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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금고

مؤلف: Jino
last update تاريخ النشر: 2026-10-15 08:18:19

성수동의 새벽은 기름 냄새로 시작했다.

골목 초입의 오래된 인쇄소에서 잉크와 기계유 냄새가 흘러나왔고, 그 옆 빵집 환풍구에서는 버터가 녹는 냄새가 났다. 서린은 캐리어 두 개를 끌고 그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바퀴가 보도블록 틈에 걸릴 때마다 덜컥 소리가 났다.

3년 만에 걷는 길이었다.

빨간 벽돌 건물 2층, 간판도 없는 철문 옆에 손바닥만 한 황동 명패가 붙어 있었다.

「무향(無香)」

향을 만드는 곳의 이름이 '향이 없음'이라는 게 우습다고, 처음 이 이름을 지었을 때 실장은 한참 웃었다. 서린은 그때 이렇게 대답했었다. 모든 향은 아무 냄새도 없는 데서 시작한다고.

철문을 열자 불이 이미 켜져 있었다.

"서린 씨!"

작업대 뒤에서 문지현이 튀어나왔다. 마흔다섯, 짧은 커트 머리에 돋보기안경을 이마에 올린 여자였다. 서린이 스무 살 때 조향 학원에서 처음 만난 선생이었고, 지금은 N의 유일한 손발이었다.

"잠은 잤어요?"

"실장님이야말로요. 세 시간 전에 전화 드렸는데."

"그 전화 받고 잠이 와요? 누가 7번을 훔쳤다는데."

지현은 서린의 손에서 캐리어를 빼앗듯 받아 들다가 멈칫했다. 캐리어 두 개. 그리고 서린의 맨 손가락.

"……반지는요?"

"두고 왔어요."

"그럼 진짜로—"

"네. 진짜로요."

지현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서린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그 손이 조금 떨렸다는 걸 서린은 모른 척했다.

* * *

금고는 작업실 안쪽, 원료장 뒤에 숨어 있었다.

어른 허리 높이의 회색 철제 금고. 비밀번호는 여덟 자리였고, 그 번호를 아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서린과 지현.

서린이 번호를 눌렀다. 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에는 가죽 표지의 노트 열두 권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N이 10년 동안 만든 모든 향의 배합이었다. 파리의 회사들이 수십억을 부르며 찾아 헤매는 것이 전부 이 좁은 철 상자 안에 있었다.

서린은 일곱 번째 노트를 꺼냈다.

표지를 넘기고, 종이를 한 장씩 넘겼다. 손가락 끝으로 모서리를 쓸어 보고, 제본 실이 끊긴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마지막 장까지 넘긴 뒤 노트를 코에 가까이 댔다.

종이 냄새. 오래된 잉크. 그리고 자기 손 냄새.

"……노트는 멀쩡해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어젯밤 그 향이 확실히 7번이었어요?"

"확실해요."

서린은 금고 맨 아래 칸을 열었다. 거기에는 작은 유리병들이 스펀지 틀에 꽂혀 있었다. 노트마다 한두 병씩, 배합을 확정하기 전에 만든 시제품이었다.

7번 자리는 두 칸이었다.

그중 한 칸이 비어 있었다.

지현이 숨을 들이켰다.

"5밀리 한 병……. 이게 언제부터 없었지? 나 지난달에 재고 볼 때 분명히—"

"실장님, 지난달에 7번 칸까지 보셨어요?"

지현의 입이 닫혔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1번부터 6번만 봤어요. 7번은 서린 씨가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직 이름도 없는 거라고."

맞는 말이었다. 7번은 서린이 3년 전, 결혼하기 직전에 만들기 시작한 향이었다. 흰 목련과 비에 젖은 돌. 그리고 무화과 잎. 결혼식 날 아침 창밖에서 나던 냄새를 붙잡아 두려고 만든 향이었는데,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이 향을 완성할 이유가 결혼 생활 안에서 한 번도 생기지 않았으니까.

"금고 기록 볼 수 있죠?"

"네, 잠깐만요."

금고는 디지털식이었다. 지현이 옆면의 작은 화면을 눌러 개폐 기록을 불러냈다. 날짜와 시각이 줄지어 떴다. 대부분은 지현이 낮에 원료 노트를 확인하느라 연 기록이었다.

