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윤은 마이크를 들고 가장 앞에 서 있던 기자를 바라봤다.“정우석 교수님이 공식 검증을 요청하셨다고 들었습니다.”기자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네, 박사님. 검증에 응하실 생각입니까?”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응하겠습니다.”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그럼 표절 의혹을 부인하시는 겁니까?”“제가 연구한 내용을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말로 다투고 싶지는 않습니다.”기자 한 명이 앞으로 마이크를 내밀었다.“어떤 방식으로 해명하실 생각입니까?”서윤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공개 검증을 요청하겠습니다. 원자료와 설계 과정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자리에서요.”그 순간 기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졌다.“정우석 교수님과 같은 자리에서 검증받겠다는 말씀이십니까?”“네. 그분도 자신의 연구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서윤은 기자들을 차례로 바라봤다.“누가 먼저 발표했는지가 아니라, 누가 그 연구를 만들었는지 확인하면 됩니다.”그 말을 끝으로 서윤은 보안요원들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현석은 그녀를 따라오며 여전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박사님, 정말 공개 검증을 하실 생각이세요? 상대가 정우석 교수인데요. 학회에서도 영향력이 상당한 사람입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서윤은 안으로 들어서며 현석을 바라봤다.“그래서 더 공개적으로 해야죠.”한 시간 뒤, 정우석의 연구실에도 서윤의 발언이 전달됐다.정우석은 기자회견 영상을 보다가 화면을 멈췄다.모니터 속 한서윤은 카메라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얼굴이었다.“공개 검증이라…….”그가 낮게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조교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교수님, 이건 조금 신중하게 대응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한서윤 박사가 원자료를 갖고 있을 수도 있어서요.”정우석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원자료가 있다고 해서 그게 전부 자기 연구가 되는 건 아니야.”“하지만 설계 과정까지 검증하겠다고 했습니다.”정우석은
“의심하셔도 됩니다. 대신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확인해 주세요. 저도 그걸 원합니다.”차정혁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참고로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오늘 오전 연구 지원 심의에 참여하는 외부 자문위원들 사이에서 같은 의견이 나왔습니다.“어떤 의견인가요?”—한 박사님의 연구 성과에 대한 검증이 끝나기 전까지 지원 결정을 서두르지 말자는 내용입니다.서윤은 책상 위의 메모지를 바라봤다.“그 의견을 낸 분들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아직 공식적으로 공개된 내용은 아닙니다. 다만 일부 위원들이 정우석 교수와 오랫동안 함께 연구과제를 수행했던 분들이라는 사실은 확인했습니다.서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이제야 여러 기관에서 비슷한 말을 꺼낸 이유가 이해됐다.정우석은 단순히 자신의 연구를 가로챈 데서 그치지 않았다.서윤이 독립 연구를 시작할 기회까지 막으려 하고 있었다.“알겠습니다, 실장님. 일정은 그대로 진행해 주세요.”통화를 마친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현석 씨, 원자료 목록 다시 정리해 주세요. 개인 저장장치에 남아 있는 파일뿐 아니라 당시 연구실 서버에 제출했던 기록도 확인해야겠어요.”“학교 쪽에서 협조해 줄까요?”“정식으로 요청해 봐야죠.”서윤은 가방에서 오래된 연구 노트를 꺼냈다.누렇게 변한 종이 사이에는 손으로 그린 설계도와 실험 과정에서 수정한 수식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정우석의 논문에는 완성된 결과만 있었다.하지만 서윤의 노트에는 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수없이 실패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왜 그런 구조를 선택했는지, 어떤 문제가 발생해 설계를 바꾸었는지, 무엇을 확인하지 못해 연구를 중단해야 했는지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서윤은 페이지를 넘기다가 한곳에서 손을 멈췄다.정우석의 논문에 실린 설계도에는 자신의 초기 설계에서 이미 수정했던 오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현석 씨, 이것 좀 보세요.”서윤이 노트와 논문을 나란히 놓자 현석이 가까이 다가왔다.“같은 구조인데요.”
