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솔의 입술이 굳었다.“지금요?”“응.”“제가 반대해도요?”“응.”대답이 너무 쉽게 나왔다.솔의 눈썹이 조금 모였다.준경이 그 얼굴을 보다가 물었다.“화났어?”“아닙니다.”너무 빨랐다.준경의 입가가 움직였다.“그럼 그 얼굴은 뭔데.”솔은 잠시 버텼다.“……조금은 화난 것 같습니다.”준경이 웃었다.솔은 더 굳었다.“웃으실 일 아닙니다.”“알아.”“안 그러신 것 같습니다.”그 말에는 준경도 입을 다물었다.잠깐 뒤 손이 올라와 솔의 뺨을 한번 쓸었다.“여기 있어.”솔이 바로 물었다.“공작님은요?”“내가 열어볼게.”“싫습니다.”준경의 손이 멈췄다.솔 자신도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그래도 말을 고치지는 않았다.“같이 가겠습니다.”“위험하다며.”“그러니까요.”준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게 무슨 말이야.”“저도 모릅니다.”솔은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그래도 공작님 혼자 들어가는 건 싫습니다.”이번에는 준경이 웃지 않았다.둘이 잠시 마주 봤다.“알았어.”그가 먼저 문 쪽으로 돌아섰다.솔도 따라갔다.한 걸음 뒤가 아니라 바로 옆에 섰다.문에 가까워지자 준경의 저주가 다시 짙어졌다.솔
18화. 그래도한참 뒤 솔이 먼저 몸을 뗐다.준경의 옷을 쥐고 있던 손도 그제야 풀렸다.숨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괜찮아?”“예.”대답하고도 솔은 바로 물러서지 않았다.준경의 손목을 봤다.검은 선은 평소보다 짙었다.다행히 예언에서 본 것처럼 위로 번지지는 않았다.솔이 손을 뻗었다.검은 선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눌렀다.준경이 그 손을 내려다봤다.“뭘 봤어.”손끝이 멈췄다.“정확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정확한 거 말고. 본 거.”솔은 기억을 더듬었다.순서를 맞추려 하지 않았다.“문이 열렸습니다.”준경이 봉인문을 봤다.“아래로 계단이 있었고요.”“응.”“공작님의 저주가 짙어졌습니다.”솔의 손끝이 그의 손목에 남아 있었다.“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올라왔습니다.”준경이 자기 손을 한번 내려다봤다.“또.”솔의 입술이 다물렸다.바닥에 쓰러져 있던 준경.불러도 움직이지 않던 사람.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공작님이 쓰러져 있었습니다.”준경이 솔을 봤다.“죽었어?”솔의 눈이 흔들렸다.“모르겠습니다.”“확인 못 했고?”“예.”준경은 잠깐 말이 없었다.솔이 이어 말했다.“그런데 다음에는 다시 서 계셨습니다.”“내가
솔 혼자 어둠 속에 남았다.오른쪽 눈 아래가 불에 덴 것처럼 아팠다.솔이 얼굴을 감쌌다.손끝이 떨렸다.숨을 들이마셨는데 가슴까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너무 깊이 들어왔다.솔은 눈을 감았다.현실을 떠올렸다.철문.에드윈.기사들.바로 옆에 있던 준경.다시 눈을 떴다.어둠.한 번 더.여전히 그대로였다.솔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공작님.”대답은 없었다.이번에는 준경의 얼굴을 떠올렸다.목소리.손.자기를 부르던 방식.솔.순간 손목에 무언가가 닿았다.솔이 눈을 떴다.준경의 손이었다.언제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솔은 생각도 하지 않고 붙잡았다.어둠이 깨졌다.숨이 한꺼번에 터졌다.몸이 앞으로 무너졌다.“솔.”이번에는 진짜 목소리였다.준경의 팔이 몸을 받아냈다.대답하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시야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준경이 얼굴을 들었다.“나 봐.”초점이 흔들렸다.“솔. 나 봐.”목소리를 따라 겨우 눈을 들었다.준경의 얼굴이 보였다.숨이 조금 들어왔다.“……공작님.”“응.”솔의 손이 움직였다.준경의 손목을 찾았다.잡았다.검은 선은 있었다.하지만 번지고 있지는 않았다.솔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다행입니다.”준경의 표정이 굳었다.“뭘 봤어.”솔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아직 숨이 엉켜 있었다.그리고 대가도 끝나지 않았다.솔은 준경의 손목을 잡은 채 한동안 숨을 골랐다.머릿속 울림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눈 아래도 여전히 화끈거렸다.준경이 물었다.“대가는.”솔이 눈을 감았다.잠깐 기다렸다.필요한 것이 조금씩 잡혔다.표정이 굳었다.“많습니다.”“얼마나.”“접촉으로만 하려면…….”솔은 말을 끊었다.이 정도는 처음이었다.“시간이 좀 필요합니다.”“그럼 해.”준경이 손을 내밀었다.솔은 그 손을 봤다.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개를 저었다.“손으로는 안 됩니다.”“그럼?”솔은 한 걸음 다가갔다.준경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잠깐 망
