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경통삼 병원?’강시원은 심장이 한차례 경련하듯 조여들었다. 머릿속에 순간 눈부신 백색광이 번쩍였다.머릿속에 6년 전,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이 떠올랐다.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운 서정혁을 데리고 응급실로 향해 치료를 받게 했다. 그리고 서정혁에게 수혈까지 해주었던 병원이 바로 경통삼 병원이었다.오래전에 봉인해 버린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거센 충격에 강시원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가녀린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그 순간, 갑자기 어깨 위로 묵직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배기훈의 따뜻한 손바닥이 그녀의 어깨 위에 놓였다. 남자의 손길이 강시원에게 굳건한 힘을 불어넣은 듯, 불안하게 요동치던 그녀의 마음도 서서히 진정되었다.“정말 귀신같이 정확하게 예상하셨습니다. 그 인간, 진짜 의사였답니다!”황근우는 몹시 분노한 듯 침을 뱉었다.“음흉하고 악독한 인간이 의사라니, 정말 의사들 얼굴에 먹칠을 하네요!”배기훈은 깊고 뜨거운 눈빛으로 유리구슬처럼 맑은 강시원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계속 말해.”“성은 추 씨이고, 이름은 추강민입니다. 예전에 경통삼 병원에서 심장내과 의사로 근무했는데, 나중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그만뒀다고 합니다. 앞날이 창창했는데도 전부 포기했다는 겁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이상하지 않아.”배기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만뒀는지 대충 짐작이 가거든.”강시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배기훈을 바라보았다.너무나 영리하고 빈틈없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남자의 모습이 오히려 무서울 정도였다.여태껏 강시원이 본 것은 배기훈이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뿐이었다.그 이면에 감춰진 그의 고난과 고통, 가슴 아픈 사연... 그리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오랜 세월 가슴속에 묻어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그 모든 것을 배기훈은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기러기가 지나가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듯 철저하게 감춰왔다.배기훈이 다시 느긋하게 물었다.“추강민이 오늘 거기에 간 이유는 뭐야?”“김성진
김성진은 환자를 다 본 뒤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왔다.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추강민은 온데간데없고, 컴퓨터 화면만 덩그러니 켜져 있었다.“이상하네... 스승님은 어디 가신 거지?”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김성진은 화들짝 놀랐다.황근우가 훤칠하고 건장한 모습으로 바로 뒤에 서서 그에게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선생님, 안녕하십니까?”김성진은 의아한 듯 그를 훑어보았다.“실례지만, 누구신지...”황근우는 은근히 문 안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아까 선생님 사무실에 들어오신 그분 말입니다...”“아, 추 교수님 말씀입니까?”추강민의 성을 쉽게 알아낸 황근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네. 맞습니다. 추 교수님이요! 아직 안에 계십니까?”“추 교수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쪽은...”황근우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저는 추 교수님의 조카입니다.”김성진은 놀라면서도 반가운 기색으로 예의 바르고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눈앞의 남자를 위아래로 살폈다.나이도 얼추 맞고 성격도 온화해 보였다. 별다른 의심 없이 곧바로 황근우와 반갑게 악수했다.“아, 스승님의 조카분이셨군요! 반갑습니다!”“오늘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왔다가 우연히 삼촌을 봤습니다. 인사라도 드리려고 다가가려 했는데, 삼촌이 선생님 사무실에 들어가신 뒤 한참 동안 나오지 않으시더군요. 그렇다고 문을 두드려 방해하기도 그래서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네요...”황근우가 문득 화제를 돌렸다.“그런데 아까 선생님께서 제 삼촌을 스승님이라고 부르시던데, 두 분이 꽤 오래 알고 지내신 사이인가 봅니다?”“그럼요, 그럼요! 제 은사님입니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전부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이지요!”김성진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다만 아쉽게도... 스승님께서 나중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경시를 떠나셨어요. 그때 떠나지 않으셨다면 정말 훌륭한 의사가 되셨을 텐데.”“