그는 다시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대신 정우석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 전부 알아봐. 한서윤한테 손댄 대가가 뭔지는 알아야 할 테니까.”오세진이 나간 뒤에도 재헌은 한동안 보고서를 들여다봤다.화면 속 서윤은 대전에서 촬영된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 사진 아래에 붙은 '표절 의혹'이라는 글자가 유난히 거슬렸다.도원인베스트먼트에서는 이미 오전부터 관련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도준은 회의실 대형 화면에 띄워진 기사를 바라보며 실무진의 보고를 들었다.“정우석 교수 측에서 연구윤리위원회 소집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제가 장기화되면 공동 프로젝트 일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도준은 서류를 넘기며 물었다.“도원 쪽 계약에는 어떤 조항이 있습니까?”“원천기술의 권리 관계에 중대한 분쟁이 발생할 경우 공동 연구의 일부를 보류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법무팀에서는 해당 조항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습니다.”도준은 서류를 덮었다.“법무 검토는 진행하세요. 다만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의혹만으로 한 박사의 연구 참여를 제한하지는 마십시오.”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도준은 이어서 관련 자료를 직접 확인하겠다고 말했다.그는 한서윤이 어떤 연구자인지 알고 있었다.2년 동안 함께 일하면서 서윤이 기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연구자료를 다루는 태도를 지켜봤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신뢰만으로 모든 의혹을 무시할 생각도 없었다.오히려 이번 일은 정확하게 밝혀져야 했다.서윤이 자신의 연구를 증명할 수 있다면 그보다 확실한 반박은 없었다.회의가 끝난 뒤 도준은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몇 차례 신호가 울린 끝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네, 대표님.“기사 봤습니다. 필요한 자료가 있습니까? 도원 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라면 찾아보겠습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지금은 괜찮아요. 제가 먼저 확인할 게 있어서요.도준은 창가로 걸어가며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알겠습니다. 대신 공동 프로젝트 때문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쌓여 있었다. 학회 관계자와 과거 함께 연구했던 동료들, 최근 제안서를 보낸 연구기관 담당자들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그중에는 강성그룹 오세진의 이름도 있었다.서윤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정우석이 먼저 움직였다는 사실은 분명했다.문제는 그가 단순히 언론에 의혹을 제기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강성그룹 본사에서도 관련 기사가 빠르게 공유되고 있었다.재헌은 오전 임원회의를 마친 뒤 오세진에게 보고서를 건네받았다.“대표님, 한서윤 박사 관련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7년 전 연구 성과와 관련된 표절 의혹인데, 정우석 교수 측에서 먼저 공식 입장을 냈습니다.”재헌은 서류를 넘기다가 서윤의 이름이 보이자 손을 멈췄다.“한서윤이 남의 연구를 가져갔다고?”“정확히는 연구 기여도와 원천기술 소유권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다만 일부 언론에서는 이미 표절 의혹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재헌은 기사를 읽으며 미간을 좁혔다.그는 서윤이 대학 시절 어떤 연구를 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결혼 생활 동안 서윤이 연구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대체로 바쁘다는 이유로 흘려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기술 설명이 길어지면 다른 화제로 돌리기도 했다.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모르던 그 시절이 서윤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어 있었다.“정우석이라는 사람, 알아봐.”“이미 확인 중입니다. 강성 계열사에서도 과거 기술자문을 받은 이력이 있습니다.”재헌은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지금도 거래하는 곳이 있어?”“현재 직접적인 계약은 없습니다. 다만 일부 계열사 연구진과 학술 교류가 있습니다.”“관련 자료 전부 가져와. 그리고 이 문제 때문에 한서윤 박사가 참여한 프로젝트에 불이익이 생기지 않도록 해.”