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녀가 다시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왔던 세나이의 공항으로부터.
4년 전.
말레이시아 산다칸의 작은 게스트 하우스.
요스케는 공용 샤워실에서 샤워를 간단히 끝내고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무더운 열기 속에서 5분쯤 지났을까.
털털거리는 픽업 차량이 도착했고 그는 홀로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다시 몇 분 뒤 작은 동양인 여자가 차량 안으로 들어왔다.
30분 후, 차량은 오랑우탄 보호구역의 흙먼지 날리는 주차장에 도달했다.
요스케 먼저 차량에서 내렸고 여자가 가장 마지막에 내렸다.
그곳에는 이미 다른 차량으로 온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밝은 색상 옷 입으신 분들은 저기 마련된 스카프로 몸 두르시고 여자 분들은 특히 가는 길에 있는 원숭이 떼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무섭다고 뛰거나 소리치시면 안돼요. 그럼 위험할 수 있어요.”
현지 가이드의 거친 주의사항이 끝나기 무섭게 일행은 눅눅한 정글 깊숙이 발을 내디뎠다.
오랑우탄들의 아침 식사 그리고 본격적인 정글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하늘을 가린 거대한 초록색 차양 같은 숲을 지나.
핏빛의 라플레시아, 짙은 갈색의 커피와 후추 나무들이 시야를 스쳤다.
그리고 100년 전까지 실존했다는 식인 부족의 롱 하우스에서 아침 식사를 마쳤다.
아름다운 계곡과 쏟아지는 하얀 폭포수.
시원한 아침 공기가 온몸을 감싸는 기분 좋은 여정이었다.
그리고 몇 걸음 떨어진.
뒤편에서 걷던 요스케의 시선이 여자와 찰나로 맞닿기도 했다.
정글의 끝자락 위태롭게 매달린 흔들다리 앞.
꽤 커다란 몸집을 가진 회색빛 원숭이 떼가 다리 난간 위를 점령한 채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자가 겁에 질린 듯 흔들다리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망설였다.
그 순간 두려움을 감지한 원숭이 한 마리가 그녀의 얇은 셔츠 소매를 꽉 붙잡았다.
가이드의 주의사항을 떠올린 여자.
그녀는 비명을 삼키며 소리 없이 제 팔을 빠르게 뿌리쳤다.
아차 하는 찰나, 다른 원숭이 한 마리가 또다시 그녀를 덮치려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대로 머리를 감싸 쥐고 그 자리에 웅크린 채 앉아 버렸다.
바로 그때 뒤를 따르던 독일인 할머니가 놀라 날카롭게 짧은 비명을 질렀다.
“꺅!”
그 비명이 신호탄이었다.
서너 마리의 원숭이들이 순식간에 여자를 포위하며 둘러쌌고.
대장인 듯 보이는 거대한 원숭이가 웅크린 여자의 머리를 향해 억센 손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팍ㅡ!
순간 요스케가 여자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탕ㅡ!
뒤늦게 달려온 가이드의 공기총이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원숭이 떼들이 혼비백산하여 숲으로 달아났다.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공격을 맨손으로 막아냈던 요스케의 오른손바닥이 깊게 찢겨 나갔다.
여자는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가 병원으로 가는 그를 따라 가려 나섰다.
“You don’t need to come with me.”
요스케는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여자의 동행을 막아 세웠다.
그는 가이드와 함께 먼저 대기하던 차량에 탑승했고 이내 먼지를 휘날리며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한 시간 후, 다운타운의 작은 종합병원.
요스케는 욱신거리는 손바닥에 파상풍 주사와 드레싱 처치를 받고 항생제를 받아 들었다.
치료가 끝나자 동행했던 가이드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짓굳은 농담을 건넸다.
“Thank you so much. Without you, we could be in big trouble.”
(큰일 날뻔 했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You’re welcome. I just did what I could do.”
(천만에요. 도움이 돼서 다행입니다.)
“By the way, do you have a girlfriend? The girl you protected… she is such a knock-out. Why don’t you take her out for dinner and have some fun?”
(근데 여자친구 있어요? 아까 도와줬던 여자가 꽤나 예쁘던데. 저녁이나 같이 먹으면서 재미 좀 보면 어때요?)
“No need. I have a girlfriend.”
