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오후 3시.
태현은 편집실에서 다음 영상 구성을 확인하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서진우가 노트북 화면을 넘기며 말했다.
“형, 이번 영상 반응 좋아요.”
“그래?”
“네. 사람들이 형이랑 형수님 처음 만났던 이야기 엄청 궁금했나 봐요.”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올린 영상은 평소보다 짧았다.
수진과 처음 만났던 날.
그날 자신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녀가 얼마나 밝게 웃었는지.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사실 영상을 올리기 전 조금 망설였다.
수진이 먼저 보여 달라고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게 괜히 쑥스러웠다.
결국 영상을 먼저 공개해 버렸다.
또 혼나겠네.
태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진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형, 근데 이 댓글 뭐예요?”
“뭔데?”
진우가 노트북을 돌려 보여줬다.
[첫 만남은 그날 아닐 텐데요.]
[남자분이 기억 못 하는 것 같은데.]
태현의 손이 멈췄다.
“……뭐야.”
“아는 사람인가 봐요. 형수님 친구 아니에요?”
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댓글을 오래 바라봤다.
이상하게 익숙한 말투였다.
특히 한 단어.
남자분.
태현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설마.”
“뭐가요?”
“아니야.”
태현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수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수진아.]
답장은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력했다.
[우리 처음 만난 날 언제였지?]
그 시각 수진은 회의 중이었다.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슬쩍 화면을 확인한 수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우리 처음 만난 날 언제였지?]
설마.
댓글을 본 걸까?
아니겠지.
그 영상에 댓글이 얼마나 많은데.
수진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회의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20분쯤 지나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친구 생일 모임 아니었어?]
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그렇다고 대답하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억울했다.
태현이 정말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결국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아니야.]
전송 버튼을 누른 뒤에야 정신이 들었다.
“……아.”
곧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
그리고 전화가 걸려왔다.
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받지 않았다.
전화가 끊기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역시.]
[뭐가.]
[댓글 너지.]
수진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무슨 댓글.]
[모른 척하지 마.]
[나 아닌데.]
잠시 후.
[너 맞네.]
수진은 어이가 없었다.
[왜 확신해?]
태현은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다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너 화나면 남자분이라고 하잖아.]
수진의 손가락이 멈췄다.
기억하고 있었다.
연애할 때 태현이 얄미우면 수진은 일부러 그를 낯선 사람처럼 불렀다.
“저기요, 이태현 씨.”
혹은.
“남자분, 지금 뭐 하세요?”
그때마다 태현은 싫어했다.
갑자기 남이 된 것 같다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그 사소한 습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수진은 괜히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첫 만남 언제인데?]
[기억 못 하면 됐어.]
[알려줘.]
[싫어.]
[수진아.]
[왜.]
[나 진짜 궁금해.]
수진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이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자신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낯선 남자에게 우산을 받아 들고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그리고 일주일 뒤 그 남자를 다시 만났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그런 건 자신만 기억하고 있었다.
수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편의점.]
태현의 답장은 바로 왔다.
[뭐?]
[비 오던 날.]
읽음 표시가 떴다.
그런데 답장은 오지 않았다.
1분.
2분.
3분.
수진은 괜히 화면을 바라봤다.
그러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태현.
이번에는 전화를 받았다.
“왜.”
“수진아, 잠깐만.”
태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높았다.
“뭐.”
“편의점이라고 했지?”
“응.”
“비 오던 날?”
“응.”
태현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그가 말을 멈췄다.
수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혹시 뭐?”
“그때 내가 우산 빌려준 사람?”
“……이제 생각나?”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태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미친.”
“뭐?”
“그 사람이 너였어?”
수진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몰랐구나.”
“아니, 잠깐만.”
태현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분명히…….”
그의 말이 끊겼다.
수진은 웃음을 참으며 기다렸다.
태현은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던 저녁.
회사 근처 편의점.
처마 아래 서 있던 낯선 여자.
그리고 자신이 건넸던 우산.
그날의 기억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수진아.”
“왜.”
“그럼 너는…….”
태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생일 모임에서 나를 봤을 때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수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날을 떠올렸다.
일주일 전 자신에게 우산을 빌려준 남자가 친구의 생일 모임에 나타났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그런데 태현은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했었다.
수진은 그때 조금 서운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가 먼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바랐다.
“응.”
짧게 대답했다.
태현이 숨을 멈췄다.
“근데 왜 말 안 했어?”
수진은 잠시 웃었다.
“네가 먼저 기억해 주길 바랐으니까.”
전화기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진은 괜히 창밖을 바라봤다.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일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의 자신이 잠깐 돌아온 것 같았다.
태현이 아주 낮게 말했다.
“나 진짜 바보였네.”
“이제 알았어?”
수진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태현은 웃지 않았다.
한참 만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진아.”
“응.”
“그날 우산을 빌려준 여자가 너였다는 걸 알았으면…….”
그가 말을 멈췄다.
수진의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알았으면 뭐?”