오세진은 지시를 적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사님께 직접 연락하시겠습니까?”재헌의 시선이 휴대전화로 향했다.서윤에게 당장 전화를 걸고 싶었다.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왜 자신에게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묻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이제 와서 혼자 연구한 것처럼 주장하면 곤란하지.”전화를 끊은 정우석은 곧바로 대학 홍보실에 연락했다. 다음 날 예정된 학술 행사와 관련해 공식 입장을 준비해 달라는 지시였다.홍보실 직원이 발표 내용을 묻자 정우석은 잠시 망설이지도 않았다.“최근 언론에 소개된 한서윤 박사의 연구 성과와 관련해서입니다. 사실관계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어요.”통화를 끝낸 정우석은 다른 번호를 눌렀다.상대는 국가 연구과제 심의에 여러 차례 참여했던 오랜 동료였다.“김 교수, 나 정우석이야. 이번에 한서윤이라는 연구자한테 독립 연구 지원이 들어간다는 이야기 들었지?”정우석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상대의 대답을 들었다.“아직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 좀 있어. 내 연구실에서 시작한 기술인데 본인 혼자 만든 것처럼 알려지고 있거든.”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목소리를 낮췄다.“내가 무슨 지원을 막자는 건 아니야. 다만 국가 예산이 들어가는 일인데 연구 성과의 귀속 관계부터 확인해야 하지 않겠어? 자네가 아는 심의위원들에게도 그 정도는 이야기해 줄 수 있잖아.”상대가 신중하게 검토하겠다고 답하자 정우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그래, 괜히 서둘렀다가 문제가 생기면 서로 곤란하니까.”전화를 끊은 뒤에도 그는 몇 사람에게 더 연락했다.오랫동안 함께 연구과제를 수행했던 교수와 학회 임원, 정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선배까지. 정우석은 누구에게도 노골적으로 한서윤의 지원을 막아달라고 말하지 않았다.대신 국가 예산과 연구윤리, 검증되지 않은 성과라는 말을 반복했다.그 정도면 충분했다.그날 밤, 정우석은 자신이 발표했던 논문들과 과거 연구실 운영 기록을 다시 검토했다.오래된 연구실 자료에는 한서윤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연구실 소속 학생 명단과 장비 사용 기록, 교수에게 제출한 중간보고서까지.그는 한서윤의 이름이 적힌 보고서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옆으로 밀어놓았다.“학생이 교수 연구실에서 배운 걸 가지고…….”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서윤이 제출한 설계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이런 연구에 매달리다가는 졸업도 못 해. 현실적인 주제를 찾아.”서윤은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연구를 포기하지 못했다. 실험실 사용 시간이 끝나면 남는 장비를 빌려 테스트했고, 연구비를 지원받지 못해 필요한 부품을 직접 구입한 적도 있었다.그러다 졸업을 앞두고 정우석의 지시로 관련 자료를 연구실 서버에 제출했다.그것이 마지막이었다.“박사님, 이 논문 발표 시점이 이상합니다.”현석이 화면을 가리켰다.“박사님이 졸업하고 3년쯤 지난 뒤에 발표됐어요. 그런데 여기 적힌 초기 설계 원리가 지금 보여주신 자료랑 거의 같습니다.”서윤은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정우석은 자신이 오랜 기간 연구해온 독자적인 원천기술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연구의 출발점과 발전 과정까지 자세하게 적혀 있었지만 어디에도 한서윤이라는 이름은 없었다.참고문헌에도, 연구 기여자 명단에도.“관련 논문이 더 있나요?”현석이 검색창에 정우석의 이름을 입력하자 여러 편의 후속 논문이 나타났다. 학회 발표 자료와 정부 연구과제 보고서, 기업 공동개발 실적까지 줄줄이 이어졌다.그중 하나는 지난해 국가 우수 연구성과로 선정된 자료였다.서윤은 천천히 화면을 넘겼다.7년 전 자신이 연구 노트에 적어두었던 가설이 다른 사람의 대표 업적으로 성장해 있었다.“이건 그냥 비슷한 연구라고 보기 어려운데요.”현석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박사님 이름이 어디에도 없어요. 처음부터 정우석 교수 혼자 연구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서윤은 논문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한 뒤 자신의 오래된 연구 파일을 다시 열었다.“원자료부터 확인해 봐야겠어요. 정확히 어디까지 사용됐는지 알아야 하니까요.”“지금 바로 문제 제기하실 생각은 아니시고요?”서윤은 대답 대신 논문 두 편을 나란히 띄웠다.현석은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서윤의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끝이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7년 전 자신의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