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인은 휴대폰을 내려다본 채 대꾸했다.
“그런가 보네요.”
“깜찍하게.”
끝이었다.
재하는 잠깐 서인을 바라봤다.
정작 흔적을 남긴 본인은 관심조차 없는 얼굴이었다.
그도 별말 없이 다시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인 역시 아무렇지 않게 오늘 일정을 넘겼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나갈게요.”
“그러세요.”
현관까지 걸어가던 서인은 생각난 듯 멈췄다.
“아, 재하 씨.”
“네.”
“오늘 저녁 늦어요.”
“알겠습니다.”
“먼저 주무세요.”
평소처럼 나온 말이었다.
재하도 평소처럼 대답했다.
“네.”
서인은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올게요.”
“다녀와요.”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인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법무법인 세경에서 온 메시지가 떠 있었다.
[한서인 고객님, 금일 오전 10시 상담 예약 확인드립니다.]
서인은 메시지를 읽고 화면을 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 안으로 들어가 지하 주차장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도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
오전 9시 55분.
서인은 법무법인 세경이 입주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예약 시간보다 5분 빨랐다.
차에서 내리기 전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일곱 통.
전부 아버지였다.
서인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전화가 다시 울렸다.
[아버지]
여덟 번째였다.
이번에는 받았다.
“네.”
― 너 지금 어디냐.
인사도 없었다.
서인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이에요.”
― 회사 아니야?
“조금 있다 갈 거예요.”
― 지금 당장 본사로 와.
목소리가 다급했다.
평소라면 화부터 냈을 사람이었다.
오늘은 달랐다.
그 차이가 한성의 상황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서인은 입술을 다물었다.
“오후에 갈게요.”
― 오후가 문제가 아니야. 권 서방이 연락을 안 받아.
서인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아버지.”
― 내가 어제 분명히 얘기했는데 아무 대답도 없잖아. 네가 말 좀 해. 우진에서 급한 불만 꺼주면—
“제가 하지 말라고 했어요.”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짧은 정적이었다.
― 뭐?
“재하 씨한테 한성 도와주지 말라고 했다고요.”
이번 침묵은 조금 더 길었다.
서인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9시 57분.
― 너 미쳤어?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나중에 얘기해요.”
― 한서인!
“저 약속 있어서 끊을게요.”
― 너 지금 어디야?
서인은 잠시 망설였다.
굳이 거짓말할 이유는 없었다.
“세경이요.”
― 거긴 왜?
“변호사 만나려고요.”
― 변호사를 왜 만나.
서인은 차 문을 열었다.
높은 건물의 유리 외벽에 아침 햇빛이 반사됐다.
“이혼하려고요.”
이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인은 휴대폰을 귀에서 조금 떼어 화면을 확인했다.
통화 중이었다.
“아버지?”
― …….
“듣고 있어요?”
그제야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돌아왔다.
―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서인은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고 법무법인 세경의 이름이 걸린 건물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재하 씨랑 이혼한다고요.”
이번에는 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전화를 끊었다.
화면에는 정확히 오전 10시가 떠 있었다.
서인은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법무법인 세경의 문을 열었다.
법무법인 세경의 27층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예약자 이름을 확인한 직원이 서인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차도윤 변호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서인은 익숙한 복도를 따라 걸었다.
세경과 한성은 오래전부터 거래가 있었다.
계열사 인수부터 주주총회, 해외 법인 분쟁까지.
한성의 이름을 달고 일하기 시작한 뒤로 서인도 몇 번 이곳을 드나들었다.
차도윤을 처음 만난 것도 그때였다.
한성 측 외부 자문 변호사.
함께 일한 건 서너 번 정도였다.
서류를 주고받고, 회의를 하고, 가끔 식사를 했다.
그 정도.
“여기입니다.”
직원이 문을 열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창가에 서 있던 남자였다.
단정하게 떨어지는 짙은 회색 슈트.
큰 키에 반듯한 어깨.
서류를 보고 있던 남자가 서인을 발견하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서인 씨.”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러게요.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네. 도윤 씨는요?”
“저도요. 앉아요.”
도윤이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주었다.
“고마워요.”
서인이 자리에 앉자 그가 맞은편으로 돌아갔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서류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커피가 두 잔.
도윤이 그중 하나를 서인 쪽으로 밀어주었다.
“카페라떼예요. 이거 좋아하죠?”
서인의 손이 멈췄다.
“제 거예요?”
“네.”
도윤이 웃었다.
“아니면 제가 두 잔 다 마셔야 되니까 좋아한다고 해요.”
서인이 피식 웃으며 컵을 집어 들었다.
따뜻했다.
“제가 카페라떼 마시는 건 어떻게 기억했어요?”
“회의할 때마다 드셨잖아요.”
“그걸 기억해요?”
“그냥 기억나던데요.”