(괜찮습니다. 저 여자친구 있습니다.)
“Then, where is she?”
(근데 여자친구는 안왔어요?)
순간 요스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년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지기 위해 떠나온 도피성 여행이었으니까.
그는 그저 멋쩍게 쓸쓸한 미소만을 지었다.
*
그날 밤 8시. 풀문 파티 (Full Moon Party).
말레이시아는 무슬림 국가였고.
특히 이 사바 주는 이슬람 규율이 지배하는 엄격한 지역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술 문화나 클럽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법망을 피해 외국인들의 지갑을 털어내려는 영악한 무리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
그들은 영토의 경계가 모호한 국제 해역의 작은 무인도에서,
한 달에 단 한 번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비밀스러운 풀문 파티를 개최했다.
이따금 무슬림 무장 단체에 의한 납치 사건이 뉴스에 도배되는 악명 높은 위험 구역이었지만.
오히려 그 치명적인 위험성이 젊은 여행자들의 불순한 호기심을 자극해 입소문을 탄 광란의 성지였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의 유진은.
생전 처음 마주하는 파티와 클럽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보트에서 내리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신세계였다.
불법과 방탕이 만연한 난장판의 백사장.
붉은 오렌지색의 불 쇼가 모래사장 여기저기서 화염을 내뿜었다.
섬 전체를 진동시키는 클럽 음악 소리에 고막과 심장이 터질 듯 울렸다.
거대하게 뻗은 야자수 아래 바 테이블에는 알록달록한 술병들과 출처를 알 수 없는 백색의 약들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나뒹굴고 있었다.
유진은 우선 바(Bar)에서 맥주 한 병을 사 들었다.
미지근하고 시큼한 맥주 맛은 별로였다.
하지만 사방을 지배하는 기묘한 열기와 분위기에 서서히 취해 갔다.
조금 뒤 유진의 외모를 눈여겨본 남자 무리가 유진과 그녀의 친구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달콤한 밀크셰이크 맛이 나는 핑크빛 칵테일을 사주었다.
그때 바로 옆에 앉은 남녀 커플이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거친 신음과 살 부딪히는 소리가 음악에 섞였다.
둘러보니 백사장 곳곳의 어두운 그늘마다 섹스 파티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밑바닥 본능이 통제를 잃고 썩어 문드러지는 장소.
어느 정도의 일탈과 모험을 각오하고 왔기에 그냥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빈 야자수 그늘 자리에 걸터앉자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무리가 말을 걸어왔다.
취기가 오른 친구는 그중 마음에 드는 사내의 손을 잡고 백사장 한가운데로 춤을 추러 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유진은 아까 마신 칵테일 한 잔 때문인지.
자꾸만 뇌가 흐물거리고 아무 이유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앞의 풍경이 네온 빛으로 번져 나갔다.
그때 함께 있던 덩치 큰 백인 남자가 음흉하게 웃으며 유진에게 새로운 칵테일 잔을 들이밀었다.
유진은 더 마셨다간 필름이 끊길 것 같아 잔을 입술에 대고 마시는 척만 했다.
그러자 남자의 눈빛이 순식간에 야수처럼 돌변했다.
남자는 자신이 마시던 맥주를 입안 가득 들이켠 채 유진의 목덜미를 휘어잡고 그대로 입술을 들이받았다.
“읍……! 으읍!”
비릿한 알코올 향과 거친 타액이 유진의 입안으로 강제로 밀려들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쳐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가 깨질 듯이 몽롱했고 뱃속에서부터 역겨운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숲 안 쪽으로 들어가는 유진의 팔을 누군가 낚아챘다.
척ㅡ!
그의 눈 앞에 낯익은 여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늘 오전 산다칸의 정글에서 만났던 여자.
그녀가 휘청거리며 정글 안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달려가 그녀를 붙잡아 사람들이 많은 백사장 근처로 끌고 나갔다.
“You can’t go deep inside the woods.”
(숲 안 쪽으로 들어가면 안 돼.)
유진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완전히 휘청거렸다.
눈앞의 남자가 두 세 명으로 겹쳐 보이며 시야가 사정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요스케의 눈썹이 험악하게 꿈틀거렸다.
“술을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칵테일 한 잔 밖에 안 마셨는데.”
그의 입술사이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는 유진에게 생수 큰 병 하나를 건넸다.
