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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핏빛 눈물과 반격의 서막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6 10:27:28

​"마마..."

 

​목구멍까지 차오른 벅찬 감정을 억누르듯 민혁의 거친 숨소리가 내실의 무거운 공기를 흔들었다. 

 

황후의 고귀한 손길이 자신의 상처를 감싸 안을 때마다 그는 이 목숨을 몇 번이고 바쳐서라도 저 가녀린 여인을 짓밟으려는 자들을 지옥 끝까지 쫓아내리라 맹세하고 또맹세했다.

 

​시은은 눈앞에 무릎 꿇린 짐승 같은 충신을 바라보며 14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심장에 뜨거운 피가 다시 도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슬픔에 겨워 눈물 흘리는 허울뿐인대한제국에 국모가 아니었다.

 

​"일어나거라 민혁아."

 

​시은이 차갑고도 단단한 음성으로 명하자 민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방금 전까지 본가 앞마당의 살귀처럼 잔혹했던 빛을 거두고 오직 주군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절대적인 경외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 밤이 지나면 저 오만한 황충들은 우리가 파놓은 무덤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오게 될 것이다."

 

​시은의 붉은 입술이 서늘한 미소를 그려냈다.

 

​다음 날 아침

 

​세상을 집어삼킬 듯 몰아치던 간밤의 폭우가 모든 오물을 씻어내린 듯 황궁의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청명했다. 

 

그러나 따스하고 평화로운 아침의 햇살이 무색하게도 황제의 편전은 폭풍전야의 기괴한 고요함에 휩싸여 있었다.

 

​황제 유종석은 최고급 백자 찻잔에 담긴 향긋한 차를 마시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넓은 용상 위 그의 무릎에는 속이 훤히 비치는 천박한 붉은 실크 슬립 차림의 신아리가 나른한 고양이처럼 기대앉아 있었다.

 

​"폐하 간밤에 좋은 꿈은 꾸셨사옵니까?"

 

​아리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종석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하하 물론이지 오늘 아침이면 내 눈엣가시 같던 민현석 늙은이가 제 명을 다했다는 반가운 부고가 들려올 테니깐 말이야 내가 친히 기른 흑영의 실력은 대한 제국 제일이니깐 아마 지금쯤 흔적도 없이 그 늙은이의 숨통을 끊어놓고 지옥으로 보냈을것이다."

 

​종석은 마치 이미 승리라도 거머쥔 듯 오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평생 고개 한 번 숙이지 않던 그 오만방자한 시은마마가 제 아비의 싸늘한 주검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폐하의 바닥을 기고 살려달라 매달리는 꼴을 보면 얼마나 통쾌할까요"

 

​아리는 종석의 단단한 가슴을 얇은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뱀처럼 교태를 부렸다. 

 

황후의 자리가 이 거대한 제국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달콤한 착각에 빠져있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쾅-!

 

​편전의 육중한 문이 예의도 없이 다급하게 열리며 종석의 수석 비서관이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폐... 폐하! 큰일 났사옵니다! 제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사옵니다!"

 

​종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무슨 소란이냐! 아침부터 방정맞게혹시 암살단 조장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냐?"

 

​"그...그것이 아니오라 아...아침 대한제국 증권거래소 장이 열리자마자 민석그룹에서 황실 관련 채권과 국채를 시장에 무더기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황실의 주력 사업인 문화재 복원 사업의 주가가 개장 단 10분 만에 하한가로 직행했고 국고 자금망이 완전히 마비되어 부도 위기입니다!"

 

​비서관은 숨을 헐떡이며 충격적인 보고를 이어갔다.

 

​"더욱 끔찍한 것은  민현석 회장이 살아있습니다! 그가 직접 언론 단상에 나서서 황실과의 모든 투자 계약을 전면 백지화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뭐... 뭐라?!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 민현석 그 늙은이가 왜 살아있단 말이냐!"

 

​종석이 기겁하며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무릎에 앉아있던 아리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대리석 바닥으로 나동그라졌지만 종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서관에게 달려가 그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흑.. 흑영은 그 암살단들말이다! 그..그놈들 어찌 된 것이냐! 내가 보낸 최정예 부대가 일개 재벌 늙은이 하나 처리하지 못했단 말이냐! 대답을 해보란 말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 드십니다!"

