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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황제의 기만 피어나는 불신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7-26 10:27:47

​"기대하십시오 폐하 어젯밤의 지옥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니까요."

 

​서늘하고도 잔혹한 귓속말을 끝으로 시은은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황금빛 적의(翟衣)가 대리석 바닥을 스치며 내는 사각이는 파찰음만이 죽은 듯 고요해진 편전 안을 날카롭게 가르며 울려 퍼졌다.

 

​"이...이 독부 같은 년! 감히 폐하 앞에서 피를 보이고 협박을 해? 황후! 네가 정녕 미친 것이로구나! 멈춰라! 거기 서지 못할까!" 민시은!!!!

 

​사색이 된 황제 유종석이 등 뒤에서 악을 쓰며 소리쳤지만 시은의 고고한 발걸음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한비서가 얼음장 같은 얼굴로 무미건조한 목례를 남긴 뒤 시은의 뒤를 따랐고 마지막으로 편전 문을 나서던 호위무사 김민혁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종석과 아리를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오직 살육과 주군의 안위만을 위해 훈련된 들개처럼 무감각하면서도 잔혹한 눈빛 그 칠흑 같은 시선과 마주친 순간 종석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섬뜩한 한기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헉, 하고 삼켰다.

 

​쾅-!

 

​거대한 편전의 문이 무거운 굉음을 내며 닫히는 소리와 함께 14년간 오만하게 군림했던 황제의 권위도 산산조각이 났다.

 

​"꺄아아아악! 치워! 당장 치워! 저 끔찍한 것을 내 눈앞에서 당장 치우란 말이야!"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신아리가 자개 상자 안에 담긴 흑영 조장의 잘린 손목을 보며 발작하듯 비명을 질렀다. 

 

황제의 수석 비서관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다가와 상자를 덮고는 밖으로 쫓기듯 뛰쳐나갔다. 

 

넓고 화려한 편전 안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종석과 공포에 질려 바닥을 기어가는 아리만이 남았다.

 

​"폐...폐하 ! 저. .저민시은 저년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폐하의 수족을 저리 잔인하게 베어내고 우리를 죽이려 들고 있습니다! 저 무서운 년을 당장 폐위시켜야 하옵니다!"폐하!

 

시끄럽다! 민시은 이.. 이독한년!

 

​아리가 종석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 가증스러운 눈물과 비명에, 종석은 이를 뿌득 갈았다.

 

 

​공포는 이내 지독한 분노와 열등감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13살 황궁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오직 제 그림자만 밟으며 순종하던 계집이었다.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늘 애정 어린 때로는 구걸하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우러러보던 그 미련한 민시은이 감히 내명부의 주인이랍시고 황제인 자신을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대한제국 경제의 명줄을 쥐고 있는 제 아비 민현석 회장을 움직여 황실의 돈줄을 말려 죽이려 들고 있었다.

 

​"건방진 것 감히 짐을 겁박해? 내깟 게 민석그룹의 여식이라는 껍데기를 빼면 무엇이 남는다고 감히 폐하를 능멸해! 감히 나를!"

 

 

​종석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탁자 위의 다기를 거칠게 쓸어버렸다. 

 

 

쨍그랑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백자들이 바닥에 나뒹굴며 산산조각이 났다. 

 

숨을 헐떡이던 종석은 아리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

 

​"아리야 너무 두려워하지 말거라 저들이 가진 것이 고작 자본이라는 천박한 돈뿐이라면 내게는 이대한 제국을 합법적으로 움직이는 절대적인 권력이 있다."

 

​종석의 눈동자에 비열하고 교활한 기만의 빛이 떠올랐다.

 

​"내각 총리를 당장 은밀히 입궐시키라 전해라 그리고 황실 언론 통제관을 모두 불러들여라 민현석 그 늙은이가 감히 경제 보복을 시작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철저하게 역이용할 것이다."

 

​"역이용이라 하심은?"

 

​"황실의 숙원 사업인 '문화재 복원 사업'을 민석그룹이 독식하려다 짐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자 앙심을 품고 자본을 무기로 황실을 핍박하고 있다는 프레임을 씌워주마 백성들은 본디 가진 자 특히 재벌의 횡포라면 치를 떠는 개돼지들이다. 여론이 한 번 돌아서면 그 가증스러운 황후년도 제 가문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무릎을 꿇고 내 발등에 입을 맞추며 용서를 빌게 될 것이다!"