도윤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서류를 펼쳤다.
“요즘도 드시는지는 몰라서 시럽은 안 넣었고요.”
서인은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셨다.
딱 평소 마시던 맛이었다.
“잘 마실게요.”
“입에 맞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전부였다.
도윤은 곧바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보내주신 자료는 전부 확인했어요.”
“빠르네요.”
“급하게 잡은 일정이었잖아요.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멈췄다.
“그전에 하나만 확인할게요.”
“네.”
“제가 맡는 게 괜찮겠어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왜요?”
“아는 사람 이혼 서류를 보는 게 아주 편한 일은 아니니까요.”
도윤은 웃으며 덧붙였다.
“서인 씨가 불편할 수도 있고요.”
서인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저는 도윤 씨가 하는 게 편한데.”
도윤의 손이 잠깐 멎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서인은 알아차리지 못했을 만큼.
곧 아무렇지 않게 서류를 한 장 넘겼다.
“그래요?”
“네.”
이번에는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펜 끝이 종이 위에 가볍게 닿았다.
잠시 후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가 할게요.”
금요일 오후. 서인은 사무실에서 마지막 메일을 보내고 노트북을 덮었다. 시계는 5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비서가 가져다 놓은 검은색 드레스 커버가 걸려 있었다. 오늘 저녁 일정은 우진문화재단 후원 행사였다. 한성의 자구안 협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바빴지만, 오래전부터 잡혀 있던 공식 일정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행사장은 청담동의 작은 갤러리였다. 정식 만찬보다는 후원자와 재단 관계자들이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자리라 규모는 크지 않았다. 서인이 도착했을 때 이미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검은 드레스 위로 얇은 숄을 걸친 채 몇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한 전무님.” 재단 이사가 반갑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잘 지내셨어요?” “나는 똑같죠. 그런데 권 대표는?” “회사에서 바로 온다고 했어요.” “웬일이래. 오늘은 따로 오나 봐요?” 서인이 웃었다. “오늘 타이밍이 좀 안 맞았네요.” “그래도 금방 오겠죠?” “네. 거의 다 왔다고 했어요.” 그때 입구 쪽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서인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권재하였다. 짙은 네이비 슈트에 넥타이는 없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놓은 탓에 평소보다 목선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조명 아래로 걸어 들어오는 얼굴은 멀리서도 선이 또렷했다. 이마에서 곧게 떨어지는 높은 콧대와 그 아래 단정하게 다물린 입술, 사람을 볼 때마다 느슨하게 휘어지는 긴 눈매까지. 반듯한 차림을 하고 있으면 차가워 보이는 얼굴인데, 오늘은 셔츠 깃이 조금 풀어진 것만으로 인상이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아침마다 현관에서 보던 단정한 모습보다 한결 느슨했다. 재하는 입구에서 재단 관계자와 악수하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지나가던 여자 둘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한 명은 걸음을 늦추며 한 번 더 돌아보기까지 했다. 서인은 다시 잔을 들었다.
식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갈비찜은 적당히 데워져 있었고, 와인은 한 병을 다 비우지 않았다. 서인은 한성의 자구안 이야기를 조금 했다. 오전에 회신한 자료에서 매각 대상이 하나 더 늘었다는 얘기였다. 재하는 들으면서 필요한 말만 했다. “그쪽은 매수자 있어요?” “두 군데요. 아직 조건 보는 중이고.” “급하게 팔면 가격 많이 빠질 텐데.” “알아요. 그래도 현금화 순서는 앞쪽이에요.” “그럼 경쟁 붙이는 게 낫겠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대화는 그 정도였다. 식사를 마친 서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올라갈게요.” “네.” 빈 잔을 싱크대에 내려놓은 서인이 주방을 나갔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차츰 멀어졌다. 재하는 식탁에 남아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잔 가장자리에 묻은 와인이 입술을 적셨다. 삼키고 나서도 이상하게 입안이 말랐다. 