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예상했던 첫마디였다.
서인은 가방을 내려놓고 회장실 소파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한성그룹 회장 한정호가 서 있었다.
“앉으세요, 아버지.”
“내가 지금 앉게 생겼어?”
“저는 앉을게요.”
한정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알아요.”
“아는데 이혼을 해?”
“네.”
“하필 지금?”
“지금이라서 하는 거예요.”
한정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미쳤구나.”
서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두 번째 듣는 말이었다.
“권 서방한테 지원하지 말라고 한 것도 사실이야?”
“네.”
“왜!”
“한성 일이니까요.”
“우진이 남이야? 권 서방이 네 남편인데!”
“곧 아니게 될 거고요.”
한정호의 표정이 굳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진에서 검토하던 지원안이 있었어.”
한정호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오늘 아침 전부 보류됐어.”
“…….”
“신규 자금 지원도, 지급보증도, 공동사업 선투자까지 전부.”
한정호가 서인을 노려봤다.
“네가 권 서방한테 그딴 말을 해서!”
“제가 부탁한 건 맞아요.”
“부탁?”
한정호의 목소리가 터졌다.
“네가 우진 손을 직접 잘라놓은 거야!”
“우진 손 아니면 못 버티는 회사면 이미 문제가 있는 거잖아요.”
“한서인!”
이번에는 한정호가 책상 위로 휴대폰을 내리쳤다.
“너 지금 회사 망하는 게 장난 같아?”
“장난 같았으면 여기 안 왔어요.”
“너 때문에 채권단 분위기까지 달라졌어!”
서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저 때문에요?”
“우진에서 손 뗐다는 얘기 돌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다들 한성이 끝났다고 생각할 거야!”
“그럼 우진이 계속 돈을 넣어줘야 끝난 회사가 아닌 건가요?”
“지금 말장난하자는 거야?”
“아뇨. 현실적인 얘기 하는 거예요.”
“현실적인 얘기?”
“단기차입금 만기 막는다고 끝나는 상황 아니잖아요.”
서인은 테이블 위 재무자료를 집어 들었다.
“한성건설 PF, 유통 쪽 손실, 계열사 지급보증.”
항목을 짚을 때마다 자료가 한 장씩 넘어갔다.
“우진 돈 들어오면 급한 불은 끄겠죠.”
“그러니까!”
“그다음에는요?”
한정호가 입을 다물었다.
“몇 달 뒤에 또 손 벌리게요?”
“시간을 벌자는 거잖아!”
“그 시간 동안 뭘 하실 건데요?”
“…….”
“또 버티실 거잖아요.”
한정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팔 건 팔고, 접을 건 접어야죠.”
“말이 쉽지.”
“어려우니까 지금까지 미뤘잖아요.”
“서인아.”
이번에는 목소리가 낮아졌다.
“우진 자금만 들어오면 정말 시간을 벌 수 있어.”
서인은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도 한성 살리고 싶어요.”
한정호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이러는 거예요.”
“…….”
“살리는 척하면서 빚만 더 늘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한정호는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잠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우진이 왜 남이야.”
“…….”
“네 남편 집안이야.”
“곧 아니게 될 거고요.”
“결혼이 장난인 줄 알아?”
“아뇨.”
“네 결혼이 너 하나만의 문제인 줄 알아?”
서인은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럼 누구 문제인데요?”
“뭐?”
“제 결혼인데.”
“…….”
“누구 문제냐고요.”
한정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서인은 그 얼굴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 3시에 채권단 회의 있죠.”
“너 지금 어디 가.”
“회의 준비하러요.”
“이 얘기 안 끝났어.”
“저는 끝났어요.”
“한서인.”
서인이 가방을 들고 아버지를 돌아봤다.
“그리고 재하 씨한테 다시 연락하지 마세요.”
“…….”
“제가 막은 거니까 저한테 화내세요.”
서인은 그대로 회장실을 나왔다.
회장실 문이 닫히자 밖에서 기다리던 비서가 곧바로 다가왔다.
“상무님.”
“네.”
“채권단 회의 자료 수정본 나왔습니다.”
“회의실에 올려놔 주세요. 바로 갈게요.”
“네. 그리고…….”
비서가 태블릿을 확인했다.
“이번 주말 일정 관련해서도 확인 요청이 왔습니다.”
서인이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정이요?”