서린의 눈이 한 줄에서 멈췄다.

「7월 19일 02:03 — 열림」

「7월 19일 02:11 — 닫힘」

8분.

"7월 19일."

서린이 날짜를 소리 내어 읽었다. 지현이 휴대폰 달력을 뒤졌다.

"토요일이에요. 새벽 두 시면 나는 집에서 자고 있었을 거고……. 서린 씨는요?"

"시댁에 있었어요."

그날은 시할머니의 기일이었다. 서린은 새벽 네 시까지 본가 부엌에서 전을 부쳤다. 기름 냄새가 머리카락에 배어 사흘 동안 빠지지 않았던 걸 기억했다. 시어머니는 그날도 전 모양이 고르지 않다며 두 번이나 다시 부치게 했다.

"그럼 누가……."

"번호를 아는 사람이 연 거예요. 부순 흔적이 없으니까."

"나 아니에요!"

지현이 거의 소리를 질렀다. 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알아요. 실장님이었으면 7번 말고 1번을 가져가셨겠죠. 그게 제일 비싸니까."

"……이 와중에 농담이 나와요?"

"농담 아니에요."

서린은 금고 문을 닫았다. 삑, 소리가 났다.

"CCTV 볼게요."

* * *

같은 시각, 청담동의 펜트하우스.

차도혁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커피도, 토스트도, 그가 3년 동안 한 번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은 반숙 계란도.

그는 넥타이를 매다 말고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 비서."

"네, 전무님."

"아침 여덟 시 회의, 아홉 시로 미뤄."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아무 일도 없어."

도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그 강 위로 아침 해가 낮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 어디 있는지 알아봐. 조용히."

"누구를……."

"내 아내."

수화기 너머가 한 박자 조용해졌다. 강민재는 5년째 도혁의 비서였지만, 도혁이 '내 아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걸 들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찾아서—"

"아니."

도혁이 말을 끊었다.

"찾기만 해. 데려오지는 말고."

"……네?"

"내버려 둬. 어차피 사흘이면 돌아와."

전화를 끊고 그는 넥타이를 마저 맸다. 거울 속의 매듭이 비뚤었다. 다시 풀고 다시 맸다. 또 비뚤었다. 3년 동안 그는 넥타이를 직접 맨 적이 없다는 걸, 그 순간까지 알지 못했다.

매일 아침 이 시간이면 현관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가 구두를 신는 동안 조용히 다가와 매듭을 한 번 고쳐 주고, 한 발 물러났다. 말은 없었다. 그도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해가 뜨면 한강이 반짝이는 것처럼.

도혁은 넥타이를 풀어 소파에 던졌다. 노타이로 가면 그만이었다.

현관에서 구두를 신다가 그는 신발장 위를 보았다. 늘 거기 놓여 있던 작은 도자기 접시가 비어 있었다. 차 열쇠와 사원증, 명함 지갑이 매일 아침 그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는 걸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열쇠는 어디 있지.

그는 서재로 가서 어젯밤 벗어 둔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열쇠가 나왔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는데 코트 깃에서 향이 훅 올라왔다. 흰 목련. 비에 젖은 돌. 어젯밤 세아를 호텔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차 안에 가득하던 향이었다.

좋은 향이라고 생각했었다. 세아가 빈에서 산 거라며 손목을 내밀었을 때.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목이 막혔다. 어젯밤 이 코트를 받으려다 멈춰 서 있던 아내의 손끝이 떠올랐다. 그 손이 왜 멈췄는지 그는 묻지 않았다.

도혁은 코트를 옷걸이에 도로 걸었다. 그리고 다른 코트를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 * *

작업실 CCTV는 건물 관리인이 달아 준 구형이었다. 녹화 파일은 날짜별로 한 달 치씩 외장 하드에 쌓였다. 지현이 7월 폴더를 열었다.

7월 19일.

영상을 틀었다. 새벽 1시 50분, 텅 빈 작업실. 1시 55분, 여전히 텅 빈 작업실. 2시 정각까지 화면 구석의 시계만 흘러갔다.

그리고 화면이 튀었다.

시계가 2시 00분에서 갑자기 2시 15분으로 넘어갔다.

지현이 영상을 멈추고 되감았다. 다시 틀었다. 2시 00분. 그리고 2시 15분. 그 사이의 15분이 통째로 없었다.