“그럼 이거 전부 마시고 토해”
“네?”
“너 마신 거… 그냥 칵테일 아니라고… 더 취하기 전에 토하라고”
유진은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그의 서늘하고 강압적인 눈빛에 압도되어.
물을 받아 들고 벌컥벌컥 목구멍 뒤로 들이켰다.
그리고 남아있는 병을 그에게 다시 건넸다.
“더 마셔. 그리고 억지로 토해”
유진은 아무 말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래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요스케는 바들바들 떠는 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고 인적이 드문 커다란 야자수 기둥에 기대어 앉혔다.
유진은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강렬한 화끈거림에 드레스를 움켜잡았다.
아랫배가 단단하게 조여들며 이상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찌릿하게 흘러내렸다.
“제가 마신…. 게, 그럼…. 뭐에요?”
“Poison Mushroom”
“Poison Mushroom 이요? 그걸 왜 마셔요? 그럼 나 죽어요?”
유진은 눈물이 고인 채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요스케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겁에 질린 채 붉게 달아오른 유진의 얼굴.
그는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픽 실소를 흘렸다.
“안 죽어. 걱정 마. 최음제 같은 거니까.”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노골적이고 외설적인 단어가 유진의 고막을 뚫고 들어온 순간.
유진의 전신은 마치 불꽃이 튄 것처럼 새빨갛게 익어 버렸다.
약기운이 전신을 지배하며 심장이 터질 듯 박동했다.
유진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픽, 요스케의 단단하고 넓은 가슴팍 위로 그대로 쓰러져 누워 버렸다.
여기까지 유진과 요스케의 슬픈 운명의 여정을 따라와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두 사람이 여전히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 세계에 있습니다.독자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실지 궁금하네요.이 소설의 결말은 독자 여러분이 스스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혹시라도 기회가 되신다면, 리뷰에 독자 여러분의 결말을 올려 주셔도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제 결말은…… 글쎄요.사실 이 작품을 두 사람이 재회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더 이어 갈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이대로 두기로 했습니다.사실 이 작품은 제 개인 연애 이야기여서 이미 저는 저만의 결말에 도달했습니다.혹시나 작품의 분위기 때문에 걱정하실까 사족을 붙이자면.참고로 저의 결혼생활은 오늘도 해피엔딩입니다😊.그리고 유진과 요스케의 결말 이외에도.선호와 요스케 중 독자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 지도 궁금합니다.여러분도 이 작품 보시면서 옛 사랑을 한자락 기억해 보셨기를 기대합니다.그리고 유진과 요스케는 여전히 다른 세계관에서 열심히 사랑하고 있으니, 저는 다른 작품에서 뵙겠습니다.그동안 제 작품을 즐겨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절대 올 것 같지 않았다.그 영원과도 같았던 12년의 기나긴 유예가 마침내 흘러갔다.바로 그 약속의 날, 디데이(D-day).하지만 서울의 한복판에 서 있는 유진의 심장 속 기대치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정확히 1 대 99.기적을 바라는 희망이 고작 1% 라면.그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냉혹한 확신이 99% 였다.그가 정말로 자신을 찾을 생각이었다면.이혼했던 4년 전, 그때 벌써 서울로 날아왔어야 마땅했다.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완벽한 자유의 몸이 되고서도 차갑게 침묵했다.그리고 다시 잔인한 4년의 세월이 무심히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그런데 이제 와서 올까.아니, 결코 안 올 것이다.유진은 제 손끝으로 차가운 책상 모서리를 쓸어내리며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다.솔직히 말해서, 그는 이제 자신의 연락처조차 모를 터였다.물론 유진 역시 그의 연락처를 알지 못했다.이미 12년 전에 그를 흔적도 없이 싹 다 지웠다.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의지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려 그를 다시 찾거나.