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곽강민이 던지는 질문 하나하나에 그녀는 신속하고 적절한 답변을 내놓았고,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동의의 기운이 감돌았다.“DS그룹은 신생 그룹이긴 하지만, 최 사장님 같은 책임감 있는 리더가 이끄니 금방 성장할 겁니다.”그의 칭찬에 하연의 입가엔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곽 선생님,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며칠 후, 운성시의 오 대표님도 B시에 오실 예정이니, 그때 협력을 공식적으로 확정 짓는 게 좋겠군요.”운성시라는 이름이 나오자, 곽강민은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답했다.“좋습니다. 대신 저는 이번 협력에서 자문 역할만 맡겠습니다. 지분에는 관여하지 않을 테니, 수익이 1% 증가하면 그 1%는 제 몫으로 하고, 사업에 문제가 생기면 제 책임은 없는 것으로 하죠.”그가 우려하는 바를 하연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이번 DS그룹의 계획은 혜성그룹과 HD그룹의 사업을 넘보는 상황이었고, 만약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곽강민은 자신에게 퇴로를 마련해야 할 터였다.하연은 넓은 아량을 베풀듯 답했다.“곽 선생님께서 이 정도로 양보해 주시니, 그 조건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협상이 마무리되자, 곽강민은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듯 일어나며 말했다.“최 사장님, 이 근처에 괜찮은 농가 맛집 식당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현지 음식을 맛보는 건 어떻습니까? 오늘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하연은 가벼운 웃음을 띠며 답했다.“그럼 접대비는 너무 많이 들지 않게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한 검사장님이 곤란해지실지도 모르니까요.”그 말에 곽강민과 한창명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샤인 머스캣 농원을 빠져나오며 하연은 문득 이곳이 예전에 손이현과 함께 왔던 교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넓게 펼쳐진 농원이 낯설지 않았고, 곽강민이 말한 농가 맛집 식당은 이 마을의 이장인 왕대천의 집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정말로 기이한 우연이었다.“무슨 생각 중이세요?”자리에서 한창명이 메뉴를 건네며 물었다.“여기 음식
그 시절은 정말 달콤한 추억이었다. 그때 상혁은 목욕 후의 따뜻한 향기를 풍기며 하연을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의 몸은 뜨거웠고, 그 열기가 하연의 온 몸에 전해졌다. “저걸 어떻게 보지?” “저 분야의 앞날이 밝을 것 같아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상혁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상혁은 그녀에게 다가와 뜨겁게 키스했다.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리자, 하연의 입가에는 자연스럽게 쓴웃음이 번졌다. 이제는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다.하연이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갑자기 방 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둬! 여긴 밥 먹는 곳이야, 이러다 가게 문을 닫게 할 작정이냐고!” 익숙한 목소리에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식당 주인과 그의 아내가 다투고 있었고, 아내는 칼을 든 채로 격분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손님들은 겁에 질려 서둘러 도망치고 있었다. “이장님?” 싸움을 말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손이현의 친척인 마을 이장, 왕대천이었다. “하연이?” 왕대천도 하연을 보고는 잠시 놀란 듯했으나,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어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정책에 너희 집이 해당되지 않았다고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거야? 큰일도 아니니까, 마을 사람들이 도우면 충분히 돈을 모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꼭 이혼까지 해야겠냐고!” 식당 주인의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대꾸했다. “그게 수천만이라고요! 어떻게 모으냐고요!” “머리는 길어도 생각은 짧구나! 나랑 이혼하면 더 나은 사람 만날 줄 아나?” 식당 주인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연은 상황이 어이없어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는데, 이미 주변엔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고, 한창명은 테이블 위에 있던 담배를 집어 들고 주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무슨 문제인지 말씀해 보세요.” “아이 학교 문제 때문이에요. 학교 근처에 집을 구해야 하는데, 우리 집은 너무 멀어요. 새집