"……이게 뭐야."

지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 속 텅 빈 작업실을 오래 바라보았다. 2시 15분의 작업실은 2시 00분의 작업실과 똑같았다. 의자 하나, 컵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금고를 8분 동안 열었다 닫았다. 그리고 그 앞뒤로 딱 15분만 지웠다.

실수가 아니었다.

"실장님."

"네."

"이 하드, 우리 말고 누가 만질 수 있어요?"

지현이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작업실 한쪽 구석의 작은 책상을 돌아보았다.

조수 구하람의 자리였다.

책상 위에는 하람이 늘 쓰는 머그컵이 엎어져 있었다. 컵 옆에 코튼볼 한 봉지. 그리고 시향지 몇 장.

서린은 그 책상으로 걸어가 시향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코에 대지 않았다. 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흰 목련. 비에 젖은 돌. 그리고 끝에 남는, 아주 희미한 무화과 잎.

"하람이……? 설마. 걔 여기 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금고 번호도 모르고—"

"모르면 알아낼 수도 있죠. 실장님 번호 누를 때 옆에 서 있던 적 없어요?"

지현의 얼굴이 하얘졌다.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지금 전화해서 불러요. 아니, 경찰부터—"

"아니요."

서린은 시향지를 비닐 봉투에 넣어 입구를 접었다. 목소리는 조용했다. 어젯밤 남편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던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하람 씨 오늘 몇 시 출근이에요?"

"……열 시요."

"그럼 평소처럼 대해 주세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린 씨!"

"시향지 한 장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요. 하람 씨가 '서린 씨 노트 구경하다 호기심에 한 번 섞어 봤어요' 하면 끝이에요. 병이 누구 손에 들어갔는지, 그걸 누가 몸에 뿌리고 공항에 나타났는지는 여전히 모르고요."

지현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서린의 말이 맞았다. 늘 그랬듯이.

"그럼 어떻게 해요."

서린은 금고 쪽을 돌아보았다. 회색 철 상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

"도둑은 한 번 연 문을 또 열어요."

그녀는 봉투를 서랍 깊숙이 넣고 잠갔다. 작업실 창밖에서 빵집 환풍구의 버터 냄새가 다시 흘러들었다. 아침 아홉 시 반이었다.

한서린이 남편 없이 맞은 첫 번째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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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서류는 내가 먼저 냈다   100화. 조건부 청혼

    눈은 오후 두 시에 왔다.아침부터 하늘이 낮았다. 서린은 옥탑방 창가에 앉아 오전 내내 하늘을 보았다. 작업실에는 내려가지 않았다. 지현이 문자로 한 줄만 보냈다. 「오늘 휴무예요. 대표 둘이 정했어요.」 하람은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원료장 앞에 우산 두 개를 세워 둔 사진이었다. 무슨 뜻인지는 쓰지 않았다.열두 시가 넘자 공기가 바뀌었다.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골목의 소리가 한 겹 낮아졌다. 인쇄소 기계 소리도, 빵집 문 종소리도 솜에 싸인 것처럼 멀어졌다. 그리고 코 안쪽이 서늘해졌다. 쇠붙이를 혀끝에 댄 것 같은.서린은 창문을 열었다.첫 송이는 창틀에 앉자마자 녹았다. 두 번째도 그랬다. 세 번째부터는 녹지 않았다. 골목 지붕들이 천천히 하얘졌다.그녀는 휴대폰을 들었다. 문자는 쓰지 않았다. 쓸 필요가 없었다. 그 사람도 창밖을 보고 있을 테니까.대신 그녀는 난로에 불을 붙였다. 주전자에 물을 채워 올렸다. 책상 위를 한 번 닦고, 수첩을 가운데 놓았다가 옆으로 비켜 두었다. 비커는 그대로 두었다. 수첩을 다시 펼쳐 다섯 줄을 소리 없이 한 번 읽었다. 입술만 움직였다. 둘째 줄에서 한 번 멈췄다. 연습하는 자신이 우스워서 그녀는 수첩을 덮었다.창밖을 내려다보니 골목 입구에 검은 차가 섰다. 남자 하나가 내렸다. 우산을 받지 않고, 눈 속을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린은 창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숨지도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면 보이는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 *도혁은 골목 입구에서 차를 보냈다.강민재가 운전석에서 돌아보았다.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우산을 내밀었다. 도혁은 받지 않았다."눈 맞고 갈게.""감기 드십니다.""한 번은 괜찮아."그는 골목을 걸어 들어갔다. 빵집 사장이 가게 앞 눈을 쓸다가 그를 보고 빗자루를 멈췄다. 1년 넘게 이 골목 입구에 차를 세우던 남자였다. 사장은 아무 말 없이 턱으로 빨간 벽돌 건물을 가리켰다. 가 보라는 뜻이었다.계단 아래에서 그는 멈췄다. 가을에 그녀의 캐리

