했다. “옥 펜던트는 2년 전쯤 제가 넘어져서 실수로 깨뜨렸어요. 하지만 제 목에 평생 걸려 있던 거라 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서 사람을 시켜 똑같이 복제해 달라고 한 거예요!”심서정의 순발력 있는 대처에 하예원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미진은 몸이 굳은 채 눈물을 흘렸다. 눈동자에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우리 막내 아린이가... 심서정이라고? 그럴 리가!’하도연은 강미진이 충격으로 쓰러질까 걱정되어 한마디 거들었다. “엄마, 막내 어깨 아래쪽에 태점이 있었잖아요
하예원이 손을 뻗자 심서정은 자신만만하게 옥 펜던트를 풀어 건네주었다. 이 옥 펜던트는 과거 심서정이 온채아에게서 직접 빼앗은 것이었다. 틀림없었다.어제 하예원이 옥 펜던트를 빼보라고 하더니 손에 쥐고 자세히 살피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심서정의 신분을 확인하려던 것이었다. 심서정은 입가 근육을 파르르 떨며 속으로 기쁨을 억눌렀다.‘내가 하씨 가문의 귀한 아가씨가 되기만 하면 이제부터 온채아는 내 발밑이야!’‘교통사고 사건도 결국 흐지부지 끝나겠지. 하씨 가문이 자기 핏줄의 몸에 오점을 남길 리 없으니까.’‘온채아, 네가 태어나길 잘 태어나면 뭐 해? 결국 다 내 차지가 됐는데!’심서정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할 때쯤 옥 펜던트를 무심히 훑어본 하도연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옥 펜던트 어디서 난 거예요?”심서정과 하예원 모두 멍해졌다. 하도연이 단번에 꿰뚫어 볼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하예원이 다급히 물었다. “언니, 어디 문제라도 있어?”“문제가 아주 많지.”하도연이 차갑고 엄숙한 표정으로 심서정에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말해요. 옥 펜던트 어떻게 손에 넣었어요?”“저는....”심서정은 살면서 여자에게서 이런 기운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겁에 질려 말까지 더듬었지만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는 머리를 쥐어짜 대답했다. “줄곧 저한테 있었어요! 옥 펜던트는 제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제 목에 걸려 있었다고요!”“그래요?”하도연이 비웃으며 그녀를 놓아준 뒤 집안 어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옥 펜던트, 막내가 어릴 때 차고 있던 게 아니에요.”말을 마친 하도연은 강미진의 손에 옥 펜던트를 쥐여주었다. 강미진은 펜던트 안쪽에 새겨진 글자를 손가락 끝으로 만지자마자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막내... 우리의 막내 아린이.’강씨 가문의 아이들은 태어날 때마다 옥 펜던트를 하나씩 받았다. 강미진이 맏이였기에 부모님은 특별히 펜던트에 강의 성씨를 따서 K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