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시간은 마치 끈적하고 검붉은 핏방울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듯 몹시도 잔혹하고 숨 막히게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황후전의 가장 깊고 은밀한 서재 두꺼운 방음벽과 육중한 백단향 나무 문으로 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된 듯한 그 고요한 공간 한가운데 놓인 최고급 마호가니 탁자 위에는 현재의 화려한 황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낡고 기분 나쁜 비린내를 풍기는 작은 목함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그리고 그 안에는 시은이 13살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이 끔찍한 황궁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그녀의 유일한 피붙이이자 어머니와도 같았던 유모의 잘린 손가락 하나가 참혹하게 담겨 있었다.그 옆으로는 15년 전 죄 없는 어린아이들의 피와 절규 그리고 멸문지화의 진실을 고스란히 머금은 고아원의 낡고 빛바랜 비밀 장부가 흉물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그 끔찍하고도 구역질 나는 잔해들 앞에서 제국의 지배자 황후시은의 너무나도 서늘하고 평온한 대답에 분노로 핏대를 세우던 한비서와 살기를 뿜어내던 민혁이 동시에 경악으로 물든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은은 우아한 손길로 협탁에 놓인 백자 찻잔을 들어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천천히 음미했다. "어젯밤 김태혁이 내의전 창문을 깨고 후원으로 도주할 때 놈이 어디로 튀어 황궁의 어느 지하 배수로로 스며들지 김비서가 이미 황궁의 오래된 지하 도면을 바탕으로 완벽하게 경로를 예측해 두었다. 내명부 지하 감옥의 경비를 평소의 절반 이하로 대폭 줄여서 놈이 아주 수월하게 폐황제 유종석의 독방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길을 열어준 것도 모두 이 황후의 은밀한 지시였지" "마... 마마! 어찌하여 그런 위험천만한 짓을...! 어찌하여 그 끔찍한 살귀들과 원수들을 제 발로 도망치게 살려 보내셨사옵니까!" 민혁이 애가 타는 듯 상처가 벌어지는 것도 잊은 채 침상에서 몸을 앞으로 숙이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주군의 안전에 대한 맹목적인 공포만이 서려 있었다. 쥐새끼는 구석에 몰렸을 때 가장 치명적으로 고양이를 무는 법 아무리 병력을 잃었다 한들 궐 바깥에는 아직 김태혁의 피에 굶주린 5백 명의 살수들이 숨죽여 대기하고 있었다. 시은은 찻잔을 내려놓고 피가 배어 나오는 민혁의 커다란 두 손을 자신의 가녀린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지독한 곰팡내와 벽 틈새에 말라비틀어진 쥐 사체 냄새가 코를 찌를 듯 진동하는 내명부의 최하층 지하 감옥,황실의 빛나는 영광 뒤에 철저하게 감춰진 이 구역은 제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죄인들만이 버려져 빛 한 줌 보지 못하고 서서히 썩어가는 핏빛 심연이었다.끼기기긱-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온 무거운 철창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는 사지가 쇠사슬에 결박된 채 절망에 빠져 있던 신아리에게는 마치 그녀를 데리러 온 지옥문이 열리는 기괴한 파찰음처럼 들려왔다."누...누구냐?"공포에 질려 바싹 갈라진 아리의 목소리 너머로 습기 찬 공기를 가르고 희미한 횃불의 붉은 불빛이 스며들었다.그리고 그 일렁이는 핏빛 조명 아래로 악귀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바닥을 구르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사내의 거대한 실루엣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한 명은 자신을 배신하고 법정에서 모든 횡령의 죄를 뒤집어씌웠던 분노와 치욕에 일그러진 폐황제 유종석이었고, 다른 한 명은 불에 타 짓무른 끔찍한 화상 흉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어깨에서 검은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혈랑회의 수괴 김태혁이었다."오랜만이구나, 신아리 아니, 한때는 이 황궁을 쥐락펴락하던 신 황귀비 마마라 불러드려야 하나?"태혁이 서늘하게 벼려진 은장도 단검을 꺼내어 바닥에 엎드린 아
