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혜와 허미숙은 먼저 차 쪽으로 걸어갔다. 막 차량에 타려는 순간, 임지유가 조수석 쪽 문을 열고 내려왔다.“아직 안 갔나 보네.”허미숙은 그녀를 흘긋 보고 시선을 다시 돌리며 담담하게 말했다.‘아까 못 본 줄 알았는데, 다 보고 계셨네...’연미혜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미숙의 안전벨트를 매주고 있었다.그 사이, 경민준은 자연스럽게 임지유 쪽으로 걸어갔다.그 모습을 본 허미숙은 경민준이 30분 동안 병실을 비웠던 것을 떠올리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아주 죽고 못 사는 견우직녀 납셨다!”연미혜는 대꾸하지 않고 조
병원을 떠나 얼마 지나지 않아, 허미숙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민준이는 병원에 와 있었잖아. 다솜이는? 다솜이는 어디 있어?”연미혜가 대답하기도 전에 허미숙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연미혜는 그 표정만 봐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임지유 만나러 병원에 온 김에 다솜이는 또 혼자 내버려뒀나 보지...’“민준 씨도 나름대로 잘 챙겼을 거예요.”연미혜가 담담히 말했지만 허미숙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또다시 다솜이 혼자 두고 놀러 다니면 진지하게 재판으로 끌고 가. 어떻게든 다솜이
“응.”경다솜은 말하다 말고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다.“수연이는 제 친구예요. 수연이는 승태 삼촌을 외삼촌이라고 불러요.”“그래.”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이 나서 하루를 공유하는 경다솜을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그래서 오늘은 뭐 하고 놀았어?”“우리 미로 찾기 했어요!”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솜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지만, 그 옆에 앉아 있던 허미숙은 점점 얼굴이 굳어졌다.처음에 경민준이 다솜을 데려간다고 했을 땐, 직접 아이를 챙기려는 줄 알았다.그런데 오늘 얘기를 들어보니, 그는 임지유와 시간을 보
넥스 그룹은 염성민, 하승태 측과의 협업이 확정되었지만, 아직 일부 사업 부문은 파트너를 확정하지 못한 상태였다.이에 따라 회사의 노출도와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내부적으로 한동안 준비해 왔던 투자유치설명회를 월요일 아침에 공식 개최하게 되었다.그날 아침, 연미혜는 경다솜을 학교에 데려다준 뒤 설명회가 열리는 호텔로 향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김태훈을 비롯한 주요 임직원들이 도착해 있었다.곧 연미혜는 회사의 핵심 기술 개발자로서 연단에 올라 발표와 함께, 언론의 질문에도 응답해야 했다.그녀는 김태훈과 함께 무대 뒤에서 발표 흐
하지만 사람들은 임지유가 겸손해서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했다.잠시 소란을 피우던 프로젝트팀 사람들은 이내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가 본격적인 업무에 집중했다.오늘 아침 넥스 그룹의 투자유치설명회가 있었다는 건 임지유도 알고 있었다. 다만 오전 내내 업무에 시달리느라 그 내용을 따로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잠깐의 여유가 생긴 틈을 타, 그녀는 휴대폰으로 관련 내용을 검색했다.“염 대표님, 오늘 아침 넥스 그룹 설명회에 다녀오신 거죠?”“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회 영상을 재생했다. 마침 화면에는 연미혜가 제품과 기술을 소개
임해철은 통화를 마친 뒤, 휴대폰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거실 대형 스크린에선 여전히 넥스 그룹의 투자유치설명회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과일을 먹으며 여유롭게 TV를 보던 손아림은, 화면 속 연미혜가 그런 중요한 무대에서 유창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리모컨으로 화면을 꺼버렸다.“왜 하필 연미혜가 발표해?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거잖아.”손수희는 그런 반응엔 별 감흥 없다는 듯 말했다.“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
“알겠어요.”연미혜는 짧게 대답하고는 이어서 말했다.“엄마는 이제 회사 가야 돼. 끊을게.”“엄마... 다음에 만나요 그럼...”전화를 끊은 연미혜는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뒤 회사를 향해 출발했다.어제 하루 종일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오늘도 만만치 않았다.다만 다행히 오후엔 비교적 일찍 퇴근할 수 있었고, 오랜만에 할머니와 저녁을 먹고자 연씨 가문으로 향했다.하지만 집에 도착하자 허미숙의 표정이 어딘가 썩 좋지 않았다.거실 안을 둘러봐도 경다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연미혜는 그녀가 경민준과 함께 있다는 걸 단번에
연미혜가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은 뒤, 계단을 올라가려는 찰나 막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던 경다솜의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에는 ‘아빠’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경다솜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아빠?”“지금 막 연락받았는데, 내일 오후에 할아버지께서 오신단다. 내일 너 학교 끝나면 아빠가 사람 보낼 테니까 집에 같이 가서 저녁 먹자. 엄마한테도 얘기해 둬.”경문세는 정부 고위직에 있는 인물로, 평소엔 워낙 바빠 좀처럼 집에 머물지 못했다.노현숙이 사고를 당했던 그날에도 새벽에 잠깐 들렀다가 해 뜨기 전에 떠났었다.이번엔
양주시에서 온 이들은 허미숙을 알아보긴 했지만,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쪽 사람들이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바로 눈치를 챘다.임씨 가문 쪽에서 예전 연씨 가문과의 일들이 이 자리에서 거론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그렇게 분위기를 읽은 이들은 허미숙을 분명히 알아보면서도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오히려 몇몇은 시선을 임지유와 임지후 쪽으로 돌리더니, 연미혜와 허미숙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도 이금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어르신, 두 손주분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인물도 그렇고 기품도 그렇고, 어르신 복
“그러게 말이에요.”염성민과 정범규도 현장에 있었다.그들 역시 연미혜와 임씨 가문, 손씨 가문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기에, 이금자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한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넘겼다.임해철과 임혜민 역시 그랬다. 누구 하나 나서서 연미혜를 두둔하거나, 그녀를 향해 인사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손아림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반면, 강혜원은 속으로는 연미혜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
국제 인공지능 콘퍼런스를 마친 지 이틀, 아니 사흘쯤 지난 어느 저녁, 연미혜는 퇴근 후 외삼촌 쪽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찾았다.호텔에 도착한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이 닫히려던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잠깐만요!”같은 순간, 손이 쑥 들어와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고개를 돌린 연미혜는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사람은 임지후였다.두 사람은 그동안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마주친 건 두세 달 전의 일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지후는 그녀
캐벳 스미스가 말한 ‘깊이 있는 대화’라는 건 결국 김태훈에게서 Infinite-CM의 핵심 기술을 조금이라도 캐내 보겠다는 속내였다.그러나 김태훈은 그와 악수하며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말투로 받아넘겼다.“스미스 교수님, 과찬이십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순환신경망과 어텐션 메커니즘 관련 논문, 열 번도 넘게 읽었습니다. 저한텐 정말 큰 자극이 됐어요. 이렇게 직접 뵙고 말씀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제게 큰 영광입니다.”캐벳 스미스는 당연히 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개막식이 임박한 터라 두 사람은 주최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