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5분만은 싫어요. 채린 씨를 좋아하는 시간이 그걸로 끝나면 너무 아쉽잖아요.”
통화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내가 너무 대담한 질문을 했나 싶어 휴대전화를 고쳐 쥐었을 때, 태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좋아해도 됩니까?”
나는 집 앞 가로등 아래에서 한참 발끝만 내려다봤다. 안 된다고 해야 옳을 것 같았으나, 이미 입가엔 웃음이 번져 있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떠오를 사람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어서, 부정하는 말은 소용없었다. 나는 일부러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6분까지만 허락할게요.”
“내일은 7분 달라고 졸라도 될까요?”
“대표님, 은근히 욕심 많으시네요.”
“채린 씨 앞에서만 그런가 봐요.”
전화를 끊고서도 한동안 현관에 기대 있었다. 우리는 하루에 몇 분씩 마음을 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줄어드는 게 아까웠다. 그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는 순간까지도 그가 궁금했으니까.
다음 날 오후, 창밖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오전부터 맑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흐려지더니 퇴근 무렵에는 빗방울이 사무실 창을 두드렸다. 나는 회의 자료를 저장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에서는 오늘도 태준과 업무 이야기밖에 나누지 않았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조차 그는 다른 직원들에게 하듯 내게 고개를 숙였고, 나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했다.
그런데 그의 옷소매가 지나간 자리만큼은 한참 바라보게 됐다. 누구에게나 같은 태도로 대하는 그가 고마웠다. 내가 회사에서 잘해 내는 일을 그는 소중하게 여겼고, 그래서 그의 다정함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우산 챙겼어요?’
‘네. 대표님은요?’
‘저도요. 그런데 오늘 비가 와서 조금 기뻐요.’
‘왜요?’
‘함께 걸어 달라고 부탁할 핑계가 생겨서요.’
나는 문자를 읽다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사무실 근처에서 만나면 안 된다는 걸 그도 알았다. 그가 적어 보낸 곳은 회사에서 몇 정거장 떨어진 작은 골목이었다. 근처에 조용한 찻집이 있고, 인적이 뜸한 길이라고 했다.
‘싫으면 가지 않을게요. 괜히 부담 주고 싶지 않아요.’
그 문장을 보고 웃음이 났다. 보고 싶다고 말해 놓고 늘 내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 나는 휴대전화에 엄지를 얹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근데 회사 근처에서는 안 돼요.’
‘그럼 각자 따로 가요. 제가 먼저 기다릴게요.’
퇴근 인파에 섞여 지하철을 탔다. 창에 비친 얼굴이 자꾸 웃고 있어서 입술을 꾹 다물었는데, 소용이 없었다. 낯선 사람과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이 이렇게 익숙한 기쁨일 줄 몰랐다. 손에는 우산 하나와 가방뿐인데, 마음은 꽃다발이라도 품은 듯 부산했다. 호텔에서 달아나듯 헤어진 아침이 떠올라 잠시 걸음을 늦췄다.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고 제대로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약속한 골목 입구에서 그를 발견했다. 태준은 짙은색 우산 아래 서 있다가 나를 보자 환하게 웃었다. 호텔에서는 정장 위에 걸쳤던 재킷을 오늘은 팔에 들고 있었다. 남의 시선을 피해 먼 길을 온 게 미안했지만, 그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을 보니 그 미안함마저 조금 달콤해졌다.
“많이 기다렸어요?”
“채린 씨가 오는 동안은요. 막상 얼굴 보니까 하나도 안 길었네요.”
“그런 말 어디서 배워요?”
“방금 채린 씨 보면서요.”
나는 우산 아래서 괜히 뺨을 문질렀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가 내 우산을 보고 멈췄다. 서로 우산을 챙겨 왔으니 나란히 걸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태준은 제 우산을 접어 옆에 세웠다.
“왜 접어요? 다 젖잖아요.”
“같이 걸어 보고 싶어서요. 허락해 줄래요?”
“그러다 감기 걸리면 제가 책임져야 해요?”