  • 이혼 서류는 내가 먼저 냈다   99화. 첫눈 전날

    서린은 새벽 네 시에 비커를 꺼냈다.옥탑방 책상 위에 원료병이 스무 개쯤 늘어서 있었다. 작업실에서 하나씩 들고 올라온 것들이었다. 베르가모트, 삼나무, 향나무, 리넨 계열의 알데하이드, 재스민 앱솔루트 한 방울 분량, 제라늄, 그리고 머스크 두 종류.12월의 첫 주였다.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찬 공기가 들어왔다. 아직 눈 냄새는 아니었다. 눈이 오기 전의 공기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먼지가 가라앉고, 소리가 낮아지고, 쇠붙이 같은 서늘함이 코 안쪽을 건드리는. 오늘 새벽 공기에는 그게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그녀는 수첩을 펼쳤다. 「청혼받는 조건」 다섯 줄 다음 장에 배합이 적혀 있었다. 몇 번을 지우고 다시 쓴 흔적이 있었다.「새 향 — 이름 없음. 둘이 쓰는 것.」처음에는 도혁을 위한 두 번째 향을 만들려고 했다. 첫눈이 곧 떨어질 테니까. 그 병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녀는 알았다. 파리에서, 구청 앞에서, 그의 손목에서 올라오는 향이 날마다 얇아지고 있었다. 머스크만 남고 베르가모트가 먼저 사라지는 건 병 바닥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그런데 첫눈 같은 걸 하나 더 만드는 건 이상했다. 첫눈은 3년 전 그녀가 혼자 기억한 냄새였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그를 위해.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다른 걸 적었다. 그의 냄새와 그녀의 냄새가 한 병 안에서 싸우지 않는 향.첫눈에서 베르가모트와 삼나무를 가져왔다. 옥탑에서 나무 계단과 리넨을 가져왔다. 그리고 1년 동안 두 사람이 같이 맡은 냄새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구청 앞 군고구마. 파리의 크레페 버터. 센강의 물비린내. 그라스의 재스민이 배었다가 그의 첫눈으로 바뀐 손수건.전부 넣을 수는 없었다. 필요 없는 걸 빼고, 마지막에 한 가지만 남기는 게 그녀의 일이었다.비커에 베르가모트를 떨어뜨렸다. 다섯 방울. 삼나무 세 방울. 향나무 두 방울. 그리고 한참 멈춰 있다가, 재스민을 이쑤시개 끝으로 아주 조금. 그라스의 밭이 아니라 손수건에 남아 있던 만큼만.시향