 

​그제야 아리의 창백했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결 속에는 시은을 향한 더 짙은 증오와 살의가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건방진 민시은 황후 주제에 감히 내 앞에서 그 잘난 척을 해? 네년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그 고고한 얼굴을 반드시 시궁창에 처박아 주겠어'

 

​같은 시각 편전을 벗어나 황후전으로 돌아오는 길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완벽한 황후의 위엄 있는 걸음을 유지하던 시은의 몸이  아무도 없는 회랑 모퉁이를 도는 순간 속절없이 푹 꺾이며 휘청였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온몸의 피를 말리며 버티고 있던 이성의 끈이 느슨해진 탓이었다.

 

​"마마!"

 

​시은의 몸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추락하기 직전 거대하고 단단한 그리고 데일 듯이 뜨거운 팔이 그녀의 얇은 허리를 으스러질 듯 감싸 안았다. 

 

익숙하고도 짙은 비 냄새와 섞인 수컷의 체취 민혁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온몸이 부서지는 것보다 주군의 몸이 차가운 땅에 닿는 것을 백배는 더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다급하면서도 몹시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괜찮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 어지러웠을 뿐이야놓아라"

 

​시은이 파르르 떨리는 숨을 내쉬며 민혁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다시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에 무너지듯 기대고 말았다. 

 

민혁은 시은의 창백한 얼굴과 하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보며 턱 끝을 굳게 세웠다. 

 

그의 눈동자에 짙은 자책감이 서렸다.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안색이 백지장 같습니다."

 

​"아니 절대 안 된다. 부르지 마라"

 

"마마!"

 

​시은이 민혁의 옷깃을 꽉 쥐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된다 절대 부르지마라 만약에 어의를 부르게되면 황후가 편전에 다녀온 직후 충격으로 쓰러졌다는 소문이 궐내에 퍼지면 안 돼 유종석은 분명 그것조차 나의 나약함과 죄책감으로 포장해 언론에 공격할 위인이다. 나는 그들에게 단 한 치의 약점도 보여줄 수 없어."

 

​시은의 힘없는 그러나 독기 어린 속삭임에 민혁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고통스럽게 일렁였다. 

 

왜 이토록 곱고 여린 분이 그토록 추악하고 잔혹한 전장의 한복판에서 홀로 갑옷도 없이 피를 흘려야 한단 말인가 민혁의 이빨이 까득, 하고 갈렸다.

 

​"한비서"

 

​민혁의 품에 안긴 채로 시은이 나지막이 불렀다.

 

​"예, 마마 말씀하십시오"

 

​"당장 내 서재로 가서 대비전의 김비서에게 은밀한 채널로 연락을 취해 내각의 움직임이 분명 심상치 않을 것이니 총리실의 동향을 실시간 파악해 달라고 전해라 아버님께서 돈줄을 끊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으니 궁지에 몰린 유종석은 분명 언론을 조작해 대국민 사기극을 펼치려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마마  즉시 대비전과 접선하겠습니다."

 

​한비서가 빠르게 몸을 숙이고 회랑 저편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두 사람의 공간에는 묘하고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민혁은 조심스럽게 시은을 안아든 채 황후전의 깊은 내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품은 그 어떤 굳건한 성벽보다 안전했고 그의 심장 박동은 느리지만 묵직하게 시은의 귓가에 전해지고 있었다.

 

​황후전 내실에 도착해 시은을 조심스럽게 침상에 뉘어준 뒤 민혁은 습관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 했다. 

 

감히 주군의 그림자가 고결한 옥체에 닿아있었던 그 불경한 시간을 속죄라도 하듯 깊게 고개를 숙이는 그를 향해 시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다급히 뻗어왔다.

 

​시은은 물러서려는 민혁의 소매를 단단히 붙잡았다.

 

​"민혁아"

 

​"예~ 마마"

 

​시은의 시선이 민혁의 왼쪽 팔뚝에 머물렀다. 

 

어젯밤 흑영 암살단과의 처절한 혈투,그리고 그 이전 신아리의 은밀한 별채를 습격하여 정보를 캐내는 과정에서 입은 깊은 자상,

 

​짙은 흑색의 호위무사 제복 위로는 선명하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소맷자락 틈으로 붉고 끈적한 피가 말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방금 전 시은의 몸을 무리하게 안아 올리며 간신히 지혈해 두었던 상처가 기어이 다시 터져버린 것이다.

