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정채향이 궁을 떠난 날, 수라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불도 울지 않았고, 솥도 삐걱이지 않았으며, 하늘도 맑기만 했다.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은 ‘그녀가 머물던 자리에 아무도 오르지 않는 것’으로 천천히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졌다.수라간을 다시 돌보던 상궁들은 예전보다 국을 천천히 끓였다.하나같이 맛은 좋았지만, 그 맛은 사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이건… 채향의 국이 아니다.’그녀는 다만 국을 잘 짓는 자가 아니었다.그녀는 국으로 사람의 마음을 짓던 자였고,
백국연이 끝난 다음 날 아침,정전 앞마당의 국 솥들은 모두 비워져 있었다.그 큰 솥에서 퍼지던 향은 사라졌고,솥의 벽엔 국물의 흔적만이 엷은 물결처럼 남아 말라가고 있었다.그리고 조선의 공기는, 그 하루 아침을 맞이하며 마치 아주 조용한 눈처럼 느리게 내렸다.채향은 혼자 수라간으로 돌아왔다.그녀가 떠난 빈 솥을 아무도 치우지 않았고,그녀가 두고 간 국자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그 국자를 손에 쥐었다.“…이제 이 국자는 다시 쓰이지 않겠지요.”“…이제 더는 누군가를 위해 국을 지어야 할 이유가…”“…없사옵니다.”그녀의 말은 비어 있었으나,그 안엔 지난 계절들이 한 줌씩 담겨 있었다.이현은 그 순간, 왕과 단둘이 정전 안에 있었다.왕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말하였다.“나는 이제 국을 받는 자로 남고 싶지 않다.”“…그동안 나는 국을 받기만 했지…”“…단 한 번도 국을 끓이는 자의 손을 잡아준 적이 없었도다.”이현은 침묵했다.왕은 그의 침묵을 이해하듯 웃었다.“이제 조선은 국을 짓는 사람의 나라가 되어야 하느니라.”“…그대는 그 향이 퍼지게 하고, 그 손이 지치지 않게 해야 할 것이야.”“…이 나라가 진정으로 따뜻하려면, 그 따뜻함의 중심에 사람이 있어야 하느니라.”왕은 천천히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그의 걸음은 무거웠지만, 어쩐지 가벼워 보였다.그날 저녁, 이현은 채향이 있는 수라간을 찾았다.그녀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그녀는 여전히 국자 하나를 손에 들고, 마치 마지막 국을 끓이듯 가마솥 안에 물을 붓고 있었다.“…떠나려 하오?”이현의 물음에, 채향은 국자를 잠시 내려두며 말했다.“네, 저하.”“…국이 남지 않았사옵니다.”“…조선은 이제 사람들이 스스로 국을 짓는 나라가 되었사옵니다.”“…저는 그 처음을 보여주었을 뿐이옵니다.”이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 눈빛은 결코 놓지 않는 이의 것이었다.“허나 나는 아직 당신이 끓인 국을 먹지 못했소.”그 말
밤은 길었고, 그 길이 끝나기 전의 시간은 항상 가장 조용하고, 가장 위태로웠다.고운령은 궁 밖 별궁에 연금된 채, 하인 하나, 첩자 하나만을 남기고 단 둘이 남아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조선이 여자의 손끝에서 끓는 국 하나로 움직이는 나라라면—”“…그 국이 식었을 때, 그 나라도 식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그녀는 은밀히, 기존의 구대감, 남창부원군, 대사헌 등정적과 불만 세력을 향해‘채향의 국은 조선의 혈통이 아닌 자의 손에서 끓었다’는 소문을 은밀히 퍼뜨렸다.‘그녀는 궁녀였고, 궁녀 중에서도 가장 천한 주방 수련생이었다.’
