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표님, 출발할까요?”재헌은 대답 대신 도준의 차량을 바라봤다.한참 뒤에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도원 제안서 분석은 어디까지 진행됐어?”“공개된 투자 계획과 기존 사업 실적을 검토하고 있습니다.”“오늘 안으로 보고해.”재헌은 차 문을 열다가 멈췄다.“그리고 도원이 검토하는 생산 협력업체들을 확인해. 강성과 거래할 가능성이 있는지도.”수행원이 잠시 망설였다.“대표님, 그 업체들 가운데는 도원과 오랫동안 거래해 온 곳도 있습니다.”재헌은 그를 차갑게 바라봤다.“그래서?”수행원은 입을 다물었다.“강성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선택은 업체가 하는 거야.”재헌은 차에 올라탔다.그의 시선은 여전히 멀어지는 도준의 차량에 머물러 있었다.한서윤이 자신을 남처럼 대하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다.그러나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웃는 모습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날 밤, 강성그룹 전략기획실에는 대표이사 명의의 긴급 지시가 내려갔다.*한서윤 박사 기술사업화 협력 제안 전면 재검토.**도원에너지테크 대비 우위 조건 확보.*그리고 마지막에는 재헌이 직접 추가한 한 줄이 적혀 있었다.*도원 주요 생산 협력업체와의 신규 거래 가능성 검토.*재헌은 보고서를 덮었다.사업에서는 정당하게 경쟁하겠다고 말했다.하지만 한서윤을 향한 감정까지 공정하게 다룰 자신은 없었다.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협력사로 선정되는 일이 아니었다.서윤이 다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었다.그 방법이 무엇이든 찾아낼 생각이었다.***같은 시각.권도준의 휴대전화에도 도원 사업본부장의 연락이 들어왔다.도준은 서윤을 집에 데려다준 뒤 차량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말해.”—대표님, 강성 쪽에서 저희 생산 협력업체 몇 곳에 접촉을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도준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어느 업체?”본부장이 이름을 말하자 도준은 잠시 생각했다.그는 곧바로 태블릿을 열어 해당 업체들의 계약 현황을 확인했다.“기존 계약부터 점검해. 우리 일정에 차
“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도준이 그녀를 바라봤다.“어떤 말씀이요?”“제 남자가 되고 싶다고요.”도준은 잠시 서윤의 얼굴을 살폈다.그러더니 낮게 웃었다.“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문이 열리자 도준은 그녀가 먼저 나가도록 비켜섰다.서윤이 몇 걸음 앞서 걷다가 돌아봤다.“도준 씨는 원래 그렇게 자신감이 넘쳐요?”그가 걸음을 멈췄다.처음 듣는 호칭이었다.도준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방금 뭐라고 부르셨습니까?”서윤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그냥…….”“다시 불러주십시오.”도준이 가까이 다가왔다.서윤은 시선을 피하려다가 그의 눈과 마주쳤다.“도준 씨.”그의 미소가 짙어졌다.“네, 서윤 씨.”도준은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아까 제 손을 잡으셨죠.”서윤의 얼굴이 붉어졌다.“그건 상황이…….”“압니다.”그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그래도 좋았습니다.”도준은 그녀 앞에 섰다.키 차이 때문에 서윤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야 했다.그는 서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한 손을 내밀었다.“이번에는 강 대표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 잡아주시면 좋겠습니다.”서윤은 그의 손을 바라봤다.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도준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생각보다 뜨거웠다.그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기지 않았다.대신 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큰일 났군요.”서윤이 놀라 그를 바라봤다.“왜요?”“생각보다 훨씬 좋습니다.”그가 고개를 들었다.눈빛에는 조금 전 회의실에서 보였던 냉정함 대신 뜨거운 감정이 어려 있었다.“서윤 씨.”“네.”“저는 당신을 좋아합니다.”도준은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그래서 앞으로도 데이트 신청할 겁니다. 손도 잡고 싶고, 당신이 허락한다면 키스도 하고 싶습니다.”서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그는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 가까워졌다.서윤은 피