‘왜 내 어린 시절을 언급한 걸까? 왜 어머니까지 언급한 걸까? 왜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말한 걸까?’강시원은 남자가 입맞춤한 입술을 꼭 다물었다. 수많은 의문이 마음속에서 거센 파도처럼 소용돌이쳤다....다음 날, 추강민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집을 나선 뒤 택시를 타고 6년 전 서정혁을 치료했던 경통삼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뒤 곧장 심장내과 과장실로 향했다.“스승님!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과장 김성진은 곧바로 마중 나와 무척 반가운 얼굴로 추강민의 손을 잡았다.“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잘 지냈어.”추강민은 흐뭇하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에 보니 내 제자가 이렇게 출세했구나. 벌써 심장내과 과장이라니.”“별말씀을요... 저는 스승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제자 아닙니까? 스승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김성진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스승님, 오늘은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추강민이 쓴웃음을 지었다.“사실은 말이야. 개인적인 일로 부탁 하나를 하려고 왔어.”“스승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절대 어려워하지 마시고요!”“좋아. 그럼 바로 말하지.”추강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자네 병원에서는 6년 전 헌혈자들의 헌혈 기록도 조회할 수 있나?”김성진이 대답했다.“그럼요. 헌혈자의 기본 정보만 알려주시면 조회할 수 있습니다.”“그래? 강시원이라는 여자가 6년 전에 이 병원에서 헌혈해서 누군가를 구한 적이 있는지 한번 확인해 주게.”“그분은 스승님의...”추강민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친구의 딸이야. 자세한 사정은... 조금 사적인 문제라서 미안하지만 말하기 어려워.”“아! 설마...”김성진은 참지 못하고 추측했다.“혹시 혈액이나 면역과 관련된 질병이라도 앓고 있는 겁니까? 설마 에이즈는 아니죠?!”추강민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전화기 너머.고요한 병실 안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했다. 방 안에는 배기훈과 강시원의 숨소리뿐이었다.큰 기럭지를 자랑하는 배기훈은 창가에 서서, 휴게실에 누워 깊이 잠든 강시원을 한참이나 바라봤다.강시원은 밤낮없이 성수연의 곁을 지키며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가장 친한 친구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몸과 마음,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평소 뭐든 힘든 줄 모르는 강시원이라 해도 한낱 여자에 불과했다. 저녁 무렵 한 차례 쓰러지기까지 하자, 배기훈은 더 이상 그녀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몸을 혹사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강시원을 단호하게 안아 들고, 다소 거칠게 그녀를 휴게실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커다란 두 손으로 그녀의 양 손목을 붙잡아 머리 양옆에 고정했다.부끄러워진 강시원은 얼굴이 부끄러움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손이 잡혀 몸도 꼼짝할 수 없었다.남자의 따뜻한 숨결이 온몸을 감싸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몽롱하게 잠이 들었다.한번 잠이 들자 한밤중까지 깨어나지 않을 정도로 푹 잤다.“그 여자와 한패인 사람을 찾은 거야?”배기훈은 강시원이 잠든 모습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부하는 깜짝 놀랐다.“어떻게 아셨습니까?!”“이렇게 늦은 시간에 몰래 만나러 나간 사람이라면, 분명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상대겠지.”배기훈은 자신도 모르게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여자의 섬세한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두 사람 밀회 장소가 어디인데?”부하가 한 아파트 이름을 말했다.“오래된 주거 건물입니다. 확실히 눈에 띄지 않는 곳이기도 합니다.”“정확히 어느 집인지 확인했어?”“확인했습니다.”“그래.”배기훈의 아름다운 눈매에 어두운 기류가 일렁였다.“네가 지금 맡고 있는 일은 황근우에게 인계해. 앞으로 한동안은 근우가 직접 미행하도록 해.”부하가 황급히 물었다.“배 대표님, 제가 어디 부족한 부분이라도 있었습니까?”