 

​"다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구나 피가 배어 나오고 있지 않느냐 상처가 벌어졌다."

 

​"별것 아닙니다 짐승의 이빨에 살짝 스친 것뿐입니다 하루 이틀이면 아물 가벼운 상처이옵니다."

 

​"옷을 벗어라"

 

​"마마! 어찌 감히 마마 앞에서 제 비천한 몸을..."

 

 

​민혁이 기겁하며 뒤로 훌쩍 물러섰지만 시은의 단호하고도 서늘한 눈빛은 굽힐 줄을 몰랐다. 

 

그녀는 침상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채 민혁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것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황후로서 내리는 황명이다. 나를 위해 내 아비를 지키기 위해 대신 흘린 피를 방관하는 비겁한 주군은 없어 당장 겉옷을 벗어라"

 

​결국 민혁은 덜덜 떨리는 거친 손으로 핏물이 스며든 검은 제복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젖은 겉옷이 바닥으로 무겁게 떨어지고 얇은 셔츠마저 벗겨지자 탄탄하게 다져진 짐승 같은 근육질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그러나 시은의 숨을 멎게 한 것은 그의 근육이 아니라 그 위에 빈틈없이 새겨진 수많은 흉터들이었다.

 

​검에 베이고 불에 지져지고 짐승에게 물어뜯긴 듯 살점이 떨어져 나간 참혹한 흔적들 그것은 지난 15년 동안 오직 시은을 지키기 위해 황실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채 죽음의 훈련을 견뎌온 민혁의 처절한 역사이자 핏빛 훈장이었다. 

 

그리고 그 흉터투성이의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길고 깊게 찢어진 살갗이 끔찍하게 입을 벌린 채 붉은 피를 쉴 새 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시은은 황급히 구급 상자를 가져와 침상 아래에 무릎을 꿇은 민혁의 곁에 똑같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천하의 황후가 일개 호위무사 앞에 무릎을 꿇고 상처를 치료하는 황실의 엄격한 법도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순간이었다.

 

​차가운 소독약을 듬뿍 적신 하얀 솜이 찢어진 상처에 닿을 때마다 민혁의 거대한 몸이 반사적으로 흠칫거렸다.

 

 신경을 긁는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그는 입술이 터지도록 꽉 깨물고 단 한 번의 신음조차 내뱉지 않았다.

 

 시은의 섬세하고 떨리는 손길이 하얀 붕대를 팽팽하게 감아내려 갈 때마다 두 사람의 뜨겁고 엇갈린 숨결이 허공에서 애절하게 부딪히며 얽혀들었다.

 

​"민혁아 아프지 않느냐"

 

​시은이 붕대의 마지막 매듭을 지으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나직이 물었다.

 

​"마마의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에 비하면 제 살갗이 찢어지는 것은 그저 간지러움에 불과합니다."

 

​시은의 손끝이 일순간 허공에서 멈칫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본 민혁의 깊은 눈동자 속에는 시은을 향한 지독하리만치 맹목적인 애정과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짙은 슬픔이 고스란히 찰랑거리고 있었다.

 

​"너는 참으로 바보 같구나 고아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네 상처는 돌보지 않고 나를 위해 온몸을 던지기만 하니말이다."

 

​"제 세상이 마마의 구원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민혁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15년 전 그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진흙탕 속에서 짐승처럼 죽어가던 제게 마마께서 건네주셨던 그 하얀 손수건 하나가 지옥의 밑바닥에서 저를 건져 올린 유일한 밧줄이자 빛이었습니다."

 

​민혁이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거친 손을 들어 올려 시은의 창백한 뺨 위로 흘러내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황실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금기된 애정이 묻어나는 조심스러운 터치였다. 

 

그의 굳은살 박인 손끝이 시은의 뺨에 닿을 듯 말 듯 미세하게 떨렸다.

 

​"제 피는 비록 붉고 비천하여 마마의 고결한 옥체를 더럽힐지 모르나 제 심장만은 오직 마마를 향한 투명하고 결백한 충심뿐입니다. 그러니 제발 이 무겁고 잔인한 전장에서 혼자 모든 짐을 지려 하지 마십시오 마마께서 억울한 눈물을 숨기셔야 한다면 제가 짙은 그늘이 되어드릴 것이고 피를 묻히셔야 한다면 제가 기꺼이 마마의 손에 쥐어진 가장 날카로운 칼이 되겠습니다."