 

​문밖에서 환관의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목소리가 편전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거대한 어전의 정문이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고 화려한 황금빛 대례복을 차려입은 민시은이 완벽한 제국의 안주인으로서의 위용을 뽐내며 당당한 걸음으로 편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오른쪽에는 민석그룹의 두뇌 한비서가 왼쪽에는 한 마리의 흉포한 흑표범 같은 호위무사 김민혁이 대동하고 있었다.

 

​시은의 얼굴에는 평소의 우울한 그늘이나 핍박받던 처연함 따위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만백성을 발아래에 둔 완벽한 제국의 지배자처럼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도 고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침부터 어전이 참으로 소란스럽군요, 폐하"

 

​시은이 사뿐히 걸음을 옮겨 옥좌 앞에 섰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아리가 수치심과 독기 어린 눈으로 시은을 올려다보았지만 시은은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바닥에 기어 다니는 하찮은 벌레를 보듯 그녀를 철저히 투명 인간 취급했다.

 

​"황후! 네...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네 아비가 지금 황실을 상대로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알고나 있는 것이냐!"

 

​종석이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소리쳤다. 

 

그러나 시은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빙하처럼 차갑고 평온했다.

 

​"수작이라니요 폐하  아버님께서는 그저 투자처로서의 매력을 상실한 썩어빠진 동아줄을 미련 없이 끊어내셨을 뿐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어리석은 장사꾼은 없는 법이니까요"

 

​시은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뒤에 서 있는 한비서에게 눈짓을 했다. 

 

한비서가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와 최고급 자개로 장식된 화려한 상자 하나를 종석의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이... 이게무엇이냐"

 

​종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간밤에 저희 친정 본가에 웬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들이 찾아왔더군요 길을 잃고 헤매는 불쌍한 짐승들 같기에 제가 친히 거두어 폐하께 '선물'로 돌려보내 드리는 것입니다 한번열어보시지요 마음에 드실껍니다."

 

​시은의 서늘한 권유에 종석은 침을 꿀꺽 삼키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종석의 얼굴이 핏기가 가시며 공포로 질려 하얗게 탈색되었다. 

 

바닥에서 기어 와 상자 안을 함께 들여다본 신아리 역시 "꺄아아악!" 하는 귀를 찢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물러섰다.

 

​화려하고 부드러운 비단 쿠션 위 그곳에는 간밤에 파견되었던 흑영 암살단 조장의 '피가 말라붙은 잘린 오른손'이 기괴하게 놓여 있었다. 

 

굵은 손가락에는 황제가 하사한 비밀 조직의 문양 반지가 그대로 끼워져 있었고 그 밑에는 종석과 아리가 그토록 애타게 찾으며 덮으려 했던 '5천억 횡령 차명 계좌의 원본 복사본'이 차갑게 깔려 있었다.

 

​완벽한 물증이자, 잔혹한 경고였다.

 

​"황...황... 황후! 네년이 감...감히! 짐에게 이런 미친 짓을!"

 

​"폐하! 감히라니요! 어찌그런몰상식한말을...!

 

​시은은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종석을 향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서늘하게 일갈했다. 

 

그녀의 뒤에 선 민혁의 손은 이미 언제든 검을 뽑아 황제의 목을 칠 수 있도록 자루 위에 올려져 있었다.

 

​"선전포고는 폐하께서 먼저 하셨습니다 내 가문의 돈으로 그 천박한 기생년과 배를 불린 것도 모자라 감히 내 아비의 목숨까지 노려?!"

 

​시은은 옥좌에서 힘없이 주저앉은 종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그의 귓가에 대고, 얼음장처럼 차갑고도 치명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대하십시오 폐하 어젯밤의 지옥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니까요."

 

​완벽한 반전을 맞이한 편전 안 제국을 호령하던 오만한 황제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고 14년 동안 황후를 핍박하던 탐욕의 악녀는 핏기없는 얼굴로 사시나무 떨듯 공포에 질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그 파멸의 중심에서 13살의 상처 입은 어린 신부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지옥불에서 벼려낸 복수의 여신으로 완벽하게 각성한 민시은이 찬란하고도 잔혹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것은 제국을 뒤흔들 진정한 핏빛 전쟁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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