“우진문화재단 행사요.”
아.
그제야 기억났다.
몇 달 전부터 잡혀 있던 우진문화재단 후원 자선 행사였다. 부부 동반 참석으로, 이미 참석 명단과 보도자료까지 배포된 상태였다.
“취소하기는 어렵겠네요.”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그대로 가죠.”
“네. 권재하 대표님 측에도 확인하겠습니다.”
“제가 할게요.”
서인은 휴대폰을 꺼냈다.
[토요일 일정 기억하죠?]
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네.]
[그대로 참석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러죠.]
서인은 휴대폰을 끄려 했다.
그때 비서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상무님, 그리고 일정이 하나 변경됐습니다.”
“뭔데요?”
“행사 장소가 바뀌었습니다.”
“어디로요?”
비서가 태블릿 화면을 돌려 보여주었다.
화면에 뜬 장소는 서울이 아니라 강원도에 있는 우진그룹 계열 리조트였다.
서인은 일정표를 내려다봤다.
“원래 당일 아니었어요?”
“맞습니다. 그런데 후원 기업 간담회가 다음 날 오전으로 추가돼서요.”
비서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1박 2일 일정으로 변경됐습니다.”
토요일 오후 2시 체크인. 저녁 공식 만찬에 이어 다음 날 오전에는 후원 기업 간담회가 잡혀 있었고, 체크아웃은 오전 11시였다.
서인은 일정표를 끝까지 훑고 다시 위로 시선을 올렸다.
“숙박은요?”
“이미 배정됐습니다.”
“각자?”
비서의 표정이 묘해졌다.
“……부부 동반 행사라.”
서인은 대답을 기다렸다.
“스위트룸 하나입니다.”
서인은 끝내 메시지를 보내지 못했다. 입력창에 남아 있던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방에 올라가 불을 끄고 누웠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재하가 돌아온 건 자정이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아래층에서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이어졌다.서인은 눈을 감았다.발소리는 복도를 지나 재하의 침실 앞에서 멈췄다. 문이 닫힌 뒤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마주쳤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먼저 대화를 청했을까, 아니면 또 아무렇지 않은 척했을까. 어느 쪽이든 자신이 없었다. 베개를 고쳐 베고 다시 눈을 감았지만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서인은 평소보다 늦게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주방에서는 재하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출근 준비를 모두 마친 차림이었다. 식탁 위에는 접어놓은 신문과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늦었네요.” “잠을 좀 설쳐서요.” “피곤하겠네.” 재하는 컵을 내려놓았다. 서인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재하가 아직 집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했지만, 막상 마주 서고 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늘 일찍 나가요?” “네. 아침 회의가 있어서.” 서인은 컵에 물을 따랐다. 재하는 식탁 위에 놓인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아침은 챙겨 먹어요.” “네.” “다녀올게요.” “잘 다녀와요.” 재하는 그대로 현관으로 향했다. 서인은 컵을 든 채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현관문이 닫히고 나서도 한동안 주방에 서 있었다.*** 한성에 도착한 뒤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오전 회의에서는 협력업체 지급 일정이 다시 문제가 됐다. 일부 업체가 제시된 분할 지급안에 동의하지 않았고, 채권단에서도 추가 담보 자료를 요구하고 있었다. 서인은 재무팀장에게 수정안을 요청하고 법무팀과 대응 방향을 논의했다. 지급 일정이 더 밀리면 협력업체들이 집단 대응에 나설 가능성도 있었다.