 

​시은의 맑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종석에게 바쳤던 14년의 맹목적인 순종과 헌신 속에서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숨이 막힐 듯한 완전한 위로와 절대적인 사랑이였다.

 

​시은은 붕대가 감긴 민혁의 굵은 팔을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꽉 쥐며 천천히 그의 넓은 어깨에 자신의 이마를 무너지듯 기대었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소리 없이 떨렸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지만 가장 차가운 이 황궁 안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온전히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울음 없는 피눈물을 함께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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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명이 밝아오는 황궁,​어젯밤, 칠흑 같은 어둠을 틈타 호위무사 김민혁이 신아리의 독방에 잠입해 소리 없이 빼내 온 극미량의 혈액 샘플. 그 작은 핏방울이 품고 있는 끔찍한 진실을 낱낱이 해독하기 위해, 황실 지하 벙커의 초정밀 양자컴퓨터는 밤새도록 쉬지 않고 육중한 기계음을 뿜어내고 있었다.​밤새 피비린내 나는 폭풍이 휩쓸고 간 궐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지만, 황후전 집무실의 공기만큼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마마 민석그룹 양자컴퓨터 연구소에서 급파된 수석 연구원이 도착했습니다."​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한비서의 다급한 안내를 받으며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식은땀을 닦아내며 안으로 들어섰다.​그의 손에는 삼중으로 굳게 봉인된 티타늄 금고가 들려 있었다.​지난밤 채취한 신아리의 혈액과, 과거 유종석 및 김태혁의 유전자 데이터베이스를 밤새도록 교차 대조한 가장 완벽하고도 잔혹한 '최종 분석 결과'였다.​"이리 가져오라."​거대한 자단목 책상 앞에 꼿꼿하게 앉아 있던 시은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명령했다.​연구원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금고의 암호를 해제하고, 붉은 황실의 인장이 묵직하게 찍힌 서류 봉투를 시은의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민혁은 시은의 등 뒤에 거대한 산처럼 서서, 그 얇은 서류 봉투를 뚫어질 듯 예리하고 살벌하게 주시하고 있었다.​시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봉투의 밀봉을 미련 없이 뜯어냈다.​바스락거리는 종이 마찰음만이 숨 막히는 집무실의 정적을 채웠다.

  • 잔혹한황실    [제68화: 핏줄의 굴레, 그리고 잔혹한 진실의 서막]

    "마마! 신아리가 냉궁에서 깨진 유리 조각으로 쇠사슬을 끊고, 제 몸에 상처를 내며 탈주를 시도하다 발각되었습니다!" ​어스름한 새벽, 황후전 집무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김비서의 다급한 보고에 시은의 맑은 눈동자가 북해의 빙하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젯밤, 달빛 아래 야외 테라스에서 민혁과 나누었던 온기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유리 조각이라니 감시가 그리 철저하거늘, 기어이 제 목숨과 뱃속의 핏덩이를 담보로 황실을 겁박하려 드는구나." ​"제압하는 과정에서도 제 배를 끌어안고, 뱃속의 황손이 잘못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악귀처럼 발악을 해대어 감찰 상궁들이 진땀을 뺐사옵니다." ​시은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며칠 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신아리가 단두대 밑에서 마지막 발악처럼 던졌던 '회임'이라는 단 한마디. 그것은 단순한 비루한 몸부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은이 자신의 아버지를 희생하며 피눈물로 힘겹게 쌓아 올린 이 모든 숙청과 개혁의 정당성을, 단번에 '황실의 적통을 무참히 살해한 잔혹한 반역'이라는 더러운 프레임으로 완벽하게 짓이겨버리겠다는, 악녀다운 가장 교활하고 악랄한 역습이자 방패였다. ​시은은 핏빛 적의(翟衣)를 차려입고 곧장 대비마마가 머무는 자경전(慈慶殿)으로 향했다. ​병석에 기대어 있던 대비마마 역시 이미 냉궁의 소란을 전해 들었는지, 핏기가 가신 창백해진 얼굴로 이마를 짚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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