혹은 밤낮으로 액정만 들여다보며 그의 연락만을 기다리다 스스로 말라 죽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사실 효율성만 따진다면.유진이 먼저 수소문해 그에게 먼저 연락을 취할 수도 있다.그랬다면 지독한 감정 소비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그리고 단 한 번에 명확한 결론이 났을 것이다.그런데도 유진은 여전히 이 남자 앞에서는 미련하리만치 지독한 자존심을 부리고 싶었다.22년 전.산다칸의 첫날밤부터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저당 잡혔을지언정.마지막 남은 패마저 그에게 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멍청한 일임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원래부터 류 요스케라는 남자는 어떤 이성적 논리도 통하지 않는 세계였으니까.게다가 이제는 자신이 여전히 그 사내를 원하고 있는지조차 스스로도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과연 그 남자를 온 영혼을 바쳐 기다려왔던가.그 명제조차 흐릿한 안개처럼 불분명했다.여러 남자의 체온을 소모품처럼 탐
12월 31일의 도쿄.잿빛 하늘 위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빌딩 숲을 매섭게 할퀴고 지나가는 밤이었다.그의 거대하고 견고한 집무실 창가에 선 요스케의 나이는 마흔아홉.사내의 거대했던 40대의 마지막 단 한 해만이 서글프게 남겨졌다.그리고 이제 정확히 1년 남았다.산다칸의 뜨거운 보름달 아래에서.유진이 자신의 목줄을 죄며 안겨주었던 그 잔인한 이별의 유예.동시에 목숨보다 소중하게 지킨 자신의 아들, 이치다가 마침내 성년(18세)이 되는 날.요스케는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 아들의 멀대같이 큰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나직하게 운을 뗐다.“아들, 생일 축하한다.”이제는 어엿한 청년의 골격을 갖춘 이치다가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올해는 선물을 돈으로 주시죠.”요스케는 기가 찬다는 듯 빳빳한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뭐? 돈 맡겨놨냐? 아주 당당하다.”“제 여친과의 데이트 비용이 상당히 부족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저 차인다고요. 부탁 드리겠습니다.”아들의 너스레에 요스케의 굵은 입술 가장자리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그는 지갑을 열어 두툼한 지폐 뭉치를 아이의 손바닥 위에 툭 얹어주었다.“그 친구랑은 벌써 2년째인데, 아직 널 봐주고 있는게 거의 기적이라고 본다. 옛다. 너 때문이 아니라 네 여친 예뻐서 돈으로 준다.”“감사합니다!”순간 아이가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아버지를 똑바로 응시했다.“근데...... 아버지는 왜 그 분 안 찾으십니까?”요스케는 대답 대신 가만히 창밖의 도쿄 야경을 바라보며 깊은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이치다가 답답하다는 듯 다그쳤다.“혹시 벌써 포기하신 겁니까?”“내가 포기한 것 같아 보여?”그의 눈빛이 번뜩였다.그의 뼈 마디가 사정없이 뻐근해졌다.이치다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혀. 근데 뭘 기다리시는 거예요?”요스케는 자신의 왼손 약지의 빛바랜 반지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약속을 했으니까. 네가 성년이 될 때까지. 그 전에 내가 찾아가면,
마흔한 살.새해 첫날의 태양은 잔인하리만치 투명한 금빛을 띠고 있었지만.유진의 세계는 여전히 흐릿한 잿빛 안개 속에 갇혀 있었다.아침부터 유진은 거실 소파에 꼼짝없이 붙들린 채.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엄마의 잔소리에 모질게 시달리는 중이었다.따스한 떡국 김이 피어오르는 식탁 너머로 엄마의 날카로운 시선이 유진의 하얀 얼굴에 꽂혔다.“넌...... 아직도 결혼할 생각은 없는 거야?”유진은 한 치의 동요도 없는 메마른 눈동자로 물잔을 들어 올리며 나직하게 대꾸했다.“몇 번을 말해. 나 일이랑 결혼했다니까.”유진의 심드렁한 대답.엄마는 땅이 꺼질 듯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수년째, 늙어가는 부모의 속은 타들어 갈 뿐이었다.“너...... 벌써 40대야. 진짜로 생각 없는 거야?”“응. 지금이 좋아.”단호하다 못해 서늘함이 감도는 유진의 음성.하지만 엄마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이름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선호는......... 잘 지내니?”선호. 유진은 차갑게 선을 그었다.“글쎄. 남의 남자 된 사람이랑 이 나이 먹고도 계속 연락하면, 그거 죄 받는 짓이야.”“그때......... 선호와는 왜 깨져서......”