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어.” 다영은 원래 조금 망설였지만,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서 은근히 결심이 섰다. ‘반드시 아버지를 구해야 해.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어머님, 걱정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송혜선은 다영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랄게.” ...대기실 밖. 상혁은 잘 맞춘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훤칠한 체격에 비율까지 완벽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성은 장난스럽게 상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 한번 말해 봐. 지금 기분이 어때?” 상혁은 거울을 가볍게 흘깃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은 전날 밤 한숨도 못 잤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오히려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눈빛도 반짝였다.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좋아.”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고작 ‘좋아’ 한마디?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하성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 하연이한테 잘해. 만약 조금이라도 속상하게 하면, 우리 집안에서 널 가만 안 둘 거야.” 상혁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친구의 가슴팍을 툭 쳤다. “그 말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라. 이제 외울 지경이라고.” 그러다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하성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됐다.” ...대기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서여은과 정예나는 상혁을 보자마자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나, 둘만의 시간을 남겨 주었다. 하연은 거울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눈썹을 그리며 메이크업을 손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그러고 보니, 연지 씨가 부상혁 대표 곁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사실상 부 대표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던데... 그런데 지금은 부남준 상무를 위해 일하고 있네.”“내가 좀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떻게 그렇게 부씨 가문의 두 형제 사이를 능숙하게 오갈 수 있는 거지?” 세븐이 입을 열자, 연지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 말투와 어조가 거슬려 저도 모르게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부상혁 대표는 원래 이런 말투로 말하지 않아.” “그리고 쓸데없는 일에는 관심 끄시지.” 그리고 이어서 단호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일이나 제대로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약점 보였다가 후회하지 말고.”그러나 세븐은 개의치 않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연지 씨, 정말 부상혁 대표에 대해 꽤 잘 아는 것 같단 말이야?” “그건 당신이 궁금해할 필요 없고.” 연지는 냉랭하게 받아쳤다. 오늘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세븐은커녕 이 공간에 발 들이는 것조차 끔찍했을 것이다.“그리고 부남준 상무님이 하신 말씀 잊지 마. 본인이 할 일이나 제대로 해.” 세븐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살짝 올렸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지는 손목시계를 올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곧 예식이 시작돼. 모든 건 계획대로 진행하면 돼.” “걱정 마. 발목 잡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대답은 나쁘지 않았다. “차 안에서 얌전히 있어. 내 연락 기다려.” 마지막으로 단단히 일러둔 후, 연지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호텔 안. 비록 약혼식이지만,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이들 모두 이를 굉장히 중시했다. 사소한 부분까지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로비의 장식만 봐도, 백 명이 넘는 직원들이 작년부터 준비해 온 결과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홀 중앙에는 은하수처럼 쏟아지는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고 있었고, 대리석 바닥에 비친 금빛 패턴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장관을 이루었다. 하객들은 이미 자리를
“이 한 잔을 사과의 의미로 받아 주세요.” 다영은 그렇게 말하며 먼저 잔을 비웠다. “아주버님, 형님.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여자의 말은 매끄러웠고, 태도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하연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난 후. 다영은 더 이상 긴장을 숨길 수 없었다. ‘끝까지 침착해야 해. 실수는 절대 용납되지 않아.’ 손의 떨림을 억지로 참아내며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은 후, 급하게 잔을 채우고 나서 단숨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녀는 자신의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었다.그리고, 이 한 걸음을 내디딘 이상,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한편, 상혁은 한쪽 팔로 하연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하연은 의아한 눈길로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요?” 그러자, 상혁은 하연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순간, 하연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정말이에요?” 상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여자의 시선을 가리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연의 잔과 자신의 잔을 교체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 한마디에, 하연은 비로소 안도한 듯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둘은 자연스럽게 눈빛을 교환하며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다영은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했다. 즉, 하연이 아무런 의심 없이 잔을 들어, 그 안의 음료를 마시는 순간을. 그 순간, 다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됐다...!’ 이제, 하연의 뱃속 아이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니까. ‘길어야 3일... 그 안에 반드시 아이를 잃게 될 거야.’ ‘하지만