도준이 그를 바라봤다.재헌은 서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필요하다면 기존 설비를 즉시 전환하겠습니다. 투자 규모도 도원보다 크게 제시할 수 있고요.”회의실이 조용해졌다.서윤은 재헌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기존 생산라인을 전환하면 현재 진행 중인 생산 일정에는 문제가 없나요?”재헌의 옆에 앉은 임원이 자료를 확인했다.“일부 조정은 필요하지만 충분히 검토할 수 있습니다.”“그럼 그 부분까지 포함해 제안서에 적어주세요. 실제로 가능한 일정인지 확인해야 하니까요.”재헌의 표정이 굳었다.강성그룹 대표가 직접 투자 규모를 늘리겠다고 했다.그런데 서윤은 감탄하기보다 실행 가능성부터 확인하고 있었다.도준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역시 한서윤이었다.***설명회가 끝난 뒤 재헌은 서윤이 회의실을 나서기 전에 다가왔다.“서윤아.”그녀가 돌아봤다.“잠깐 이야기 좀 하자.”“제안서 관련 이야기라면 담당자를 통해 전달해 주세요.”재헌은 수행원에게서 서류철을 받아 그녀에게 내밀었다.“네가 요구한 연구 독립성까지 반영했어. 강성이 할 수 있는 조건은 전부 넣었고.”서윤은 첫 장을 확인했다.강성그룹 대표이사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접수 담당자에게 제출해 주세요. 다른 회사 제안서와 함께 검토하겠습니다.”재헌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내가 직접 여기까지 가져왔어.”“알아요.”“그런데 다른 회사랑 똑같이 보겠다는 거야?”서윤은 서류철을 덮었다.“강재헌 씨 회사라고 특별대우할 이유가 있나요?”재헌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그는 주변에 남아 있는 관계자들을 훑어본 뒤 목소리를 낮췄다.“우리가 남이야?”“이혼했잖아요.”재헌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는 한 걸음 다가섰다.“서류 한 장으로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그 시간 때문에 제 연구를 결정할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요.”서윤이 옆으로 비켜서려 하자 재헌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서윤아,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서윤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그는 초콜릿 상자를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강 대표님.”재헌이 돌아봤다.“사적인 이야기는 상대방도 원할 때 하는 겁니다.”재헌의 입가가 비틀렸다.“권 대표는 한서윤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나서지?”도준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모르는 게 많습니다.”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래서 앞으로 알아가려고 합니다.”재헌의 얼굴이 굳어졌다.“무슨 뜻이지?”“말 그대로입니다.”도준은 서윤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재헌을 바라봤다.“저는 한서윤 씨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사업적인 관심 말고도요.”서윤의 손끝이 태블릿 가장자리에 멈췄다.재헌이 한 걸음 다가섰다.“권도준.”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지금 나한테 도발하는 거야?”도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아닙니다. 숨기지 않는 겁니다.”그는 재헌의 어깨 너머로 회의실을 확인했다.“그리고 곧 설명회가 시작됩니다. 오늘은 한 박사님이 주관하는 자리니까,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사업에 집중하시죠.”재헌은 도준을 노려봤다.그 남자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그런데도 한 발짝도 밀리지 않았다.그 여유가 재헌을 더욱 자극했다.***설명회가 시작되자 서윤은 회의실 앞에 섰다.대형 화면에는 기술사업화 협력사 선정 기준이 표시되어 있었다.“이번 협력은 특정 기술의 상용화를 위한 것입니다. 연구소 운영권이나 다른 연구 성과에 대한 포괄적인 권리를 제공하는 계약은 검토하지 않겠습니다.”기업 관계자들이 자료에 메모하기 시작했다.도준은 서윤의 발표를 지켜봤다.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큰 기업들을 상대로도 위축되지 않았다.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조건을 먼저 제시하고 상대가 그 기준에 맞추도록 만들었다.도준은 그 모습이 좋았다.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여자.