엄마의 집요한 추궁.유진은 가슴 밑바닥에서 고여 있던 씁쓸한 자조가 밖으로 흘러나왔다.“내가 얘기했잖아. 내가 결혼할 팔자는 아닌가 보다고...... 결혼 두번 엎어졌음... 이젠 포기하는 게 맞아. 그러니까 욕심 그만 내세요. 엄마!”유진이 방어벽을 치자, 엄마는 답답함에 가슴을 쾅쾅 쳤다.과거의 남자들 전부를 끄집어 낼 생각이었다.그리고 기어이 류 요스케라는 유령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안은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길. 비즈니스석의 아늑한 노란색 조명 아래. 유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니트 롱 드레스를 입고 좌석 깊숙이 앉아 협상 전 제품 기획서를 체크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웰컴 드링크를 체크하며 비즈니스 클래스 캐빈을 쓱 훑어보던 사무장 제복을 입은 한 여자와 유진의 시선이 공중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녀였다. 그 남자의 전처 그리고 그의 아들의 생모. 유진은 단 한 순간도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천천히 훑어내렸다. 마흔여섯의 그녀. 세월을 제대로 맞은 여자. 예전 20대의 화려하고 글래머러스했던 그녀의 몸매는 노화의 궤적을 따라 딱 동남아 시아 아줌마 특유의 허리가 짧고 동글동글한 체형으로 무너져 있었다. 짙은 화장 틈새로 비치는 피부의 탄력 역시 나이가 들어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순간, 유진의 아랫입술 사이로 픽 하는 유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 이렇게 돈 값을 하는구나. 아무리 봐도 나보다 20살 이상은 많아 보이네.] 지난 수년간 주말마다 피부과와 몸매 관리에 쏟아부었던 보람이 확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유진은 피부과 도움으로 잡티 하나 없이 투명한 자신의 얼굴과 필라테스와 발레로 빳빳하게 관리된 자신의 늘씬한 몸매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확실히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동안의 가치는 빛을 발했다. 비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저녁 식사 서비스가 완전히 끝난 늦은 밤. 기내의 조명이 취침 모드로 어둡게 가라앉았을 때.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캐빈 뒤쪽에 위치한 화장실로 향했다. 좁고 서늘한 기내 복도. 메탈릭한 도어 앞의 희미한 주홍빛 조명 아래에서. 유진은 결국 그녀와 마주치고 말았다. 유진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대로 그녀를 유령처럼 무시했다. 바로 그 찰나. 차가운 공기를 찢고 여자의 입술 사이
동종 업계의 좁은 바닥에 몸을 담고 있다 보니.요스케는 의도하지 않아도 아주 가끔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듣곤 했다.서유진이라는 이름 석 자가 스치듯 들릴 때마다.그의 거대하고 단단한 심장은 예외 없이 멈춰 서서 피를 흘렸다.그러던 어느 날.도쿄 본사 HQ 최고층에 위치한 요스케의 사장실로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일본 본사로 정기 교육을 받으러 온 예전 부하직원이자, 과거 유진과 동료였던 왓슨.“류 사쵸 (사장님). 여전히 멋있으십니다.”왓슨은 예의 그 변죽 좋고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변함없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어댔다.사장의 자리에 올라 한층 더 냉혹하고 단단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옛 상사.왓슨은 특유의 처세술로 집무실의 무거운 정적을 가볍게 깨부수었다.“오랜만이네. 자네는 이번에 싱가폴 아시아 본부에서 부장으로 승진했던데. 축하해.”“다 훌륭한 사수 덕이십니다. 류 사쵸가 제 사수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요스케는 손에 쥐고 있던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웃었다.“나 밑에 있을 때는 힘들다고 불평했던 걸로 기억하는데.”그는 농담을 건네듯 왓슨을 놀렸다.“솔직히 사쵸가 편한 스타일은 아니었죠. 그래도 사쵸 밑에 있던 직원들은 다 잘 됐습니다. 자부심 가지셔도 됩니다.”“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아…… 혹시 기억하세요? 서유진? 우리 개발실 유일한 여자 엔지니어. 왜 예전에 샤쵸가 공장 사고때 구해줬던……”순간 가슴속 밑바닥에서부터 사정없이 솟구치는 갈증을 감추기 위해.그는 커피를 급하게 들이켰다.“그 친구는…… 잘 지내나?”그리고 아주 넌지시, 마치 지나가는 바람의 안부를 묻듯 나직한 저음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