상혁이 다시 로비로 돌아왔을 때, 무의식적으로 하연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하지만 익숙한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통화가 끊겼다.상혁은 미간을 좁히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차가운 자동 응답 음성이 들려왔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왠지 모르게 상혁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이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올랐다.그는 발걸음을 서둘러 인파 속에서 하성을 찾아냈다. 곧장 하성의 팔을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하연이 못 봤어?”하성은 주위를 둘러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너희 같이 있던 거 아니였어?”상혁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재빨리 하성을 놓고 출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하성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발걸음을 재촉하며 따라붙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상혁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아니야. 아마 쉬러 갔을 거야. 가서 확인해 볼게.”하성은 더 묻지 않고 상혁와 함께 휴게실 방향으로 향했다.“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그렇게 말하면서도 상혁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두 사람은 호텔 내 모든 휴게실을 확인했지만 하연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핸드폰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상혁은 점점 초조해졌다.그때, 정예나가 급하게 뛰어왔다. 그녀는 상혁을 보자 놀란 듯 말했다.“부 대표님, 아까 하연이랑 부 대표님 같이 나가지 않았어요?”순간, 상혁의 몸이 굳어졌다.“뭐라고?”하성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상혁이는 계속 나랑 같이 있었어. 네가 착각한 거 아니야?”예나는 당황한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아까 분명이 로비에서 ‘부상혁'이 하연을 감싸 안고 호텔 문을 나서는 걸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이다.심지어 장난스럽게 한마디 던지기도 했다.“신혼부부는 아니랄까 봐 떨어질 생각이 없나 보네. 어디 가서 둘이 꽁냥꽁냥 거리기라도 하려는 건가?”
‘이 사람... 상혁이 너 같은데 아니야?'하성이 무심결에 내뱉었다. 하지만 이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쳤다.“아니다!”그는 몸을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상혁의 얼굴은 이미 어두운 먹구름이 낀 듯 굳어 있었다. 그리고 눈은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모니터 속에서, 하연은 세븐에게 붙잡혀 있었다. 여자의 허리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깊숙이 눌려 있었다.하연이 몸부림치려 하자, 세븐이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댔다. 두 사람은 멀리서 보면 마치 다정하게 속삭이는 것처럼 보였다.세븐은 한 손으로 하연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피부의 촉감이 남자의 손끝을 간지럽혔다.세븐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가만히 있어. 누군가가 눈치라도 챈다면, 난 당신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순간 하연의 몸은 떨렸다. 본능적으로 손을 배 위로 가져가 보호하듯 감쌌다. 결국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세븐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렇게 순순히 따라오면 돼. 그럼 난 널 해치지 않아.”하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문 쪽을 향해 걸어가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당신 누군데 나한테 이러는 거야? 돈이 필요해서? 아니면 무슨 다른 목적이라도 있어?”세븐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웃었다.“당신 생각엔 내가 왜 이러는 것 같아?”“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금액을 말해. 난 최씨 가문의 딸이야. 당신 요구를 최대한 맞춰줄 수 있어.”세븐은 비웃듯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만약 돈이 아니라면? 내가 다른 요구를 한다고 해도 네가 들어줄 수 있어?”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연의 허리를 거칠게 감쌌다. 단검을 거두며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하연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괜히 머리 쓰지 말고 가만히 따라오기나 해.”그렇게 두 사람은 호텔 문을 빠져나갔고, 곧 감시카메라의 사각지대로 사라졌다.상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벽을 세게 내리쳤다. 상혁의 몸 전체에서 뿜어