일요일 아침, 서인은 평소보다 늦게 눈을 떴다. 열 시가 조금 넘었다. 문득 어젯밤 재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자정이 지나도록 그를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 잠들었다. 서인은 잠시 누워 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은 조용했다. 서리는 방석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자고 있었고, 주방에도 아무도 없었다. 재하가 운동하러 나간 모양이었다. 서인은 커피머신에 캡슐을 넣고 컵을 받쳐놓았다.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냉장고를 열어 아침으로 먹을 만한 것이 있는지 살폈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재하가 검은 운동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운동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있었다. 서인은 냉장고 문을 닫았다. “왔어요?” “잘 잤어요?” “네. 운동하고 온거예요?” “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대답이었다. 서인은 조금 마음이 놓여 커피머신 쪽을 가리켰다. “커피 마실래요? 지금 막 내렸는데.” “괜찮아요.” 재하는 운동화를 벗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 “아침은요?” “나중에요.” 그는 더 말하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커피머신에서 추출이 끝났다는 소리가 났다. 서인은 컵을 꺼내 식탁에 앉았다. 운동을 마치고 곧장 씻으러 올라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재하가 아침을 먹지 않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주방에 잠깐 들르지도, 서인에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서인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젯밤 일 때문이겠지. 그렇게까지 기분이 상할 질문이었나 싶다가도, 재하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은 관계를 끝내겠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재하가 앞으로도 계속 자신과 함께할 거라고 믿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사이의 어디쯤에 자신의 생각이 있었는데, 막상 설명하려니 서인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점심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재하는 샤워를 마친 뒤 서재로 들어갔고, 서인은 거실에서 한성의 자료를 확인했다. 협력업체별 미지급 대금
집에 도착했을 때는 열한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자 서리가 거실에서 걸어 나왔다. 서인은 가방을 내려놓고 허리를 숙였다. 서리가 발치에 머리를 비비자 녀석을 안아 올렸다. 얼굴을 살피고 배를 가볍게 만져봤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오늘은 괜찮은가 봐요.” “네. 다행이에요.” 서인은 서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녀석은 잠깐 두 사람 주변을 맴돌다가 거실 안쪽으로 사라졌다. 재하는 구두를 벗고 손목시계를 풀었다. “피곤하면 먼저 씻어요.” “재하 씨는요?” “물 좀 마시고요.” 서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드레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지웠다. 머리를 묶었던 핀까지 빼고 나니 목덜미가 한결 편해졌다. 세면대 앞에 서서 얼굴을 닦던 서인은 문득 집들이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윤지아가 재하를 좋아했다는 소문. 서인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 수건을 걸어두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재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반쯤 비운 물잔이 놓여 있었다. 서인은 주방에서 물을 한 잔 마신 뒤 그의 옆으로 갔다. “안 올라가요?” “확인할 게 있어서요.” 재하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서인은 소파에 앉아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재하도 팔을 둘러 그녀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서인이 조금 더 가까이 붙자 그는 팔을 고쳐 둘러주었다. 창밖으로는 담장 너머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서리는 소파 아래를 지나 제 방석으로 돌아갔다. 재하가 서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집들이에서 돌아온 뒤로 두 사람은 아직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친구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고, 서인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만 차 안에서 하지 못했던 질문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재하의 셔츠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서인은 그의 손목에 손을 얹었다가 셔츠의 접힌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서인은 다시 샴페인 잔을 들었다. 지아는 어느새 수희와 신혼여행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결혼 준비 때문에 미뤄뒀던 여행을 뒤늦게 다녀왔다는 수희의 말에 지아가 부럽다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마지막으로 여행 간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너는 맨날 바쁘냐?” 재욱이 옆에서 말을 보탰다. “이번 주말도 출근해야 돼?” “응. 내일도 나가야 돼. 오늘도 퇴근하고 온 거야.” “그렇게 살면 연애는 언제 하냐?” “연애할 시간이 어딨겠니, 내가.” 서준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할 사람이 없는 거 아니야?” “그것도 맞지.” 지아가 태연하게 인정하자 재욱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대학 때도 그런 소문 있었잖아.” “무슨 소문?” “네가 재하 좋아해서 다른 남자는 눈에도 안 들어온다고.” 