재하는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욕실에 들어온 재하는 샤워기를 틀었다. 뜨거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하루 종일 굳어 있던 목덜미와 어깨가 물을 맞으며 느슨하게 풀렸다. 재하는 눈을 감은 채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내일 오전에 확인해야 할 인수안과 월요일 투자심의위원회, 아직 넘어오지 않은 현지 법무법인의 수정 계약서까지. 머릿속에는 평소처럼 일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그 사이로 전혀 상관없는 향 하나가 스며들었다. 달고 서늘한 향. 재하는 눈을 감은 채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켰다. 욕실의 습기와 물 냄새뿐이었다. 그런데 코끝에는 조금 전 맡았던 향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냉장고 앞에서 서인의 뒤로 몸을 숙였을 때였다. 열린 문 안쪽에서는 찬 공기가 흘러나오는데, 바로 앞에 닿은 몸만 따뜻했다. 얇은 가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등에 맞닿았던 가슴. 고개를 돌린 순간에는 젖은 머리카락 몇 올이 턱 아래를 스쳤다. 목덜미 가까이에서 막 씻은 피부의 깨끗한 향이 났다. 샴푸인지 바디워시인지. 구분할 생각도 하지
뒤에서는 다시 칼질 소리가 났다.서인은 찬장을 열어 접시 두 장을 꺼냈다.결혼한 해에 집들이를 했을 때 선물받은 접시였다. 손님들에게 내놓으라고 받은 고가의 식기였는데, 정작 손님보다 두 사람이 더 자주 썼다.하나씩 식탁 위에 놓았다.팬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얇게 저민 마늘이 기름에 닿자 작은 소리와 함께 향이 퍼졌다.“배고파요?”재하가 면을 건지며 물었다.“조금.”“금방 돼요.”“네.”팬 위로 면이 한 번 크게 뒤집혔다.서인은 식탁에 기대 탄산수를 한 모금 더 마셨다.***오후에는 재하가 집을 나섰다.주말의 우진 본사는 평일보다 지나치게 조용했다.다음 주 투자심의위원회에 올릴 해외 법인 인수안 때문에 재무담당 임원과 법무팀장만 출근해 있었다.회의는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환율 변동분까지 넣으면 이쪽 수익률은 다시 봐야 합니다.”재하가 자료 한 장을 넘겼다.“낙관치 말고 보수적으로 다시 잡죠.”“네. 월요일 오전까지 수정하겠습니다.”“법무 검토는요?”“조건부 승인 가능합니다. 현지 계약서에서 두 조항 정도만 조정하면 됩니다.”재하는 표시된 부분을 눈으로 훑었다.몇 가지를 더 짚고 회의를 끝냈다.임원들이 빠져나가고 문이 닫혔다.조용해진 회의실에서 재하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업무 연락 사이로 메시지가 수십 개 쌓여 있었다.대학 시절부터 이어진 한국인 친구들의 단체방이었다. 대부분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었다. 유학을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와 가업에 들어간 놈도 있었고, 자기 사업을 시작한 놈도 있었다.다음 달 결혼하는 친구가 청첩장을 올려놓은 모양이었다.[결국 하네][양가에서 날짜 잡아준 지 몇 년 됐냐][2년][오래 버텼다][이제 도망가면 신문에 난다][축하한다]신랑이 웃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냈다.잠시 뒤 메시지가 다시 올라왔다.[유부남들한테 진지하게 묻는다][뭔데][결혼할 만하냐][그걸 이제 물어보냐][권재하한테 물어봐]재하가 화면을 내리던 손을 멈췄다.곧바로 답이 달
서인은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재하는 다시 메일을 읽었다.조금 전까지 어디를 읽고 있었는지 찾는 데 몇 초가 걸렸다.***주말 아침이었다.서인은 늦게 눈을 떴다.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이 침대 끝까지 번져 있었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자 10시가 조금 넘었다.한성 재무팀에서 밤새 수정한 자구안이 와 있었다. 매각 대상 자산과 상환 일정을 다시 맞춘 자료였다.몇 군데 숫자를 확인하고 의견을 달아 회신했다. 마지막 메일까지 보내고 나니 11시가 가까웠다.그제야 노트북을 덮었다.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커피 향이 먼저 올라왔다.재하는 주방에 있었다.운동을 마치고 막 돌아온 모양이었다. 땀에 젖은 검은 티셔츠가 몸에 얇게 들러붙어, 넓게 벌어진 어깨와 가슴에서 허리로 좁아지는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서인은 그쪽을 잠깐 보고 냉장고를 열었다.“밥은?”“아직.”재하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파스타 해먹으려고요.”“나도 먹을래요.”“그래요.”재하는 익숙하게 냉장고 안을 훑었다. 마늘과 파슬리를 꺼내고 찬장에서는 페페론치노를 찾아냈다.그걸 본 서인이 말했다.“알리오 올리오네요. 재하 씨가 해주는 거 맛있는데.”재하는 별말 없이 재료를 들고 조리대로 갔다.서인은 냉장고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평소 마시던 탄산수가 다른 병들 뒤로 밀려 있었다. 허리를 숙여 팔을 넣었지만 손끝에 닿은 병목이 미끄러지며 다시 안쪽으로 굴렀다.서인이 냉장고 선반을 짚고 조금 더 몸을 숙였다.그때 바로 뒤로 재하가 다가왔다.서인의 등 뒤에 선 재하가 왼손으로 열린 냉장고 문 위쪽을 짚었다. 오른팔은 서인의 어깨 너머로 길게 뻗었다.탄산수를 대신 꺼내려는 것뿐이었다.문제는 자세였다.냉장고 안쪽을 들여다보느라 허리를 숙인 서인과, 그 위로 몸을 낮춘 재하 사이에는 애초에 거리를 둘 만한 공간이 없었다.운동으로 열이 오른 재하의 가슴이 서인의 등에 닿았다.땀에 젖은 티셔츠가 얇은 가운에 눌렸다. 단단하게 잡힌 가슴의 굴곡이 천 두 장을 사이에 두고