“걱정해 주는 거예요?”
“대표님 감기 걸리면 회사가 곤란하잖아요.”
“아, 회사 때문이구나.”
실망한 척하는 얼굴이 우스워 결국 우산을 들어 올렸다. 그가 내 쪽으로 들어오자 비좁은 공간에 서로의 어깨가 닿았고, 손등을 스치기만 했는데도 호텔의 입맞춤이 떠올랐다.
태준은 우산을 받아 들더니 내 쪽으로 바짝 기울였다. 조금 걷자 그의 오른쪽 어깨가 젖기 시작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손잡이를 함께 잡았다.
“같이 쓰려면 공평하게 써야죠.”
“채린 씨 안 젖게 하고 싶었어요.”
“저도 대표님 안 젖게 하고 싶은데요.”
그가 내 얼굴을 바라봤다. 미처 웃음을 감추기도 전에 손끝이 겹쳤다. 우산 손잡이 하나를 두 사람이 쥐고 있다는 게 우스우면서도 좋아서, 나는 조금 더 가까이 걸었다.
“손잡이 좁죠?” 그가 물었다.
“좁으면 놓으실래요?”
“아니요. 잡을 수 있는 이유가 생겼잖아요.”
나는 그제야 그의 손등 위에 제 손을 편하게 얹었다. 빗물이 우산 끝에서 떨어졌고, 가게 처마 아래 켜진 작은 불빛이 그의 젖은 어깨를 비췄다. 뭔가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 손수건을 꺼내려는데, 그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오늘은 채린 씨랑 걷는 게 먼저예요.”
“그럼 조금만 더 걸어요. 제가 집에 가기 싫어질 때까지.”
“그건 오래 걸리겠네요.”
“왜요?”
“제가 먼저 가기 싫어졌거든요.”
나는 그의 팔꿈치에 살짝 기대어 웃었다. 한 우산 아래서 맞추는 걸음이 처음부터 익숙할 리 없는데도, 우리는 자꾸 같은 속도로 걷게 됐다. 골목 끝에 이르자 그가 멈춰 서서 나를 바라봤다.
“채린 씨, 다음에 또 만나도 됩니까?”
나는 우산 손잡이를 꼭 쥐고, 그가 듣고 싶어 할 대답을 일부러 늦췄다.
“내일 비 오면요.”
“선임님, 방금 웃으셨어요. 무슨 좋은 일 있어요?”수아의 질문에 나는 책갈피를 황급히 책장 사이로 밀어 넣었다. 웃고 있었다는 걸 들킨 순간에도 입가에는 태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손글씨 여덟 글자만으로 이렇게 기뻐하다니.“책이 재미있어서. 어제 읽다가 웃긴 부분이 있었거든.”“무슨 책인데요? 저도 읽어 볼래요.”“다 읽으면 빌려줄게. 결말은 아직 나도 몰라.”수아는 금세 관심을 돌려 오후 회의 자료를 물었다. 나는 파일을 열어 필요한 표를 찾아줬고, 그녀가 자리로 돌아간 뒤에야 가방 지퍼를 닫았다. 책갈피는 버리지 못했고, 내 웃음은 아무 일도 없던 표정 뒤에 감춰졌다.점심시간, 수아가 사내 카페에서 딸기 음료를 주문했다. 그 이름을 듣자 태준이 떠올랐다. 시럽은 반만 넣고 얼음도 조금. 내가 말한 걸 한 번에 외운 사람. 혹시라도 내 얼굴에 생각이 드러날까 봐 메뉴판을 오래 내려다보다 따뜻한 차를 골랐다.“선임님은 딸기 안 좋아하세요?”“좋아하지. 오늘은 따뜻한 게 당겨서.”그렇게 말한 뒤 컵을 받았는데, 손바닥이 따뜻해질수록 이상하게 허전했다. 태준과 함께였다면 내 잔을 기웃거리며 ‘한 입만 마셔도 될까요?’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까부터 자기 잔은 왜 안 마시느냐고 타박하면서도 기어코 컵을 건네줬겠지.오후에는 TF 실무 자료를 정리했다. 수아가 빠뜨린 첨부 파일을 찾아줬고, 팀장의 요청에 맞춰 표의 순서를 바꿨다. 누가 나를 특별히 쳐다보지도 않았고, 태준이 지나가는 복도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회의 일정과 수정 지시가 오가는 동안 사무실은 늘 그렇듯 분주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늦은 오후 회의실에서 출력물을 정리하다 태준의 서명이 있는 검토표를 발견했다. 몇 줄의 수정 의견이 적혀 있었고, 내가 처음 제안한 방식대로 진행하라는 표시도 있었다. 업무에 필요한 표시일 뿐이었다. 나는 서류를 정해진 순서대로 묶으면서도, 그의 필체를