태현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 그날부터 너를 다시 만나고 싶어 했을지도 몰라.”
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오래전 비 내리던 그날을 떠올렸다.
친구 생일 모임이 끝난 날.태현은 수진에게 처음으로 전화번호를 물었다.“번호 알려줄래요?”수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왜요?”태현이 조금 당황했다.“연락하려고요.”“왜 연락하려고요?”태현은 한참 고민했다.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한 번 더 보고 싶어서요.”수진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괜히 멋있는 척하지 않고,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지도 않았다.그냥 보고 싶어서.수진은 웃으며 번호를 알려줬다.그리고 다음 날 오후 3시 17분.태현에게 첫 메시지가 도착했다.[안녕하세요. 어제 그 사람입니다.]수진은 메시지를 보고 한참 웃었다.어제 그 사람이라니.이름도 알고 있는데 왜 저렇게 보냈을까.수진은 장난스럽게 답장을 보냈다.[어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는데요.]5분 동안 답장이 없었다.수진은 혼자 웃었다.그리고 마침내 답장이 왔다.[우산 줬던 사람.]수진의 손이 멈췄다.설마 기억났나?[그걸 기억해요?]태현의 답장은 의외였다.[뭘요?]알고 보니 태현은 자신이 편의점에서 우산을 빌려준 여자가 수진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그냥 그날 모임에서 누군가에게 우산을 건네줬던 일을 이야기한 것이었다.수진은 그 사실이 너무 웃겼다.정말 눈치 없는 사람이네.그런데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며칠 뒤.태현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다음 날 아침.수진은 댓글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어젯밤부터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읽었기 때문이다.두 분 지금 다시 만나고 있는 건가요?아니라고 대답하면 그만이었다.두 사람은 이혼했고, 아직 다시 시작하자는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그런데 그 단순한 사실을 스스로에게 설명하는 일이 이상하게 어려웠다.출근 준비를 하면서도.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도.회사 컴퓨터가 켜지기를 기다리면서도.결국 수진은 또 유튜브를 열었다.[T의 기록]태현이 올린 커뮤니티 글은 밤사이 더 많이 퍼져 있었다.댓글 수는 2만 3천 개.수진은 헛웃음을 흘렸다.“사람들 진짜 할 일 없나.”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가락은 이미 댓글을 내리고 있었다.[이거 전부인이 직접 알려준 거 아니냐.][백퍼 연락 중이다.][그 사람은 기억하고 있었고요 ← 이 말 왜 이렇게 설레냐.][우산 빌려주고 본인은 비 맞았다는 거면 처음부터 남주 재질인데.][둘 재결합하면 진짜 난리 나겠다.]수진의 손가락이 멈췄다.재결합.그 단어가 유독 크게 보였다.다시 결혼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사람들은 그저 헤어진 두 사람이 다시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수진에게 그 말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다시 누군가를 믿는 일.또다시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손을 내미는 일.그건 댓글 몇 줄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수진은 앱을 껐다.“무슨 재결합이야.”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이태현이었
일주일 전.비가 정말 많이 오던 저녁이었다.태현은 편의점에서 우산 하나를 사 들고 나왔다.그리고 입구 앞에서 한 여자를 보았다.휴대폰으로 날씨를 확인하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자.우산이 없는 모양이었다.그때는 이름도 몰랐다.그 여자가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될 윤수진이라는 사실도.태현은 그냥 지나치려 했다.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성격도 아니었고, 괜히 오해를 사고 싶지도 않았다.그런데 몇 걸음 걸어가다 다시 돌아봤다.여자는 여전히 편의점 처마 아래 서 있었다.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태현은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저기요.”여자가 고개를 들었다.“네?”태현은 들고 있던 우산을 내밀었다.“이거 쓰세요.”여자는 당황한 얼굴이었다.“아니에요. 괜찮아요.”“저 바로 앞이에요.”거짓말이었다.태현의 집은 버스로 세 정거장을 더 가야 했다.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그래도 우산은…….”“저는 괜찮아요.”태현이 웃었다.“비 더 오기 전에 가세요.”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우산을 받았다.“그럼 연락처라도 알려주세요. 나중에 돌려드릴게요.”“괜찮아요.”“그래도 새 우산 같은데.”“그냥 쓰세요.”태현은 더 이야기하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갔다.뒤에서 여자가 무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빗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그날 태현은 비에 흠뻑 젖었다.집에 도착해서야 괜히 우산을 줬나 싶기도 했다.하지만 이상하게 후회되지는 않았다
오후 3시.태현은 편집실에서 다음 영상 구성을 확인하고 있었다.옆에 앉아 있던 서진우가 노트북 화면을 넘기며 말했다.“형, 이번 영상 반응 좋아요.”“그래?”“네. 사람들이 형이랑 형수님 처음 만났던 이야기 엄청 궁금했나 봐요.”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올린 영상은 평소보다 짧았다.수진과 처음 만났던 날.그날 자신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녀가 얼마나 밝게 웃었는지.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했을 뿐이었다.사실 영상을 올리기 전 조금 망설였다.수진이 먼저 보여 달라고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그런데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게 괜히 쑥스러웠다.결국 영상을 먼저 공개해 버렸다.또 혼나겠네.태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진우가 웃음을 터뜨렸다.“형, 근데 이 댓글 뭐예요?”“뭔데?”진우가 노트북을 돌려 보여줬다.[첫 만남은 그날 아닐 텐데요.][남자분이 기억 못 하는 것 같은데.]태현의 손이 멈췄다.“……뭐야.”“아는 사람인가 봐요. 형수님 친구 아니에요?”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댓글을 오래 바라봤다.이상하게 익숙한 말투였다.특히 한 단어.남자분.태현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설마.”“뭐가요?”“아니야.”태현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그리고 수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수진아.]답장은 없었다.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력했다.[우리 처음 만난 날 언제였지?]그 시각 수진은 회의 중이었다.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슬쩍 화면을 확인한 수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우리 처음 만난 날 언제였지?]설마.댓글을 본 걸까?아니겠지.그 영상에 댓글이 얼마나 많은데.수진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지만 회의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20분쯤 지나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친구 생일 모임 아니었어?]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그냥 그렇다고 대답하면 끝날 일이었다.하지만 억울했다.태현이 정말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결국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아니야.