  • 이혼 서류는 내가 먼저 냈다   98화. 11월

    문자는 아침 여덟 시에 왔다.「하루 하나는 내일로 미룰게. 오늘은 부탁 하나.오후 두 시 사십 분, 성동구청 앞에서 기다릴게.안 와도 돼. 그냥 거기 있을게.」서린은 옥탑방 창가에서 그 문자를 읽었다. 달력을 볼 필요는 없었다. 11월 5일. 1년 전 오늘 그녀는 법원에서 나와 구청에 갔다. 번호표 118번. 2분이 걸렸다.두 시 사십 분. 그녀가 이혼 신고서를 낸 시각이었다. 그걸 이 남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서린은 잠깐 생각했다. 그러다 알았다. 그날 오후 세 시 정각에 N의 메일이 태강에 도착했다. 확인서 등본을 받고 나서 구청에 들렀다면, 신고는 그 전이었을 것이다. 1년 동안 그 시간을 거꾸로 세어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숫자였다.답장은 하지 않았다.그녀는 작업실에 내려가 하루를 보냈다. 무화과 여름 2차 물량의 향 농도를 확인했다. 하람이 만든 다음 시제품을 맡았다. 지현과 점심으로 칼국수를 먹었다. 두 시가 되었을 때 서린은 앞치마를 벗었다.지현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오늘 일찍 가요?""잠깐 나갔다 올게요.""네. 천천히 와요."지현은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입꼬리만 조금 올라가 있었다.계단을 내려가는데 하람이 원료장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서린 씨, 립밤 발랐어요? 밖에 바람 차요.""……하람 씨.""네?""아무것도 아니에요."하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서린은 계단을 마저 내려가다가 가방에서 립밤을 꺼내 발랐다. 향을 넣지 않은 립밤이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오늘은 제 냄새가 아니라 거리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구청까지는 걸었다. 성수의 공장 골목을 지나 큰길로 나갔다. 금속을 깎는 기름 냄새, 가죽 공방의 무두질 냄새, 새로 생긴 카페의 원두 볶는 냄새. 1년 전 그날은 택시를 탔다. 법원에서 구청까지, 창밖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오늘은 신호등마다 멈춰 서서 냄새를 하나씩 맡았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기다리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 *구청 앞 계단은 1년 전과 같았

  • 이혼 서류는 내가 먼저 냈다   97화. 하람의 향

    라벨은 하람이 직접 붙였다.작업실 작업대 위에 30밀리리터 병 스무 개가 두 줄로 서 있었다. 투명한 유리 안에 연한 초록빛이 도는 향. 하람은 핀셋으로 라벨을 집어 병 목 아래에 한 장씩 붙였다. 숨을 참고 있었다. 한 장 붙일 때마다 숨을 내쉬었다.「무향 — 무화과 여름」그 아래 작은 글씨로 한 줄.「조향 구하람」서린은 창가에 기대어 그 모습을 보았다. N이라는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 무향 병에 붙는 건 처음이었다. 라벨티 표상진은 처음에 반대했다. 두 번째 라인을 신인 이름으로 내는 건 모험이라고. 서린은 숫자를 보여 주었다. 파리 전시 기간 동안 무화과 시제품을 맡아 본 사람들의 반응지, 성수 팝업 재방문율, 그리고 하람이 석 달 동안 고친 버전 스물세 개의 기록. 표상진은 한참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숫자가 좋네요, 그럼 된 거죠."손 떨려요."하람이 말했다. 핀셋 끝이 정말로 조금 떨리고 있었다."떨어도 돼요. 삐뚤어지면 다시 붙이면 돼요.""이건 다시 붙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첫 병인데."지현이 커피를 들고 다가와 하람의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았다."하람 씨, 서린 씨 첫 병 라벨 얼마나 삐뚤었는지 알아요? 10년 전에. 제가 봤거든요. 이만큼."지현이 손가락으로 기울기를 그려 보였다. 과장이었다. 서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람이 웃었다. 핀셋 끝의 떨림이 멎었다.마지막 병에 라벨이 붙었다. 하람은 핀셋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붙였어요.""네. 붙였어요."서린은 병 하나를 집어 뚜껑을 열었다. 손목에 한 번 뿌렸다.초록 잎이 먼저 왔다. 한여름 오후,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서 있을 때의 풋내. 이어서 덜 익은 열매를 쪼갰을 때의 하얀 즙 냄새. 그리고 끝에 우유처럼 부드럽게 남는 따뜻함. 파리에서 돌아온 날 옥탑방 책상에서 처음 맡았을 때보다 끝이 길어져 있었다. 서린이 쪽지에 적어 둔 대로."끝을 늘렸네요.""네. 샌달우드 조금이랑, 쌀 증류 원료