그날 자정 무렵 태풍이 본격적으로 북상하며 폭풍우가 다시 맹렬하게 몰아치기 시작한 황궁의 밤 거센 빗줄기가 수술실 복도의 넓은 유리창을 미친 듯이 때리며 기괴하고 스산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수술실 밖에서 피 묻은 상복 드레스를 입은 채 장장 4시간이 넘도록 돌부처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시은의 귓가에, 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리는 무거운 기계음이 들려왔다.위잉-피 묻은 수술복을 입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황실 어의장과 의료진들이 걸어 나와, 시은을 향해 일제히 깊이 고개를 숙였다.시은은 숨을 멈추고 다가갔다."어찌... 어찌 되었느냐."어의장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조심스럽게, 그러나 안도의 미소가 번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마마 총상과 복부의 자상이 워낙 깊어 출혈이 몹시 심했고 특히 등에 박힌 특수 파편들이 척추 신경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릴 뻔하여 수술이 지연되었으나...""……!""대장의 그 짐승 같은 초인적인 정신력과 끈질긴 생명력 덕분에 간신히 최대 고비는 넘겼사옵니다.파편은 모두 완벽하게 제거하였고 지혈도 마쳤습니다.당분간 절대 안
챙-!!민혁이 온몸을 던져 허공에 뜬 은빛 폭탄을 대검의 넓은 칼면으로 맹렬하게 쳐냈다.엄청난 쇳소리와 타격음에 폭탄은 간신히 궤도를 틀어, 방탄유리창이 깨져 뻥 뚫려있는 창밖의 텅 빈 후원 정원 쪽으로 튕겨 나갔다.그러나 폭탄이 채 정원 바닥에 닿기도 전이었다.콰아아아앙-!!!고막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기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창밖 텅 빈 후원 정원 한가운데서 태양을 삼킨 듯한 거대한 불기둥이 무섭게 치솟아 올랐다.황실 특수 폭탄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미친 듯이 요동쳤고 폭발이 만들어낸 끔찍한 열풍과 충격파가 깨진 창문을 통해 병실 안을 해일처럼 집어삼킬 듯 덮쳐왔다."크으윽!"민혁은 짐승처럼 낮게 신음하며, 자신의 거대한 몸을 둥글게 웅크려 코마 상태로 누워있는 대비마마의 옥체를 완벽하게 덮어 감쌌다.폭발의 후폭풍을 타고 날아온 날카로운 파편들과 산산조각 난 날 선 유리 조각들이 민혁의 넓은 등과 어깨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하며 찢고 지나갔다.푸욱! 퍽! 찌익!살점이 뜯겨 나가고 뼈가 긁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병실을 채웠다.두꺼운 방검복조차 막아내지 못한 끔찍한 쇳조각과 파편들이 그의 등허리에 깊숙이 박혀들었지만, 민혁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으며 단 한 치의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주군의 시어머니 그 고결하고 소중한 목숨을 지켜내기 위해 그는 기꺼이 자신의 뼈와 살을 고기 방패로 내어주었다.자욱한 매연과 지독한 화약 냄새가 병실을
카아아앙-!! 쩌저저적!황실 내의전 특별 병동, 그중에서도 가장 삼엄한 경비가 깔려 있어야 할 대비마마의 VIP 병실,폭풍우가 미친 듯이 몰아치는 칠흑 같은 제국의 밤,굳건하게 병실을 지키고 있던 두꺼운 특수 방탄유리창이 끔찍한 파열음을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사방으로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 사이로, 먹구름을 뚫고 나온 스산하고 서늘한 달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그리고 그 창백한 달빛을 조명 삼아, 마치 지옥의 핏빛 투기장에서 마주친 두 마리의 굶주린 야수처럼 김민혁과 김태혁이 허공에서 맹렬하게 격돌했다."크하학! 제법이구나, 내 아우님! 고아원 벽장 구석에서 매나 맞으며 질질 짜던 꼬마 녀석이 어느새 황후의 치맛자락 아래서 제법 사나운 사냥개로 컸어! 그 피투성이가 된 덜떨어진 몸뚱이로 여기까지 단숨에 뛰어오다니!"혈랑회의 수장 김태혁이 양손에 쥔 서늘한 은장도 쌍검을 X자로 교차하여, 민혁이 벼락처럼 내리찍는 거대한 대검을 간신히 막아내며 기괴하고도 잔혹한 폭소를 터뜨렸다.두 쇠붙이가 무자비하게 맞부딪히며 뿜어내는 시뻘건 불꽃이, 병실의 짙은 어둠을 찰나의 순간마다 섬뜩하게 밝혔다.민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그의 칠흑 같은 어두운 눈동자에는 오직 눈앞의
밤 11시 45분대한제국 황궁의 거대한 정문 광화문(光化門) 앞 광장,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며 하늘이 뚫린 듯했던 어제와는 달리 구름 한 점 없이 기괴할 정도로 맑고 스산한 달빛만이 텅 빈 광장의 젖은 아스팔트를 차갑게 비추고 있었다.하지만 광장의 분위기는 폭풍전야의 팽팽한 활시위처럼 터질 듯이 당겨져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김태혁이 수일 전부터 치밀하게 국내외 유력 언론사에 뿌려둔 자극적이고 악의적인 투서 덕분에 수백 명의 외신 기자들과 국내 방송사 취재진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광장을 발 디딜 틈 없이 꽉 채우고 있었다.[속보: 황후 민시은의 그림자 호위무사 김민혁, 15년 전 고아원 방화 및 수십 명 대량 학살의 진범 의혹!][충격! 희대의 아동 살인마를 곁에 둔 황후 내명부의 권위를 무력으로 찬탈한 것인가? 진실 규명 요구!]수십 대의 방송 카메라 렌즈와 붉은 온에어 불빛 그리고 혈랑회의 정보원들에게 선동된 일부 성난 군중들의 험악한 피켓이 굳게 닫힌 황궁의 육중한 정문을 향해 일제히 쏠려 있었다.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점차 거대한 분노의 파도가 되어 황궁의 담장을 때리고 있었다.딩- 딩- 딩-그리고 마침내, 자정을 알리는 보신각의 종소리가 젖은 밤공기를 가르며 무겁게 울려 퍼지는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