서인은 그대로 방으로 올라갔다.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서로 얼굴을 제대로 볼 시간조차 없었다.둘 다 아침 일찍 나갔고 늦게 들어왔다. 같은 집에 살아도 하루 종일 마주치지 않는 날이 있었고, 운이 좋으면 아침 식탁에서 십 분 남짓 얼굴을 보는 게 전부였다.금욕을 시작한 뒤 두 번째 주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금요일에는 서인이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왔다.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보던 재하가 현관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오늘은 일찍 왔네요.”“저녁 약속이 취소됐어요.”“왜요?”“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대요.”재하가 다시 화면을 보며 물었다.“누가요?”“도윤 씨요.”트랙패드를 움직이던 손이 잠깐 멈췄다.“차도윤 변호사랑 저녁도 먹는 사이가 됐습니까?”서인은 구두를 벗다 말고 재하를 봤다.“사적인 약속 아니었어요.”“저녁 약속이 사적인 게 아니면 뭡니까?”“이혼 서류 때문에 따로 확인할 게 있었어요. 겸사겸사 저녁 먹기로 한 거고.”재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건 사무실에서도 볼 수 있지 않나.“서인이 그를 잠깐 바라봤다.“재하 씨.”“네.”“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예요.”잠깐 조용해졌다.재하가 먼저 시선을 거뒀다.“알겠습니다.”대답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노트북 화면을 한 번 넘긴 뒤 재하가 덧붙였다.“그래도 조심해요.”“뭘요?”“우리 아직 발표 안 했잖아요. 괜히 둘이 있는 사진이라도 찍히면 설명하기 귀찮아집니다.”맞는 말이었다.앞으로 두 달 동안은 밖에서 정상적인 부부로 보여야 했다. 이혼을 맡은 변호사와 단둘이 저녁을 먹는 사진은 쓸데없는 추측을 만들기에 충분했다.“그건 그렇네요.”“네.”“앞으로 조심할게요.”서인은 가방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향했다.“밥은요?”“아직요.”“저녁 먹을래요? 간단하게.”재하가 노트북에서 눈을 들었다.“그래요.”서인이 냉장고를 열었다.“와인도 하나 있는데.”“뭔데요?”“선물 받은
월요일 오전 8시 10분.서인이 주방으로 내려왔을 때 재하는 이미 아침을 먹고 있었다.흰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이었다. 재킷은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었고, 한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일찍 일어났네요.”“오늘 회의가 좀 빨라서요.”서인은 맞은편에 앉아 커피부터 한 모금 마셨다. 휴대폰을 확인하자 차도윤에게 온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오늘 오후에 법원 쪽 일정 확인해서 연락드릴게요.]짧게 답장을 보내는 사이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먼저 갑니다.”“네. 다녀와요.”재하가 재킷을 집어 들고 지나가려던 순간, 서인이 문득 그를 불렀다.“잠깐만요.”“왜요?”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하의 앞으로 다가갔다.넥타이가 조금 틀어져 있었다.별생각 없이 손을 뻗어 매듭을 바로잡았다. 넥타이를 가볍게 당긴 뒤 흐트러진 셔츠 깃까지 정리하는 동안 재하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됐어요.”서인이 손을 떼려던 순간 재하가 고개를 숙였다.시선이 마주쳤다.가까웠다.재하의 시선이 잠시 서인의 얼굴에 머물렀다.서인이 먼저 손을 내렸다.“이제 가도 돼요.”“네.”재하는 아무렇지 않게 재킷을 걸쳤다. 현관으로 향하면서 방금 서인이 바로잡아준 넥타이를 손끝으로 한 번 쓸어내린 뒤 그대로 집을 나섰다.***오후에는 도윤에게 연락이 왔다.예상했던 대로 절차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두 사람의 이혼 의사가 확실한 데다 재산 문제까지 이미 정리되어 있어 복잡하게 끌 것도 없었다.“그럼 다음 주에 법원에서 봐요.”“네.”“제가 시간 확정되면 다시 연락할게요.”“고마워요.”통화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도윤이 서인을 불렀다.“서인 씨.”“네?”“요즘도 점심 거르면서 일해요?”뜬금없는 질문에 서인이 웃었다.“그건 갑자기 왜 물어요?”“지난번에 챙겨 먹으라고 했는데 왠지 안 들었을 것 같아서요.”“저 그렇게 말 안 듣는 사람 아니에요.”“그럼 오늘은 먹었어요?”서인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오늘 점심은 회의실에서 커피 한 잔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