그런 여자가 자신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그 순간을 억지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그는 서윤이 먼저 손을 내밀고 싶어질 만큼 믿을 만한 남자가 되고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재헌은 손에 쥔 펜을 부러질 듯 움켜쥐었다.“도원과 거래하는 생산 협력업체들을 조사해.”“대표님?”“우리도 활용할 수 있는 시설인지 확인하라는 뜻이야.”임원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재헌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제안서는 내가 직접 제출한다.”***설명회 당일.권도준은 연구센터로 향하는 차 안에서 도원에너지테크 사업본부장과 통화하고 있었다.“시험설비 구축에 여덟 달이 필요하다고?”차창 밖으로 연구센터 건물이 가까워졌다.수화기 너머에서 본부장이 기존 생산라인 조정과 안전성 검증에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했다.도준은 태블릿에 표시된 일정을 확인했다.“기존 생산라인을 건드리지 말고 별도 시험설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다시 계산해. 초기 비용이 늘더라도 검증 기간을 줄이는 편이 낫겠어.”—대표님, 그러면 투자 규모가 상당히 커집니다.“알아.”도준은 자료를 한 장 넘겼다.“대신 기술사용권은 검증 대상 제품으로 한정해. 다른 연구 성과까지 묶어두겠다는 조항은 넣지 말고.”—그러면 경쟁사보다 조건이 불리할 수 있습니다.도준이 낮게 웃었다.“우리가 필요한 건 한서윤 박사의 미래를 소유하는 계약이 아니야. 함께 수익을 낼 수 있는 기술이지.”그는 수정된 투자안을 확인한 뒤 통화를 끝냈다.운전기사가 차 문을 열자 도준은 재킷 단추를 잠그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회의실 앞에서는 서윤이 현석과 발표 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다.도준은 멀리서 그녀를 발견하자 걸음을 조금 늦췄다.서윤은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태블릿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 피곤한 기색이 있었지만 연구 이야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눈빛이 선명해졌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한 박사님.”서윤이 고개를 들었다.“대표님, 일찍 오셨네요.”“오늘은 이기러 왔습니다.”그가 태블릿을 들어 보였다.“사업으로요.”서윤이 웃었다.“그럼 제 기준이 꽤 까다로울 텐데요.”“좋습니다. 쉬운 상대는 재미없으니까요.”도준은 그녀의 손에 들
에이펙스 다이내믹스와의 협상이 끝난 뒤, 한서윤의 연구센터에는 국내 기업들의 방문 요청이 쏟아졌다.세계적인 기업이 천억 원을 제시했다는 소식에 업계 전체가 들썩였다. 이틀 동안 여섯 곳에서 제안서가 도착했고, 연구센터 회의실은 오전부터 저녁까지 비어 있을 틈이 없었다.마지막 방문단을 배웅한 이현석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박사님, 이러다 연구보다 회의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겠습니다.”서윤은 책상 위에 쌓인 제안서를 세 묶음으로 나눴다. 기술 검증 능력이 부족한 회사, 연구 성과에 지나치게 많은 권리를 요구하는 회사, 실제 협력이 가능한 회사였다.“그런데 제대로 검토할 만한 곳은 두 군데뿐이에요.”현석이 마지막 묶음을 들여다봤다.“조건은 다들 좋던데요?”“자기 회사에 필요한 기술부터 이야기하잖아요. 제가 앞으로 뭘 연구할지는 별로 관심이 없고요.”서윤은 에이펙스와 협상하면서 정리했던 연구개발 계획서를 펼쳤다.독립 연구소를 세우려면 연구비와 장비뿐 아니라 기술을 실제 산업에 적용할 협력사도 필요했다. 그렇다고 사업화를 맡긴다는 이유로 연구의 주도권까지 넘길 생각은 없었다.그녀는 새로운 문서를 열었다.*기술사업화 협력사 선정 기준.*생산시설과 검증 능력, 투자 계획, 기술사용권의 범위, 연구 독립성까지 평가 항목을 정리했다.“같은 조건으로 제안서를 받아 비교할 거예요.”현석이 웃었다.“이제 기업들이 박사님 면접을 보러 오는 겁니까?”“그렇게 생각해도 되겠네요.”그때 현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던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강성그룹이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현석이 휴대전화를 가리고 서윤을 바라봤다.“박사님, 강성에서 기술사업화 제안서를 제출하고 싶답니다.”서윤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강성.그 이름을 듣자 이혼서류에 서명하던 강재헌의 얼굴이 떠올랐다.하지만 서윤은 곧 출력된 선정 기준을 현석에게 건넸다.“다른 회사와 똑같이 안내해 주세요.”“괜찮으시겠습니까?”“강성이라고 제외할 이유도, 특별대우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