'그건 약속 못 지키겠습니다.’나를 생각하지 말라는 부탁 앞에서만, 태준은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나는 그 문장을 밤새 열어 보았다. 읽을 때마다 속이 아렸고, 아파하면서도 그가 나를 아직 생각한다는 사실이 좋아졌다. 휴대전화 화면에 손가락을 올린 채 한참 망설였으나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어떻게 내게 가장 아픈 비밀을 숨겼을까. 미워하다가도 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너무 우스웠다.‘그럼 실컷 생각해요.’입력창에 적었다가 지웠다. 내가 원하는 말은 그게 아니었다.‘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기나 해요?’이것도 지웠다. 이미 알고 있을 사람이었다. 손을 잡을 때마다 웃음부터 터지던 나를, 전화를 끊기 싫어 5분만 더 달라던 나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면서 왜 그렇게 늦게 말했을까.다음 날 아침, 나는 달력부터 열었다. 토요일 칸에는 ‘같이 책 읽고 맛있는 거 먹기 ♡’라고 적혀 있었다. 카페에서 그와 정한 약속이었다. 하트를 하나 더 그려 넣을까 고민하던 날에는 토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그 날짜를 바라보는 것도 힘들었다.나는 일정을 눌러 삭제했다. 확인 창이 나타나자 잠깐 멈췄다가 다시 눌렀다. 약속 하나가 사라진 빈칸을 보며 이렇게까지 쉽게 지울 수 있는 거였냐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투덜거렸다.가방에서는 호텔 라운지 영수증이 나왔다. 첫날 혼자 마셨던 음료값이 적힌 종이였다. 버릴 생각으로 펼쳤는데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나는 낯선 남자에게 재미없는 얘기는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그는 나를 웃기기 위해 애쓰겠다고 했다. 딸기 디저트를 내 앞으로 밀어 주면서도 뭘 강요하지 않았던 손, 내 손바닥 위에 먼저 펼쳐졌던 그의 손.“그날로 돌아가면, 나 안 앉혔을까.”혼잣말을 하고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 다가왔을 때 거절했을까. 어쩌면 똑같이 웃고 똑같이 반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 밤의 나는 무척 행복했으니까.사진첩도 열었다. 함께 찍은 얼굴은 없었다. 대신
‘전송 완료.’하필 그 사람에게 보내지 않기로 한 말을, 손가락 하나가 먼저 건네 버렸다.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밥 먹었어요?’ 겨우 다섯 글자와 물음표 하나. 지우기 버튼을 찾아보았으나 이미 상대에게 도착했다는 표시가 떠 있었다. 회사 보고서를 세 번씩 검토하는 내가 왜 하필 이런 순간에는 손끝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할까.‘잘못 보냈어요.’그 말을 쓰고도 보내지 못했다. 태준이 정말 밥을 먹었는지 궁금했으니까. 이제 연락하지 말라고 한 건 나였고, 마지막으로 그를 돌아보지 않은 것도 나였다. 그런데 그의 저녁을 걱정하는 마음만은 끝내 집으로 데려와 버렸다.화면이 밝아졌다.‘네, 먹었습니다.’짧은 답장이었다. 좋아하는 메뉴도, 늦게까지 일했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 고작 한 줄이었는데 눈물이 먼저 떨어졌다. 베개에 휴대전화를 내려놓아도 글자가 눈앞에 남았다. 예전 같으면 그 뒤에 꼭 한마디가 더 왔을 것이다. ‘오늘 제일 맛있었던 건 뭐예요?’ 하고 물은 다음, 내가 달콤한 음식을 골랐다고 하면 ‘그럼 저는 채린 씨가 웃는 얼굴이 제일 맛있었어요’ 같은 말로 나를 놀렸겠지. 그 유치한 농담에 또 넘어가면서도 모르는 척 웃었을 텐데, 오늘은 더 이어질 말이 없었다.잘 먹었구나. 아프지 않고, 굶지도 않았구나.안도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싫어서 이불을 끌어당겼다. 결혼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나는 그가 끼니를 거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렇게 기뻐했다. 그가 내 앞에서 딸기 라테를 한 모금 마시고 '채린 씨가 마시는 게 더 맛있어 보여요'라던 날까지 떠올랐다.그날 나는 일부러 빨대를 내 쪽으로 돌려 놓았다. 그가 웃으면 나도 웃었고, 한 번 더 만나기 위해 메뉴 맞히기 내기에서 일부러 졌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비밀을 가진 여자처럼 굴었다. 그 사실을 몰랐을 때의 나는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오늘 내가 예쁘게 웃으면 내일 그가 또 만나자고 해 줄까,