분위기는 점점 더 묘하게 흘러갔다. 하연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왕대천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무심코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왕대천은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이현아, 누가 왔는지 좀 봐라.”하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굳어지는 듯했다. 왕대천의 핸드폰 화면 속에 비친 얼굴은 분명 손이현이었다. 그러나 핸드폰이 느려 목소리마저 끊기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하연 씨가 아저씨를 보러 갔어요?]화면이 계속 끊기자, 왕대천은 답답한 듯 중요한 말만 간추려 말했다. “그래, 그래. 하연이는 정말 착한 아이야. 나는 이 아이가 참 좋아.”한편, 한창명도 손이현의 이름을 듣고 그쪽으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화면 속 손이현의 얼굴은 그가 정태산에게서 받은 자료 속 사진과 정확히 일치했다. 한창명은 잠시 멈칫하며 하연을 다시 한번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하연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손 선생님, 아직도 B시로 안 돌아가셨어요?” [그때 하연 씨가 떠날 때는 급하게 갔지만, 오히려 모든 일을 철저하게 정리해 두고 떠나셨더라고요. 제가 운성시에 있지 않으면 어디 있겠어요.]이현의 말투에는 미묘한 불만이 묻어 있었고, 그날의 일에 대한 마음속 응어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하연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그날의 상황은 너무나도 급박했고, 상혁의 압박은 그날 쏟아진 비보다도 더 강하게 그녀를 휘몰아쳤다. 당시의 하연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상혁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은 분명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를 특별하게 대했으니 말이다. “손 선생님, 비를 맞았다면 생강차라도 마셔서 몸을 따뜻하게 하세요.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고요.”하연은 그날 자신이 갑작스럽게 떠난 것에 대해 예의를 갖추며 우회적으로 답했다. 그러나 이현은 무심한 태도로 화면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전화를 끊어버렸다. 왕대
3일 후, B시에서 신에너지 회의가 열렸다. 각 업계의 거물들이 속속 공항에 도착해 국제호텔에 머물렀다. 하연도 초대장을 받은 사업가 중 하나였다. 그녀는 서둘러 로비로 들어가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무시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BN그룹의 대표 오기용이 하연을 크게 불러세웠다.“최 사장님! 제가 마침 최 사장님을 찾고 있던 참이었어요.”하연은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저도 막 오 대표님을 찾으려던 참이었어요.”오기용은 곧바로 물었다.“방금 들은 소식인데, 곽강민 씨도 우리와 협력한다고 하더군요. 그게 사실인가요?”하연은 살짝 고개를 흔들며 웃음을 지었다.“오 대표님도 아셨으니, 이제는 온 세상이 다 알겠네요.”“대단하십니다! 곽강민 씨는 FL그룹이 인수된 이후로 아무도 영입하지 못한 인재였는데, 어떻게 해내셨나요?”하연이 답하려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오 대표님, 여전히 안목이 좁으시군요. 쫓겨난 개 한 마리 데려오는 게 그렇게 자랑할 일인가요?”뒤돌아보니, 여자 정장을 입은 왕아영이 자신감 있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HD그룹의 대표도 함께였다. 오기용의 얼굴은 굳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왕 대표님, 정말 오랜만입니다.”“오랜만이네요. 오 대표님의 사업이 B시까지 진출하다니, 다음에 꼭 가르침을 받아야겠어요.”왕아영은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말 속엔 비꼬는 뉘앙스가 가득했고, 동시에 경고의 뜻도 서려 있었다.“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최 사장님의 덕을 보고 있을 뿐이죠.”왕아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최 사장님에게 그런 덕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그녀 앞에 선 하연은 분명 더 젊고 아름다웠으며, 차분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하연은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제가 덕이 있는지 없는지, 오늘 밤 입찰에서 왕 대표님께서 직접 확인해 보시면 될 겁니다.”왕아영의 입가에는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곽강민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상혁은 수많은 기자의 환호 속에서 당당하게 입장했다. 