수진은 다음 날 아침부터 휴대폰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특별한 이유는 없었다.정확히는,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이태현이 또 연락했는지.새로운 영상이 올라왔는지.그런 걸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적어도 수진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도, 회사 앞 횡단보도에 서 있으면서도 자꾸 휴대폰으로 손이 갔다.그리고 오전 9시 12분.익숙한 알림이 화면에 나타났다.[T의 기록님이 새 동영상을 업로드했습니다.]수진의 발걸음이 멈췄다.영상 제목은 짧았다.[전부인을 처음 만난 날]“……진짜 올렸네.”어제 카페 앞에서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병원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자신의 이야기도 허락 없이 공개하지 말라고.그러면서 무심코 덧붙였다.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나 해 보라고.그랬더니 정말 그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었다.“말 참 잘 듣네.”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면서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다만 곧바로 마음이 걸렸다.어제 분명 올리기 전에 보여 달라고 했는데.태현은 이번에도 영상을 먼저 공개했다.수진은 메시지를 보내려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일단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부터 확인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출근하자마자 영상을 볼 수는 없었다.회의가 있었고, 처리해야 할 업무도 쌓여 있었다.한 시간.두 시간.수진은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이어폰을 꺼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지현이 슬쩍 물었다.“뭐 봐요?”“아무것도.”“그 유튜브요?”수진이 고개를 들었다.지현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표정에 다 써 있어요.”“밥이나 먹어요.”“먼저 보세요. 궁금해서 아침부터 계속 휴대폰 확인하셨잖아요.”“안 봤거든요.”“지금 재생 버튼 누르고 계시면서?”수진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조용히 좀 해 봐요.”영상이 시작됐다.이번에는 태현이 카페처럼 보이는 공간에 앉아 있었다.화면 아래 자막이 나타났다.[그 사람을 처음 만난 날]태현은 카메라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페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에 닿았다.수진은 코트 깃을 여몄다.태현은 그녀의 옆에서 걸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한 사람이 더 들어갈 만큼의 거리가 있었다.예전에는 이런 거리가 어색하지 않았다.길을 걸으면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고, 추운 날이면 태현이 수진의 손을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태현도 그 사실을 아는 듯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데려다줄까?”수진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알겠어.”그는 더 묻지 않았다.예전의 태현이었다면 늦은 시간이라며 한 번쯤 더 권했을 것이다.수진은 그 변화가 조금 낯설었다.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자신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것 같아서.“그럼 갈게.”“응. 조심히 가.”수진은 몇 걸음 걸었다.그러다 문득 멈췄다.뒤를 돌아보니 태현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냥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1년 전에도 저렇게 서 있었을까.이혼 서류를 제출하고 돌아서던 날.그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수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돌아보면 울 것 같아서.그리고 그가 자신을 붙잡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두려워서.“태현아.”그가 고개를 들었다.“응?”“다음 영상 말이야.”태현의 표정이 굳었다.“응.”수진은 잠시 망설였다.그의 유튜브 채널을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복잡했다.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이야기했다.누군가는 태현을 불쌍하게 여겼고, 누군가는 얼굴도 모르는 수진을 비난했다.그런데 정작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행복했던 날들.아무 이유 없이 웃었던 저녁.그리고 사랑이 시작되었던 순간.“병원 얘기는 하지 마.”“알겠어.”“내 얘기도 허락 없이 꺼내지 말고.”“응.”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차라리…… 처음 만났을 때 얘기나 해.”태현의 눈이 커졌다.“우리 처음 만났을 때?”“그냥 예를 든 거야.”“수진아.”“왜.”태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