“기다리란 말도 못 하겠어요. 그래도 사랑은 이미 시작됐습니다.”카페 문을 닫고 나온 뒤에도 그 말이 따라왔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골목이 끝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자꾸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붙잡지 않겠다던 사람은 정말로 나를 붙잡지 않았고, 그래서 더 울고 싶었다.길모퉁이 꽃집에는 분홍 장미가 놓여 있었다. 비가 내리던 날, 그는 내가 꽃을 오래 바라보는 걸 기억하겠다고 했다. 그때는 꽃을 받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혼자 연습하기까지 했는데, 이제 그 약속을 떠올리는 것마저 부끄러웠다.‘사랑은 이미 시작됐다니.’그럼 내 사랑은 어디에 내려놓아야 하는데.집에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벗고 침대에 앉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태준의 전화를 기다리느라 씻는 시간까지 아까웠다. 거울 앞에 서면 그가 예쁘다고 했던 얼굴을 한 번 더 들여다봤고, 별것 아닌 일에도 ‘오늘은 이 얘기부터 해줘야지’ 하고 웃었다. 그런데 오늘은 휴대전화가 조용했다. 내가 연락하지 말라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불과 어제만 해도 나는 다음 아침에 보낼 문자를 고르고 있었다. ‘남자친구님, 잘 잤어요?’ 그렇게 보내면 태준이 웃으면서 ‘여자친구님 덕분에요’라고 답할 것 같았다. 실제로 듣지도 못한 대답이 너무 또렷해서, 나는 끝내 베개를 끌어안았다. 가장 아픈 건 아직도 그와 나누지 못한 다정한 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달력을 열었다. 어제 표시한 작은 별 아래에는 ‘1일’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지우려고 손가락을 댔지만 화면만 몇 번 껐다 켰다. 고작 하루짜리 연애였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터졌다. 나는 그와 보낸 날들을 셀 수 있는데, 누군가에겐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은 시간이었을지 모른다.“진짜 나쁜 사람.”말해 놓고도 그가 걱정됐다. 저녁은 먹었을까. 내가 손잡지 말라고 했을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아직도 그런 걸 궁금해하는 내가 더 싫었다.다음 날 사무실은 평소와 같았다. 수아는 내 자리 위에 수정된 회의 일정을 올려놓
“네.”겨우 한 글자였다. 그런데 그 한 글자에 조금 전까지 남자친구라 부르던 사람이 낯선 남자가 되었다. 나는 태준의 왼손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았다. 그의 달력에 막 생긴 하트 하나가 떠올랐다. 하트는 하나만 넣자고 했던 나, 나중에 더 붙이자며 웃던 그 사람. 겨우 몇 분이 지났는데 그때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농담이죠? 오늘부터 1일인데, 첫날부터 이러는 거 너무 심한데요.”“농담 아니에요, 채린 씨.”“그럼 예전에 결혼했다는 거예요? 지금은 끝난 거고요?”그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 짧은 망설임에 대답이 먼저 도착했다. 