그의 옆에는 우아한 미소를 띤 주슬기가 나란히 걸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지만, 마치 의도적으로 과시하지 않으려는 듯 절제된 움직임을 보였다. 상혁은 신사적인 제스처로 주슬기의 의자를 빼주며 그녀가 앉도록 배려했다.기자들의 카메라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두 사람을 포착했고, 그 모습은 곧 대형 스크린에 크게 비쳤다. 하연은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서여은에게서 온 메시지가 도착했다.[주슬기가 호텔 청소 직원으로 변장해 부상혁의 방에 들어갔대. 그 여자, 아무래도 4조를 차지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아.]하연은 이미 로비에서 이 소문을 들었고, 참다못해 여은에게 그 진위를 물어본 것이었다. 여은은 언론계에 있으니 누구보다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그 말은 사실이었다.여은은 혹시 자신의 말이 부적절했을까 봐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주씨 가문의 가주가 금융위원회의 일원 중 한 명이잖아. 부상혁이 주슬기의 체면을 세워주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아. 하연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혹시 문제가 있다면 직접 부상혁에게 물어봐.]‘직접 물어보라고? 여은이는 모르는 모양이군. 우리 둘의 사이는 이미 많이 변해버렸어. 아마도 상혁 오빠는 더 이상 나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이때 단상 위에 서 있던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크리스티 경매사인 성지나입니다. B시에서 여러분을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오늘 경매할 타이틀은 ‘태양광 홍보대사’이며, 시작가는 60억입니다. 경매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성지나는 몸에 꼭 맞는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경매 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는 여유롭고 기품이 넘쳤다. 성지나는 크리스티 부사장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매사로, 언론에서는 그녀를 두고 ‘영원히 우아하고, 영원히 욕망을 자극하는 여성’이라 평했다. 그
“900억.”하연은 곧바로 팻말을 들어 응수했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곽강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다가와 조언을 건넸다.“너무 무리입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하연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800억은 DS그룹의 예산이고, 그 이상은 제 개인 명의로 내는 겁니다.”하연이 포기하지 않자, 성지나는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DS그룹의 최 사장님께서 900억을 제시하셨습니다. 부상혁 대표님, 참여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이 질문의 의미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부상혁이 이 경매에 뛰어들면, 이는 곧 최하연과 부상혁 사이의 대결이 될 터였다. 더욱이 최근 두 사람의 스캔들이 계속해서 화제가 되는 상황이라, 이 경매는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대형 스크린에 비친 상혁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성지나의 질문에도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연은 그런 상혁을 바라보며, 마음 한편이 아프게 조여왔다.상혁의 결정을 기다리던 그 순간, 주슬기가 상혁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상혁은 몇 마디 답을 하고, 주슬기가 팻말을 들었다.“1400억.”하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사람들은 술렁였고, 이번 금액이 상혁의 지시인지, 아니면 주씨 가문이 자금을 추가한 것인지 궁금해했다.성지나는 이번에도 여유로운 미소로 물었다.“최 사장님, 계속하시겠습니까?”하연은 팻말을 꽉 쥐었는데, 곽강민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안 됩니다. 자문가로서 이 이상 가격을 올리는 건 절대 권장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 경매는 실질적인 가치를 넘어섰어요. 저는 최 사장님이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리기를 원치 않습니다.”곽강민은 하연의 손을 강하게 눌렀다. 하연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성지나는 그런 하연을 보며 어딘가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1400억, 하나. 1400억, 둘. 더 이상 올릴 분 없으십니까?”세 번째 망치가 떨어지기 직전, 전화 입찰석에서 한 입찰자가 일어섰다.“2000억!”