“하연 씨, 곧 도착할 테니까 힘 빼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연지는 옆에 앉아 있던 세븐을 힐끗 보았다. 세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액셀을 힘껏 밟았다. 차량이 갑자기 급가속했고 강한 출력으로 몸이 쏠리며, 하연은 반사적으로 옆 좌석을 꽉 잡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주변 풍경은 점점 더 외진 곳으로 변해갔다.개인 헬기 이착륙장. 헬리콥터 한 대가 이륙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상무님, 세 사람이 도착했습니다!”멀리서 익숙한 검은색 차량이 점점 가까워지자, 부남준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이륙 준비하고, 계획대로 진행해.”“네, 상무님!”검은색 차량이 점점 다가와 마침내 멈춰 섰다.“하연 씨, 도착했어요.”연지가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 주었다.차에서 내린 하연의 시선은 곧장 저 멀리 서 있는 남준에게로 향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남준은 먼저 하연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하연 앞에서 멈춰 서며,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런 방식으로 모셔와서 미안하군.”그러나 남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연은 성큼 다가가 단호하게 손을 뻗었다. 짝!거침없는 손길이 남자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순간 얼어붙었다.연지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다가섰다.“상무님, 괜찮으세요?”남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 하연이가 얼마나 세게 뺨을 때렸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짓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걸로 화가 풀린다면, 한 대 더 때려도 괜찮아.”하연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부남준,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남준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 신호에 따라 연지를 비롯한 부하들이 한 걸음 물러섰다.하연은 경계심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바로 그때, 남준의 뒤편에서 헬리콥터 엔진이 가동되었다. 회전 날개가 점점
남준의 손등을 하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세게 악물었다. 남준의 이마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아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결국, 참지 못한 남준이 손을 놓았다. 하연은 비틀거리며 두 걸음 물러섰고, 경멸과 경계가 뒤섞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남준은 피가 흘러내리는 손등을 바라보며, 다른 손으로 상처를 눌렀다. 붉은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최하연, 너 개냐?”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한 걸음 다가갔다. “오지 마!”하연은 경고하듯 외쳤고,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렇게까지 나를 싫어하는 거야?”남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한테 난 그저 비열하고 파렴치한 그런 놈이라는 생각뿐인 거야?”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하연의 앞에 멈춰 섰다. 하연이 또다시 물러나려 했지만, 남준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최하연, 오늘 나랑 같이 가기만 하면, 부씨 가문의 모든 걸 버리겠어.”하지만 하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손목을 힘껏 뿌리쳤다.“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왜 나한테 하는 건데? 넌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감춰둔 연인? 아니면, 형제 간 싸움에서 이용할 도구?”“아니야!”남준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목젖이 떨렸다. “만약 내가 널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게, 오직 너와 함께하기 위해서 그런 거라면?”하연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지만, 곧 의심과 경계가 자리 잡았다.“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남준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네 눈엔 난 온갖 술수를 부리는 교활한 놈으로밖에 안 보이겠지.”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아니면, 네가 바라볼 수 있는 남자는 오직 부상혁 하나뿐인 거야?”남준의 시선이 하연을 꿰뚫듯이 바라봤다.“최하연, 네 눈에 내가 그렇게도 한심해? 정말 넌 나를 사랑해 줄 수는 없는 거야?”그 순간, 뒤편에
“부상혁한테는 뭐든 다 해주면서, 너도 같은 부씨 집안 자식인데 왜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해?” “남준아, 정신 좀 차려. 절대 부상혁한테 밀리면 안 돼.” “부씨 가문의 재산, 절반은 네 몫이어야 해.”“...”‘도대체 얼마나 지겹게 들었으면 머릿속에서...’ 송혜선의 목소리가 남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저주처럼, 귓가에 맴돌고 또 맴돌았다.남준은 무의식적으로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터질 듯한 분노 속에 외쳤다.“그만해! 제발 좀 그만하라고!” 사냥감을 놓친 짐승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본 남준은, 다음 순간 거침없이 다가가 그녀의 목을 거세게 움켜잡았다.“닥쳐!”악을 쓰듯 소리친 남준의 손에 핏줄이 불거졌다. 순식간에 하연의 얼굴은 붉게 질려올랐고, 숨이 막히는 듯 거칠게 헐떡이기 시작했다. “부남준... 놓아줘... 제발...!”하연은 힘겹게 말을 잇고 있었지만, 남준의 눈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온몸이 찌릿하게 울렸고, 하연의 머릿속은 새하얬다.‘죽는 건가...?’질식해오듯 점점 줄어드는 숨, 하연의 눈앞이 흐려지며 고개가 툭 떨어지려는 순간, 황연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상무님!!”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남준의 팔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외쳤다.“상무님, 제발 그만두세요! 하연 씨 죽어요!”하지만 남준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연지는 조급하게 남자의 손등을 치기 시작했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러다 진짜 큰일 나요!”순간, 손등으로 전해진 통증 때문에 이성을 잃었던 남준이 그녀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됐다. 그는 얼이 빠진 듯 손을 풀었고, 하연은 그대로 주저앉듯 바닥에 쓰러졌다.다행히 연지가 재빨리 하연을 붙잡았다.“하연 씨! 괜찮아요?”하연은 바닥에 손을 짚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기침을 터뜨렸다.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눈물이 맺혔다.연지는 급히 고개를 돌려 외쳤다.“상무님, 부상혁 대표 쪽 사람들이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