자정 무렵.차가운 달빛이 은은하게 퍼지며 서늘하고 기괴한 한기를 내뿜었다.검소한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한 아파트 건물 아래에 멈춰 섰다.헤드라이트가 꺼진 후, 한밤중인데도 커다란 선글라스를 쓴 채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박영주가 차에서 내렸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몰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영주야,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떻게...”박영주가 찾아온 것을 본 추강민은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박영주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 흐느끼며 남자를 꽉 끌어안았다.“자기야! 큰일 났어! 이번에도 우리 딸을 꼭 도와줘야 해!”“영주야, 지민이가 왜? 일단 마음 좀 가다듬고 천천히 말해봐!”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박영주의 모습을 본 추강민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박영주의 선글라스를 벗겨주니 눈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우리 딸이야. 내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지켜줄게.”박영주는 남자에게 꼭 안긴 채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기대었다.“서정혁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 찾았어.”추강민은 깜짝 놀랐다.“누구야?”박영주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강시원!”“확실해?!”“십중팔구는 맞아. 서정혁과 혈액형도 같고, 대량으로 헌혈한 기록도 있어. 모든 게 다 들어맞아. 세상에, 어떻게 이런 우연이!”추강민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정말 강시원이라면, 매일 서정혁 곁을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거잖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나 다름없어.”박영주는 불안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지민이한테 들었는데... 서정혁이 이미 몰래 강시원이 헌혈했던 일을 조사하고 있대. 만약 뭔가를 알아낸다면... 우리 세 식구가 이렇게 오랫동안 공들여 온 일이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말 거야!”“걱정 마. 절대 물거품이 되지 않을 거야.”사랑하는 여자의 귓불에 입을 맞춘 추강민은, 눈빛을 음침하게 번뜩이며 말했다.“누구도 내 딸의 앞길을 막게 두지 않을 거야. 만약 강시원이 6년 전 서정혁에게 수혈해 준 그 사람이라면, 수혈 기록은 분명
심화영은 자기가 꾸민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성수연은 중상을 입고 아이도 잃었기에, 심지경은 정신없이 바빠 사건 경위를 따질 겨를도 없을 거라 여겼다.하지만 심지경이 이렇게 빨리 이상한 기색을 눈치챌 줄은 몰랐다.심화영은 이불을 꽉 끌어안고 흐느끼며 말했다.“그건... 친구가 거기 재미있다고 해서 날 데려간 거야... 나도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그냥 따라갔을 뿐이야.”심지경은 침대 옆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노려보았다.“네 친구? 경시에 있는 네 친구들 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었었나? 누구인데?”남자의 압도적인 기세가 어찌나 강한지 심화영은 그의 눈을 거의 쳐다보지 못했다.어두운 눈빛은 심연처럼 그녀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심화영은 아무 이름이나 대충 둘러댔다.다행히 미리 꼼꼼하게 작전을 짜면서 친구 한 명을 데려갔기 때문이다. 심지경이 CCTV를 조회해도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도록.아니었으면 들통날 뻔했다. 정말 위험했다.“그렇다 해도, 고승민을 어떻게 만났는데?”심지경의 시선은 매처럼 어둡고 사나웠다.“내가 그동안 너를 얼마나 잘 지켰는데. 너도 계속 해외에서 살았기에 국내 사람들은 네 얼굴을 몰라. 고승민은 어떻게 네가 내 여동생이라는 걸 알았을까?”심화영은 몹시 두려웠다. 심지경의 연이은 심문을 더는 견디지 못해 그냥 정신 나간 척하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비명 소리를 듣자, 밖에서 지키고 있던 공명수가 서둘러 들어왔다. 곧 고연경도 방으로 뛰어들었다.“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진정하세요!”공명수는 발버둥 치는 심화영을 껴안았다.고연경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우리 딸! 대체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야?”“오빠... 오빠... 설마 날 의심하는 거야?”심화영은 눈물을 쏟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너무나 애처로웠다.“설마... 성수연을 해친 게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 나는 오빠의 친동생이야... 그런데 어떻게 나를 의심할 수 있어?”심지경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