서인은 잔을 입술에 가져가려다 멈췄다. “야, 그 얘길 여기서 왜 해.” 지아가 재욱을 쳐다봤다. “아니, 옛날에 그런 얘기가 있었다고.” 재욱은 웃으며 대답하다가 뒤늦게 서인을 돌아봤다. “아, 형수님. 죄송합니다. 괜한 얘기를 했네요.” “괜찮아요.” 서인은 가볍게 웃었다. “취했으면 그만 마셔.” 지아가 핀잔을 주자 재욱은 잔을 내려놓았다. 서준이 다른 화제를 꺼내면서 대화는 곧 넘어갔다. 서인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지아는 수희가 가져온 디저트를 살펴보고 있었고, 재하도 별다른 반응 없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잠시 뒤 지아가 재하에게 물었다. “너 이번 동문 모임 나올 거야?” “시간 봐서.” “좀 나와. 다들 너 궁금해해.” “생각해 볼게.” 지아는 더 권하지 않고 재욱에게도 참석할 거냐고 물었다. 서인은 맞은편에 앉은 지아를 바라봤다. 지아는 재욱의 대답을 듣다가 웃었고, 재하도 두 사람의 이야기에 가끔 말을 보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인은 문득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 재하가 몸을 조금 기울였다. “신경 쓰여요?” “뭐가요?” “아까부터 저쪽만 보길래
토요일 오후, 서인은 드레스룸 거울 앞에서 좀처럼 발길을 떼지 못했다. 아이보리색 실크 블라우스에 검은색 슬랙스를 입고 작은 귀걸이까지 착용한 상태였다. 평소에도 자주 입는 차림이었지만, 오늘따라 너무 차려입은 것은 아닌지 자꾸 신경이 쓰였다. 공식적인 행사라면 오히려 편했을 것이다. 정해진 격식에 맞춰 입으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재하의 대학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결혼한 지 삼 년이 넘도록 제대로 어울려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다시 정리하고 있을 때 재하가 드레스룸 문을 열었다. “아직 준비 중이에요?” “거의 다 했어요.” 재하는 검은 셔츠에 짙은 회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평소 회사에서 보던 것보다 편안한 차림이었다. “어때요?” “좋은데요.” “너무 차려입은 것 같진 않아요?” “그렇지는 않아요.” 서인은 거울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가방을 챙겼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재하가 거실에서 서리를 살펴보고 있었다. 전날 여러 차례 토해 두 사람을 놀라게 했던 서리는 아침부터 평소처럼 사료를 먹고 돌아다녔다. 추가로 토한 흔적도 없었다. “서리는 괜찮아요?” “네. 아까도 밥 잘 먹었어요.” 서인은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서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엄마 갔다 올게. 아프지 말고.” 서리는 귀만 한 번 움직였다. 두 사람이 현관을 나서자 기사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 재하가 서인이 먼저 타도록 기다렸다가 뒤따라 올랐다. “가죠.” 차가 출발하자 서인은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약속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집들이를 주최한 서준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레지던스에 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조용한 복도가 이어졌다. 재하가 초인종을 누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왔냐?” 문을 연 남자는 재하를 보자마자 반갑게 웃었다. 키가 크고 인상이 시원한 남자로, 결혼식에서도 인사를 나눈 적이 있어 서인에게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랜만이네.” 재하가 짧게 인사했
한성은 가까스로 한숨을 돌렸다. 한정호가 직접 나선 협상 끝에 은행과 채권단의 단기 유예 협의가 진전됐고, 일부 협력업체와도 지급 일정이 조율됐다. 중단됐던 현장 중 한 곳은 작업을 재개했다. 물론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음 달 만기와 아직 들어오지 않은 매각 대금이 남아 있었고, 공사대금 가압류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어느 한쪽에서라도 약속한 일정이 어긋나면 상황은 다시 나빠질 수 있었다. 서인은 보고서 마지막 장을 확인하고 덮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사흘째였다. 출근을 재개한 뒤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적어도 오늘은 야근할 이유가 없었다. 책상 위 시계는 금요일 오후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재하와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모처럼 정시에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인은 오후 여섯 시가 조금 넘어 한성 본사를 나섰다. 지난 며칠 동안 사무실에 남아 있던 시간이 길었던 탓인지,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은 시간에 회사를 나서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달랐다. 집에 도착했을 때 재하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현관에서 구두를 벗던 서인은 거실 바닥에 낯선 흔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서리야?” 바닥에 털 뭉치가 섞인 토사물이 있었다. 서인은 가방을 내려놓고 거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소파 옆에도 하나, 복도 쪽에도 하나가 더 있었다. “서리야. 어디 있어?” 이름을 부르자 소파 아래에서 서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인은 쪼그려 앉아 서리를 살폈다. 서리는 평소처럼 다가와 그녀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어디 아파? 왜 이렇게 토했어.” 서리는 대답 대신 꼬리를 세우고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서인은 뒤따라가 사료 그릇을 확인했다. 아침에 채워둔 사료가 제법 줄어 있었고, 물도 마신 흔적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인은 동물병원에 전화를 걸어 서리가 여러 군데 토해 놓았다고 설명했다. 평소처럼 움직이고 사료도 먹었다는 말을 덧붙이자, 병원에서는 상태를 살펴보되 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