그냥어둠이 걷혔다.솔은 눈을 떴다.문 앞이었다.하르젠의 문장.벨라드의 문장.그 사이를 잇는 선.조금 전과 같은 자리.그런데 문이 열려 있었다.안쪽에는 계단이 있었다.끝도 보이지 않게 아래로 이어졌다.누군가 먼저 내려갔다.준경이었다.“공작님.”돌아보지 않았다.솔은 바로 따라갔다.한 걸음.두 걸음.내려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졌다.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문장도.글자도.기록도.오른쪽 눈 아래만 뜨거웠다.솔이 얼굴에 손을 댔다.문양이 타는 것처럼 아팠다.예언 속에서 느껴본 적 없는 통증이었다.앞서가던 준경이 멈췄다.“공작님?”준경이 손을 들었다.손등의 저주가 보였다.검은 선이 손목을 넘어 위로 번져 있었다.현실에서 본 것보다 훨씬 짙었다.“돌아가셔야 합니다.”대답이 없었다.준경은 다시 내려갔다.“공작님.”솔도 따라갔다.계단 아래 희미한 빛이 보였다.가까워질수록 눈 아래가 더 뜨거워졌다.머리까지 욱신거렸다.준경과의 거리가 벌어졌다.“기다려주십시오.”계속 내려간다.솔이 걸음을 재촉했다.순간.장면이 끊겼다.준경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공작님!”달려갔다.무릎을 꿇고 몸에 손을 대는 순간.다시 바뀌었다.준경은 서 있었다.멀쩡했다.대신 솔의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손바닥을 내려다봤다.누구 피인지 알 수 없었다.문.닫혀 있었다.다시.열린 문.검게 번진 저주.붉은 문양.피 묻은 손.하르젠.벨라드.장면들이 순서도 없이 들이쳤다.하나를 붙잡으려 하면 다른 것이 그 위를 덮었다.솔은 이를 악물었다.하나만.확실한 것 하나면 됐다.다시 준경이 보였다.이번에는 가까웠다.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그의 손등에서 검은 선이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공작님.”솔이 손목을 잡았다.검은 선이 멈췄다.동시에 눈 아래가 타들어갔다.시야가 붉게 물들었다.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기는 느낌이 났다.그래도 손을 놓지 않았다.오히려 더 세게 잡았다.“솔.”처음으로 목소리
본관 안은 바깥보다 훨씬 어두웠다.무너진 지붕 사이로 빛이 몇 줄 떨어지고 있었지만 안쪽까지는 닿지 않았다.준경이 앞서 걸었다.바닥에는 깨진 돌과 썩은 나무가 널려 있었다.솔이 그 뒤를 따르고, 에드윈과 기사 둘이 마지막에 붙었다.복도 한쪽 벽은 거의 무너져 있었다.반대편에는 장식인지 문양인지 모를 흔적들이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솔은 지나가며 하나씩 봤다.아는 것은 없었다.기억나는 것도.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준경도 묻지 않았다.복도 끝에서 길이 둘로 갈렸다.왼쪽은 천장이 내려앉아 막혀 있었다.준경이 오른쪽으로 틀었다.“이쪽.”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멈췄다.뒤따르던 솔도 섰다.“왜 그러십니까?”준경은 벽을 보고 있었다.솔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먼지와 이끼 사이에 희미한 선이 하나 보였다.가까이 가 손끝으로 문질렀다.말라붙은 이끼가 우수수 떨어졌다.그 아래 은빛 흔적이 드러났다.검은 사슴뿔.솔의 손이 멈췄다.“하르젠입니다.”준경이 가까이 왔다.오래된 돌벽에 하르젠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지금 공작가에서 쓰는 것보다 훨씬 단순했지만 알아보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에드윈도 뒤에서 다가왔다.“하르젠 문장이 왜 여기 있습니까?”준경은 대답하지 않았다.솔은 문장 옆으로 손을 옮겼다.먼지 아래에 다른 선이 있었다.손바닥으로
아침부터 저택 안이 분주했다. 폐성으로 먼저 보낼 인원은 이미 출발했고, 마차도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준경은 침실 밖 작은 응접실에서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종이 외투 주름을 정리한 뒤 검대를 집어 들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솔이 들어왔다. “준비됐습니다.” 준경이 솔을 한번 봤다. 그리고 시종에게 말했다. “됐어.” 검대를 들고 있던 시종이 멈췄다. “공작님?” 준경이 손을 내밀었다. 검대를 받아 그대로 솔에게 건넸다. “네가 해.” 솔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제가요?” “응.” 준경은 이미 팔을 조금 벌린 채였다. 솔은 잠시 머뭇거리며 검대를 받아 들었다. 어젯밤에는 자신이 먼저 물었다. 다리를 주물러 드려도 될까요. 오늘은 준경이 먼저 시켰다. 솔이 가까이 갔다. 검대를 허리 뒤로 돌렸다. 앞쪽 고리에 끼우려면 조금 더 붙어야 했다. 몸이 가까워졌다. 준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버클이 채워졌다. 솔이 한쪽으로 돌아가 비틀린 가죽을 펴고 옷자락을 빼냈다. “너무 조이지 않습니까?”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