최하연과 성지나는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다. 두 사람의 집안 배경은 크게 달랐지만, 고집스러운 성격만큼은 서로 닮아 있었다. 그래서 둘은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정도의 사이로 지냈다. 졸업할 때, 지나는 먼저 하연에게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며 하연의 미래 계획을 물었다. 하연은 솔직하게 자신이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남자를 따라 B시로 갈 것이라고 답했다. 지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정말 부럽네요.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자본이 있어서요.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제가 원하는 목표를 위해 노력해야 하니까요.”“그럼 지나 씨의 목표는 뭐예요?”“최고의 경매사가 되는 거예요.”지나는 자신의 야망을 숨기지 않았고, 실제로 그것을 이루어냈다. 이후 지나는 하연과 찍은 사진을 이용해 고급 경매장에 발을 들였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지나와 하연을 친구라 여겼고, 상류 사회의 아이콘이었던 하연의 체면을 무시할 사람은 없었다.하연은 이 사실을 정예나에게 전해 들었다. 예나는 비꼬듯 말했다.“그 사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구나. 깊이 사귈 만한 사람은 못 돼.”하지만 하연은 지나를 야망 있는 인재로 보았고, 그 사실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며 오히려 지나를 도와주었다.“제 예상대로, 지나 씨는 결국 본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었네요. 축하해요.”하연은 과거를 떠올리며 담담하게 웃었다. ‘크리스티의 부대표 자리에 오른 것이 단순히 나와의 사진 한 장 덕분만은 아닐 것 같아. 성지나도 분명 그 자리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겠지.’“그럼 하연 씨는요? 원하는 걸 얻었나요?”지나는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오늘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네요. 2000억으로 타이틀을 따냈는데, 축하 파티를 열 생각은 없어요?”하연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세면대 감지대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얼음물 모드로 전환한 후, 한 줌의 차가운 물을 얼굴에 뿌렸다. 그것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였고,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이 순간에 잠시
“정말 그렇게 부러워하셨습니까?”아주 우아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문가에 기댄 채로 서 있던 주슬기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왕 대표님이 그렇게 부러우시다면, 제가 부상혁 대표님을 소개해 드릴 수도 있어요.”그 말을 당사자에게 들켜버린 왕아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필요 없어요. 저도 제힘으로 할 수 있으니까요.”“정말요? 왕 대표님은 말씀만 하시면 남자 얘기뿐이라, 스스로 할 수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슬기는 정확히 핵심을 찌르는 말을 던졌고, 왕아영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다. 바로 이때 핸드폰이 울리자, 왕아영은 이 틈을 타 전화를 받으며 빠르게 걸어 나갔다.“뭐라고? 그분이 B시에 도착했다고? 됐어, 내가 직접 마중 나갈게.”그 말을 들은 하연은 거울 속 멀어져가는 왕아영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금빛 찬란한 호텔 로비에서 하연은 슬기와 나란히 걸었다.“아까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하연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별말씀을요. 아린이가 최하연 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최하연 씨와 최하경 씨가 철없는 자신에게 많은 신경을 써줬다면서요. 언니로서 사과드려요.” 슬기는 예의 바르고 세련된 태도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서는 명문가 아가씨의 우아함이 느껴졌다.그러나 하연의 마음은 복잡했다. 로비 밖에는 아직도 상혁의 차가 서 있었다. 차창이 살짝 내려져 있었고, 공무원들이 상혁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의 반응은 적었으며, 단지 가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하연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마지막 경매에서, 1400억을 제시하신 건 부상혁 대표님의 지시였나요?”“물론이죠. 우리 ZT그룹은 신에너지 분야에 깊이 발을 들이지 않았으니, 사실 그 타이틀은 필요 없어요. 하지만 금융위원회 간담회가 막 끝났고, 부 대표님은 위원으로서 실물 경제에 기여할 필요가 있었어요. 제가 명목을 만들고, 부 대표님은 자금을 지원한 거죠. 일종의 협력이랄까.”슬기는 부드럽게 대답했지만, 그 말은 하연의 마음속을 깊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