나는 손끝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짚었다. 그가 내 손을 놓을 때마다 아쉽다고 투정을 부렸던 일이 떠올랐다. 비 오는 골목에서 우산 손잡이를 함께 쥐었고, 맑은 날에도 만나자며 그를 놀렸다. 이제는 뭘 잘못 알고 있었는지조차 차례대로 세어야 할 것 같았다. 조금 전 이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내일도 더 좋아하겠다며 웃던 내 손이었다.“제 아내는 백서진이에요. 아직 결혼한 상태예요. 이혼하지 않았고, 따로 살기로 정한 것도 아니에요.”우리가 함께 있던 정원에서는 누군가 찻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문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의 웃음소리까지 들리는데, 나는 그 모든 것이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아내가 있다는 거네요.”“네.”“그럼 어제도, 오늘도, 내가 남자친구라고 부르는 동안에도요?”“맞아요.”나는 웃었다. 웃어야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호텔에서 처음 만난 밤, 남자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가 다음 날에도 보고 싶다고 했을 때는 정말로 사랑이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모든 시간 동안 누군가는 그의 아내였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혼자 기뻐했다. 자기 전에 전화로 열 번씩 보고 싶다고 말해 달라던 내가, 오늘은 그가 무슨 말을 더 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나한테
“채린 씨, 제게 꼭 먼저 알려야 할 사실이 하나 있어요.”방금 남자친구가 생긴 여자에게 그런 표정으로 할 말이라니. 나는 그가 숨겨둔 선물이라도 꺼낼 줄 알고 두 손을 모았다. 내 달력에는 오늘이 1일째로 적혀 있었고, 조금 전까지 태준은 그 날짜 옆에 하트를 하나 더 붙이자며 웃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일 아침엔 어떤 문자를 보낼지 고민했다. ‘남자친구님, 잘 잤어요?’라고 쓰면 그가 얼마나 웃을까. 오글거리는 문장을 몇 개나 떠올려 놓고 혼자 신이 났는데, 정작 그는 내일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고 있었다.“설마 벌써 100일 기념일 예약했어요?”“채린 씨.”“아니면 제가 좋아하는 딸기 농장을 샀다거나? 그건 조금 부담스러운데.”나 혼자 웃었으나 태준의 입가에는 웃음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잡고 있던 내 손을 천천히 놓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던 손바닥이 허전해졌다. 나는 별일 아닌 듯 그의 소매를 건드렸다.“왜 그래요? 저 또 놀리려고 그러죠?”“저 기다리는 거 잘하는 거 알죠?” 일부러 씩 웃어 보였다. “아까 1일째라고 했으니까, 오늘 안에만 말하면 봐줄게요.” 농담이 통하지 않자 내가 세운 입꼬리도 조금씩 내려갔다.그는 대답 대신 내가 앉았던 의자를 바라봤다. 카페 문 앞까지 나왔던 우리는 다시 정원 쪽 테이블로 돌아갔다. 저녁바람에 작은 꽃잎이 흔들렸고, 태준은 내 의자를 당겨 주었다. 언제나처럼 사려 깊은 손길이었다.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한참을 망설이는 걸까.“우선 앉아서 이야기해요.”“우리 이제 연인이잖아요. 무서운 이야기 할 거면 먼저 안아 주고 해요.”나는 팔을 조금 벌렸다. 평소 같으면 웃으며 다가왔을 그가 이번에는 제자리에 선 채 나를 바라봤다. 그 순간 가슴에서 작게 무언가가 가라앉았다.“채린 씨가 들으면 많이 속상할 이야기예요.”내가 벌렸던 팔을 내렸다. 그래도 선뜻 겁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처음으로 그를 남자친구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