바람이 비단을 넘는 소리가 수묵화처럼 궁 안에 스며들던 밤.그날, 궐 안의 모든 불빛은 평소보다 한참 늦게 꺼졌다.왕이 직접 소집한 심문은 조선의 법전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은 방식이었다.‘궁중의 국 하나를 두고 왕실의 정통성과 정직함을 따져야 하는’그런 전례 없는 자리였기에. 세손의 첫 수라에 이물질이 있었다는 루머는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이 궁녀들 사이로 스르르 스며들고 있었고,그 향방은 마치 장작 없는 화로처럼 연기를 피우지 않고도 마음을 태웠다.채향은 수라간 마루 끝에 앉아 국이 담겼던 사발을 손수 천으로 닦고 있었다.그 사발은 이미 비어 있었지만
“…이 국은 내가 본 적 없는 조선을 담고 있도다.”“…옛 것이 아닌, 올 것이 담긴 국이로다.”“…이 국을 지은 이는 국으로 미래를 짓는 자이니라.”이현이 곁에서 조용히 말했다.“채향은 한 번도 조선을 지배하려 한 적 없사옵니다.”“…다만 국으로 품으려 하였사옵니다.”그 말에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이 국을 먹은 자들은 조선이 무엇을 품어야 하는지를 잊지 말라.”“…이 국은 하나의 나라를, 한 여인의 손으로 지은 조선의 저녁상이니라.”그리고 그날 밤, 조정은 국 하나로 물들었고조선의 마지막 저녁은 향과 온기로 기억되었다.채향은 그 모든 말이 끝난 뒤 수라간 한켠에서 조용히 국의 남은 그릇을 씻었다.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조선을 지은 것이 아니옵니다.”“…다만, 사람을 모아 그들이 나눌 수 있는 맛을 지었을 뿐이옵니다.”그녀의 손끝엔 솥의 온기가 남아 있었고, 그 온기는 조선의 밤을 늦게까지 데웠다.세손의 수라가 차려진 날은 궁궐의 바람마저 무릎을 꿇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채향은 그날 새벽, 다른 수라간 사람들보다 먼저 불을 지폈다.솥은 맑은 물로 헹궈졌고, 쌀은 새벽 안개가 가시기도 전에 손등에 담겨 씻겨졌다.이 국은 처음 밥을 배우는 자에게 주어질 국이었고,처음으로 국의 의미를 혀로 받아들이게 될 자를 위한 국이었다.그 국을 먹는 이는 말이 없고, 표현도 없고, 기억조차 흐릿한, 아직 ‘맛’이라는 개념조차 모르는 아이였다.하지만 바로 그래서 이 국은 ‘맛’을 말해서는 안 되는 국이었다.“…맵지도, 짜지도, 시지도 않아야 하며…”“…그저 부드럽고, 혀에 닿자마자 사라져야 하옵니다.”“…그러면서도 한 번쯤은 다시 찾고 싶은 맛이어야 하옵니다.”그건 오직, 가장 사랑하는 이를 위해 국을 짓는 마음에서만 우러나올 수 있는 국이었다.그녀는 맑은 멥쌀죽 위에 조심스럽게 삶은 대구살을 올렸다.뼈는 솥 위에 세 번 고아내어 맑은 육수를 내었고, 육수는 천천히, 죽 위에 작은 강물처럼 부어졌다.그 위에 올린
조용한 새벽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안개가 채향의 발끝을 따라 유영하고 있었다.그녀는 수레도, 말도 없이 도보로 천천히 궁을 벗어나 작은 산길을 걸었다.바람은 차지 않았으나 속은 서늘했다.머리맡엔 흩어진 달빛이 내려와 희뿌연 기억을 손끝으로 더듬는 듯했다.그녀가 멈춰 선 곳은 오래전 ‘궁녀 박씨’가 아이를 품고 쫓겨나듯 머물렀던 곳.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진 촌락의 빈집이었다.들풀 사이로 기와도 없이 무너진 초가 한 채,그 집터 앞에는 불을 지폈던 흔적조차 바래진 작은 솥 받침이 돌무더기처럼 남아 있었다.그곳에 앉아 채향은 작은 손망태를 풀었다.말린 무, 말린 다시마, 묵은지 한 조각,그리고 손수 챙겨온 정미 쌀 몇 줌.그녀는 작은 냄비를 걸고 물을 부었다.불씨는 가지고 온 장작으로 일으켰다.“…어머니,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이 처음 국을 끓이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옵니다.”그녀는 정좌한 채 물 위에 무를 띄웠다.다시마는 길게 우러나기만을 기다렸다.그동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직 국물의 소리, 끓는 온도,그리고 바람이 섞이는 기척만으로 그 자리에 머물렀다.그 순간, 불빛 위로 작은 새 그림자가 지나가고, 그 새가 낙엽을 머리에 얹고 푸드덕 날아올랐다.그 광경에 채향은 무심결에 웃음을 지었다.“…이 자리가, 어쩌면… 당신께서 가장 마지막으로 웃으신 자리이옵니까.”국물이 천천히 끓어오르며 묵은지의 짠 향이 풍기기 시작했다.그 짠맛은 자극적이지 않았고, 지나간 세월을 소금처럼 절여 담은 듯 깊었다.그녀는 국 한 그릇을 작은 사발에 담아 무너진 초가의 흙바닥 위에 올려두었다.그건 산 자의 국이 아닌, 떠난 자를 위한 국이었다.그리고 스스로를 위해, 한 모금 그 국을 들이켰다.그 맛은… 익숙하지 않았다.익숙함조차 없을 정도로 오래 잊혀져 있었다.그러나 바로 그 낯섦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찾았다.“…이것이… 제가 태어난 맛이옵니다.”“…이 맛을 품고, 수라간으로 들어갔고, 세자빈으로 올랐사옵