  • 이혼 서류는 내가 먼저 냈다   96화. 윤정숙의 봄

    전화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왔다."한서린 씨죠?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옛날에 향기 봉사 오셨을 때 수간호사였던…….""기억해요. 배 선생님."서린은 작업대에서 손을 떼고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스물다섯 살 때, 병동 복도 끝 작은 방에서 환자들에게 냄새를 물어 가며 병을 채우던 때였다. 그때 그녀에게 방을 내준 사람이었다. 올해 초 도혁이 찾아갔을 때, 그녀가 두고 간 샘플 상자를 아직 버리지 못했다고 말한 사람이기도 했다."다름이 아니라요. 요즘 봉사 오시는 분이 한 분 계신데요. 차성준 님 사모님이세요."서린의 손가락이 작업대 모서리를 짚었다."두 달째 매주 오세요. 환자분들 손 닦아 드리고, 말벗 해 드리고. 그런데 그분이 자꾸 비누를 만드세요. 장미 비누요. 환자분들한테 옛날 냄새를 맡게 해 드리고 싶다고. 근데 그게 잘 안 되시나 봐요. 매번 냄새가 이상하다고 속상해하세요.""…….""그분이 서린 씨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해요. 모른 척하고 한 번만 와 주시면 안 될까요."서린은 창밖을 보았다. 10월 끝자락의 햇빛이 인쇄소 지붕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목요일에 갈게요."* * *병동은 스물다섯 살 때와 거의 같은 냄새가 났다.소독약, 삶은 수건, 오래된 리놀륨 바닥. 그 아래에 사람의 냄새가 있었다. 오래 누워 있는 몸의 냄새, 약 냄새, 그리고 누군가 가져온 귤 껍질. 서린은 복도 입구에서 숨을 한 번 고르고 들어갔다.간호사실 앞에서 배 선생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새 머리가 하얗게 센 얼굴이었다. 배 선생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그리고 책상 아래에서 낡은 종이 상자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뚜껑에 서린의 글씨로 「향기 봉사 — 샘플」이라고 적혀 있었다."아직 있어요. 가끔 열어 봐요. 냄새 다 날아갔는데도요."서린은 상자 모서리를 한 번 쓸어 보았다. 스물다섯 살의 글씨가 거기 있었다. 지금보다 동글동글했다.휴게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창가 테이블에 윤정숙이 앉아

  • 이혼 서류는 내가 먼저 냈다   95화. 조건 목록

    서울은 은행잎 냄새로 서린을 맞았다.인천에서 성수까지 오는 택시 안에서 그녀는 창문을 조금 내렸다. 한 달 사이에 가을이 깊어져 있었다. 가로수가 노랗게 물들었고, 길가에 떨어진 열매가 밟혀 쿰쿰한 냄새를 올렸다. 파리에서 한 달 동안 맡지 못한 냄새였다. 좋은 냄새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반가웠다.골목 입구에서 택시를 내리자 빵집 사장이 가게 앞을 쓸다가 빗자루를 멈췄다."어머, 왔네! 파리 갔다며. 빵은 거기가 낫지?""여기가 나아요.""거짓말도 잘해."사장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금빵 두 개를 봉지에 담아 주었다. 돈은 받지 않았다. 봉지에서 버터와 굵은소금 냄새가 올라왔다. 파리의 버터보다 짰다. 서린은 그게 좋았다.캐리어를 끌고 계단 앞에 섰다. 한 달 전 도혁이 캐리어를 내려놓고 바퀴를 돌려놓았던 자리였다. 이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린은 손잡이를 접고 캐리어를 들었다. 가벼웠다. 병 열한 개는 파리에 두고 왔다. 전시가 끝나면 이안이 하나씩 싸서 보내 주기로 했다.올라가는 길에 2층 작업실 문을 잠깐 열어 보았다. 불은 꺼져 있었다. 원료장 유리문 너머로 갈색 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서린은 문틈에서 숨을 들이쉬었다. 알코올, 나무 선반, 누군가 새로 들여놓은 오렌지꽃 원료. 그리고 하람 책상 모니터 옆의 로즈마리 화분.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틀어지지 않은 냄새였다. 그녀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옥탑방 문을 열자 먼지 냄새와 함께 낯선 냄새가 났다. 무화과였다. 누군가 책상 위에 시향지를 한 장 꽂아 두고 갔다. 그 옆에 쪽지.「두 번 고쳤어요. 이제 진짜 무화과예요. — 하람」서린은 시향지를 코에 댔다. 초록 잎, 덜 익은 열매의 풋내, 그리고 끝에 우유 같은 부드러움. 한 달 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그녀는 쪽지 아래에 연필로 한 줄을 적었다.「좋아요. 끝을 조금만 더 길게.」* * *그날 밤 옥탑방은 시끄러웠다.지현이 족발을 사 왔고, 하람이 떡볶이를 사 왔고, 승아가 소주 세 병을 들고 왔다. 파리 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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